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저는 오랜 기간 학생운동, 통일운동에 참여한 바 있습니다. 2012년부터는 사회운동을 접고 수학 강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현재 주요 관심사는 한국 수학교육을 혁신하는 것입니다.

5년 정도 일선 교육현장에서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전업활동가로 일할 때와는 사뭇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수학이나 과학, 첨단 과학기술을 접하면서 새로운 시각도 갖게 되었습니다.

촛불이 있었고 신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촛불과 신정부 출현은 또 한 번의 정권교체라기보다는 어떤 시대의 종말과 시작 같은 것으로 느껴집니다. 개인적으로는 1970년대 초반 대도시에 출현한 청년 인텔리들의 꿈과 염원이 실현된 것으로 봅니다. 익숙한 표현을 빌리자면 386세대가 시대의 주역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면서 우리가 당연히 생각하고 있는 문제들을 검토해 보는 것도 유익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수학 선생으로 일하면서 갖게 된 이런 저런 생각들을 격식 없이 적어 볼까 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보는 색다른 시선’ 정도로 너그럽게 봐주시길 바랍니다. / 필자 주

          

                                                      1

‘김빠’가 있었다. 김대중의 열성 지지자들을 지금의 용어를 빌려 말한다면 김빠이다. 김빠는 1990년대 한국 민주화 국면을 주도했던 주역이다.

1987년 6.29 선언 직후인 9.8 김대중 대통령이 광주를 찾았다. 광주 전체가 철시하다시피 하며 김대중을 맞았다. 고난의 시절을 함께 했던 비운의 정치인과 서리서리 쌓은 호남의 분노가 만났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성급했다. 김대중의 행보는 6.29 선언 이후 양김씨의 연대를 해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6월항쟁을 주도했던 부산의 반발이 문제였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 것은 10.8 부산이었다. 김영삼은 부산 수영만을 찾았고 수영만에는 100만이 넘는 인파가 운집했다. 한국 정치사상 가장 많은 인파일 것이다. 이로써 양김씨는 돌이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그렇게 대선은 양김씨의 분열과 패배로 이어졌다.

1992, 1997년 선거는 기묘했다. 사람은 경험으로부터 배운다. 선거 막판까지 호남은 조용했다. 열성적인 김대중 지지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들은 말을 삼가며 칼을 갈고 있었다. 그들이 우려했던 것은 호남이 나서면 영남이 역결집한다는 점이다.

선거 막판까지 침묵을 지키던 호남은 선거 당일 조용히 투표장을 찾아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정말 강한 자는 소리가 없는 법이다. 지휘부와 조직이 있던 것도 아니다. 지휘부와 조직이 있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5.18을 거치며 집단적으로 합의한 보이지 않는 정치적 저력이었다.

1997년 그렇게 민주정부가 탄생했다. 97년 대선은 무수한 우연과 절묘한 타이밍이 결합되어 탄생한 정치드라마였다. 이인제가 500만표를 갈라 먹고 DJP 연합을 하고도 간신히 이겼다. IMF로 발생한 보수의 몰락도 한몫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한국의 이른바 ‘빠’ 문화를 개척했던 호남 시민의 위대한 자제와 소리 없는 헌신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한국의 새 역사를 열었다.

                                                  2

‘노빠’도 있다.

1990년 김영삼이 3당 합당을 하자 노무현은 이를 거부하며 부산에서 민주화 운동의 교두보를 지켜냈다. 노무현이 지켜낸 영남의 불씨가 없었다면 오늘날 영남, 나아가 한국은 다른 길을 걸었을지 모른다.

2002년 대선, 사람들은 노무현으로 결집했다. 2002년만 해도 정치의 주류는 정치적 이해관계로 얼룩진 그들만의 리그였다. 당장 민주당 대선 경선도 대세는 이인제였다. 노무현은 전통 민주당에 시민적 활력을 불어 넣으며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었다.

선거 막판 이회창에 맞선 노무현-정몽준 간의 후보 단일화가 추진되었다. 선거 전날 정몽준 후보가 지지를 철회하자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선거 막판 벌어진 경천동지할 변화에 온라인에서는 운명을 좌우할 격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지휘부도 없고 조직도 없다. 누군지 알 수 없는 무수한 포스팅과 댓글을 거치며 활화산처럼 정치적 열기와 의견이 분출되었다. 그리고 이는 점차 하나로 모아지고 있었다.

“정몽준의 배신, 노무현으로 결집하라”

이 무언의 결론을 쥐고 투표 당일 오후 늦게 젊은 층이 투표장을 찾았다. 그렇게 대법관 출신의 이회창은 부산상고 출신의 노무현에게 무너졌다. 온라인을 배경으로 한 집단 지성이 정치적 이해관계로 얼룩진 한국 정치구조에 파열구를 낸 것이다.

                                                 3

'문빠'는 어떨까?

계기는 대통령의 중국 방문이다. 중국의 홀대 여부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고 서민 교수의 날선

비판으로 이어졌다. 중국의 홀대 여부는 관심사가 아니다. 본 글의 관심은 시점이다. 다음의 두 가지 점에서 문빠 논쟁은 어떤 정치적 변곡점을 시사한다.

