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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대에 전봉준 장군 동상을 서울에 세우자” 정남기 동학농민혁명유족회 고문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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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1.26  12: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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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종로 복판에 전봉준 장군 동상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정남기 동학농민혁명유족회 고문과 지난해 12월 20일 수운회관 내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1894년, 극심한 학정과 외세의 발호에 맞서 ‘보국안민 척양척왜’ 기치로 봉기한 동학농민혁명군의 맨 앞장에는 형형한 눈빛의 전봉준 장군이 서 있었다.

동학농민혁명 123년이 된 지난해 전봉준 장군의 동상을 서울 종로 한복판에 세우자는 서원을 실천에 옮겨 나선 이들이 ‘전봉준 장군 동상 건립위원회’(이사장 이이화)를 만들어 올해 3월 20일 제막식을 가질 예정이다.

전봉준 장군과 함께 활동했던 ‘비서’ 정백현의 손자로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을 오랫동안 맡아온 정남기(75) 고문과 지난해 12월 20일 서울 종로 수운회관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언론인 출신으로 한국언론재단 이사장을 역임한 정남기 고문은 ‘동학에 미친 사람’으로 불릴 정도로 동학농민혁명을 천착해 왔고 마침내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과 “우리 세대에 전봉준 장군의 동상을 서울에다 세우는 것으로 우리 생을 마감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정 고문은 “전봉준 장군이야말로 우리들이 현재 123년 동안 쭉 적체되어온 우리 민족의 자주와 평화, 평등을 구현할 수 있는 유일한 지도노선이랄까 실천운동을 이끌었다”며 사학자들의 견해를 빌어 “정말 대외적으로 내놓고, ‘우리나라 선대에는 전봉준 같은 사람이 있다’라고 할 수 있는, 그 버금가는 사람은 우리 대한민국에도 없고 일본에도 없고 중국에도 없다”고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또한 “전봉준 장군 동상도 전주에도 있고 정읍에도 있다. 이제 서울에 꼭 전봉준 장군 동상을 세워서 전 국민이 동학농민혁명이 전라, 충청 몇 개 지역에 걸치는 사회변혁운동이 아니고 전국적이고 민족적인 변혁운동이었다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확인시켜 줄 하나의 상징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 고문은 “전봉준 장군은 특히 호송 장면을 담은 사진이 상당히 인상적이기 때문에 그 사진에 입각해서 하기로 했다”며 “기단 높이를 1미터로 하고, 아랫부분은 만져볼 수 있게 형상하고, 실물크기 좌상으로 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전봉준 장군은 처형 사흘 전인 1895년 3월 27일 종로 의금부 감옥에서 신문을 받기 위해 법무아문으로 호송되는 과정에서 일본영사관 구내에서 일본인 사진사가 들것에 앉은 모습을 촬영해 사진이 남게 됐다.

전봉준 장군은 국가 변란죄로 처형돼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 했고, 천안전씨 대종회에서 정읍에 써놓은 가묘가 전부이다. 마지막 그의 사진 속 형형한 눈빛이 종각에 자리잡게 된다면 그 자체로 역사적 해원을 맞게 되는 셈이다

   
▲ ‘전봉준 장군 동상 건립위원회’는 3천만원 모금을 목표로 ‘다음 스토리펀딩’에 ‘종각역 전봉준 동상건립 프로젝트’ 캠페인을 2월 25일까지 진행하고 있다. [캡쳐사진 - 통일뉴스]

‘전봉준 장군 동상 건립위원회’는 ‘다음 스토리펀딩’에 ‘종각역 전봉준 동상건립 프로젝트’ 캠페인을 2월 25일까지 3천만원 모금 목표로 진행하고 있으며, 현재 약 774만원이 모아진 상태다. [스토리펀딩 바로가기] 

정 고문은 “동학농민혁명도 시발점은 소위 봉건 주구들에 대한 저항, 내치의 불만에서 시작했고, 오늘 촛불시민혁명도 박근혜 일당의 국정농단이라는 내치에서 폭발했다”며 “우리가 지향할 점은 외세에 휘둘리고 있는 엄혹한 현실을 어떻게 타파해나갈 것인가라는 동학농민혁명군이 지향했던 소위 ‘반외세 자주’라는 깃발”이라고 짚었다.

나아가 “어쨌든 길게 보면 통일 대업을 위해서는 정신적인, 상호 인정하는 가치 부분이 공통적으로 있어야”된다며 “동학이라고 하는 우리 선대들이 남겨놓은 고유의 정신적 유산을 공유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국가의 미래를 개척해나갈 수 있지 않겠느냐”고 제시했다.

