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화창한 하늘 아래 정릉사를 찾다
      
화창한 날씨 속에 평양호텔을 나온 필자는 평양 력포구역 정릉사(定陵寺) 방향을 향하여 즐겁게 출발했다. 설렘과 기대감에 잔뜩 부풀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이미 오래전 이곳 정릉사의 유물 중 일부를 서울에서 만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2002년 월드컵 경기를 마친 그해 연말, 서울 삼성동 코엑스 전시장에서 ‘고구려 유물 특별기획전’이 열렸을 때 정릉사의 유물 일부가 전시된 적이 있었다.

당시 북측의 조선중앙역사박물관의 협조를 받아 서울에서 고구려 유물들을 전시한다길래 만사를 제쳐놓고 서너 시간 관람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분단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서울을 찾은 북측의 국보급 문화재 진품 중에는 이곳 정릉사와 안학궁 일대에서 출토된 기와장 등이 전시됐는데 나는 오늘 그 유물들이 본래 파묻혔던 역사의 현장에 직접 오게 된 것이다. 물론 그 후로도 김대중 정부를 이어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 5월에 다시 한 번 더 100여점에 가까운 북측의 국보급 문화재가 서울에서 전시회를 이어갔던 적이 있었다. 무엇보다 남북 간의 정치적 교류가 선행되면 이로 인해 사회 각 분야 자동으로 교류가 이어지기 때문에 새삼 남북 정상회담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할 수밖에 없다.

정릉사는 동명왕릉으로 가는 널찍한 신작로를 따라 들어가다 보면 정문이 나오기 직전 우측으로 빠지면 바로 나온다. 그 유명한 동명왕릉(주몽) 입구에 정릉사가 마주하듯 자리 잡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둘 사이는 떼래야 뗄 수가 없는 구조적 관계이니 어차피 가까이 있을 수밖에 없다. 나와 일행은 그에 앞서 동명왕릉에서 불과 10분 거리에 있는 해외동포애국열사묘역 참관을 다녀온 후 다시 동명왕릉을 거쳐 마지막 코스로 이곳 정릉사에 당도한 것이다. 거리상으로는 동명왕릉에서 약 300m 우측 하단 외딴 곳에 절간이 위치해 있는데 평야처럼 아주 평평한 지형위에 아늑하게 자리 잡았다.

지도상으로 본다면 평양시내 중심에서 정릉사와의 거리는 동남쪽으로 22km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평양시 력포구역(力浦區域) 용산리(龍山里)’라고 한다. 원래 ‘진파리’였는데 왕릉개건 공사를 마친 후부터 다시 ‘용산리’로 지명이 바뀐 것이다. 옛날에는 이곳이 ‘평남 중화군 동두면 진파리(東頭面 眞坡里)’였다. 그래서 북측 문화재 당국은 동명왕릉을 ‘진파리 제10호분’으로 명명했던 것이고, 왕릉은 20여개의 진파리 무덤군 중에 하나에 속한다. 그 후 행정구역이 진파리에서 ‘력포구역 무진리(戊辰里)’로 또 바뀌었고 그 후 김일성 주석의 적극적인 주도로 동명왕릉이 개건되면서 또 다시 행정구역 명칭이 ‘룡산리’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진파리, 무진리 룡산리 등의 마을 이름들은 알고 보면 모두 같은 장소를 말하는 것이니 헷갈리면 안 된다.

현재의 정릉사는 1993년 왕릉 개건 당시 함께 복원되며 문을 연 것이며 사찰의 행정적인 주소는 ‘평양시 력포구역 용산리 왕릉동(平壤市 力浦區域 龍山里 王陵洞)’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경치가 좋기로 이름난 이곳 용산(龍山)에 위치한 동명왕릉과 정릉사는 뒤편 동쪽으로는 제령산, 남쪽으로는 마장산의 산줄기들로 에워싸여 있어 매우 아늑한데다가 국립묘지로 간주하는 인근 해외동포애국열사묘역에서 사방을 바라보면 마치 천하의 명당 부럽지 않을 형세를 지닌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사찰에 당도하고 보니 뒤로는 왕릉 주변의 고풍스런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이곳이 마치 무풍지대, 지상낙원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매우 평온해 보였다.

