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저는 오랜 기간 학생운동, 통일운동에 참여한 바 있습니다. 2012년부터는 사회운동을 접고 수학 강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현재 주요 관심사는 한국 수학교육을 혁신하는 것입니다.

5년 정도 일선 교육현장에서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전업활동가로 일할 때와는 사뭇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수학이나 과학, 첨단 과학기술을 접하면서 새로운 시각도 갖게 되었습니다.

촛불이 있었고 신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촛불과 신정부 출현은 또 한 번의 정권교체라기보다는 어떤 시대의 종말과 시작 같은 것으로 느껴집니다. 개인적으로는 1970년대 초반 대도시에 출현한 청년 인텔리들의 꿈과 염원이 실현된 것으로 봅니다. 익숙한 표현을 빌리자면 386세대가 시대의 주역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면서 우리가 당연히 생각하고 있는 문제들을 검토해 보는 것도 유익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수학 선생으로 일하면서 갖게 된 이런 저런 생각들을 격식 없이 적어 볼까 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보는 색다른 시선’ 정도로 너그럽게 봐주시길 바랍니다. / 필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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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문제가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2018년 우리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살게 될 것 같다.

북핵은 외길이었다. 북핵 문제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북한의 태도이다. 북한은 핵 개발 의사를 숨기지 않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4월 14일 한성렬 외무성 부상의 다음 인터뷰가 압권이었다.(https://www.youtube.com/watch?v=azI7bnkj7fc)

‘미국이 선택한다면 전쟁을 하겠다’ 북한의 수사에 어지간히 익숙한 나도 TV에서 보는 북한의 입장은 섬뜻했다.

북한의 입장을 상수로 본다면 선택의 폭은 거의 없다. 전쟁, 전격적인 협상, 정치군사적 대치, 북한의 붕괴 등인데 지금이라면 한국의 개입 여지가 별로 없다.

북핵 문제의 해결 과정과 맞물려 남북관계가 부상한다. 이른바 통미봉남은 황당한 이야기다. 북한은 미국과의 문제가 가닥을 잡는 순간 곧바로 남북관계를 제기한다.

1970년대 초반 미중 수교와 7.4 공동성명, 1994년 카터 방북과 정상회담 제안, 2000년 6.15 공동선언과 북미 고위급 회담 등이다. 당장 2018년 신년사가 주목의 대상이다.

나는 20년 이상 가까이 통일문제에 관여했다. 한국이 한반도 문제를 주도하려면 한미동맹을 유지하면서도 남북이 협력할 수 있는 독자공간을 열어야 한다. 1991년 남북합의서, 2000년 6.15 공동선언 등이 모두 그러했다.

지금까지 문재인 정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럼에도 북한은 언젠가 남북대화를 제기할 것이다. 대화가 시작되면 평창 올림픽 참가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남북관계를 주로 인도적, 경제협력과 연관 짓는 경향이 있지만 북한은 남북관계의 기본 틀을 중시한다. 정작 통일문제 등을 정면에서 제기했을 때 우리는 어떤 준비가 되어 있는가? 가령 핵을 보유한 북한과의 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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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개월간 북한의 연쇄적이고 파상적인 공세가 이어졌다. 이전 과정에서 이해하기 어려웠던 두 명의 리더는 트럼프와 문재인 대통령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행보와 발언은 당황스러웠다. 북한의 미사일, 핵실험 때마다 NSC를 소집하고 군사적 대응을 지시했다. 그러면서 극한의 제재를 통해 북한을 비핵화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은 본인이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거나 지나쳤다. 한미동맹을 말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독자 공간을 고민했던 김대중-노무현과 많이 달랐다.

대통령의 전망대로 될 가능성은 전무하다. 논란의 여지도 없다. 지금은 비핵화가 김일성의 유훈이라며 형식적이라도 대화를 진행하던 1990~2000년대가 아니다. 북한은 핵무력 완성의 종착을 공언하며 대놓고 실험을 하고 있다.

이미 적어도 8개월 이상 전에 핵무력 완성을 종점으로 하는 북한의 시간표는 가동되고 있었다. 북핵문제는 난마와 같이 얽힌 복잡한 고차 방정식이 아니라 시간표와 시험 문제가 알려져 있고 전략적 판단과 정치적 결단만 남은 1차 방정식이었다.

반면 문재인 대통령의 행보와 발언은 이상했다. 미국과 한편에 서서 가망 없는 레토릭을 반복하며 정치적 입지를 좁히고 있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대통령을 제외한 다른 각료나 원로의 발언도 거의 없었다. 내가 아는 한 대통령 방미 직전 문정인 특보와 최근 이해찬의 발언이 거의 전부이다. 통일부, 외교부 장관 등의 존재감도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시종일관 문재인 대통령의 개인적 캐릭터가 북핵 문제를 좌우했다.