“통일이 된다면 통일헌법에는 그야말로 홍익인간에서부터 동학농민혁명 정신도 들어가서 우리나라의 기둥을, 근간을 세우는데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해야 될 것”이라는 것.

다음은 지난해 12월 20일 오후 2시 수운회관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사무실에서 정남기 동학농민혁명유족회 고문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동학농민군 비서 정백현, “전봉준 꾐에 빠져 일시적 외도”

   
▲ 정남기 고문과 인터뷰를 가진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사무실에는 전봉준 초상 판화와 절명시가 걸려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절명시> 殞命 운명

時來天地皆同力 시래천지개동력
運去英雄不自謨 운거영웅부자모
愛民正義我無失 애민정의아무실
愛國丹心谁有知 애국단심수유지

때 만나서는 천지도 내편이더니 
운 다하니 영웅도 할 수 없구나
백성 사랑 올바른 길이 무슨 잘못이더냐 
나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김동리 역) 

□ 통일뉴스 : 먼저, 정 고문께서 동학농민혁명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계기를 소개해달라.

■ 정남기 고문 : 우리 할아버지가 백자 현자, 정백현이시다, 동학농민군의 조직표 상으로 보니까 비서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흔히 요즘 이야기로는 전봉준 장군 비서라고 하는데 그런 건 아닌 건 같다.

편재 상으로 대장이 전봉준, 그 밑에 총관령 손화중, 김개남, 총참모 김덕명, 오시영, 영솔장 최경선, 비서 송희옥, 정백현으로 나와 있다. 이이화 선생 이야기로는 요즘 비서와 달리 선비 중에서 비밀스런 글을 쓰는 사람의 직책이 비서였다. 농민군 조직에서 특수하게 문장력이 있고 지식이 있는 사람에게 비서라는 직책을 줬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알았고 그때부터 쭉 관심을 갖고 해오다 본격적으로 한 것은 1994년도 100주년 때다. 이이화 선생을 만나서 유족회도 만들고 명예회복을 시키기 위해 특별법도 만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다른 지역에 있는 동학농민회 지역단체들도 만나고 연구자들도 만나게 됐다.

□ 1994년부터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고 했는데, 당시는 기자 신분이 아니었나?

■ 그렇다. 천도교에서 나오는 <신인간>에도 ‘동학에 미친 사람’이라고 소개된 글도 있다. 젊었을 때도 공사석을 불문하고 맨 동학 이야기만 하니까, 일견 외부에서 나를 볼 때 ‘동학에 미친 사람’이라고 불렀다.

□ 고등학교 때부터라면 부모님이나 동네 어르신들의 말씀을 많이 들었나?

■ 전혀 그런 것 없었다. 대개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했던 후손들이 다 그렇겠지만 우리 아버지도 우리 할아버지가 그쪽에 관여했다는 것을 일체 극비에 부쳤다. 왜냐하면 피해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런 걸 전혀 몰랐고, 내가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책을 읽어 봤더니 우리 할아버지 이름이 나와서 우리 아버지한테 확인을 했는데, 우리 아버지가 나한테 해준 얘기는 “우리 아버지가 굉장히 어렸을 때도 영민하고 그래서 훌륭한 문재(文才)가 있었는데 전봉준이라는 요상한 사람의 꾐에 빠져 가지고 일시적으로 외도를 한 것이다”고 말씀하시더라.

내가 기대했던 것하고는 정 반대의 말씀이셨다. 우리 아버지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것은 부정적인 것만 생각하고 계셨고, 그래서 내가 더 열심히 해야겠다 생각했다.

□ 비서 직을 맡은 것도 그렇고, 아버님 말씀도 그렇고, 할아버지 정백현 선생이 굉장한 문재가 있었던 분 같다.

■ 그렇게 봐야 할 것이다. 전설 같은 이야기지만 4살 때부터 시를 짓고 이런 것들이 있다. 옛날에는 한 대여섯살 되면 서당에서 글 배우기 시작했지 않나.

그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인 1994년에 내가 우리 할아버지 문집을 냈다. <정백현 서울일기>를 타이틀로 해서 냈다.