해외동포애국열사묘역, 동명왕릉, 정릉사 등 이들 3각 지역을 오고가는 길목에는 좌우로 옥수수밭(강냉이밭)이 유독 많이 눈에 띄었으며, 산세도 좋아 지금도 산짐승들이 많이 눈에 띤다고 한다. 절에 당도하니 스님들은 안보이고 그 대신 필자 일행을 기다린 사람은 미녀 해설사였다. 여느 해설사들과 달리 조선옷(한복)을 입지 않고 단촐한 평상복을 입은 앳된 얼굴의 해설사는 우리 일행을 맞으면서 “어서 오십시오. 성불(成佛)하십시오”라며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후 무언가 시간에 쫓기는 듯이 빠른 템포로 즉흥 해설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난 속으로 ‘거 참, 목사가 성불하면 어떻게 되는거지?’라며 빙그레 쓴웃음을 지으며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 필자가 멀리서 바라본 정릉사 전경. 정릉사 터 뒤편 언덕에는 수백 년 자란 제주산 소나무들이 우거져있고, 이 숲속에 동명왕릉이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동명왕릉 입구에 다다르면 우측에 정릉사가 보인다. 거대한 높이의 석탑 끝부분이 경내에 보인다. 멀리 제령산과 마장산이 둘러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해박한 미녀 해설사를 남겨두고 스님들은 출타 중

잠시 담장 밖 멀리 떨어진 왕릉 쪽을 다시 한 번 흘깃 바라보니 수백 년 된 고풍스런 푸른 소나무들이 더욱 기품 있게 보였다. 왕릉에 들렸을 때 설명해준 해설사의 말에 의하면 그 소나무들은 옛날 제주도에서 직접 운반한 고급 소나무들이라고 했다. 정릉사 규모는 얼핏 보아도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나 경북 경주의 황룡사지보다 더 크게 보였다. 고구려 불교가 백제나 신라보다 더 융성했다는 것을 여실히 입증하는 것 같아 만감이 교차했고 마치 고구려인들의 기상과 숨결이 이 절간을 덮고 있는 듯 느껴졌다.

중국 관광객들이 우르르 몰려와 왁자지껄 떠들다 다시 우르르 떠나가는 동명왕릉과는 달리 이곳 정릉사는 오히려 한산하고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정릉사라는 현판이 붙은 절간 출입문을 들어와 경내로 발걸음을 들여놓은 필자는 가장 먼저 스님들이 예불을 드리는 모습을 목격하고 싶었으나 오히려 대웅전격인 보광전 출입문은 예상과 달리 굳게 닫혀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해설사가 그 자리에서 모든 금당문을 열어주며 일일이 설명을 이어가는 형식으로 안내를 해주었다. 정릉사는 5세기 무렵 고구려 동명왕릉을 옮겨올 때 동명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특수한 목적으로 지은 절인데, 처음에는 사당(祠堂)에서 출발해 훗날 사찰로 승격된 곳이라서 ‘추모사찰’, ‘수호사찰’, ‘충신사찰’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고 했다.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목적으로 건축한 고구려의 절집이라서 그런지 막상 경내를 들어와 보니 선입견 때문인지 오히려 사당 같은 분위기도 감돌았으며 참선이나 예불이 드려지는 남측 절간에 익숙한 나로서는 여러 건물 구조들이 매우 생경스러웠다.

특히 신라나 고려시대 혹은 조선시대의 불교 건축양식을 따르는 남측 건축물과는 판이하게 달라 약간 이질감마저 들었으며 그나마 스피커에서 번갈아 들려오는 은은한 목탁소리와 독경소리가 간극을 좁혀 주고 안도감마저 들게 했다. 여성 해설사 동무는 나의 눈빛만 대충 읽고도 주지스님의 안부를 전해주었다. 마침 내가 “스님은 어디계신가?”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곧 바로 내 생각을 스캔하듯이 눈치 빠르게 읽어 버린 것이다. 여기는 두 분의 스님이 계시는데 급한 일이 있어 두 분 모두 출타 중이라고 했다. 왠지 절간에 피치 못할 무슨 급한 용무가 생긴 듯 했다.
 

▲ 정릉사 현판이 달린 출입문 전경.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정릉사 경내에 들어서자마자 좌측 편에 회랑을 배경으로 극락전이 보인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극락전 전경. 극락전은 1탑 3금당식의 고구려 사찰양식에 비춰볼 때 서금당에 해당한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극락전에 모셔진 불상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수행보다는 인민들의 역사교육과 관광객들의 문화휴식 공간
      
