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방북기를 다시 연재하며
     
7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북미간의 첨예한 대립전은 ICBM 발사 성공을 향해 치달을수록 더욱 긴박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시민권자의 신분으로 북을 방문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주변으로부터 많은 눈총과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나의 말과 글로 인해 여러 문제가 유발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필 평양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나는 수없이 되뇌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 민족이 처한 문제와 해답의 중요성에 대한 작은 실마리라도  잡기 위해서는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왜 여기 왔는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과연 어떤 나라인가?”, “우리 조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북의 인민들은 진정 행복한가?”, “사실과 다르게 왜곡되고 있는 이북을 서방세계에 올바로 알릴 방법은 없을까?”, “우리 민족의 자주적 통일은 정녕 불가능한 것인가?” 등에 대한 타는 목마름의 화두를 여기 평양서나마 한 모금 축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나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남과 북, 북과 남은 지리적으로 볼 때 수천 년 동안 위 아래로 같이 붙어 하나로 살아오다가 70년 전부터는 가장 먼 나라처럼 각각 따로 살고 있다. 같은 역사, 같은 혈통, 같은 문화를 공유하며 칡넝쿨처럼 깊이 얽히고설켜 있으면서도 이 세상에서 가장 적대시 할 수밖에 없는 통탄할 이 현실을 지금도 나는 강력히 부정하고 싶은 심정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두 개의 나라가 된 것이 아니라 원래 한 몸뚱이인데 반 토막씩 잘라져 두 개의 토막이 동강난 채로 나뒹굴고 있을 뿐이다. 그러기 때문에 나에게 있어서 북을 방문한다는 의미는 한쪽의 절규와 처절한 몸부림을 뒤로하고 나머지 한 토막을 부둥켜안고 같이 아파한다는 의미이다. 이제는 다시 합쳐야 한다. 설령 통일이 된 후에 남과 북이 두 손 꼭 잡은 채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통일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이 지긋지긋한 사대주의 험산준령을 언제까지 정처 없이 헤매며 방황할 것인가? 

필자가 어떤 목적에서 북을 방문했으며 어떻게 북을 이해하며 어떤 관점에서 받아들이고 평가하느냐에 따라 일거수일투족, 언행심사는 이념적으로 상당한 오해와 논쟁을 유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분단된 땅을 조국으로 삼고 있는 이민 목회자로서 이념적 위치와 서술방향보다 더 중요하게 가치 기준을 두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2천 년 전 역사적 예수가 실제로 살아왔던 치열한 삶과 가르침에 의한 인간의 존엄과 권리 그리고 자주와 평등을 계속해서 이 시대에도 실현하고 계속 이어가는 것이다. 

남측과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들의 북을 향한 매도는 해가 갈수록 극에 달하고 있는 비극적 현실 속에서도 필자는 가능하면 저들의 무지와 편견을 극복하고자 “우리는 과연 북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가? 우리는 과연 북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을까?”를 염두에 두고 비교적 솔직하고 객관성 있게 글과 말로서 증언해왔다. 특히 남쪽 사회에 만연한 반북논리나 친북논리 같은 양극단에 치우친 편파적인 논리가 아니라 민족의 앵글로 자연스럽게 남북을 동일선상에서 바라보며 북을 따듯하고도 냉철하게 해석하며 이해하고자 했다. 

종국에는 남과 북이 고귀한 하나의 민족성원으로 완전한 회귀를 하는데 일조하기 위해 앞으로도 기회가 주어지는 범위 안에서 북의 인민들과 함께 웃고 울고, 밀고 당기며, 소통하며 공감하여 그 소식을 널리 알릴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 문제를 남과 북과 해외동포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힘을 합쳐 통일 지향적으로 나갈 수 있을까에 대한 방향을 모색할 것이다. 

분단시대를 마감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통일 해법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자주력’과 ‘주권’이라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그것을 기준삼아 글을 쓸 것이다. 자주와 주권 운운하면 북의 일방적 주장을 따라하는 것이라고 매도하지 말라. 삼척동자도 다 아는 것을 누가 가르쳐야 알 수 있단 말인가?

