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리일만 사무국장이 투병생활 끝에 2018년 1월 19일 오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도쿄조선고급학교 교원과 군마초중학교 교장 등 민족학교 교원으로 오랜 기간 재직했으며, 총련의 지부 위원장을 역임했다. 또한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연행 진상조사 활동을 통해 남측의 역사학자, 종교인, 교사, 노동자들과도 꾸준히 교류해왔으며 남북해외의 교류협력 활동에도 적극 나서기도 했다. 생전에 고인과 각별한 만남을 유지해왔던 안영민 <민족21> 전 대표가 고인을 추모하는 글을 기고해왔다. /편집자 주

 

▲ 도쿄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리일만 사무국장이 투병생활 끝에 2018년 1월 19일 오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제공 - 안영민/사진 - 로금순 조선신보 사진기자]

“수고하십니다. 일만 선생님이 오늘 오전 세상을 떠나시었습니다.”
점심 무렵 일본에서 지인이 전해준 짧은 메시지였습니다. 순간 소파에 기댄 몸이 저절로 벌떡 일어났습니다.
이럴 수가, 리일만 선생님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도쿄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리일만 사무국장님. 아니, 제게는 <민족21> 도쿄지사장으로 마음속에 각인되어 온 분입니다. 2011년 6월 마지막으로 도쿄를 방문했을 때 뵙고는 7년에 가까운 세월이 덧없이 흘러갔습니다. 중간에 몇 차례 술이 거나하게 취한 목소리로 “안 기자, 건강하신가?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게 지내시게. 꼭 다시 만나야지.” 전화를 걸어주신 게 전부였구나 하는 생각에 슬픔이 더 커졌습니다.

2011년 7월 ‘민족21 사건’이 터진 뒤 제가 선생님께 가는 길도 막혀버렸고, 2010년 ‘천안함 사건’으로 총련 동포들의 입국이 불허되면서 선생님이 그리운 고향땅을 밟아볼 기회도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렇게 7년의 세월이 흘러 남북관계에도 해빙이 찾아오고 평창 동계올림픽 때는 총련 응원단이 남쪽을 방문할 거라는 이야기도 나오는 이때, 끝내 세월과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선생님은, 리일만 선생님은 영영 만나뵐 수 없는 곳으로 떠나신 것입니다.

리일만 선생님은 총련의 민족학교 교사로 오랫동안 재직하셨던 분입니다. 교직에서 은퇴하신 후에는 총련 일선 조직의 간부로도 활동했습니다. 또한 도쿄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사무국장 일을 맡아 20년 가까이 일본과 북, 남에서 일제의 만행을 조사하고 알려나가는 일에 헌신해 오셨던 분입니다. 작은 체구이지만 추진력 있고 강단진 원칙주의자의 모습을 지녔던 선생님. 그렇지만 만나보면 참으로 인정이 많고, 얼마나 민족애가 넘쳐나는 분인지 알 수 있습니다.

리일만 선생님과 <민족21>의 인연은 창간 때부터 시작됐습니다. 창간호에서 ‘우끼시마호 사건’의 진상에 대해 소상히 알려주신 선생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제 강점기 강제연행 문제에 대한 기고를 통해 남쪽의 <민족21> 독자들과 만나셨습니다. 또 6.15시대의 성과로 총련 재일동포들의 고향 방문이 가능해지면서 여러 차례 남쪽을 방문해 강제연행 문제에 대한 연구 성과를 남쪽 연구자들과 나누기도 하셨습니다.

<민족21> 기자들이 일본으로 취재를 갈 때면 선생님은 항상 안내원 역할을 해주셨습니다. 숙소 예약부터 식사 문제, 취재원 만남 등 모든 일정을 사전에 조직해주셨고, <민족21> 기자들이 아무런 걱정 없이 취재에만 전념하도록 챙겨주셨습니다. 서울로 돌아올 때는 상공인들로부터 거둔 <민족21> 후원금을 챙겨주시는 것도 선생님의 일이었습니다. <민족21> 기자들 어느 누구 하나 선생님으로부터 넘치는 사랑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어찌 그 사랑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저희들한테 말씀하셨죠. “내가 다른 사람들한테 뭐라는지 알아? 내가 바로 민족21 도쿄지사장이야. 그러니 빨리 빨리 구독신청도 하고, 후원금도 내놔 봐.”