정릉사는 김일성 주석에 의한 동명왕릉 개건공사와 함께 본격적으로 복원됨에 따라 당국에서는 사찰운영 정책에 많은 고심을 했을 것으로 예상한다. 그러나 결과는 전통적인 불교를 계승하는 수행정진과 참선, 예불보다는 인민들에게 동명왕릉과 함께 옵션으로 한데 묶어 살아있는 역사교육을 실시하며 문화 휴식처로서의 공간을 제공하는데 치중하는 듯 보였다. 아울러 끊임없이 찾아오는 국내외 참관객들과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차원에 중점을 두고 운영되는 듯 했다. 노동당과 내각의 강력한 문화재 보존 정책에 따라 정릉사, 광법사 등 사찰 유적지 발굴이나 복원작업이 본격화되면서 동시에 승려들의 등장과 그들의 임무에 대한 지침과 활동들이 적극적으로 재개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필자가 만나 본 북측 스님들은 삭발하지 않고 일반인과 동일하게 머리를 기른 스님들이 있는가하면 삭발한 스님들도 있었다. 최근 들어서는 각 사찰에 대표성을 지닌 스님들은 모두 삭발한 상태가 많았다. 또한 절집에 상주하지도 않고 대부분 집에서 출퇴근하는 대처승들로 보였다. 순수한 종교적 의미나 기능보다는 문화재로서의 가치만이 강조되고 있으며 승려들은 관리인의 업무 그 이상은 아닌 듯 했다. 3대 기념 절기인 석가탄신일, 열반절, 성도절 등이 매년 돌아오면 공식적인 예불을 집전하고 법회도 열지만,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밀접하게 접목되지는 않은 듯 했다. 조선불교도련맹(조불련)의 발표에 의하면 북측 승려는 현재 300여명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스님들의 구분도 조불련 자체 내에서 대선사, 선사, 대덕, 중덕 등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특히 조선식 사회주의 불교를 표방하는 북측 승려들은 모두가 결혼해서 가정을 갖고 있는 대처승들이며 수행 목적의 독신생활을 하는 스님은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간혹 독신 승려가 있을 경우에 자세히 알아보면 대부분 이혼이나 부인과 사별한 경우였다. 원래 남측 조계종은 소속 승려의 결혼을 철저히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북측 조불련 소속 승려들은 오히려 결혼을 허용하는 남측 태고종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필자나 신은미 선생의 방북기에도 드러났듯이 스님들의 복장을 자세히 보면 예식을 치르거나 중요한 방문객을 영접할 때는 검은 예복을 입고 그 위에 붉은 장삼을 대충 걸치고 있는 모습들을 자주 목격했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양복을 입고 구두나 운동화를 착용하고 다녔으며 특히 스님들의 신발을 보면 일명 빽구두로 불리는 흰색 구두를 비롯해 빨강색, 노랑색 할 것 없이 오히려 일반 인민들보다 더 구두색깔이 화려했다.

북측 승려들은 음식에도 구애 받지 않아서 보신탕인 단고기(개고기) 요리도 매우 좋아 할 뿐 아니라 일반 인민들과 마찬가지로 육류도 즐겨 먹는다. 불교의 종단을 대표하는 건 주불(主佛)인데 이는 법당 중앙에 봉안되는 으뜸 되는 불상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남측 사찰의 주불은 대부분 석가모니불을 모신다. 또한 각 종파에는 조사(祖師)를 일컫는 종조(宗祖)가 있고, 개인이나 종파에서 가르치는 소의경전(所依經典)이 분명히 있다.

화엄종의 화엄경, 천태종의 법화사부경, 정토종의 정토삼부경, 조계종의 금강경 등이 바로 소의경전이다. 그리고 종파의 근본 되는 핵심교리와 취지인 종지(宗旨)도 저마다 각 교단마다 가지고 있다. 북측도 조불련 중앙위원장을 지낸 박태화 스님에 의해 자신들의 종단 형태와 내용은 전통적인 조계종이며 소의경전도 남측 조계종과 같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라고 증언한 적이 있었다.
 

