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재능

가끔 사람들에게 `언제부터 그림을 그리게 되었냐?`, `미술을 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곤 한다. 곰곰 생각해 보면 그림을 언제부터 그렸는지, 계기가 무엇이었는지는 뚜렷이 기억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만화를 좋아했고 즐겨 그렸다. 특별히 재능을 인정받았던 기억도 없다.

하지만 초등학교 6학년 때 봄은 기억에 남아있다. 미술시간에 야외에서 화단을 그리고 있었다. 기억으로는 수채화였던 것 같다. 여느 아이와 마찬가지로 하늘을 파란색으로 칠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다가와 하늘을 한번 쳐다보라고 했다. "가까운 하늘은 진하고 먼 하늘은 흐리지?" 하늘을 보니 정말로 그랬다.

이 작은 사건이 내게 사물을 보는 방법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살색, 하늘색, 나무색 따위로 사물의 색을 규정하던 아이가 시시각각 다르고 역동적으로 변하는 사물을 보고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림으로 표현하는 일에 재미를 붙인 것은 당연했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자녀교육에 유달리 관심이 많다. 특히 미술교육에 관심을 갖는 부모들이 찾아와 자녀 미술교육에 대해 상담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떤 분은 재능이 없는 아이를 `미술천재`라며 영재교육을 요구하고, 반대로 풍부한 재능을 죽이는 부모도 있다. 사실 이 문제는 꼭 부모 책임만 있는 건 아니다. 우리나라 현실에서 제대로 미술적 재능을 키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이들은 풍부한 감성과 미술적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현실 교육에서 밑천을 다 까먹는다. 황량한 학교교육에서 올바른 미술교육을 기대하기 어렵다. 학교 `특기적성교육` 시간의 대부분을 입시공부로 대체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히려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는 기초교육을 예술교육으로 대체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미술학원도 마찬가지이다. 100년 전의 석고상을 아직도 그리고 있는 입시학원과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어린이 미술학원에서 월급 40만원 정도를 받는 강사에게 무엇을 요구하겠는가?

이런 조건에서 미술정규교육을 받은 강사가 아이들 미술학원에 몇 명이나 있겠는가. 학교수업의 연장에서 점수를 받기 위해 숙제를 하고 살색, 나무색 따위를 외우며 `완성해 치우는` 미술교육은 단지 보습학원일 뿐이다. 물론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좋다.

돈을 많이 주면 유명한 화가가 진행하는 `미술영재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미술교육에서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두드러진다. 구체적인 교과내용은 잘 모르지만, 지극히 `감성훈련과 표현력` 중심의 교육을 시키고 있다. 원래 아이들은 감정이 풍부하고 이성이 부족하다.  오히려 논리와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미술교육이 필요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 영화산업은 10년만에 국내시장 점유율을 40%로 끌어올렸고, 세계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애니메이션 산업도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 예상컨대, 10년 정도면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가 될 것이다. 패션과 화장품 산업은 어려운 경제사정에서도 호황을 누리고, 대중음악은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에 `한류`열풍을 만들어 낼만큼 저력이 있다. 

하지만 이런 대중문화의 뿌리가 되는 예술교육은 밑바닥이다. `창조성`과 `탄탄한 철학적 내용`을 겸비하지 못하면 대중문화는 한순간에 사그라지는 물거품일 수도 있다.

비단 경제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사람이 사람다워지려면 예술의 옷을 입어야 한다. 지금도 어설픈 경제논리와 무관심 속에서 예술적 재능을 죽여 가는 숱한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작가의 의도

▶파도/정룡수/유화/72*107/1995

이번에는 평양미대 출신의 북한화가 정룡수가 1995년에 그린 <파도>라는 유화 작품을 소개한다. 이 작품의 크기는 대략 2절지 정도이다. 이 작품은 북한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거나 유명한 화가가 그린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북한화가의 창작태도가 잘 드러난 작품이기에 소개한다.

<파도>라는 작품은 그야말로 파도를 그린 것이다. 거친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에서 거대한 파도를 화면에 담았다. 육중하고 거친 파도의 표현도 좋고, 파도거품까지 세밀하게 그린 묘사능력도 만만치 않다. 단순히 상상만으로 그린 작품이 아니라 꼼꼼한 관찰의 결과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단순한 풍경화는 아니다. 거친 파도를 가르며 지나가는 군함이 작품의 알맹이다. 쉽게 풀면, 거친 파도가 치는 조건에서도 바다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거친 파도는 어려운 북한의 국내외 조건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우리는 주변에서 이렇게 거친 파도를 그린 작품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범선과 함께  그려진 이발소 그림부터 파도타기를 하는 그림이나 사진은 흔하다. 이런 그림에 익숙한 사람들은 파도 사이를 지나가는 군함이 눈에 거슬릴 수 있다. `파도는 멋있는데 옥의 티처럼 하필 군함이 뭐람... 쯧쯧, 그림 버렸네` 라고 말할지 모른다.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상징과 비유`를 통해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사람들은 거친 파도를 보면서 험한 세상을 헤쳐 가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고, 그야말로 자연의 웅장함을 느낄 수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예술은 바로 `상징과 비유`를 통해 무엇인가를 전달하려고 한다.

사람들은 `장미꽃`을 통해서 `사랑`이라는 상징적 이미지를 느끼고, 농촌을 그린 풍경화에서 `향수나 자연`을 느낀다. 이것은 원시 동굴벽화에서 그려진 쓰러진 동물이 풍족한 밥상을 상징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사물이나 현상은 그 자체로서 작품이 되진 않는다. 사물이나 현상 속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징성`이 결합되어야 작품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말이다.

군함이 없는 파도는 감상하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이 된다. 작가의 의도도 불분명할 수밖에 없다. 북한미술은 이런 식의 창작태도를 좋아하지 않는다. 상당히 이성적이며 논리적으로 미술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의 의도가 감상자에게 어렵지 않게 전달된다.

북한 미술에서 깃발과 구호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작품의 의도가 왜곡해서 감상되는 것을 막는 최소한의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애매한 작품 앞에서 작가의 의도를 알기 위해 끙끙거리는 모습은 북한에서 찾을 수 없다. 사람들은 작품은 감상하는 사람 마음이라고 항변할지 모르지만 정말 그렇다면 예술가의 존재가치가 없어져 버린다.
 
우리는 의미를 잘 해석하지 못하거나 어려운 작품일수록 깊은 뜻을 숨기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주최측의 농간`이다. 중세시대 미술은 문맹자들에게 예수의 복음 을 가르치는 역할도 했다. 글자를 모르는 사람도 그림을 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렵고 깊은 내용일수록 감상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좋은 것을 함께 공유하면 더욱 좋은 일 아니겠는가. 마치 예수의 가르침이 어려워서 존경하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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