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정당 하태경 의원이 북한 응원단의 가면 응원을 두고 “김일성 가면이 명확하다”며 “통일부는 김여정에게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0일 남북단일팀과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북한 응원단은 가면을 이용한 응원을 펼쳤다. 하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해당 기사를 소개하며 “북한 응원단이 대놓고 김일성 가면 쓰고 응원한다. 평양올림픽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며 “한국 대통령이 얼마나 우스웠으면 김일성 가면을 감히 쓰겠나. 문재인 대통령을 호구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수위 높은 발언을 적었다.
  
나아가 김여정이 김정은 특사로 왔으니 김여정에게 즉각적인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김여정이 북으로 돌아가기 전 바로 사과하지 않으면 응원단도 김여정과 함께 추방해야 한다”며 “문 대통령이 현장에서 김일성 가면을 보고 즉각 비판했는지도 공개해야 한다. 정부가 김일성 사과 요구도 하지 못한다면 국민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통일부는 11일 “‘김일성 가면 쓰고 응원하는 북한 응원단’ 제하의 보도는 잘못된 추정임을 알려드린다”며 “현장에 있는 북측 관계자 확인 결과 보도에서 추정한 그런 의미는 전혀 없으며 북측 스스로가 그런 식으로 절대 표현할 수 없다고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하 의원은 재차 “통일부가 김일성 아니라고 방어해준다”며 “김일성과 헤어스타일까지 똑같다. 통일부는 김일성 가면이 아니라고 쉴드칠 것이 아니라 김여정에게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일성 가면이 명확한데 그에 대해 아니라고 거짓말까지 해야 하냐. 평창 올림픽을 거짓말 올림픽으로 만들고 싶으시냐”며 “진실을 억압하면 올림픽 분위기는 더 어려워질 것이다. 진실이 드러났는데 어떻게 침묵하고만 있느냐”고 반문했다.

가면 즉, 페르소나(persona)는 기독교 교리에서부터 현대 심리학에 이르기까지 주요 용어로 사용된다. 기독교 교리 사상, 이 말을 제일 처음 사용한 신학자는 2세기 교부 터툴리안이다. 그는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한 분의 실체(우시아)가 어떻게 세 분일 수 있느냐는 난제 앞에서 그 셋을 두고 신의 ‘페르소나’라고 했다. 신이 가면을 쓰고 세상에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면은 셋으로 달라도 결국 그 이면의 실체는 한 분이라는 것이다. 터툴리안은 페르소나를 ‘위(位)’라 하여 삼위는 신과 같은 위격이라는 말로 ‘페르소나’란 말을 사용했다.

여기서 말하는 “위”라는 말은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의 한 “실재”(subsistence)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다른 실재와 서로 관계를 가지면서도 교통할 수 없는 특성에 의하여 저들과 구별된다. 칼빈에게 위격이란 하나님의 본질 안에 있는 구별되는 “실재”(subsistence)라는 것이다. 즉, 본질과 연결되어 존재의 행위가 되며 특별한 구분점을 가짐으로 서로 다르게 구별되는 본질(일체) 안의 존재(삼위)이다. 결국 페르소나란 용어를 통해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가 존재한다는 사실, 같은 말이지만 하나님의 유일성 안에 삼위가 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페르소나(persona)는 현대 심리학, 특히 융 심리학에서 주요시 되는 데, 타인에게 비치는 외적 성격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원래 페르소나는 그리스의 고대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일컫는데 심리학적인 용어로 심리학자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은 말하기를, 인간은 천 개의 페르소나(가면)를 지니고 있어서 상황에 따라 적절한 페르소나를 쓰고 관계를 이루어 간다고 한다. 페르소나를 통해 개인은 생활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반영할 수 있고 자기 주변 세계와 상호관계를 성립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페르소나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심리구조와 사회적 요구 간의 타협점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이 사회적 요구에 적응할 수 있게 해 주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게 된다. 결국 페르소나는 본래의 자아의 다른 화신 격이다.

우리 일상 언어 습관에서 ‘가면’은 매우 부정적 의미를 갖는다. 즉, ‘가면을 썼다’고 하면 위선과 가식 같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전통에는 가면극이 많은 데 대부분 가면을 쓴 주인공들은 양반과 같은 부정적이다.

그런데 만약에 하태경 의원의 말대로 북한 응원단들이 김일성 가면의 의미를 알고 의도적으로 썼다면 또한 위와 같은 배경과 가면에 대한 역사를 안다면, 몇 가지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 즉, 페르소나는 신과 동격의 위를 가지기 때문에, 가면을 쓴 자는 가면과 동격을 갖게 된다. 그것이 북한 주민들에게 가능이나 할 것인가? 우시아가 페르소나가 같은 위격인데 어떻게 가면 뒤의 얼굴이 가면과 같을 수 있는가.

지난 번 아시아 게임 때 김정일 위원장의 얼굴이 현수막에 걸려 비 맞는 것을 보고 눈물까지 흘렸고, 김정일 위원장의 사진이 있는 신문이 휴지통에 버려지는 것을 보고 분노한 적도 있는데 어떻게 김일성 가면을 자기 얼굴에 걸 수 있을까?

신학과 심리학적 전통에서나 우리 관습적으로 보아도 북한 응원단들이 김일성 가면을 쓰고 응원을 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평창 올림픽 성공을 바라는 마음에서 열병식도 축소하면서까지 협조적인데, 결과를 환히 알면서까지 김일성 가면을 쓰고 응원까지 하려 했을 까?

한 번 물어 보았으면 한다. 과연 북한 주민들이 북한 내에서 김일성 가면을 쓰고 경기에서 응원을 한다든지 놀이를 할 수 있는 일이 가능하지 물어보고 싶다. 보도에 의하면 응원단들이 가면의 눈에 심지어 구멍까지 내었다고 하는 데 그들이 과연 김일성 가면인 줄 알면서 그럴 수가 있을 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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