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진실은 바로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


 산중답속인(山中答俗人) 
 - 이백  

 내게 묻노니 어찌 푸른 산에 푸른 산에 사느냐고
 대답 대신에 웃으니 절로 마음이 한가롭네
 복사꽃 흩날려 아득히 물 따라 흐르니
 이 별천지는 인간세상이 아니라네


 오래 전에 모 초등학교에 ‘부모 교육’ 강의를 간 적이 있다. 한 학부모가 질문을 했다. ‘아이가 사랑이 뭐냐고 묻더라고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죠?’ 나는 나도 모르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때는 꼬옥 안아주세요. 그리고는 이게 사랑이야! 하고 대답해 주세요.’  

 답변을 하면서 내 자신이 참으로 대견하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가르침대로 한 것이었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라!’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은 보여줄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아이가 삶이 뭐냐고 물으면 어떻게 답해야 할까? 아마 많은 부모님들은 어떤 멋있는 답을 찾으려 애쓸 것이다. 고학력 부모일수록 어떤 현학적인 대답을 할 것이다. 가방 끈이 짧은 부모님들은 그냥 씩 웃으며 아이를 바라볼지 모른다.         

 한 때 ‘삶은 계란’이라는 아재개그가 있었다. 누가 만들어 널리널리 퍼졌을까. 다중지성(多衆知性)은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이 말은 비트겐슈타인의 경지다. ‘삶은 말로 할 수 없어. 입 닥쳐!’ 삶을 뭐라고 주절거리는 이 시대 모든 지식인들을 향해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한 방을 날린 것이다.

 신(神), 사랑, 삶, 믿음, 소망, 애국, 정의, 지혜, 마음......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을 뿐인 것들에 대해 우리는 너무나 많은 말을 한다. 말로 그런 것들이 규정되고 나면 우리는 그런 고귀한 것들을 만날 수 없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말한다. ‘종교는 신(神)을 만나지 못하게 한다.’ 신은 깨달아야 알 수 있는 그 어떤 무엇일 것이다. 아마 신을 본 사람은 신에 대해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대 성직자들은 신에 대해 얼마나 많은 말을 하는가? 그들의 가르침이 우리 눈을 가려 우리는 신을 만나도 알아 볼 수 없을 것이다.  

 아주 오래 전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의 삶의 목적에 대해 정의를 내리셨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아,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가슴이 조여들고 숨이 막힌다. ‘그 좋은 말’ 앞에 우리는 꼼짝도 못하고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워야 했다.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들에 대해 말을 하게 되면 삶이 황폐해진다. 인간은 성찰(스스로를 보는)의 힘이 있어 정신이 아주 높은 단계에 오를 수 있다. 인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은 성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묵묵히 자신의 정신을 가꿔갔을 것이다.  

 우리는 빼어난 경치나 예술 작품을 보면 말을 잃는다. 멋있게 사는 사람을 봐도 말을 잃는다. 그때 우리는 얼마나 고귀해지는가! 세상에 말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산중(山中)에 있는데, 누가 ‘어찌 푸른 산에 푸른 산에 사느냐?’고 묻는다면 이백 시인은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대답 대신에 웃으니 절로 마음이 한가롭네/복사꽃 흩날려 아득히 물 따라 흐르니/이 별천지는 인간세상이 아니라네’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다.’

 그는 죽을 때 ‘나는 경이로운 삶을 살았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렇다. 그는 경이로운 삶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일생을 통해 우리에게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하느님에 대해 묻는 제자에게 예수는 ‘저 돌멩이를 들춰보라. 그 아래에 하느님이 있다.’고 대답했다. 부처가 뭐냐고 묻는 제자에게 조주 선사는 ‘뜰 앞의 잣나무!’ 하고 대답했다. 

 ‘묻지마 폭행’이 자주 일어난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들은 행동으로 우리에게 무언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해 우리가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고 말만 늘어놓자 이번엔 대형 화재 사고가 마구 일어난다. 우리는 또 말만 늘어놓을 것이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보여주어야 연이은 사건 사고들은 멈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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