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이후 최고위급 인사 공식 방남(訪南)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평창올림픽 개막식 참석을 위해 2박 3일의 일정으로 방남한다. 북한이 평창올림픽 기간에 파견하기로 한 고위급대표단의 단장 자격이다. 북측 국가수반의 서울방문은 1948년 분단 정부 수립이후 70년만이다.

▲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헌법상 국가수반이다.그는 북한 ‘외교의 산증인’이다. [자료사진 - 정창현] 

북측 사회주의헌법에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국가를 대표하며, 다른 나라 사신의 신임장, 소환장을 접수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어 대외적으로 국가수반의 역할을 한다. 이에 비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실질적인 ‘최고영도자’로서 북한을 움직이는 조선노동당의 위원장과 ‘국가주권의 최고정책적 지도기관’인 국무위원회의 책임자 직책을 맡고 있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 사망이후 4년 만에 헌법을 개정하면서 주석제를 폐지하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를 신설해 주석제의 모체가 되는 중앙인민위원회의 권한을 상임위원회로 이양했다.

이때 정무원 부총리직에 있던 김영남이 상임위원장에 승진 기용된 후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그는 김일성종합대학과 모스크바대학을 나온 후 1950년대에 노동당 국제부에 들어간 후 당 국제부와 외교부를 오가며 활동한 북한 ‘외교의 산증인’으로, 1983년에 정무원 부총리에 오른 바 있다.

그 동안 북측 고위급대표단장으로 최용해 당 부위원장 등이 거론됐지만 최종적으로 김영남 상임위원장으로 결정된 것은 북측 신년사에 밝힌 것처럼 평창올림픽 성공에 최대한 성의를 보이려한 점, 미국에서 펜스 부통령이 온다는 점, 평창올림픽 기간 다양한 외교활동이 예정돼 있다는 측면이 고려됐을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김 상임위원장이 ‘실권’이 없어 대화에서 실질적인 유연성을 발휘할 수 없다는 우려가 나오지만, 북측의 정책결정 속성상 누가 대표단장으로 오든 이미 메시지는 정해져 있다. 그가 갖는 ‘국가 수반’이라는 상징성이 더욱 중요하고, ‘실질적인 논의’는 함께 오는 대표단 차원에서 이뤄지면 될 것이다.

따라서 김영남 상임위원장의 방남은 그 자체로 남북관계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갖고 있으며, 여러 측면에서 주목된다.

남북 정상의 ‘특별한 간접대화’ 기회

첫째, 김 상임위원장은 분단이후 공식적으로 방남한 최고위급 인사이고, 문재인 대통령과 회담할 경우 역시 청와대를 예방한 북측 최고위급 인사가 될 것이다. 1972년 5월 박성철 부주석이 서울을 방문해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했지만 비공식적 비밀방문이었다. 1985년 허담 대남담당비서가 방남해 전두환 대통령을 만났지만 역시 비밀회담이었다.

공식적으로는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때 특사조의방문단장으로 방남해 이명박 대통령과 만난 김기남 노동당 비서(현 부위원장)가 최고위급 인사였다. 2014년 10월 인천 아시안게임에는 북측 황병서 총정치국장, 최룡해 국가체육지도위원장, 김양건 당 비서가 방남했지만 박근혜 대통령과의 만남은 무산됐다.

따라서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 고위급 대표단장으로 방남하는 김영남 상임위원장을 단독으로 접견한다면 우리 정상과 북한 고위급 인사의 회동을 통한 남북 정상의 간접 의사소통이 2009년 조문단 일행의 방남 이후 약 9년 만에 이뤄지게 된다.

김 상임위원장은 2000년과 2007년 남북정상회담 차 평양을 방문한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과 만나 회담한 바 있지만, 서울을 방문해 남쪽의 대통령과 회담하는 것은 무게감 자체가 전혀 다르고, 남북관계의 새로운 진전을 의미한다.