현재 남측의 위정자들과 통일전략가들은 주로 ‘대세론’, ‘국익론’ 등을 정책으로 내세우고 있으나 그들이 유념해야 할 것은 모든 것에 앞서는 것이 바로 외세를 배격하고 활용하여 자주적인 민족통일을 이룩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당위성이고 절대가치이다. 이것 말고 그 어떤 것도 우선시 될 수 없다. 미국의 눈치를 보고 미국의 시각에서 해석된 ‘현실론’만을 따르거나 국내정치와 국제정치의 흐름에 따른 ‘대세론’, ‘국익론’을 따르면 우리 미래에 더 이상 통일은 없다. 대세가 불리하고, 현실이 어려워도, 국익을 해치는 한이 있더라도 자주적인 통일이 절대 우선시 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보잘 것 없는 나의 글들이 민족화해와 자주통일의 방향을 고민하는 작은 증언이 되기를 원하며 필자가 어느 이념적 입장을 취하든지 독자들이 함께 고민하는 심정으로 끝까지 읽어봐 주시길 바란다. 나의 이념은 마치 외줄타기를 하듯 남과 북과 미국, 이 세 나라들이 지니고 있는 이념의 경계선을 위반하지 않으려고 아슬아슬하게 걸어왔던 짬뽕에 불과하다. 

생애 첫 방문이든 수십 차례의 방문이든 이북 땅을 밟는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알 수 없는 흥분과 기대감, 그리고 적당한 긴장감을 매번 제공해줌과 동시에 우리들의 돌덩이 같은 잘못된 고정관념들이 산산이 부서지고 깨지는 경험도 하게 될 것이다. 남측 동포들이 북을 가고 싶어도 마음대로 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름 북을 가고 싶을 때마다 제때 드나드는 재미동포의 특혜보다는 그에 따른 사명감과 도의적 책임감의 무게가 몇 갑절로 어깨를 억누른다. 

오늘부터 다시금 북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사회, 종교 등 다양한 분야의 방북 이야기를 시리즈로 다루게 될 것이다. 첫 번째는 만수대 언덕을 몇 차례 오르며 그곳에 건축되거나 조성된 갖가지 건축물들과 조형물 등을 참관하고 시민들을 만나본 이야기를 심도 있게 나눌 것이다. 중복을 피하기 위해 다음 주부터 만수대의사당, 만수대 대기념비, 조선혁명박물관 참관기를 순서대로 정리하고자 한다. / 필자 주

 

▲ 만수대 언덕 맞은편 산 정상에서 바라본 만수대 언덕 전경. [사진제공 - 최재영]
▲ 구글 인공위성 지도에 나타난 만수대 언덕 전경. [사진제공 - 최재영]

 

만수대 언덕의 역사적 유래
    
필자는 ‘4월의 봄’을 맞이해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진달래, 개나리, 벚꽃들이 만발한 평양 만수대 언덕을 찾았다. 이북의 수도는 현재 평양이다. 나는 언덕을 오르며 “김일성 광장이 ‘평양의 머리(두뇌)’라고 한다면 만수대 언덕은 ‘평양의 심장’이다”라는 생각을 얼핏 했다. 평소에도 북의 인민들이 그토록 신성시하여 구별하는 성역과도 같은 언덕이기 때문에 ‘이북의 심장’ 혹은 ‘사회주의의 심장’이라고 표현해도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닐 것 같다. 

사실 평양은 볼거리가 많은 유서 깊은 도시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과거 고구려의 수도였고, 여러 역사적 유적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2004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구려 고분군 외에도 을밀대(乙密臺), 평양성(平壤城) 그리고 평양 인근에 새로 개축된 단군릉(檀君陵), 동명왕릉(東明王陵) 등은 북에 남아있는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들이다.

나와 동행한 안내원으로부터 ‘만수대(萬壽臺)’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 설명을 들어보니 평양시민들은 만수대의 옛 지명을 ‘장대(將臺)고개’, ‘장대현(將臺峴)’, ‘장대재’라고 불렀다고 한다. 예로부터 ‘장대’라는 말은 ‘높은 곳에서 장수들이 성곽 일대를 한 눈에 바라보며 군사들을 지휘하는 지휘소’를 말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평양의 군사 지휘소가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며 이런 종류의 ‘장대’는 평양에도 여러 곳이 있다고 한다. 안내원은 “현재 옥류교 인근 대동문 근처 대동강변 절벽 위에 축조된 ‘련광정(練光亭)’도 마찬가지인데 이 련광정은 고구려 평양성의 내성 동쪽의 ‘장대(將臺)’였던 곳이다”라고 알려주었다.

