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시선은 권력이다 (푸코)

 
 좀비
 - 황인숙

 지하철이 플랫폼에 들어선다.
 사람들 출구로 몰린다.
 나와 눈이 마주친
 뚱뚱한 아주머니, 뺨이 붉은 아주머니.
 웃던 눈빛이
 움찔, 꺾인다.

 오, 아주머니,
 당신께 아무 감정 없어요.
 당신을 빈정거리지도 않고
 당신 때문에 시무룩한 것도 아니에요.
 당신께 무뚝뚝한 게 아니에요.
 왜 그러겠어요, 제가?

 오, 내 흉한 눈, 죽은 눈.
 생각도 감각도 없이
 바라보는 것을 시들게 하는.


 어느 모임에 갔다가 너무나 슬픈 이야기를 들었다.

 아빠가 거실에 있는 동안 고등학생인 딸이 자기 방에서 자살을 했단다.

 아빠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아빠는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왔는데...... .

 딸을 금지옥엽으로 키웠는데.

 말 한마디 없이 유서 한 장 없이 떠난 딸.

 그런데 그 딸은 정말 아빠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을까?

 그 아빠는 사업을 하는 분이라 자신의 일에 너무나 골몰해 바람결처럼 지나가는 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게 아닐까?

 ‘내 안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그것을 살아 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첫 구절이다.

 우리는 ‘두 세계’ 속에 산다.

 선과 악으로 나눠진 세계.

 싱클레어는 두 세계를 경험하며 데미안을 만나 차츰 두 세계의 통합을 이뤄가게 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아프락사스는 선과 악의 합일을 이루는 신이다.

 아이들은 선과 악이 선명하게 나눠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어른이 되며 선과 악이 하나임을 서서히 알아간다.

 하지만 우리 마음에는 여전히 ‘아이 같은 유치한 마음(세상을 선과 악으로 선명하게 나눠 보는 마음)’이 많이 남아 있다.

 세상을 선과 악으로 선명하게 나눠 보게 되면 선과 악이 뒤섞인 애매모호한 세계는 잘 보이지 않는다.

 특히 세상에서 지식이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일수록 이 애매모호한 세계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자살한 딸은 평소에 아빠에게 애매모호하게 말하지 않았을까?

 너무나 아팠던 딸의 마음이 어떻게 선명하게 나타날 수 있겠는가?

 그 말을 들은 아빠는 아이가 힘든 학창시절이라 그런가보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선과 악으로 선명하게 나눠진 마음은 눈을 통해 어떻게 나타날까?

 그 눈은 어떤 눈이 될까?

 길을 가다 마주치는 사람들.

 눈을 보면 무섭다.

 세상을 선과 악으로 나눠보는 눈.

 마음이 선과 악으로 나눠지면 겉으로는 선을 가장하고 살지만 속에서는 악이 어둠처럼 쌓인다.

 심층심리학자 융이 얘기하는 그림자다.

 내 안에 어두운 또 다른 내 모습 그림자가 생긴다.

 그 그림자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나타난다.

 눈을 통해 나타난다.

 ‘나와 눈이 마주친/뚱뚱한 아주머니, 뺨이 붉은 아주머니./웃던 눈빛이/움찔, 꺾인다.’

 ‘오, 아주머니,/당신께 아무 감정 없어요./당신을 빈정거리지도 않고/당신 때문에 시무룩한 것도 아니에요./당신께 무뚝뚝한 게 아니에요./왜 그러겠어요, 제가?’

 우리는 울부짖는다.

 ‘오, 내 흉한 눈, 죽은 눈./생각도 감각도 없이/바라보는 것을 시들게 하는.’

 시인은 예민하게 아는 사람이다.

 자신의 상한 눈을.

 시인은 한 시대의 감각기관이다.

 시인의 눈이 상했을 진데, 어느 누구의 눈이 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 모두는 좀비다.

 선과 악을 나눠보는 눈은 이미 폭력이다.

 남을 해치는 힘을 가졌다.

 선과 악으로 분열된 삶을 사는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도움으로 자신의 악을 만난다.

 겉으로만 선으로 치우치는 마음 깊이 숨겨진 자신의 악.

 그 악을 만나지 않으면 우리는 진정한 선을 만나지 못한다.

 진정한 선은 ‘자신의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예수)’이다. 

 그래서 우리는 선과 악의 통합으로 나아가야 한다.

 좋은 부모, 좋은 자식,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해.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얼마나 위선적인가!

 요즘 아이들은 도덕 과목을 무척이나 어려워한단다.

 무조건적인 덕목을 강조하는 우리의 도덕 교육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싱클레어처럼 자신의 악을 만나야 (자신 안에서 솟아나오는 것으로) 진정한 도덕을 행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이런 기회를 아이들에게 주고 있는가?

 우리는 언제까지 아이들을 제물로 삼아 겉으로만 번쩍이는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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