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저는 오랜 기간 학생운동, 통일운동에 참여한 바 있습니다. 2012년부터는 사회운동을 접고 수학 강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현재 주요 관심사는 한국 수학교육을 혁신하는 것입니다.

5년 정도 일선 교육현장에서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전업활동가로 일할 때와는 사뭇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수학이나 과학, 첨단 과학기술을 접하면서 새로운 시각도 갖게 되었습니다.

촛불이 있었고 신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촛불과 신정부 출현은 또 한 번의 정권교체라기보다는 어떤 시대의 종말과 시작 같은 것으로 느껴집니다. 개인적으로는 1970년대 초반 대도시에 출현한 청년 인텔리들의 꿈과 염원이 실현된 것으로 봅니다. 익숙한 표현을 빌리자면 386세대가 시대의 주역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면서 우리가 당연히 생각하고 있는 문제들을 검토해 보는 것도 유익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수학 선생으로 일하면서 갖게 된 이런 저런 생각들을 격식 없이 적어 볼까 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보는 색다른 시선’ 정도로 너그럽게 봐주시길 바랍니다. / 필자 주

 

교육 문제의 쟁점 중 하나가 선행학습이다. 심지어 이를 금지하는 법률이 있다. 선행학습 금지는 교육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함축하고 있고 넓게는 민주화 세대의 세계관과도 관련이 있다.

아래에서는 선행학습을 둘러 싼 문제를 몇 가지 측면으로 나눠 검토해 보겠다. 필자의 한계상 수학을 중심으로 논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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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학습 금지는 현행 교과가 학생들의 수준과 처지를 고려하여 잘 설계되어 있고 학교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수학교육의 핵심 문제는 시대에 뒤떨어진 교과이다. 여기에 교수·교사들의 이권이 결합되어 심각한 결함을 갖고 있다. 지금과 같다면 교과와 교육과정을 충실히 이행하는 행위를 교육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여기에 구조적인 문제가 결합되어 학교는 매우 후진적인 곳이 되었다.

공교육의 획기적인 개혁이 필요한데 이는 예산을 늘리고 인원을 증원하는 정도로 해결되지 않는다. 교수와 교사의 기득권, 나아가 학교라는 틀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 나는 선행학습 금지를 논하는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선행학습 금지는 공교육의 근본적인 개혁을 논하지 않고 사교육을 재물로 문제를 쉽게 해결하려는 발상의 산물이다. 덕분에 제대로 시행도 못하고 흐지부지되었다. 오히려 문제는 누구도 믿지 않고 아무런 효력도 없는 이런 발상과 법률이 태어날 수 있었던 배경이다.    

                                                           2.

논쟁의 핵심은 도대체 교육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특히 수학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선행학습 금지를 주도했던 ‘사교육 걱정없는 세상’은 2015 교육과정 개정 취지가 “미래사회에 필요한 역량 개발을 위하여 핵심 성취기준을 중심으로 교과별 학습량을 적정화하고 학생 참여형 수업 등이 가능한 여건을 조성하고 과정중심평가를 실행”(https://www.facebook.com/hiddenbag/?hc_ref=ARTW48nECGExZe81i-3tzUIxPCbYRMF7mR6VwPib1EqWQQArvdVXWjDcC_kvipJ0Xkc)하는 것으로 적시한 후 수학교과서의 내용을 문제 삼고 있다.

환영할만한 점은 교육 콘텐츠를 문제 삼고 있는 점이다. 대부분의 교육단체들이 콘텐츠를 문제 삼지 않고 주변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데 비해 ‘사교육 걱정없는 세상’은 나름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교육 철학은 매우 논쟁적이다. 개정 교육과정 취지는, 첫째 학습량을 적정화하고, 둘째 학생참여·과정중심평가를 중시하고 있다. 이는 ‘사교육 걱정없는 세상’의 주장이 아니라 현 중3부터 적용되는 교육과정의 핵심 기조이다. 즉 교육계 전반의 보편적인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사교육 걱정없는 세상’의 질문은 이 핵심 기조를 긍정하는 기조위에서 일종의 보완적인 문제제기인 것이다.

중고등 교육의 주요 목적은 인류가 쌓아 올린 과학기술적 성과를 단시간 내에 체계적으로 습득하는 것이다. 배워야 할 지식은 그야말로 산더미 더미이다. 그런데 학습량을 적정화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도대체 무언가를 배우는데 어디까지만 배워야 한다는 한계를 두는 것이 무슨 뜻일까?

교육의 본질은 가능한 빨리, 가능한 많이 가르치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에 한계가 있다면 어떤 수준 이하로 가르치는 것이다. 금지해야할 것이 있다면 후행학습이다.

선행학습 금지가 교육현장과 만나면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진다. ‘자음과 모음’ 출판사의 ‘수학자가 만난 수학이야기’라는 책이 있다. 나는 지난 5년 간 이 책들을 재미있게 읽었다. 도서관에 가면 어린이 코너에 있다. 만화책이라 만만하게 보지만 내용 대부분은 선행이다. 대학수학도 그냥 나온다. 초등 5~6학년들이 읽는 책임을 고려하면 책 전체가 선행이다.

그런데 이 책은 권장 도서이다. 이 책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수학 관련 교양도서가 대부분 선행이다. TV를 봐도 그렇다. 눈만 뜨면 크리스퍼가 어떻고 인공지능이 어떻고 최신 첨단 과학의 기술을 소개하고 있다. 선행학습이 문제라면 대졸 아버지 어머니가 자녀들과 나누는 상당수의 대화도 선행이다.