제재를 하면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이라는 발상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왜 대통령은 가망 없는 시나리오에 그렇게 집착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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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문재인 정부의 발목을 잡은 것은 촛불과 적폐청산으로 형성된 거대한 운무였다. 사람들은 촛불과 대선, 적폐청산으로 이어지는 국내 정치 이벤트에 취해 있었다. 상황은 거칠 것이 없었다. 변변한 저항 한번 없는 가운데 보수진영의 본당들이 줄줄이 꼬리를 내렸다.

사람들은 도취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어마어마한 촛불의 규모에, 다음에는 구시대의 소탕에... 그러나 그 과정은 총칼 하나 동원되지 않는 무혈 혁명(?)이었다. 골키퍼도 자리를 비운 텅 빈 골대에 골을 넣는 장면과 유사했다.

그렇게 환호하고 기뻐하고 위로했다. 점잖고 매너 있는 대통령의 캐릭터와 청와대의 적절한 연출이 이를 부추겼다. 대선 직후 한국은 촛불 이후의 정국을 논하는 냉정한 전략적 토론보다는 감성적인 이벤트에 열광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좋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다양한 의견을 조율하는 관리형 리더에 가깝다. 반면 북핵은 냉혹한 결단과 정치적 판단을 요구하는 카리스마 있는 강한 리더십을 요구했다. 북핵과 북핵을 풀어갈 리더십 사이의 괴리가 너무 컸다.

문재인 정부의 관심은 민주화와 진보적인 사회경제 정책에 집중되었다. 문재인 정부는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정부로 기록될 것이다. 의문의 여지가 없다.

민주화를 거스를 수 있는 세력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부의 집권철학이 그러하고 정치적 의지 또한 명료하다. 한국은 민주화 이외의 길로 들어 설 수 없다. 한국은 당연히 될 일에 너무 열광한 반면 가야할 길에 너무 인색했다.

이 모든 것에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신념과 정서가 흐른다. 많은 사람들이 결심했다. 노무현을 잃었지만 문재인을 뺐기지 않겠다고... 집권 당국자들 또한 12년 전 노무현 정부의 실패에 갇혀 있다. 부동산, 교육 등에서 서민층이 노무현 정부로부터 이탈했던 쓰라린 기억이 트라우마가 된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북핵 문제는 그저 관리의 대상이었다. 전략적 행보가 결여된 채 어떻게든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으려는 즉자적인 행위가 계속되었다.

한중 정상회담 결과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UN 안보리에서 북한과 미국 사이에 설전이 벌어졌다. 북한은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한 상태에서 회담을 하자고 제안한다. 며칠 전 조건 없는 대화를 제의했던 틸러슨 국무장관은 핵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 아마도 거의 막바지 신경전일 것이다. 대화의 성격을 둘러 싼 논란은 그냥 기싸움에 불과하다.

남은 것은 허망한 요식행위가 끝난 후 미국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이다. 미국에게 남은 거의 유일한 선택은 전쟁이다. 트럼프는 이제 전쟁 카드를 진지하게 고민할 것이다.

같은 시간 한중 정상은 전쟁반대에 합의했다. 대찬성이다. 이것이 기회일 수 있다. 한국정부가 미국의 대북압박에 동의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독자 공간을 갖고 있었다면 이것을 기화로 한반도 정세를 주도할 수 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까지도 미국의 최대 압박과 제재에 함께 했다. 그런데 미국의 최후 결단을 앞에 두고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에 반대한 것이다. 전쟁을 반대한다면 북핵을 용인한다는 뜻인가? 그것도 미국의 경쟁국인 중국에서 말이다.

내가 볼 때 정부와 대통령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건 국제정치와 한반도 문제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않고 국내 정치 이벤트에 집중했던 시야와 관점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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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을 내려 보자.

촛불이 있었다. 촛불은 이미 쓰러져가는 구세력을 간단히 제압했다. 성채와 같이 굳건해 보이던 박근혜 정부는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정치현장에서 퇴출되었다. 앞으로도 역진은 벌어지지 않는다. 구세력의 퇴장에 환호하는 일은 그만하자.

촛불로 발생한 거대한 정치적 공백을 배경으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문재인 정부의 시야는 2005년 보수 세력과 각축했던 12년 전 노무현 정부에 갇혀 있다.

그 사이 세상은 너무 많이 변했다. 결정적인 것은 북핵과 과학이다.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북핵과 과학을 제1의 과제로 두었어야 한다. 적폐청산은 놔두어도 될 일이다. 설사 조금 지체되거나 부족하더라도 큰 문제가 아니다. 사회경제적 개혁도 큰 틀에서 보면 마찬가지다.

반면 정부는 칼을 거꾸로 쥐었다. 적폐 청산이 시간이 지날수록 스러질 과거의 문제라면 북핵과 과학은 시간이 흐를수록 표면화될 미래의 문제이다. 거꾸로 쥔 칼은 문재인 정부의 존립기반을 흔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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