첫째는 북핵 위기에서 한국의 입지다.

북핵을 둘러 싼 북미, 북중, 미중의 갈등은 임계점을 넘어섰다. 이제는 모종의 결단 국면으로 넘어갔다. 문제는 대한민국이 적폐청산으로 시간을 보내며 북핵 위기를 미봉책으로 모면해 왔다는 점이다. 중국 방문은 운신의 폭이 없는 정부의 외교적 입지를 시사한다. 정부는 진실의 순간을 대면하고 있다.

국내에서 고만고만한 정치세력을 상대로 승승장구하던 문빠도 조만간 그들이 직면한 현실을 보게 될 것이다. 댓글이나 집회 참여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총칼이 오가는 정치게임에서도 지금처럼 행동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들도 경험을 통해 배워야 한다. 1992, 1997년 정치적 약자였던 호남 시민이 부족한 자원을 극대화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구사했던 위대한 침묵 말이다.

둘째는 문재인 지지기반의 이완이다.

문재인 정부의 장기 고공 지지를 견인했던 것은 적폐청산과 거기서 수반된 카타르시스였다. 나는 이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필요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민주화 세대는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제는 적폐청산도 어느 정도 윤곽을 잡고 있다. 대통령의 중국 방문과 서민 교수의 문제제기는 적폐청산 국면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발생했다. 사람들은 적폐청산 이후에 대해 묻고 있다.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에 대한 호불호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정직한 대면과 책임 있는 결단이다. 그런데 문빠는 대통령에 대한 좋고 싫음을 기준으로 정치를 가르잔다.

                                                  4

문빠의 행동은 문재인 정부가 출현하는 과정에서 배태된 경향과 맥을 같이 한다.

2012년 대선 이후 한국 정치는 극적으로 후퇴했다. 박근혜와 최순실의 관계는 주술로 설명이다.

지금의 범여권은 역사와 사회경제적 문제에 집중했다.

레미제라블, 암살, 군함도, 귀향, 홍길동, 육륭이 나르샤... 이들 모두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결국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원래 나쁜 놈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몰아내야 한다는 점이다. 반면 현재는 어떠하고 국민이 그들을 선택해야할 이유에 대한 설명은 누락되었다.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한 관심도 유사하다. 나는 민중이나 혁명을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들의 경제조건을 따지는 버릇이 생겼다. 연봉은 얼마이고 차는 뭘 타고 다니며 아파트는 몇 평이고 은퇴 후 연금은 얼마인가?

이른바 강남 좌파의 '내로남불'은 언행일치의 문제가 아니다. 객관현실과 신념 체계 사이의 심각한 괴리 현상이 상황의 본질이다. 말끝마다 혁명이고 민중이지만 그건 그들의 진심이 아니라 청년시절부터의 습관이다.

이들 모두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현실과 정직하게 대면하지 않는 어떤 경향, 즉 신비주의다. 문재인 정부의 서사에 유독 역사나 민중·혁명과 같은 거대 담론이 많은 것도 같은 이유이다.

사실 문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문빠 자체로만 보면 그냥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정작 심각한 문제는 문빠가 간직한 기형적인 체질과 문화를 문재인 정부가 체현하고 있는 점이다.

                                                   5

결론을 내려 보자.

2012년 대선이 있었다. 선거는 박정희의 딸과 노무현의 비서실장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선거 이후 박근혜 정부는 주술적 경향을 보이며 한국사회를 나락으로 몰고 갔다. 반면 범여권은 역사와 사회경제적 의제를 중심으로 선거에 대응했다. 그리고 정치 외곽에서 음모와 팬덤으로 무장한 일군의 사회세력이 출현했고 이들이 청년과 여성을 장악했다.

촛불은 뜻밖의 사건이었다. 민주당은 어떻게 대응할지 몰랐다. 다행히도 보수세력이 자멸하면서 무주공산의 정치공간이 열렸다. 정확히 말하면 문재인 정부는 촛불을 계승한 정권이 아니라 촛불에서 비롯된 정치공간에서 승리한 세력이다.

대선 이후 장기간 적폐청산 국면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는 민주화 세대 전체의 광범위한 지지를 동반하며 문재인 정부의 고공지지를 견인했다.

적폐청산 또한 결국 과거의 문제다. 과거 유산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보수세력이 자멸한 조건에서 특별한 정치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자동적으로 해결될 문제였다.

만약 내가 책임 있는 자리에 있었다면 다른 길을 제안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조치와 논의가 필요했다. 첫째, 북핵을 용인하는 새로운 국제질서가 가능한가? 둘째, 다당제와 같은 정치적 실험은 가능한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과학기술인과 여성·청년들의 파격적인 발탁은 가능한가? 셋째, 정규직 고용의 유연화를 포함한 전반적인 노동개혁은 가능한가?

사실 문재인 정부의 체질을 고려하면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대통령의 중국 방문-서민 교수의 비판-문빠들의 행동에서 드러난 것은 이들에게서 현실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용기 있게 극복하려는 태도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