학교 밖의 사회가 이미 선행으로 가득 차 있는데 시대에 뒤떨어진 학교가 수십 년 전 교과서를 부여잡고 선행이라는 부질없는 담론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3.

또 다른 문제는 학생참여, 과정중심 평가이다. 사회 수업은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수학의 경우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특히 학생참여, 과정중심 평가가 어떤 교과와 관련한 특별한 교습 방법이 아니라 교육 철학을 전반을 주도하고 있는 모습은 매우 우려스럽다.

나는 바둑 5급이다. 만약 바둑 10급 10명이 힘을 합쳐 나와 대적하더라도 내가 이긴다. 무조건 이긴다. 마찬가지로 바둑 5급 10명이 협동하더라도 바둑 1급을 넘을 수 없다. 학생이 직접 경험하고 서로 토론하여 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렇지 않는 일이 있는 것이다.

수학은 학생들이 참여와 토론으로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물리·화학 등 대부분의 이과 학문이 그렇다. 고도로 추상화된 지식과 우주를 설명하는 난해한 수학을 학생들이 과정과 협동으로 감당할 수 없다.

따라서 수학과 과학 교육의 기본은 가장 우수한 교사가 잘 정리된 내용을 효과적으로 제공하고 이를 바탕으로 학생들이 더 나은 문제의식을 갖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학생 참여나 과정 중심은 하나의 부수적인 활동 방식이다.

                                                          4.

문제는 이런 경향이 민주화 세대와 그 영향력을 타고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는 점이다.

민주화 세대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과정에 독특한 신념체계를 발전시켰다. 사회경제적 문제를 중시하고 기존 질서를 거부하는 경향이다.

학생들이 공부 때문에 힘들어 한다. 당연하다. 지금의 수학과학 공부는 힘들지 않고서는 배울 수 없다. 그것은 다른 모든 문제와 마찬가지다. 죽도록 힘들지 않았다면 김연아는 나올 수 없다.

문제는 이때 기성세대가 보이는 태도이다. 민주화 세대는 본질을 흐리고 교묘히 전선을 이동시켰다. 공부하기 힘든 것이 지나친 경쟁 구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교육하고 교육해야할 필요까지를 부정했다.

다음은 ‘대학입시 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의 ‘대학입시거부 선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수준의 글이 학생은 물론 중년 민주화 세대의 유력 인사와 조직에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지금은 이들이 주류이다.

선언은 이렇게 주장한다.

“둘째, 우리는 ‘교육권’을 제대로 보장받고 싶다.

우리는 수능과 입시 위주의 공부가 아닌 교육을 원한다. 각종 인권침해를 정당화하며 인생의 한 시기를 견디는 것은 교육이 아니라 폭력이다. 우리는 단지 교육 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교육의 주체로서 원하는 교육에 원하는 방식으로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 우리는 우리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요되는 획일적인 입시 위주의 교육을 거부하고, 진정한 교육권을 보장할 것을 요구한다”(https://www.facebook.com/hiddenbag/?hc_ref=ARTW48nECGExZe81i-3tzUIxPCbYRMF7mR6VwPib1EqWQQArvdVXWjDcC_kvipJ0Xkc)

도대체 말하고 싶은 바가 무엇인가? 수능과 입시는 국어와 수학, 사회와 과학 등을 다룬다. 이들 교육은 당연히 입시 교육이다. 그럼 입시 위주의 교육이 아닌 다른 교육이 있다는 말인가?

다른 교육이 있다. 나는 이런 류의 주장을 많이 봤고 그런 교육현장에서 실제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대안학교가 있고 인문학 공동체가 있고 홈 스쿨도 있다. 민주시민교육이 있고 마을 학교가 있고 협동조합도 있다. 나는 이런 류의 교육 모두를 단호히 반대한다. 왜냐하면 교육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바둑 10급 여러 명이 아무리 머리를 맞댄들 바둑 5급을 이길 수 없다. 바둑 10급이 5급을 이기는 길은 책을 보거나 누군가로부터 체계적으로 배우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교육기관에서 벌어지는 교육은 교육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취미 활동이다. 만약 취미 생활을 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 그러나 한 나라의 국방·보건·정보·경제 등을 책임질 인재를 기를 마음이라면 가능한 비싼 선생을 찾아 제대로 교육시켜야 한다.

                                                           5.

결론을 말해 보자.

공부의 본질은 더 많은 것을, 더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본질적으로 문제 삼아야 할 점은 경쟁과 차별, 선행학습이 아니라 시대의 추세에 맞지 않는 낡은 교과와 교습법이다. 어떻게든 최신 과학기술적 성과를 활용해 최대한 더 빨리 더 많이 가르칠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민주화 세대가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그들의 교육관도 주류로 부상하고 있다. 선행학습 금지, 학습 분량의 적정화, 사교육 근절, 공교육 정상화, 과정중심의 평가 등이 그런 것들이다. 이들 중 다수는 교육보다는 교육 문제에서 파생된 사회경제적 갈등에 중심을 두고 있다. 또한 학생들에게 더 열심히 공부할 것을 권하지 않고 공부하지 않아도 되고 심지어 그런 경향을 미화한다.

민주화 세대의 낡은 유산이 별다른 검증도 없이 권력의 중추로 진입한 것이다. 지금이라도 상황을 직시하고 대책을 서둘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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