우리 할아버지는 26살 때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했다. 그러니까 26살이나 27살 때 실제 전투가 다 일어났지 않았겠나. 그 다음에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고 시골에 피난해 있다가 서울로 잠행한다. 서울로 피난와 계시면서 여러 사람과 만나서 교류하면서 외로움을 달래고 혼자서 객지생활 한 것을 일지 형식으로 남긴 것이 있다. 이것을 엮어서 내가 <정백현 서울일기>라는 책을 냈다.

그때 교류한 양반들 면면을 보면 굉장한 사대부 집안의 권세가들이다. 그래서 피신을 해서 살아남았다. 지난달 11월 16일 성균관대학교에서 열린 동학에 관한 학술세미나에서 성균관대 배항섭 교수가 우리 할아버지에 대한 연구논문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내가 낸 <정백현 서울일기>를 중심으로 했다.

이잡듯이 해서 다 잡아 죽이는데, 우리 할아버지는 끝까지 살아남으셨다가 4,5년 후에 고향으로 내려간다. 내려갈 때도 1차 기포지가 고창 무장인데, 무장현감으로 새로 부임하는 사람하고 동행해서 온다. 그렇지 않으면 고향에서 다 잡혀 죽는다. 그렇게 살아남아서 거의 은거하다시피 살면서 26년을 살고 52세에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전반부 26년, 후반부 26년 갈라서 사셨다.

서울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뭐였느냐? 설은 여러 가지가 있다. 대원군과 전봉준 내통설이 있는데, 대원군 비호세력의 그늘 아래서 피신할 수 있었을 것 아니냐는 설도 있다.

젊은 청년이 남긴 싯구 같은 것을 보면, 서울 와서 친구들과 어울리고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셨다. 그때 청국군이 들어와 있고 일본군이 왔다갔다 하고 난리였다. 오늘날과 비슷한 정황이었는데, 그런 것을 약간 썼는데, 오늘날 청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을 못할 만큼 나라에 대해서, 민족에 대해서 걱정하신 것을 보고 세대차가 난다는 생각을 했다.

박근혜 “네, 귀가 따갑도록 아버지한테 들었습니다”

   
▲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가운데)과 태안지역 봉기를 주도한 문구석의 증손녀 문영식 여사와 촛불집회 시기 찍은 사진이다. [사진제공 - 동학농민혁명유족회]

□ 94년부터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활동을 본격으로 해오면서 느끼는 바는?

■ 시간은 우리 편이란 소리를 가끔 하지만, 어느 정도 민주사회로 우리 사회가 변혁이 되고 통일이 임박할수록 우리 동학농민혁명은 빛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어쨌든 통일이 안 된 상황에서 자주를 내세우는 것도 남쪽에서는 지금까지 어려운 상황이었다.

심지어 동학농민혁명특별법을 제정할 당시에 <조선일보> 같은 데는 사설에서 반대를 하고 그랬다. ‘조선시대 때 일어난 사건을 어찌해서 대한민국 정부에서 명예를 회복시킬 수 있느냐, 차라리 그러면 을지문덕부터 올라가든지 해야 할 것 아니냐’ 비아냥거리고. 세계사적으로 그런 건 별로 찾아보기 어렵고 법논리상 조금 맞지 않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어쨌든 민족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근현대에서 이렇게 투쟁한 사람들을 홀대하고 천대하고서는 미래가 없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쭉 해왔는데, 그래도 날이 갈수록 많이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따지자면 동학농민혁명에서부터 시작해서 3.1운동, 의병투쟁, 4.19의거, 6.10항쟁 다 이어져서 촛불혁명으로 거의 완성단계에 들어간 것 아니냐. 그래서 사회변혁운동이 수없는 실패를 거듭하지만 그것이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다음 세대로 이어지면서 계속 맥이 이어지고 언젠가는 그것이 완성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민중들의 참여민주주의가 꽃피는 것은 동학농민혁명에서부터 시발된 것으로 확신한다.

지금도 언론계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주변에서도 ‘종북좌빨’이니 이런 비난을 받고 있지만 나는 사실 어느 면에서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 사회에서 주류로부터 배척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렇지 못한 것이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다.

여담이지만 이이화 선생과 술을 많이 마셨는데, 하는 이야기가 늘 그랬다. “우리 세대에 전봉준 장군의 동상을 서울에다 세우는 것으로 우리 생을 마감하자.”

□ 북한에서 천도교청우당이 조선로동당 우당(友黨)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안다. 최덕신,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이 월북한 것도 특이하다.

■ 나는 상당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일반적으로 천도교인이 생각할 때는 상당히 큰 흠결로 받아들이고 있다.