이처럼 예로부터 민가나 관청에서 친숙하게 부르던 이곳 장대재는 행정적으로 여러 차례 지명이 바뀌면서 현재 ‘평양시 중구역 만수동’에 편입되어 있다고 한다. 필자가 글을 보충하기 위해 지명관련 전문서적을 살펴보니 이곳이 옛날에는 ‘영문리(瑩門里)’였는데 1946년 평양이 평양특별시로 승격되면서 ‘영문리’가 ‘중구’로 편입되며 ‘영문동(瑩門洞)’이 되었고, 1960년에 이르러서는 ‘영문동’을 ‘만수동(萬壽洞)’으로 개칭하였고 그 후 1992년부터 현재까지 중구역 산하에 편입되어 내려오고 있었다.

또한 필자가 확인하고 연구한 바에 의하면, 역사적인 3.1운동 당시 평양에서 독립선언문이 가장 먼저 낭독된 곳이 바로 이곳 만수대 언덕(당시 장대현 교회당)이었다. 3월 1일 당일에 전국에서 제대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곳은 서울 파고다공원을 비롯해 7개 지역에 불과하였고 그 중에서도 시간적으로 제일 먼저 항일의 불을 제대로 지른 곳은 바로 평양이었다. 지역별로 보면 서울 한 곳을 제외한 여섯 개 지역(함남 1, 평남 3, 평북 2)이 모두 이북이며 그중 평양이 세 곳이었다. 평양지방 3.1운동 거사에 대한 기록(국가보훈처 발행, 독립운동사 제2권)에 의하면, 평양시내에서의 3.1 만세 시위운동은 세 곳에서 시작되었으며 가두에서 합류하여 전 평양시가지를 휩쓰는 큰 형세를 이루었다. 

평양의 3.1운동을 주도한 세 곳은 장로교 중심으로 평양숭덕학교(崇德學校) 교정에 모인 만세 집회, 광성학교(光成學校) 근처에 있는 감리교의 남산현교회(南山峴敎會) 뜰 안에 모였던 감리교 중심의 만세 집회, 그리고 평양시내 설암리(薛岩里)에 있는 구 대성학교(舊大成學校) 뒷자리 천도교구당(天道敎區堂)에서의 천도교 중심의 만세 집회였다. 이처럼 장로교, 감리교, 천도교 3파가 사전에 거사계획, 선언서 수령 전달 등을 긴밀하게 약속한 것을 실천했고 실제로 선언서 낭독, 연설, 만세제창 등을 이행하였다.

또한 파고다공원과 동시간대에 독립선언문을 가장 먼저 평양에서 낭독한 곳이 바로  평양에서 제일 큰 장로교회였던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 앞마당이었다. 그 교회당이 있던 자리가 바로 지금의 이곳 만수대 언덕에 자리 잡은 만수대의사당 바로 옆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사실은 해방 직후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 출석했던 박용옥 전 국방부차관(예비역 육군 중장)이 1992년 9월에 개최된 제8차 남북 고위급회담 대표로 평양을 방문했을 당시 인민군 차수 김광진으로부터 직접 확인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고 한다. 이와 같이 만수대 언덕은 역사적으로 살펴 볼 때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이 장면은 평양 장대현교회당이 건립되던 해인 1900년에 촬영된 모습이다. 현재 만수대의사당 부근 언덕에 세워졌다. 교회당 아래는 초가와 사립문으로 조성된 민가들과 골목길들로 형성된 마을이 보인다. [사진제공: 강정훈 전 조달청장] 
▲ 서울 파고다공원과 동시에 평양은 이곳에서 3.1독립선업서가 낭독됐다. 이 장면은 평양대부흥운동으로 인해 가장 왕성한 시기였던 1907년에 찍은 사진이다. 장대현교회당을 배경으로 장년, 여성 신자들과 여학생 등이 모여 단체사진을 찍었다. 아래 사진과 비교하면 남성 신자들보다 수적으로 열배 이상 많아 보인다. [사진제공: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 이 장면은 2년 후인 1909년에 찍은 사진으로 장대현교회당 마당에 모인 남성 신자들의 모습이다. 당시는 남녀 신자를 구별하기 위해 ㄱ자형으로 지어졌는데 중앙 좌측은 남자 칸, 우측은 여자 칸으로 사용해 남녀가 상면하는 일이 항상 없도록 했다. [사진제공: UCLA 옥성득 교수]

 

