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덕 (원불교 교무)

 

일제 강점기 경성의 대자본가들 가운데 ‘경성 3대왕’으로 불리는 이들이 있었다.

조선 최초의 근대적 부동산개발업자인 ‘건축왕’ 정세권과 화신백화점 소유주 ‘유통왕’ 박흥식, 금광을 개발한 ‘광산왕’ 최창학이다.

이들 '경성 3대왕' 가운데 기농 정세권 선생은 친일파로 살았던 다른 이들과 달리 대자본가이면서도 건축을 통해 조선의 독립과 물산장려운동 등에 기여하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 김경민의 저서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일제하 경성 북촌 조선인의 영역을 지켜낸 정세권 선생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사진 제공-정상덕교무]

1910년대 중반 경성의 청계천 남쪽에는 일본인이, 청계천 북쪽에는 조선인이 다수 거주하였다. 1920년대로 접어들면서 청계천 남쪽에 사는 일본인 수가 급증해 포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조선총독부는 이를 기화로 일본인 주거 공간을 청계천 북쪽으로 확장하려고 도모한다. 이때 청계천 북쪽 조선인의 영역을 지켜낸 이가 바로 정세권 선생이다.

정세권 선생은 먼저 경성 북촌에서 넓은 토지나 택지를 쪼개 작은 규모의 한옥 여러 채를 지어 대량 공급했다. 이렇게 지은 한옥들은 전통한옥의 ‘ㅁ’자 구조를 기본으로 삼아 근대의 편리성과 생활양식을 반영한 구조의 개량 한옥이다.

한편, 신간회와 조선물산장려운동, 조선어학회 등에 적극 재정 후원을 하는 독립운동을 했다. 또한 당시 초기 계몽운동에 그쳤던 물산장려운동은 정세권 선생의 참여로 실물 경제 운동이 되었다.

김경민의 저서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를 읽으며 원불교 교조이며 시대의 선각자이신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를 떠올린다. 우연하게도 정세권 선생과 소태산 대종사, 이 두 분의 경성 활동 시기가 1924년부터 1943년으로 같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 기간 동안 100여 차례 경성을 방문해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을 이어갔다. 또한 정신개벽의 시대를 함께 열어갈 제자를 찾는 일을 지속하는 한편, 검박하고 내핍한 생활을 통해 어렵사리 서울 최초로 창신동에 원불교 교당을 열었다.

이후 제자인 구타원 이공주 선진의 계동 한옥에서 ‘강자약자 진화상 요법’을 설법하며 상생상화의 새 세상을 전망했다.

창신동의 교당이나 계동의 ‘ㅁ’자 한옥은 모두 기농 정세권 선생이 지은 한옥대단지 안에 자리한 가옥이다. 또한 정세권 선생이 남긴 건축의 자취는 전북 익산의 원불교 총부 안에도 스며 있다. 총부에는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지은 초기 건축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소태산 대종사 당대에 지어 지금까지 남아 있는 ‘ㅁ’자 구조의 한옥 ‘금강원’과 ‘영춘헌’이 그것이다.

정세권 선생과 소태산 대종사, 두 분은 한 번도 마주한 적은 없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경성이라는 시공간에서 민족과 인류를 위해 고민하고 실천한 점에서 닮아 있다.

일제강점기 건축을 통해 우리 한옥 구조를 확산하고 물산장려운동과 독립운동 지원 등으로 벌인 정세권 선생의 공로는 뒤늦게 인정되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됐고,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서울시에서 정세권 기념사업회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정 선생의 삶과 업적을 역사적으로 복원해 기억한다는 점에서 매우 잘 된 일임에 틀림없다.

소태산 대종사의 역사와 삶 또한 지금 한강변에 한창 건축하고 있는 ‘원불교소태산 기념관’의 건립으로 세상에 더 크고 넓게 드러날 것이다.

좋은 책을 만나면 행복하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를 읽으며 스위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사람을 향한 건축』과 건축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던 반 시게루의 『시대정신의 반영이 건축』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원불교소태산기념관’의 건립 책임을 맡고 있는 내게 ‘공공성’이야말로 건축의 첫째가는 덕목임을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

 

2018년 02월 08일 정 상 덕 합장

 

 

원불교 교무로서 30여년 가깝게 시민사회와 소통하고 함께해 왔으며, 원불교백년성업회 사무총장으로 원불교 100주년을 뜻 깊게 치러냈다.

사회 교화 활동에 주력하여 평화, 통일, 인권, 정의와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는 일에 늘 천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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