북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을 공식적으로 갑오농민전쟁이라고 한다. 동학이라는 종교적이랄까 사상적인 배경은 빼고 농민들이 일으킨 전쟁이라고 받아들인 모양이다. 우리 남쪽에서도 학자들 대부분이 갑오농민전쟁이라고 한다.

어쨌든 길게 보면 통일 대업을 위해서는 정신적인, 상호 인정하는 가치 부분이 공통적으로 있어야 되는데, 그것은 소위 좌우익이라고 하는 정치적인 편가르기를 뛰어넘어서 동학이라고 하는 우리 선대들이 남겨놓은 고유의 정신적 유산을 공유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국가의 미래를 개척해나갈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 이쪽 동학이나 천도교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의 생각이다.

□ 그런데 천도교의 수운회관은 박정희 시절에 특혜로 받은 것 아닌가?

■ 박정희가 가기 아버지가 동학접주였다고 했다. 친필로 쓴 회고록에도 그래서 하마터면 죽을 뻔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박근혜나 박근령 한테도 내가 확인했다. 박근혜 한테 내가 직접 “네 할아버지가 동학농민군이었다고 내가 들었는데 사실이냐? 너 들어봤냐?” “네, 귀가 따갑도록 아버지한테 들었습니다.” 대통령되기 전인데, “그러면 동학농민혁명유족회에 들어와서 같이 일하자. 그리고 앞으로 네가 정치적으로 성공하더라도 동학농민혁명에 관해서 만은 나하고 손잡고 잘하자.” “아, 두말씀이냐”고 나하고 굳건히 말로는 그렇게 했다.

그런데 박정희 아버지가 동학농민군이었냐 아니었느냐 하는 문제는 개연성은 있지만 실질적인 증명할만한 것은 없었다. 그런저런 측면에서 박정희가 집권하고 나서 자기 정통성을 어떻게 하기 위해서 공주 우금치에다가 동학혁명기념탑도 세우고, 정읍에다가 탑도 세웠다. 최덕신과의 인간적인 관계도 있고 해서, 아마 천도교 수운회관 세우는데 상당히 도움을 준 것 같다.

“동학농민혁명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전봉준 장군

 

   
▲ 정남기 고문은 동학농민혁명군 비서를 맡았던 정백현의 손자로 '동학에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동학농민혁명에 천착해왔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우리가 흔히 천도교 하면, 수운 최제우, 해월 최시형, 의암 손병희로 이어지는 법통이 있고, 전봉준 장군, 김개남 장군, 서장옥 선생 등 여러 인물들이 떠오른다. 전봉준 장군 동상 건립 추진의 의미나 역사적 맥락을 짚어달라.

■ 최제우 선생이나 최시형 선생 동상은 여러 곳에 있다. 손병희 선생 동상도 탑골공원에 있다. 천도교 입장에서 종교적 지위로 보면 전봉준 장군은 일개 접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어떤 사상적인 바탕으로 실질적인 사회변혁을 주도적으로 실천한 사람이 누구냐가 중요한 것이고, 동학농민혁명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전봉준 장군이다.

전봉준 장군이야말로 우리들이 현재 123년 동안 쭉 적체되어온 우리민족의 자주와 평화, 평등을 구현할 수 있는 유일한 지도노선이랄까 실천운동을 이끌었다. 그것은 아직도 한 번도 완성되지 못했다.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했던 그 당시와 오늘날도 외세에 휘둘리는 입장은 하등 변함이 없다. 그런 면에서는 전봉준 장군의 외침이 오늘날도 유효하다. 그것은 지난 촛불 시민혁명에서도 충분히 입증되고 발휘가 됐다.

어쨌든 전봉준 장군 동상도 전주에도 있고 정읍에도 있다. 이제 서울에 꼭 전봉준 장군 동상을 세워서 전 국민이 동학농민혁명이 전라, 충청 몇 개 지역에 걸치는 사회변혁운동이 아니고 전국적이고 민족적인 변혁운동이었다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확인시켜 줄 하나의 상징물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과거의 사대주의에 젖어 있는 정권이나 정치인들 앞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하기 어려웠고, 물론 지난 김대중이나 노무현 정권 때도 이런 이야기 할 수 있었을 터이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우리 사회가 거기까지 이르지 못했던 측면이 있고, 지금은 상당히 진전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전봉준 장군 이야기, 동학농민혁명 이야기를 꺼낼 때가 된 것 아니냐. 지금이 적기다. 이렇게 판단을 한 것이다.