북 인민들의 마음의 고향, 만수대 언덕을 오르다
    
필자를 비롯해 누구든지 북을 방문하는 손님들이 평양시내로 들어오면 가장 중심지인 만수대 언덕을 지나치거나 근접거리에서 쉽게 바라 볼 수 있다. 그동안 만수대 언덕은 북 인민들에게 있어서 정치, 사회, 문화, 사상의 중심지였다. 그러다보니 ‘만수대TV’, ‘만수대예술극단’, ‘만수대 대기념비’, ‘만수대 의사당’ 등의 기관과 단체들의 명칭이 앞 다투며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북의 인민들에게 있어서 “만수대는 곧 김일성 수령과 관련된 신성한 장소”라는 공식이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민들에게 있어서 만수대 언덕은 마치 기독교 신자들에게 있어서 갈보리 언덕(골고다 언덕)과도 같이 여기지는 곳이다. 갈보리 언덕은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 그곳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곳이며 그 후부터 그 언덕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인류구원의 진리가 태동된 상징적인 성지로 여겨지고 있듯 평양시민들에게 있어서 바로 그런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평양시는 이른바 ‘혁명의 수도’가 된지 이미 오래다. 그런 도시 가장 한복판 노른자 위에 위치한 언덕이다 보니 북의 여러 가지 정치적 기능과 이념적 상징물인 기념탑, 박물관, 건물, 동상 등이 즐비하게 조성되어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언덕 좌측에는 ‘민의(民意)의 전당’으로서 만수 대의사당과 그 부속건물들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고, 언덕 꼭대기에는 조선혁명박물관이 산뜻하게 재단장한 모습으로 엄청난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동강 방향의 박물관 벽면에는 백두산 정상과 천지 그림이 은은한 모자이크화로 그려져 있으며 그 배경을 뒤로 하고 만수대 대기념비가 양 옆으로 세워져있었다. 

대기념비의 좌측에는 엄청난 숫자의 군인들을 형상화한 ‘항일혁명 투쟁탑’이, 우측에는 ‘사회주의혁명 및 사회주의 건설탑’이 세워져있는데 모두가 인민들의 항일혁명과 사회주의 혁명 투쟁사를 집대성하여 보여주는 역동적인 내용이었고 얼핏 보아도 매우 수준 높은 예술 작품들이었다. 박물관 벽면을 배경으로 좌우에 세워진 기념비 정중앙에는 우리가 언론에서 자주 접했던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거대한 입상이 세워져 있는데 그 웅장한 크기와 황금빛 찬란함 그 자체만으로도 보는 이들을 압도하였다. 

언덕 좌측 아래 코너에는 원형으로 된 초현대식 인민대극장(人民大劇場)이 신축되어 운영 중에 있었고 대로변을 한참을 달리면 언덕이 끝나는 지점 맨 끝자락에 천리마 동상이 조성되어 있었다. 만수대 언덕의 모든 건축물과 조형물들은 하나같이 그 스케일과 규모가 크고 현대적 디자인으로 축조되어 있어 역사성과 예술성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건축물과 시설들은 지금까지 주로 사상교육을 위한 도구로 활용되어 왔다고 볼 수 있는데  최근 들어 이 만수대 언덕 구역 안에는 해맞이식당을 비롯해 인민의 휴식처와 상업적 목적의 기능도 갖추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휴식이나 상업적 목적보다는 아직까지도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와 체제의 우수성 등을 교육하고 선전하는 필수 정치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여겨졌다. 

▲ 만수대 언덕 동상 진입로 동산에 활짝 핀 벚꽃 나무 아래서 잠시 포즈를 취한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 인근 창전거리 아파트에 거주한다는 귀여운 어린이들이 만수대 언덕을 찾아 왔길래 필자와 셀카를 찍은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만수대 언덕에서 솟아나는 역동적인 기운들