▲ 경내에서 가장 중요한 대웅전 격인 정릉사 보광전 모습. 보광전은 1탑 3금당식의 고구려 사찰양식에 비춰볼 때 중금당에 해당한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보광전 내부 모습. 높은 천정을 지닌 내부의 단청은 나름대로 화려했으며 기둥들도 길고 웅장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보광전 법당 안에 모셔진 높이 4.2미터의 석가여래 좌상.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용화전 전경. 용화전은 1탑 3금당식의 고구려 사찰양식에 비춰 볼 때 동금당에 해당한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용화전에 모셔진 불상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1탑 3금당을 모두 돌아보며 고구려인의 기상을 느끼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정릉사 건축물중 가장 중심축인 8각 7층 탑을 하루빨리 직접 눈으로 목격하기를 기대해왔다. 기억에도 없을 정도로 아주 오래 전에 폐사되어 흔적도 없던 이곳 절터를 발굴해 옛 모습을 복원한 북측 당국은 이 절을 국보 문화유물 제173호로 지정했다. 무엇보다 식량난을 비롯해 조미간의 대결로 인한 군사력 개발과 이로 인한 자금력 지출과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동명왕릉을 비롯해 단군릉, 왕건릉을 보수하고 새로 단장한 것에 대해서 이념을 떠나 찬사를 보내고 싶다. 밥을 굶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문화재와 유산들을 복원하고 관리하여 그 정신을 후세에 보존 계승하려는 그 정신이야말로 자주와 주체의 기본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발굴 당시의 8각 탑 터를 중심으로 18채의 건물터 등 절 터만 남겨진 상태에서 김일성 주석의 적극적인 지도와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탑을 중심으로 보광전, 극락전, 용화전 등이 복원되어 김일성 주석이 서거하기 1년 전에 그 옛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고고학적인 철저한 검증에 의해 하나씩 복원한 근거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출토 유물 중에 붉은 기와가 있었는데, 이를 반영해 붉은 기와를 제작해 올렸는데 얼핏 볼 때 마치 구리 지붕처럼 보였다. 건물 단청도 신라와 고려 혹은 조선시대의 단청이 아닌 고구려 때 유행하던 단청을 그대로 본 따서 복원했는데 이는 4~6세기경에 그려졌던 고구려 고분 벽화에 묘사된 단청 문양을 응용한 것이라고 한다.

해설사의 설명을 자세히 메모하며 3금당이라 불리는 중금당, 동금당, 서금당을 차례대로 둘러보니 남측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법당 형태와 불상 모습 그리고 법당 내부의 단청이나 구조와 색상이 확연히 달랐다. 중금당에 해당하는 보광전은 외형은 2층 구조지만 내부는 위아래를 틔운 건물이라 천정이 매우 높았다. 석가여래 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입상 등 삼불을 모셨다. 또한 동금당에 해당하는 용화전에는 미륵불을 모셨으며 서금당에 해당하는 극락전에는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여래 입상과 관음보살, 지장보살 입상 등 삼불을 모셨다. 보광전 불상 앞에 드려진 꽃들은 생화가 아닌 조화라서 살짝 아쉬움이 들었다. 보광전 바로 뒤에는 후세의 왕들이 시조능에 제사 지내러 올 때마다 사용하던 별궁 터가 있고, 그 뒤에는 잘 다듬은 돌로 쌓은 물도랑 터가 사실적으로 복원되어 있었다.

절터 전체의 규모와 설계 디자인을 살펴보니 마치 서울 덕수궁의 담벼락같이 보이는 회랑에 의해 다섯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졌다. 원래 터전에는 남북의 길이가 132.8미터, 동서 너비가 223미터, 총 면적이 3만㎡(9천평)에 달하며 8각 탑 터를 중심으로 18채의 집터가 일목요연하게 배치되고 회랑이 사방을 둘러싸는 형국이었다. 8각 탑 터는 평양 청암리사지 탑 터처럼 8각형의 목탑을 세웠던 자리이며 돌기단 너비는 20.4미터, 8각형 한 변의 길이가 약 8.4미터라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8각 7층탑을 복원했으나 최초로 발굴된 원형대로 목재 복원이 아닌 석재로 복원하여 매우 아쉬웠으며 탑 이외에도 금당들과 정문, 회랑 등도 일부를 복원하는 것에 머물러 아쉬움을 더했다. 목탑을 석탑으로 복원하고 다른 여러 건물들도 일부만 복원하다보니 원래 설계대로 건축된 발굴 당시의 위상에는 턱없이 못 미친다. 그러나 복원된 일부를 보더라도 고구려 시대의 웅장한 기상과 화려한 기품은 충분히 엿볼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경내 전체 넓이가 9천 평이나 된다고 하니 그 규모의 방대함에 나는 입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필자가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1천 5백여 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정릉사 담장 너머의 복원된 우물이었는데 그 안에서 투구, 방패 등을 비롯한 철제품과 정릉사의 머리글자인 ‘정’, ‘고구려’, ‘정릉’, ‘능사’ 라고 새겨진 질그릇 조각들이 발견돼 ‘정릉사’라는 것을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정릉사 입구 문에 높이 달린 현판은 출토 당시 그릇에 새겨진 글씨 원형을 살려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그뿐 아니라 토제품, 목제품, 석제품을 비롯해 동식물류들의 유골이나 유물들이 많이 발견됐는데 특히 동물뼈 중에는 호랑이, 사슴, 노루 외에 35종이 발굴됐고 모두 1,130점이나 되는 다양한 유물들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발굴 당시 나온 각종 기와, 벽돌, 질그릇들은 고구려의 요업기술과 공예술이 발전되었다는 사실과 그 시대 고구려인들의 생활풍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으며 필자가 서울 코엑스에서 관람한 유물이 바로 이 기와 조각들이라서 고구려의 정서와 체취를 남김없이 반영한 듯했다. 또한 정릉사 터 우물에서 발굴된 유물들에 대한 필자의 자료요청에 대해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교수 남일룡 박사가 작년 11월말에 매우 구체적으로 공개해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 보광전 앞의 8각 7층 석탑 앞에서의 필자 모습. 창건 당시 원형은 목탑이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필자의 안내원과 일행이 경내를 관람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정릉사 방문객들을 상대로 설명하는 전문 해설사.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1500명 발굴단의 수고로 발굴된 정릉사 터
    
