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저는 오랜 기간 학생운동, 통일운동에 참여한 바 있습니다. 2012년부터는 사회운동을 접고 수학 강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현재 주요 관심사는 한국 수학교육을 혁신하는 것입니다.

5년 정도 일선 교육현장에서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전업활동가로 일할 때와는 사뭇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수학이나 과학, 첨단 과학기술을 접하면서 새로운 시각도 갖게 되었습니다.

촛불이 있었고 신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촛불과 신정부 출현은 또 한 번의 정권교체라기보다는 어떤 시대의 종말과 시작 같은 것으로 느껴집니다. 개인적으로는 1970년대 초반 대도시에 출현한 청년 인텔리들의 꿈과 염원이 실현된 것으로 봅니다. 익숙한 표현을 빌리자면 386세대가 시대의 주역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면서 우리가 당연히 생각하고 있는 문제들을 검토해 보는 것도 유익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수학 선생으로 일하면서 갖게 된 이런 저런 생각들을 격식 없이 적어 볼까 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보는 색다른 시선’ 정도로 너그럽게 봐주시길 바랍니다. / 필자 주

 

1.

1970~80년대 노동문제의 핵심은 주로 노조결성, 임금인상 등과 관련 있었다. IMF 이후 종신고용이 흔들리면서 고용안정 문제가 전면에 부상했다.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노동문제가 역사적이라는 점이다. 노조결성과 임금인상이 주된 의제가 되었던 것은 강권적이고 병영적인 노동집약적 산업화 때문이다. 이 시기라면 고용안정은 중요한 의제가 아니다. 고용안정이 전면화 되기 시작한 것은 IMF 이후 신자유주의적 노동정책 때문이다.

당연한 결론은 고용안정이 어느 시기에나 관통하는 절대선이 아니라는 점이다.

2.

고용안정을 둘러 싼 극적인 갈림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부동산·교육·보육 문제 등에서 내수 기반을 진작하는 획기적인 실험에 주저했다. 그러나 세상을 보다 근본적으로 갈랐던 것은 고용이다.

 

위 그림은 20~50대의 고용률 추이이다. 1980~2005년 동조하던 양자는 2005년 이후 엇갈리기 시작한다. 50대 고용률은 2005년 68.%에서 10년 70.9%로 상승했지만 20대는 61.2%에서 58.2%로 하락했다.

해석은 어렵지 않다.

노조를 가진 사람들은 고용을 지켰다. 이들은 대체로 베이비 붐 세대의 맏형에 해당한다. 1955년생들이 2005년 50세가 되었다. 이들은 87년 당시 20대 후반~30대 초반이었고 6월항쟁에 참여한 후 여세를 몰아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그리고 성장과 분배가 공존하는 위대한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2005년 50세가 되면서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기 시작한다. 일자리 나누기를 통해 청년들의 고용을 보장하고 청년들의 에너지를 사회 전반으로 확산시키려는 노력을 차단했다. 그리고 이 일탈은 보수정부 10년의 길을 열어 주었다.

유탄을 맞은 것은 청년이었다. 고용 총량이 줄어든 데다 중소기업은 양에 차지 않았다. 그나마 대기업 일자리도 주로 경력직으로 채워졌다. 청년들은 의대와 로스쿨, 공무원에 몰리기 시작했다.

현장에 있으면 이런 경향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냥 신문 기사로 읽지 말고 한번 느껴 보면 좋을 듯하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자면 무섭고 섬찟할 때가 있다. 그들은 20대 때 돌을 던지던 우리와는 전혀 다른 인류다. 이상 같은 것은 없다. 물론 예외는 있지만 청소년을 감싸고 있는 핵심 키워드는 철저히 돈이다.

3.

결정적인 것은 시대와의 관계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반복하자면 노동문제에서 절대선이란 없다. 시대에 부합하는 노동정책이 있고 시대에 맞지 않는 노동정책이 있을 뿐이다.

2017년 지금 우리는 세상이 변했음을 느낀다. 세상은 미국과 중국의 거대기업이 주도하는 대혁신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여기에는 구글·애플·아마존·페이스북 등의 기업과 스티브 잡스·제프 베조스·엘런 머스크 등의 이름이 있다. 중국으로 눈을 돌리면 알리바바·바이두·텐센트가 있고 마윈이나 텐센홍 같은 리더가 있다.

변화의 범위나 속도를 보면 더 기가 막힌다. 바둑을 둘 줄 아는지 모르겠다. 나는 5급이다. 5급 정도가 보는 바둑의 세계도 경이롭다. 그런데 바둑이 졌다. 2016년 이세돌을 격파한 알파고는 더 이상 바둑에는 관심 없다는 듯 은퇴했다. 그리고 알파고의 또 다른 버전인 제2의 알파고는 아예 인간의 기보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에게 100:0으로 승리했다. 이 모든 일이 1~2년 사이에 벌어진 것이다.