만수대 언덕은 지리적으로도 평양 한 복판인데다가 맑은 날이면 서해바다까지도 바라 볼 수 있는 곳이라 하니, 북 최고의 중심지가 될 만한 명당 터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바라본다면 만수대 언덕은 그야말로 천혜의 조건을 모두 겸비한 것으로 보여졌다. 대도시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정상이 50~60 미터의 적당한 높이로 형성된 이 언덕은 그 시작 능선이 정상을 향해 편안하게 거슬러 오르다가 힘들이지 않고도  어느새 가뿐히 도달하는 형국이었다. 이뿐 아니다. 1년 365일 양지 바른 곳에 위치해 있고 언덕 앞에는 대동강이, 뒤편으로는 보통강이 흐른다. 이처럼 동산(야산) 앞뒤에 양강(兩江)이 흐르는 명당자리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평양시내 김일성 광장에서 만수대 언덕으로 접근하다보면 좌측으로는 ‘만수대거리’, 우측으로는 ‘안상택거리’가 있으며 언덕 앞에는 ‘승리거리’, 뒤편에도 보통강을 따라 이름 모를 거리가 길게 조성되어 있었다. 김일성 광장 주석단 바로 앞을 가로지르는 대로 이름이 ‘서문거리’인데 그 도로는 만수대언덕 하단부 지점까지 올라가다가 만수대 의사당과 인민대극장 사이를 경계로 나눈 후 끝이 난다. 만수대 언덕을 한 바퀴 돌아보려면 우선 보통강변에 인접한 오거리에서 출발하여 ‘만수대거리’를 따라 가다보면 의사당 부속건물과 의사당 본관을 지나 ‘승리거리’와 맞닿는 코너에 위치한 인민대극장을 지나 좌회전하면 첫 번째 고급 유리로 건축된 휴식건물과 봉사관, 해맞이식당과 초현대식들이 연이어 나타난다. 

이어서 만수대 대기념비와 동상 앞을 지나면 언덕의 맨 끝 자락은 천리마 동상으로 마무리 된다. 이 ‘승리거리’는 인민극장에서부터 천리마 동상까지 꽤나 길게 조성되어있는데 평양학생소년궁전, 조선혁명박물관, 인민극장, 천리마동상 등을 일직선으로 두고 있어 중심 번화가로서 뿐 아니라 최신 유행을 선보이는 ‘서울의 명동’ 혹은 ‘서울의 강남거리’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한 지리적 조건을 갖췄으며 특히 해맞이식당의 쇼핑몰과 커피숍에는 서울 압구정도 번화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옷차림을 한 평양시민들과 젊은이들이 출입하며 여유로움을 즐기고 있어 깜짝 놀랐다. 

서방세계의 국회의사당 격인 만수대의사당에는 최고인민회의 양형섭 부의장과 김영남 의장을 접견하기 위해 자국의 방문객들은 물론 해외 방문객들, 특히 각국 외교관들과 사절들, 국가 수반급 정상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었고 김일성, 김정일 두 지도자의 거대한 동상이 세워져있는 만수대 대기념비 앞에는 이제 막 가정을 꾸린 신혼부부들이 줄지어 찾아와 동상 앞에 서서 엄숙하게 꽃다발을 올리고 참배하는 모습도 자주 목격할 수 있어 언덕은 매우 역동적인 광경을 보여주었다. 

머리에 꽃단장을 한 어여쁘고 수줍어하는 신부와 양복 정장을 갖춘 의젓한 신랑이 꽃다발을 맞잡고 동상 앞에서 다정스런 자태로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을 보니 생명의 기운을 뿜어내는 듯했다. 신혼부부가 동상을 참배하고 결혼식 기념사진을 찍는 것은 자발적인 행동들이었다. 동상을 찾지 않는다고 해서 강제성을 띠거나 법적으로 위반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혼을 앞둔 북의 청년들과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두 지도자의 동상을 참배하는 정서는 이미 사회윤리화 되었고 통념화 되었다. 또한 신혼부부뿐 아니라 각계각층의 남녀노소 수많은 인민들과 해외 관광객들의 발길이 연이어 끊이지 않고 동상을 찾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조선혁명박물관 앞에는 김일성 주석의 항일투쟁 일대기부터 시작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개국까지의 과정과 그 이후의 과정 등을 유물과 함께 섹션별로 전시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개건공사를 마치고 새롭게 단장을 하여 참관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방문객들 대부분이 학생과 근로자, 군인 등 단체 관람이 많았으며 외국 방문객들도 많이 보였다. 그뿐 아니라 언덕 여기저기에는 모처럼 연인끼리 친구끼리, 가족끼리, 삼삼오오 찾아오는 시민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이처럼 조용하고 야트막한 언덕에는 새봄을 맞아 역동적이며 진취적인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 방문객들 중에는 참배 후 결혼기념촬영을 하는 커플들이 서너 쌍들이 항상 보인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승리거리에서 바라본 만수대의사당(좌)과 인민대극장 일부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의사당 앞에서 바라본 원형으로 건축된 인민대극장. 초현대식 설비와 최고급 음향, 조명, 장식 등을 갖추고 운영 중에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만수대언덕 모퉁이에서 승리거리로 진입하면 시민들의 휴식시설과 해맞이식당 등이 나온다. [사진제공 - 최재영]
▲ 필자를 태우고 승리거리에서 천리마탑을 향해 주행 중인 차량이 만수대 언덕 대기념비와 동상 앞을 지나가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제1금릉동굴 인근에서 바라본 천리마 동상. 천리마동상 위치가 만수대 언덕이 끝나는 지점이다. [사진제공 - 최재영]