해설사의 증언에 의하면 평소 평양시 외곽 안학궁 터 발굴에 공로가 컸던 유명한 역사학자인 채희국 박사가 이끄는 발굴단이 동명왕릉 유물발굴과 묘실 벽화 발굴에 이어 정릉사 터를 발굴하는데 있어서도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고 한다. 채의국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고고학을 가르치는 유명한 교수(강좌장)인데 그가 가르치는 제자들을 비롯해 대학교 학생들을 무려 1500명을 동원해 불철주야 교대로 발굴작업을 벌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왕릉발굴에 대한 수령님의 확고한 의지와 가르침을 채희국 동지가 높이 받들어 모시고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학생 1천 500명을 동원하며 왕릉 발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결의모임을 갖고 현장을 달려간 학생들이 밤낮없이 교대로 무덤 밑바닥까지 파들어 갔으나 기대와 달리 유물은 전혀 나오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해설사의 말을 정리하자면 어느 날 억수같이 소낙비가 쏟아졌는데 비가 그친 후 작업을 하던 학생 한 명이 파낸 흙더미 위에서 무언가 반짝거리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왕관에만 장식하는 조그만 금동제 장식 조각품이었다고 한다. 채 교수와 리정남 등을 비롯해 모든 핵심 관계자들과 학생들이 기쁨의 환성을 지르며 그동안 파낸 흙들을 모조리 채반으로 치기 시작하자 그 속에서 금, 은으로 만든 왕관 잔편들과 구슬, 머리빗 같은 것들이 연속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후 용기를 얻은 발굴자들은 이번에는 묘실로 들어가 돌 사이 접착재로 사용했던 석회석 덩이들이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모두 녹아내려 두껍게 겹겹이 쌓여있던 것을 모두 걷어내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일주일이 되던 날, 모서리 부분에서 여섯 꽃잎으로 도안된 벽화가 조금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벽화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하자 또 다시 기쁨의 환성이 터졌는데 그날이 바로 74년 1월 23일이었습니다. 눈앞에 나타난 꽃잎 벽화들은 모두 기하학적으로 배치되여 있었으며 일정한 간격으로 열과 행을 이루며 그려진 련꽃들을 104송이 발견하였으며, 그것들을 바탕으로 각 모서리마다 벽면마다 모두 복원하여보니 완전히 지워져 없어진 것들까지 추산해 모두 641송이의 련꽃무늬가 새겨져있었다는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해설사의 말에 의하면 동명왕릉 널방(관이 놓여진 묘실) 내부를 장식한 연꽃무늬 바탕에 칠해진 붉은 자색은 이 무덤의 급수가 왕릉 급임을 뚜렷이 시사 하는데 그 근거로는 당시 고구려에서는 관직에 따라 옷 색깔을 달리했고 특히 붉은 자색은 국왕 급을 상징하는 이른바 로열칼라를 의미한다고 했다. 또한 그 동명왕의 무덤방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마치 고급 실크벽지에 그려진 빨간 꽃잎문양의 벽지를 사방으로 도배한 방으로 상상하면 된다. 그런 아름다운 방안에 관이 놓여졌다고 생각해보자. 그 연꽃이 종교적으로 상징하는 것은 망자가 영원히 기거할 구택 자체가 이미 극락이며 천당이라는 것일 수도 있다.

일제가 저지른 참혹한 도굴 사건

이어서 해설사를 통해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 왕릉과 국보급 문화재들을 약탈한 일제 만행을 듣고 있노라니 피가 거꾸로 솟는 듯 분하고 억울했다.

“일제가 우리나라 왕릉을 도굴할 때 발생한 일들이었습니다. 일제 도굴꾼들은 은밀히 작전을 수행하려고 주로 한 밤중에 작업을 감행하였으며, 흔적 없이 몰래 하려다 보니 무덤 입구를 비좁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작은 체구의 일꾼이 필요해 주로 어린아이들을 여기저기 돈으로 유혹해 불러와서 도굴작업을 시켰는데 일제 놈들은 가장 마지막에 자신들이 원하는 보물들을 모두 꺼낸 후에 비밀을 간직하기 위해 작업에 동원됐던 아이들을 무덤안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고 산채로 봉인했다고 합니다.”