그렇습니다. 선생님은 누가 뭐래도 민족21 도쿄지사장이었습니다. 동포 상공인들로부터 <민족21> 평생독자를 모집해주시고, 창간 기념행사 때마다 각 단체와 동포들로부터 축하광고와 후원금을 모금해 저희들한테 보내주셨죠. 이제사 고백하지만 그 후원금이 <민족21>을 버티게 해준 힘이었습니다. 재일동포 분들의 분에 넘친 사랑이 <민족21>을 통일잡지로 성장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리일만 선생님의 노력이 있었음을 저희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저는 개인적으로 선생님과 각별한 인연을 맺었지요. 2003년인가요, 선생님이 남쪽에 오셨을 때, 제게 조심스레 부탁을 하셨습니다.

“안 기자, 내 아버지 고향이 정읍인데 내장산에 한번 가볼 수 있겠나?”
“그럼요.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제가 차로 선생님을 모시고 같이 가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서울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정읍의 내장산으로 내려가는데, 선생님은 보자기에 싼 작은 상자를 하나 들고 계셨습니다. 바로 부친의 유골함이었습니다. 돌아가실 때의 유언을 지켜드리기 위해 나선 길, 선생님은 한참 동안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셨죠. 마침내 내장산 입구에 도착해 산 중턱까지 올랐을 때, 선생님은 조용히 유골함을 열고 아버님의 영혼을 고향땅 뒷산에 모셨습니다. 소리 죽이며 흐느끼는 선생님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그때 비로소 저는 재일동포들의 회한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 선생님은 살아오신 날들을 제게 들려주셨죠. 총련 동포들의 60년 역사를, 일본 땅에서 우리말과 우리 역사,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며 살아온 세월을, 그래서 더더욱 절절히 민족의 화해와 평화, 통일을 바라는 재일동포들의 마음을 들려주셨습니다. 이때의 기억이 ‘안영민 기자’를 있게 해주었습니다. 이때의 기억이 <민족21>을 남북해외가 함께 하는 통일잡지로 세워 나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리일만 선생님, 너무나도 죄송합니다. 저희는 선생님과 재일동포 분들로부터 받은 사랑을 끝내 지키지 못했습니다. 6.15시대가 부정당하는 참담한 세월을 끝내 버텨내지 못했습니다. <민족21> 기자들이 일본에 가서 총련 동포들을 만났다는 이유로 종북잡지로 낙인찍히고 간첩으로 몰리는 세월 앞에서 <민족21>은 결국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일본에 가서 선생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 걱정만 하던 차에 이렇게 뜻밖의 부음을 듣게 되다니 참으로 가슴이 저립니다.

2011년 6월, 제가 쓴『행복한 통일 이야기』를 들고 일본을 방문했을 때, 선생님은 당신이 이 책을 번역해서 재일의 젊은 청년들이 꼭 읽도록 출간하겠다고 약속하셨죠. 그리고 10월쯤에『행복한 통일 이야기』일본어 번역판을 갖고 전국을 돌며 ‘안영민 기자 일본 통일 강연회’를 조직하겠다고 하셨죠. 선생님은 번역판 출간의 약속을 지키셨지만 저는 10월에 일본을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7년째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혼백으로 먼 길을 떠나는 선생님의 마지막 모습마저 찾아가 뵙지 못하는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조만간 저를 옭아매고 있는 사슬이 떨어질 때면 꼭 선생님을 찾아뵙겠습니다. 그래서 지키지 못한 약속에 용서를 구하고, 선생님의 삶과 정신을 다시 한번 온전히 제 마음 속에 담아오겠습니다. 리일만 선생님, 부디 평안하십시오. 리일만 선생님, 부디 영면하십시오. <민족21> 식구들은 영원히 선생님을 잊지 않겠습니다. 사랑합니다.

2018년 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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