둘째, 김 상임위원장의 방남은 향후 성사될 남북정상회담으로 가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 북한은 2000년 첫 남북정상회담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에 앞서 김 상임위원장을 서울에 파견하기로 했었다. 실제로 그의 서울 방문이 여러 차례 추진됐으나 주변정세와 남북관계 변화로 이뤄지지 못했다. 2008년 초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때 김 상임위원장 초청이 거론되기도 했지만 성사되지는 않았다. 그런 측면에서 그의 방남은 남북 간 합의 후 18년 만에 성사되는 셈이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과 회담에서 김 상임위원장이 직책에 걸맞은 메시지(평양 초청 등)를 내놓을 경우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에도 탄력을 받을 수 있고, 남북정상회담 추진도 앞당겨질 수 있다. 최소한 남북관계와 관련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의중이 ‘친서’ 또는 구두 메시지 형식으로 문 대통령에게 전해지고, 문 대통령도 김 상임위원장을 통해 남북대화 의사를 전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셋째, 김 상임위원장이 미국을 향해서는 어떤 메시지를 내놓을지 주목된다.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할지, 미국의 대북적대시정책 폐기를 요구하며 새로운 협상 카드를 제시할 지가 향후 북미대화 재개에 분수령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북측 고위대표단에 리용호 외무상의 포함여부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현재로서는 미국이 북미대화의 핵심 의제로 삼고 있는 핵·미사일 문제에서 북한이 변화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번 평창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할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과 김영남 상임위원장 간의 ‘의미 있는 만남’이 성사될지 여부조차 불투명하다. 2월 8일 평양에서 열리는 ‘건군절’ 열병식이 어느 수위에서 열릴지가 하나의 변수다.

북측 고위급대표단의 평창 행보에 주목

북한은 고위급대표단이 김영남 상임위원장을 단장으로 3명의 단원과 18명의 지원인력으로 구성된다고 밝혔다. 단원 중에는 노동당 부위원장이 1명 이상 포함될 가능성이 크고, 지원인력 중에도 남북관계를 담당하는 통일전선부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관계자가 다수 포진돼 있을 것이다.

장기간의 남북관계 단절과 세대교체로 소원해진 남과 북의 ‘대화일꾼’들이 다양한 층위에서 서로의 입장을 타진하고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셈이다. 이를 통해 평창 이후 남북 간에 특사를 주고받을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남북적십자회담과 군사회담 개최에 의견 접근을 이뤄내는 게 중요하다.

평창올림픽 이후를 걱정하는 전망이 많다. 실제로 남북대화의 진전에 필요조건인 북미관계는 여전히 긴장상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금의 대화 분위기가 언제까지 지속될 지 아무도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다. 만약 (남북대화가) 그것(평창)만으로 끝난다면 그 후에 우리가 겪게 될 외교·안보상의 어려움은 가늠하기가 어려울 것이고 또 다시 대화의 계기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이뤄지고 있는 남북대화에 대해 “좋은 일”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올림픽 이후 상황에 대해선 “누가 알겠느냐”라고 밝혔다. 북한도 “평창 이후 정세가 어떻게 변화될 지 가늠하기 어렵다”며 고심하고 있다고 한다.

정세는 유동적이고 평창 이후의 전망은 낙관적이지 않은 게 사실이다. 우선은 평창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 남북화해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문 대통령이 밝힌 것처럼 “평창올림픽 덕분에 기적처럼 만들어낸 대화의 기회를 평창 이후까지 잘 살려나가는 지혜와 노력이 필요”하고, “남북대화가 미국과 북한 사이의 대화로 이어지게 하고 다양한 대화로 발전시켜 나가도록”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평창올림픽 기간 중 ‘펜스-김영남 접촉’이 성사되더라도 그 자체로 서로의 입장이 좁혀질 수는 없겠지만 만남 자체가 의미가 있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남북간 육·해·공 이동 경로가 일시적으로나마 모두 열렸다. 올림픽을 활용해 남북대화 분위기를 최대한 끌어올려 미국과 북한의 대화수요를 높일 수 있는 좋은 시점이다.

북한도 이번 기회를 잘 활용해 북미대화에 돌파구를 열려는 적극적인 행보에 나서야 할 것이다.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중재자’, ‘촉진자’로서 우리 정부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평창 이후는 평창 기간의 성과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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