해설사는 동명왕릉을 강탈한 일제 도굴꾼에 대한 가슴 아픈 이야기를 더 들려주었다. 이곳 동명왕릉 주변에는 수많은 고구려 무덤들이 동쪽과 북쪽, 서쪽에 분포돼 있는데 그 가운데서 진파리 1호분과 진파리 4호분에는 화려한 벽화가 있을 뿐 아니라 이 무덤이 6세기 말에 활동한 고구려의 이름난 장수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합장묘라는 것도 밝혀졌는데 그곳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제 침략자들에 의해 동명왕릉은 한 번이 아닌 여러 차례 지속적으로 도굴을 당했고 결국 남아있는 벽화의 일부분도 파괴됐다고 한다.

“나라가 침략을 받으면 력사도 수탈을 면치 못하는 것인데 일제 놈들은 우리 조선을 강점한 후 거의 모든 고분들을 도굴하다시피 하였으며 이곳 동명왕릉도 참혹한 수난을 당한 유적중의 하나입니다. 처음에 왕릉을 발견한 사람은 룡산리 수풀속에서 군사훈련을 하던 일제 침략군 부대의 한 분대였다고 합니다. 워낙 큰 릉묘여서 작업량이 이만저만하지 않았던 터라 그들은 주변마을을 돌아다니며 농민들을 품삯으로 유혹해 끌어와 고분을 파헤치는 노역을 시켰답니다.

그러다가 밑바닥까지 거의 다 팠을 때 도굴을 지휘하던 일본군 장교는 모략을 꾸며 작업을 중지시키고 작업하던 농민들을 다 불러낸 다음 “사실 알고 보니 여기는 가짜묘이다. 왕릉이라고 해서 팠는데 아무것도 없으니 다들 집으로 돌아가라” 했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농민들은 교활한 장교의 말을 듣고 각자 무심코 집으로 돌아갔고 일본군들은 농민들을 다 돌려보내고 나서 자기들끼리 그 속에 있던 진짜 왕관과 희귀한 치레거리들을 손달구지로 담아서 몰래 달아났는데 그 양이 무려 달구지 10대 분량도 넘었답니다.”

동명왕릉은 이처럼 일제 도굴꾼과 국내 일반 도굴꾼 등에 의해 그 후에도 몇 차례 더 약탈당했으며 광복 후에도 여전히 왕묘로서의 정식 대접을 받지 못하고 누구도 돌보지 않는 쓸쓸한 고총으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사대주의 역사학자들은 중국 은나라 사람 기자(箕子)라는 인물이 조선에 와서 교화를 이루었다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을 퍼트리면서 동명왕묘를 가짜묘라고 주장해왔다고 한다.

해설사에 의하면, 이처럼 기자동래설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에게 자랑스러운 전승으로 믿어졌으며 그런 연고로 평양시내에는 실제 기자묘라고 전해지는 무덤이 존재했고 기자가 실시했다는 정전제(井田制) 옛터가 남아 있었으니 이처럼 가짜묘를 진짜 시조묘라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역사적으로 실재하는 자신들의 직계 조상인 동명왕의 묘는 한사코 가짜묘라고 우겼던 비극적 현실을 김일성 주석이 직접 해결해주었다고 강조했다.
 

▲ 진파리 제7호분 내부 묘실 천장. 고구려 석실봉토묘지의 특징인 말각조정법(일명 평행삼각고임법)으로 위로 갈수록 점차 좁혀지는 구조이다. 사방 3.5m의 좁은 묘실이며 높이가 6,6m나 되는 높은 천장이 특징이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진파리 고분군 중 제7호분 내부 묘실에서의 필자. 이곳은 고구려 마리 장군의 묘인데 그는 주몽이 비류수(혼강)가에서 고구려를 창건하는데 이바지한 장수였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진파리 고분 묘실을 안내하는 여성 해설사. 매우 야무지고 당찬 해설로 필자가 고구려역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정릉사터가 발굴되기까지의 극적인 일화

동명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왕릉을 옮겨올 때 릉 앞에 지어진 정릉사 터는 김일성종합대 역사학부 연구팀들이 모두 달려들어 옥수수 밭을 2미터가량 파내는 작업을 1974년 5월부터 11월까지 밤낮없이 반년동안 진행하며 극적으로 발굴했다고 한다.