시대는 17세기 뉴턴, 20세기 초 아이슈타인이 이끌던 어떤 시대처럼 불꽃같이 타오르는 위대한 열정과 비범한 창의의 시대로 번져가고 있다. 그리고 그 끝이 유례없는 인류의 풍요로 이어질지 스티븐 호킹의 지적처럼 절망적인 미래로 이어질지 알 수 없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 시대가 언제 시작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시계는 대체로 2000년대 후반을 가르치고 있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출시한 2007년 어느 즈음이다. 세계가 새로운 격동을 준비하며 비상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청년들에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 안정된 직장에 들어가 편안히 살 것을 강요한 것이다.

4.

2017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문재인 정부는 노동존중을 아예 국가적 차원의 과제로 끌어 올렸다. 그리고 노동존중의 핵심 구호 중 하나가 고용안정이다.

문재인 정부의 철학과 패러다임에는 유난히 과거의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가 노동 패러다임이다.

2005~10년 일자리 나누기 같은 타협이 이론적으로 가능했다. 돌이켜 보면 가능성은 절망적일 정도로 희박했다. 고용을 둘러 싼 일자리 경합에서 정규직 노조는 이걸 거부했다. 이를 배경으로 전 사회적인 양극화가 확산되었다.

문재인 정부는 2005~10년에 불가능했던 일을 지금 하려는 모양이다. 공공기관의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고 공무원 정원을 늘리며 최저임금 인상을 강행하고 있다.

나는 5년간 소규모 학원을 경영했다. 그리고 매일 카페에 들러 수학문제를 풀며 카페의 경영 실태를 간접적으로 살펴본다. 간접 탐색을 넘어 양해를 얻어 직접 인터뷰하기도 했다. 최저임금제는 무인화와 가족노동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고용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가능한 고용을 회피할 것이다.

되든 안 되든 일선에서 돈을 만졌던 나 같은 장사꾼(?)의 입장에서 이건 당연한 귀결이다. 문제는 현실을 가리는 이데올로기라는 족쇄인데 이 족쇄가 최소한 10년이 넘은 것이다. 고용안정은 적어도 10년 그것을 뒷받침하는 노동존중은 197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름 아닌 전태일의 시대이다.

고등학교 역사교과서를 보면 6월항쟁 이야기가 나온다. 거기에 나와 내 친구들이 나온다. 학생들은 나를 보며 역사책에 나오는 사람을 봤다며 신기해한다. 그런데 전태일은 그로부터 17년 전 이야기다. 그냥 역사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노동존중이란 전태일에 뿌리를 둔 너무 오래 된 옛날이야기다.

이데올로기가 현실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결정적인 것은 역시 시대와 부합하는가이다. 산업의 속도는 말 그대로 하루가 다르다.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평생 또는 몇 십 년의 고용을 보장하겠다는 생각이 맞을 리 없다.

국방이나 방역과 같은 사회기반 시스템만 정규직으로 하고 나머지는 유연화하여 민간의 활력과 역동성을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 고용 불안정에 따른 문제가 있다면 (잘 모르지만) 기본소득제와 같은 방식으로 해결할 문제이지 해고 자체를 불온시하는 풍토 자체가 틀렸다.

주장을 명확히 하면 노동유연화가 옳고 노동안정은 틀렸다.

5.

노동안정·노동존중이라는 메시지가 갖고 있는 치명적인 위험은 다음과 같다.

한국은 1:99가 아니라 1:10:50:50 이하로 세분되어 있다. 이 중 정규직 노동자는 1~10에 해당한다. (만약 이것이 틀렸다면 내 주장의 모든 것이 틀렸다) 그런데 1~10이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부의 근원인 대기업과 공공기관에 안정적으로 고용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하려면 고용에 대한 태도부터 바꾸어야 한다. 누구라도 해고될 수 있어야 하고 언제라도 새롭게 고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고용안정이라는 메시지 안에는 고용된 노동자들의 이권이 보장되어 있다. 고용안정이 노동존중의 핵심이고 비정규직도 정규직화 하는 판에 기존 정규직의 양보를 말하는 것이 모순이기 때문이다.

나는 노동문제를 잘 모른다. 그런데 정규직 고용을 흔들지 않으면서 건전한 신규 고용을 창출할 수 있다는 주장을 믿을 수 없다. 그러니 공무원 증원과 같은 발상이 계속 나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노동관과 정책에는 20대 중후반 6월의 거리에서 싸우고 이후 노조를 만들어 사회전반을 민주화했던 사람들 그리고 2005년을 기점으로 노조를 무기로 자신들만의 이권을 배타적으로 지켰던 중년 정규직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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