호송 장면을 담은 사진 토대로 좌상으로 제작

   
▲ 전봉준 장군은 처형 사흘 전인 1895년 3월 27일 종로 의금부 감옥에서 신문을 받기 위해 법무아문으로 호송되는 과정에서 일본영사관 구내에서 일본인 사진사가 들것에 앉은 모습을 촬영해 사진이 남게 됐다. [사진출처 - (사)전봉준장군 동상 건립위원회]

□ 전봉준 동상을 서울에 세우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지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 박원순 서울시장이 동상을 세울 자리를 마련해주겠다 해서 본격화 돼 지난 3월부터 공식적으로 ‘전봉준 장군 동상건립 위원회’를 만들었다. 이사장에 이이화 선생이 초대돼서 사단법인 이사장으로 돼 있다. 나는 이사도 아니고 다만 실행위원회 실행위원이다.

동상을 제작하는데 공모를 통해서 작가를 선정했고, 또 입상으로 하느냐 좌상으로 하느냐 아니면 반신상으로 하느냐 두달 동안 여러 논란을 거쳤다. 그러다가 최근에 좌상으로 하자고 결정됐다. 입상은 너무 진부하고, 전봉준 장군은 특히 호송 장면을 담은 사진이 상당히 인상적이기 때문에 그 사진에 입각해서 하기로 했다.

어떤 크기로 제작해야 하느냐 고민이 많았는데, 기단 높이를 1미터로 하고, 아랫부분은 만져볼 수 있게 형상하고, 실물크기 좌상으로 하기로 했다. 세종대왕, 이순신장군 같이 위압적으로 하면 오히려 거부감이 들 수 있다. 서울시 심의회를 통과해야 공식적으로 기자회견해서 발표한다고 한다.

좌상을 어느 카톡방에다 띄워봤더니 젊은이들이 보고 칭찬을 많이 하더라. 입상은 정말 식상한데 좌상이 좋고, 수난받는 민중의 표상으로서 빛나는 눈동자로 앉아 있는 모습이 굉장히 감명적이라는 거다. 서울시내에 이런 동상이 서면 상당히 민중들의 호응을 얻을 것이다

내심 기대하는 것은 노동운동하는 사람들이 출정식할 때 전태일 동상 앞에서 하듯이 전봉준동상 앞에서 그런 걸 했으면 하는 측면도 있다.

현재는 3월 20일날 제막하는 걸로 돼 있다. 전봉준 장군의 처형일은 음력 3월 24일이다.

□ 전봉준 동상 건립 위치는 정확히 어디인가?

■ 종각 맞은편 영풍문고, 지하철 입구와 입구 사이다. 인도와 차도 사이에 조그마한 화단 같은 것이 있다. 거기다 세우기로 했고, 지금 우리가 스토리펀딩도 하고 있는데, 자세한 위치도 게시해 놓았다. 거기에 글도 자료도 올려놓고 있다.

스토리펀딩에 첫 이야기는 이이화 선생이 현장을 답사한 사진과 전봉준 장군의 최후진술이 담겼다. 두 번째 이야기가 오늘 아침 올라왔는데, 유족들의 수난사를 썼다. 제일 끝에다가 나하고 이이화 선생하고 다른 유족하고 촛불집회에서 찍은 사진을 올려놨더라. 촛불집회에도 주도적으로 가담했다는 이미지를 알리는 것이다.

□ 총 모금액 목표치는 얼마인가?

■ 5억이라고 목표를 정했는데, 내용적으로 3억만 거둬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스토리펀딩은 3천만원으로 정했다. 만약 여기서 돈이 여유가 생긴다면 변두리에 조그만 건물을 사서 전봉준 기념관이라고 이름할까 꿈을 가지고 있다.

□ 서울시에서는 도와주지 않나?

■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요청을 안 했다. 물론 내부적으로 그런 생각도 가지고 있다. 어떤 기업체나 누가 돈을 많이 내서 한두 사람이 세우는 것 보다는 국민 모금을 통해서 만원, 2만원씩 모아서 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런 절차를 밟아서 해보자는 거다.

