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닦을 마음도 본래 없다 (혜능)


 장소부에게  
 - 왕유

 늙어가니 조용함만 좋아지고
 세상일에는 관심이 없네
 돌아봐도 마땅한 대책이 없으니
 그저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솔바람은 불어와 옷고름을 풀고
 거문고를 타니 산달이 비춰주네
 그대는 궁통의 도리를 물었지
 어부의 노랫소리 물가 깊은 곳에서 들려오지 않는가


인터넷으로 신문에 실린 글을 읽다보면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를 때가 있다. 그때는 독자들의 댓글을 본다. 그러면 찬탄이 절로 나온다. ‘아, 그런 거였어?’

철학자 벤야민은 ‘독자와 저자, 경계의 몰락’을 예견했다. 저자와 독자의 경계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나는 저자들보다 독자들이 더 탁월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글을 읽으며 저자들이 일부러 사실을 왜곡하려고 글을 쓰는 경우도 있지만 실력이 부족해 글의 관점이 잘못된 경우가 상당히 많은 것 같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다중시대(多衆時代)’가 열린 것 같다. 지식인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지식인이 된 시대. 스스로 지식과 지혜를 만들어가는 시대.  

사실 원래부터 모든 사람이 지식인이었다. 수만 년의 원시시대에는 모든 사람이 지식을 함께 만들고 함께 나누었다. 그러다 소위 문명사회, 계급사회가 되며 지식인이라는 특권층이 생겨났다. 지배계급을 위한 지식을 만들어내며 먹고사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저자들이 지식인이라는 허울을 쓰고 이 땅의 지배계급에게 봉사하며 호의호식하는가! 

이름 없는 독자들이 그 허울을 한방에 날려버린다. 그래도 앞으로 오랫동안 ‘지식인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생계수단이니까. 온갖 방법을 쓰서 자신들의 밥그릇을 챙길 것이다.   

왕유는 여러 벼슬을 전전하다 낙향하였나 보다.

‘솔바람은 불어와 옷고름을 풀고/거문고를 타니 산달이 비춰주네/그대는 궁통의 도리를 물었지/어부의 노랫소리 물가 깊은 곳에서 들려오지 않는가’

이 세상은 물질이면서 에너지라고 한다. 딱딱하게 굳어진 마음으로 보면 이 세상은 다 물질로 보일 테지만, 생각을 내려놓고 보는 세상은 에너지의 흐름, 하나의 춤일 것이다.

솔바람을 맞아 옷고름을 풀고 거문고를 타니 산달이 비춰주는 세상, 시인은 물질인 몸을 넘어 파동의 세계에 들어간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색(色), 물질은 곧 ‘텅 빈 세계(空)’인 것이다.

이 세계에 들어가 본 각자(覺者)들은 말한다. ‘텅 빈 충만’이라고. 

‘텅 빈 충만’ 속에서 시인은 이 세상을 관통하는 이치를 노래한다. 물가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어부의 노랫소리를 통해.

석가가 제자들 앞에서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여 주듯이.    

어부 같은 장삼이사들. 댓글 다는 수많은 독자들이 아닌가!

그들은 이 세상의 ‘궁(窮)하고 통(通)하는 이치’를 알고 있는 것이다. 밑바닥에 살면서 위로 틔어 오르는 수많은 경험을 하면서 그들은 궁통(窮通)의 이치를 깨달은 것이다.  

위에 있으면서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사람들, 저자들이 어떻게 떨어지고 위로 틔어 오르는 이치를 알겠는가!   

일자무식이었던 혜능이 ‘닦을 마음도 본래 없다’고 외치며 동아시아의 불교를 열었다. 마음을 별로 닦지 못한 독자들이 댓글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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