“이제 정릉사가 발굴된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왕릉에서 유품 잔여물들을 발견하고, 묘실에서 벽화들을 발견한데 이어 이번엔 정릉사 터가 기적적으로 발견되었단 말입니다. 발굴단 학생들이 왕릉주변을 오고가며 유심히 관찰하다보니 유독 왕릉 앞벌의 10여호 정도 되는 농가들이 심은 터밭 강냉이(옥수수) 농사가 잘 안되더란 말입니다. 이상하리만치 같은 동네 다른 집 밭과는 달리 유독 이 지역만 하나같이 강냉이들이 여위고 키들이 낮다는 사실에 력점을 두고 꾸준히 관찰하게 된 것입니다.”

학생들과 발굴단들은 이 고장 토착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해 매년 똑같은 흉작이 되풀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분명히 밭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짐작하며 무언가 큰 유적지로 직감하게 됐다는 것이다.

“발굴조의 성원들은 땅 주인들의 허락을 받고 밭을 파헤치기 시작하였는데, 땅껍데기를 얼마쯤 파내자 고색이 짙은 기와장들이 가득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기와장들에는 ‘정릉’이라는 글자와 ‘릉사’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왕릉 앞에 조상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었던 정릉사라는 절간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절터는 이렇게 해서 우연히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곳 옥수수 밭에서는 30만㎡(9천 평)에 달하는 방대한 절간 터가 드러나게 되었고, 왕릉에서는 100여점의 왕관 잔편들과 금관못들이 그리고 묘실에서는 다양한 벽화들이 발굴되었는데 이 같은 발굴 업적들은 동명왕묘의 실재여부를 확증하는 증거물들이 되었던 것이다. 이윽고 발굴단의 보고를 받은 김일성 주석은 몹시 감격하며 다음과 같이 복원사업과 개건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발굴단 보고를 받으신 수령님께서는 ‘우리 고구려시조가 이제서야 세상 빛을 보게 됐소. 고구려가 로동당 시대에 다시 태여난 것 같구만. 세상에 이런 경사도 다 있는가? 광복 후 30년 동안 바라오던 소원이 이제야 풀렸소. 이제야 모든 것이 풀렸으니 그 왕릉을 세상이 보란듯이 개건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시며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그 후 동명왕릉은 주몽의 2,295번째 생일에 맞춰 1993년 5월 14일 개건했고 그날 이후로도 왕릉과 정릉사의 복원공사에 대한 규모와 질에 대해 김일성 주석의 요구 수준이 워낙 높아서 여러 번 보완작업이 진행되었고, 1998년까지 동명왕릉은 크게 두 번에 걸쳐 새롭게 개축을 거듭했으며, 김일성 주석은 왕릉과 정릉사 복원 준공식에 현장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고 한다.
 

▲ 1500명의 발굴단이 참가해 6개월간 작업 끝에 드러난 정릉사 터. 총 면적이 9천 평이나 된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정릉사 담장 밖에 있는 사찰 전용 우물. 최근 복원한 모습이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정릉사 복원과 관련한 김일성 주석의 역사관

“수령님께서는 정릉사를 복구하는데 대하여 ‘정릉사는 동명왕릉을 위하여 세운 건물이니 잘 복구해 놓아야 고구려 시조왕릉으로서의 면모도 더 잘 살아날 수 있다고 하시면서 정릉사를 복원한 다음에 유물진렬관을 하나 잘 꾸려 놓는것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해설사에 의하면, 유물전시관을 만들면 동명왕릉을 참관하러 온 사람들이 왕릉을 다 돌아본 후 정릉사로 이동해 유물전시관에 들려 고구려시기의 유물들을 실물로 보게 할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였다. 이처럼 동명왕릉과 정릉사는 쌍둥이처럼 서로 떼래야 뗄 수 없는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

“동명왕릉에 왔다가 그저 무덤이나 한 바퀴 돌아보고 가서는 고구려의 력사를 잘 알 수 없습니다. 정릉사를 복구하여 놓고 그냥 비워둘 필요가 없다고 하시면서 ‘진렬관에 동명왕릉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비롯하여 고구려시기의 유물들을 진렬해 놓고 동명왕릉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도 보여주면 몹시도 좋아 할 것입니다’라고 하시며 일일이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당시 동명왕릉 앞에 있는 유물전시관에는 유물도 별로 없고 내용이 빈약하여 유적지 전시관으로서는 어울리지 않아 찻집으로 활용하고 정릉사에서 제일 큰 건물인 강당을 유물전시관으로 꾸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것이 김 주석의 의견이었다.