 

분단 시대, 만수대언덕은 북 인민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꽃구경을 하며 언덕을 거닐고 있노라니 두 손에 꽃다발을 공손히 들고 여기저기서 찾아오는 인민들을 쉽게 마주치게 된다. 그럴 때 마다 그들의 얼굴과 가슴속에는 두 지도자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들을 지니고 있는 듯 얼굴에 나타나 있다. 각자 나름대로 생존 시의 지도자들과 맺어진 갖가지 사연들을 연상하며 기억을 떠올리는 듯 보였다. 무엇인가 차분하게 생각하면서 숙연하고 정숙한 마음으로 언덕을 찾는 인민들을 바라보니 이곳은 ‘사색의 언덕’이며 ‘그리움의 언덕’이자 ‘추모의 언덕’이라고 여겨졌다.

또한 언덕을 산책하다가 평범한 시민들을 마주치노라면 그들의 모습에서 왠지 순수한 인간적 면모와 인간애를 엿볼 수 있었다. 그들이 사람을 대하는 느낌부터가 달랐다. 그래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나와 얼굴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몇 마디라도 소소한 대화를 하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필자는 언덕에서 뛰노는 아이들과 노인들, 아낙네, 청년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많이 나눌 수 있었다.

평양시민들에게는 이 언덕이 시리고 아픈 사연이 깃들어 있다. 폭풍한설 몰아치는 매서운 어느 겨울날, 지도자를 잃고 몸부림치며 얼어붙은 가슴을 움켜쥐고 땅을 치며 울부짖었던 기억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은 ‘통곡의 언덕’이다. 얇은 옷을 걸친 채 손에 장갑도 끼지 않고 털썩 주저앉아 꽁꽁 언 땅을 내리치던 평양시민과 병사들이 흘렸던 ‘눈물의 언덕’이었다. 영구차가 시가지와 이 언덕 앞을 지나갈 때, 거리마다 내리는 폭설을 치우고 쓰는 것도 모자라 도로위에 자신들의 외투와 목도리를 벗어 바닥에 깔기도 하고 자신들의 외투를 동시에 벗어 펼쳐 들며 도로위에 내리는 눈을 막았던 ‘통한의 언덕’, ‘회환의 언덕’이다. 

이제 이 야트막한 언덕에도 봄기운이 가득 내려앉으니 길 건너 차디찬 대동강에는 물안개 가 피어오르고, 언덕에는 꽃과 잔디와 나무와 식물들에 싹이 돋고 꽃이 피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곳은 더 이상 숨 막히게 휘몰아쳐온 역사의 비바람과 눈보라를 맞은 음산하고도 매서운 ‘폭풍의 언덕’이 아니다. 제국주의자들의 비열하고도 집요한 제재와 악랄한 고립 압살정책 그리고 연이어 닥쳐온 비극적 자연재해까지도 굳건하게 견뎌왔던 ‘희망의 언덕’이요, ‘승리의 언덕’이며 ‘강철언덕’이었다.

하늘과 땅이 맞닿는 듯한 심오한 분위기가 감싸고 있는 이곳은 인민들 심장의 불을 지펴주는 용광로 같은 ‘활화산 언덕’이며 새 역사를 노래하는 ‘전진의 언덕’이며 세상을 놀라게 하는 기적들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창조의 언덕’이며 질풍노도 내달리는 영원한 ‘천리마 동산’이었다. (계속)

▲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동상 참배를 마치고 삼삼오오 내려오는 평양시민들. [사진제공 - 최재영]
▲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동상참배를 위해 꽃다발을 들고 정숙한 마음으로 언덕을 오르는 남녀 평양시민들. [사진제공 - 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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