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개봉되었던 영화 <공공의 적>에서 악역 이성재의 극중 대사 중 여전히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좀 살벌한 대사였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하나?” 아마 이 비슷한 대사였을 것이다. 이 대사가 여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왜일까. 인정하긴 싫지만,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은 때로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살인을 저지르는가. 지금도 매일 들려오는 끔찍한 소식들은 인간이 애초부터 여타 동물과 다름이 없음을, 아니 더 잔인한 생물임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때문에 필자는 역설적으로 인간의 사랑이 애틋하다. 어떤 작가의 말처럼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타인을 죽이는 사건만큼 인간의 원초적 감정과 생각들이 솔직하고 선명하게 나타나는 상황은 없다(단이리)’면, 사랑 역시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인간은 무자비한 살상을 저지르는 동시에 때로 사랑을 위해 목숨을 던진다. 감히 필자가 판단하거나 해석할 수도 없거니와, 사랑은 인간이 인간임을 말해주는 유일한 그 무엇이다. 적어도 난 그렇게 믿고 싶다.

▲ 초이,『하노이 소녀 나나』, 스틱, 2017. 12. [자료사진 - 통일뉴스]

여기 국적과 나이를 뛰어넘어 사랑을 키워가고 있는 연인이 있다. 서른여섯 한국 남자와 스물 셋 베트남 여자, 아이 같은 아저씨와 어른 같은 소녀의 사랑이야기.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아가던 남자는 우연히 국가 프로젝트를 맡아 베트남에서 6개월 동안 근무하게 된다. 그리고 운명처럼 한 소녀를 만난다. 소녀의 이름은 남자의 귀로는 도저히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기에, 그냥 ‘나나’로 부르기로 한다. 자주 찾던 커피숍에서 일하던 나나에게 차츰 관심을 가지게 된 남자는 결국 사랑에 빠지고 만다.

얼핏 흔하디흔한 사랑 이야기로 비쳐질 수 있다. 사실 그리 특별한 이야기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애틋하고 따뜻하다. 그리고 조금은 짠하다. 과연 이 지구상에 사랑이 남아있기는 한 것일까, 문득 돌아보곤 하는 지금, 이들의 조그만 사랑은 조마조마하다. 그리고 빤한 로맨틱 코미디마냥 그저 해피 엔딩이 되기를 바라게 된다. 그렇지 않은가. 사랑이 사랑으로 보이지 않고, 그저 계산과 투자로만 보여지는 지금, 온전한 사랑을 이제 막 키워나가기 시작한 이들을 어찌 응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저 사랑인데 말이다.

마치 삼촌과 조카처럼, 때론 친구처럼 조금씩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가던 철없는 연인은, 남자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예정된 이별을 맞게 된다. 소녀는 자신이 상상하지 못했던 사랑과 또 예견된 이별 앞에 태연하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아픔에 안절부절 못하고, 남자 역시 빤한 이별을 알면서도 맥없이 사랑에 빠진 자신을 자책하며, 소녀에 대한 미안함만 쌓인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쉽지 않은 길을 택한다. 아니 어쩌면 어쩔 수 없는 단 하나의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사랑하는 것. 그저 감정이 움직이는 곳을 따라 사랑하는 것, 살아가는 것. 두 연인은 감정과 생각이 흘러감을 멈추지 않고, 애써 막지 않고 사랑을 따라 가기로 결심한다.

귀국 후 주위의 걱정과 위로, 때로 상처가 되는 이야기들까지 안아가며, 나나와의 사랑을 이어가던 남자는 어느 날 헤어지자는 통보를 받게 된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맥없는 이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자는 사랑을 믿기로 한다. 자신의 감정을 믿고 끝까지 사랑을 믿기로 한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다시 베트남 출장의 기회를 얻게 되고, 나나를 찾아 하노이로 떠난다.

이제 시작한 이 연인들이 앞으로 어떤 사랑을 만들어갈지 혹은 이 책이 나온 후 얼마 되지 않아, 어쩔 수 없는 혹은 서로의 감정에 따라 헤어지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책은 다시 하노이를 찾은 남자와 나나와의 재회에서 끝을 맺는다. 부디 해피 엔딩을 바랄 수밖에.

어느 새 마흔이 훌쩍 넘어버린 지금, 다시 사랑을 떠올린다. 적지 않은 인연들이 내 곁을 스쳐갔고, 내 마음에 남아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아내와 딸아이를 지키고 있다. 내 삶을 함께 했던 사랑들은 모두 안녕할까. 지금은 어디에서 어떤 이와 사랑을 만들고 있을까, 모두들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을까. 알 수는 없지만, 그저 바람이다. 행복하기를.

누구나 한 때는 그랬듯, 사랑을 믿었다. 오직 사랑이라면 그 어떤 고난과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녀만 있으면 세상 그 무엇도 부러울 것이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은 그 무엇보다 냉정하고 잔인한 스승이 아닌가. 맥없이 이젠 가슴 속 기억으로, 그때의 뜨거움으로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여전히 믿고 싶다. 이 세상엔 무모하고 대책 없는 사랑으로, 어처구니없고 끔찍한 오늘을 견뎌내며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존재할 것임을. 그들은 지금껏 인류가 그래왔듯, 무모한 희망으로, 낙관으로, 긍정으로 서로를 지켜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한없이 행복할 것이다. 그 사랑이 아직 멸종되지 않았음을 난 기어이 믿는다.

여전히 사랑하는 이들이 많기를, 사랑할 수 있는 이들이 많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 역시 사랑을 믿는 이로 남고 싶다. 그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사랑으로 가슴 벅찼던 시간을 떠올리며 그렇게 철없이 죽어가고 싶다. 행복하게.

오해와 편견이 쌓여 증오와 배제가 되고 그것이 쌓여 적대와 무자비한 폭력을 낳는다. 올림픽이란 축제를 맞아 이를 축하하기 위해 북녘에서 손님들이 오고 있다. 손님을 맞이하는 따뜻함이, 굳이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미움과 적대로 되돌려주는 몰인정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남북은 그동안 참 오랫동안 오해와 편견을 쌓아왔고, 증오와 배제를 일삼아 왔다. 그리고 적대와 무자비한 폭력을 주고받았다. 이젠 서로에게 조금 더 다가가 사랑을 이야기해도 될 때이다. 너무 늦었다.

늦은 밤, 옛사랑을 떠올리며 피식 웃을 수 있는, 그런 날이 가끔은 그리워지는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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