“동학농민혁명군이 지향했던 것은 ‘반외세 자주’라는 깃발”

   
▲ 정남기 고문은 전봉준 장군의 '자주적 민족 정신'에 방점을 찍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전봉준 동상 건립 이후에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 일부에서는 헌법 전문에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이어받자”라고 하는 것을 언젠가 넣어야할 것 아니냐고 한다. 지난번에 5.18민주화운동을 넣는다고 하니까 일부에서는 국회에서 세미나도 갖고 그랬다. 그러나 나는 현실적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분단된 상황에서 헌법에 집어넣자면 무리가 가고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다. 다만, 통일이 된다면 통일헌법에는 그야말로 홍익인간에서부터 동학농민혁명 정신도 들어가서 우리나라의 기둥을, 근간을 세우는데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해야 될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이 빠진 4.19나 5.18이나 6.10은 하나의 가지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동학농민혁명에서 뻗어나온 가지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항차 정말 자주적이고 통일된 국가로 형성되고 재탄생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국가의 이념으로서, 민족의 지향으로서 동학농민혁명이 높이 평가 받도록 하는 것이 내 개인의 욕심이 아니고 실질적으로 이 나라를 반석에 올려놓는 길이 아니겠는가.

추정이지만 300만이 가담하고 30만이 희생당했다. 그때 인구 비례로 봐서 굉장한 사람들이 희생당한 거의 유사이래 최대의 사건이다. 우리가 외국에 내놓아도 자랑할 수 있는 우리 민족사적 일은 사실 동학농민혁명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고 사학자들이 이야기한다.

예를 들면 성균관대 총장 했던 장을병 씨도 “아니, 한국의 민주주의가 비행기 타고 영국에서, 미국에서 건너온 줄 아느냐? 이것은 동학농민혁명의 집강소에서부터 출발했다”고 한다.

근현대 사학을 했다는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대외적으로 내놓고, ‘우리나라 선대에는 전봉준 같은 사람이 있다’라고 할 수 있는, 그 버금가는 사람은 우리 대한민국에도 없고 일본에도 없고 중국에도 없다”로 한다.

정말 이 동학농민혁명이 프랑스에서 일어났다면 프랑스 시민혁명 버금가는 가치를 인정받을 것인데, 진주가 진흙 속에 파묻힌 꼴이다. 이것을 끌어내서 우리 민족에게 정말 활력을 불러일으키고 민중 참여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하나의 심볼로 삼아야겠다.

□ 최근 촛불집회는 서구의 광장민주주의도 아니요. 촛불의 미학도 아니요, 우리의 전통운동과 맞닿아 있다는 논지가 있다. 촛불집회와 동학의 내적 맥락과 연계성을 설명해 달라.

■ 말하자면 시대는 120년 차이가 있지만, 국제 정치외교적인 여건이나 이런 걸로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상황이고, 그때는 주권자의 대부분이 농민이었기 때문에 농민이란 걸 붙였지만 오늘날로 보면 국민이고 시민, 인민이다.

동학농민혁명도 시발점은 소위 봉건 주구들에 대한 저항, 내치의 불만에서 시작했고, 오늘 촛불시민혁명도 박근혜 일당의 국정농단이라는 내치에서 폭발했다. 그러나 우리가 지향할 점은 외세에 휘둘리고 있는 엄혹한 현실을 어떻게 타파해나갈 것인가라는 동학농민혁명군이 지향했던 소위 ‘반외세 자주’라는 깃발이다. 그것이 오늘날 촛불시민들한테도 당연히 적용된다고 본다. 이 운동이 어느 정도 성숙돼 가면 결국 귀결점은 그렇게 해야 완성될 것이다.

서울에다가 전봉준 장군 동상을 세우는 의미가 상당히 크다고 본다. 서울 시내에 소위 옛날 벼슬아치들, 쉽게 이야기하면 국민의 세금을 먹고 사는 사람들의 동상이 주로 많다. 세종대왕도 마찬가지고, 이순신장군도 마찬가지다.

전봉준은 아니다. 국민이 주는 세금 한 푼도 받아본 일이 없고 오직 자력으로 나라를 구하고 민족의 길을 뚫겠다고 일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어느 공무원, 군인, 임금보다도 더 훌륭하고 더 가치있다고 생각한다.

동학농민군들은 국가의 혜택을 거의 받지 않은 사람들이 ‘국가를 구하겠다’, ‘민족을 구하겠다’고 일어난 것이고, 더 높이 평가해야지 더 낮게 평가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희생당한 것에 대한 국가적인 인정, 추모가 지금까지 너무 미약했지 않았느냐.

어쨌든 전봉준 장군이 남긴 자주적인 민족의 정신이랄까 이런 것을 최대의 유산으로 삼아 후손들이 나라다운 나라,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하고, 거기에 이번 동상을 세우는 것이 보탬이 되길 바란다.

 

(수정,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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