“또한 수령님은 정릉사와 제당, 릉문을 비롯해 건물들을 건축학적으로 보아도 고구려식 건물이라는것이 안겨오게 잘 건설하여야 하겠다고 하시면서 관계부문 일꾼들에게 지시하여 철저한 고증을 마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문화재 보존에 관한 김 주석의 교시문에는 “동명왕릉 주변과 앞산에 있는 무덤들도 잘 꾸려야 하겠습니다. 동명왕릉 주변에 있는 무덤들이 고구려시기의 무덤이라는 자료적 근거가 있는 것만큼 그 무덤이 누구의 무덤이라는 것을 밝히고 동명왕릉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어느 대신의 무덤이고 저것은 어느 장군의 무덤이라고 설명하여주도록 하여야 합니다. 동명왕릉뿐 아니라 안학궁을 비롯한 고구려시기의 유적들과 개성시에 있는 고려시기의 유적들도 잘 꾸려야 하겠습니다. 력사유적을 꾸리는데는 돈이 얼마 들지 않을 것입니다. 설사 돈이 많이 든다고 하여도 돈을 아끼지 말고 력사유적들을 잘 꾸려놓고 우리나라의 유구한 력사와 민족 문화를 널리 소개 선전하여야 합니다.”라는 문구 내용이 나온다.

고구려인의 체온을 느끼게 해준 정릉사를 떠나며

평소 불교 건축물과 유적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필자는 동명왕릉과 직접 관련이 있는 정릉사에 대해서만큼은 많은 연구를 해왔다. 정릉사를 떠나면서 사찰 복원 건축물에 대한 소견을 피력한 메모를 짧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본래 이 사찰은 전형적인 고구려 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차 사료들에 근거해 분석하여 정리해 보면 정릉사는 단 한차례의 창건으로 끝난 것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다. 고구려가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동명왕릉과 사당까지 평양으로 옮겼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 정릉사 터에 맨 처음 건립된 것은 절간이 아니라 사당(祠堂)이었다. 사당으로 출발해 그 후 능사(陵寺)로 승격되었으며, 그 후 또 다시 왕실 전용 별전(別殿)이 부속 건물로 세워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절차와 시대적 환경 변화에 의해 훗날 이곳은 다시 정식 사찰(寺刹)로 환원되어 고구려 식 불상을 모신 절간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여러 번에 걸쳐 증축과 개축을 거듭했던 정릉사는 마침내 크게 다섯 구역으로 나뉘는 대형 사찰로 변모하며 정착했던 것이다.

터전 발굴로 인해 이미 확인된 건물만도 18채, 회랑이 10개, 총 면적은 약 9천 평이 되는 엄청난 규모로서 이는 경주 황룡사지터와 비슷한 면적이다. 경주에서 가장 큰 사찰인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시절에 창건하기 시작해 진평왕, 선덕여왕, 경덕왕 등 4대왕들을 거치면서 무려 100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동안 건축과 조성공사를 거듭 이어 갔듯 이곳 정릉사도 창건 당시부터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폐사되기까지의 일목요연한 단계별 연구과제들이 아직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미 복원해 놓은 정릉사의 가장 핵심적인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탑 중심의 건축 배열을 보는 전문가들은 매우 기하학적인 원리에 기초해 독특하게 설계되었다고 이구동성으로 극찬한다. 이처럼 아름다운 건축 아이디어를 평면구성과 공간운영에 반영했다는 것은 그 옛날 수준 높은 고구려의 건축 문화와 불교적 정서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이라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면서 393년 평양에 9개의 절(九寺)을 건립하며 창건한 건물들이 백제와 신라는 물론 일본의 건축 양식 발전에도 큰 영향을 준 사실이 밝혀졌으며 고구려의 건축 기술 발전의 총체적 성과들도 보여주어 그 의의가 컸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최초의 발굴 터 위에 나타난 대로 원상복구를 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부분적인 복원만 시도하여 정릉사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고구려 사찰만의 고유한 비례감각미를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경내 중앙에 우뚝 선 8각 7층 탑을 기왕 복원할 바에야 석탑 대신 원래대로 목탑으로 세워야만 고구려 건축의 탁월한 아름다움과 각 건물끼리 연결해주는 보이지 않는 비례대칭의 맛을 볼 수 있다. 결국 목재가 아닌 돌로 탑을 쌓은 것 때문에 1탑 3금당식의 고구려 사찰만이 지니는 독특한 탑 중심 건축양식의 기본 틀은 깨졌으며 이로서 전체적인 구도의 기본축도 흔들렸다고 볼 수 있어 복원이라는 말이 무의미하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계속)
 

▲ 남측에서 그래픽으로 재현한 7층 팔각 목탑의 가상 사진.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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