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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언의 인왕산도<연재> 심규섭의 아름다운 우리그림(180)
심규섭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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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1.01  17:3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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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언(1738-1784 이전)은 조선시대 후기의 화가로서 자는 경운(景運), 호는 담졸(澹拙)이며, 1735년 천문이나 지리 분야의 시험인 음양과에 급제하여 감목관을 지냈다.
잡과에 속하는 음양과는 종8품 정도에 해당하여 관직의 급이 낮다. 양반의 자제나 선비들은 거의 없고 주로 중인이나 서얼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강희언의 신분도 중신일 가능성이 높다.

강희언이 중인 신분이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에서 그림은 단지 집안을 장식하거나 감상하는 수준을 넘어 정치, 사상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다. 중인은 정치와 사상을 대변하는 선비를 배제한 독자적인 사상이나 정치세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것은 강희언이 아무리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는 당대 선비들의 사상이 투영되어 있다는 말이다.

가끔 김홍도, 신윤복과 같은 도화서 화원들의 작품이나 화공들의 민화를 선비들의 사상과 분리하여 독자성을 부여하는 시도가 있다.
이를테면 김홍도, 신윤복의 풍속화를 선비들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내용으로 파악한다든지, 양반문화에 대항하기 위해 민화가 발전했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지극히 서구 중심으로 편향된 관점일 뿐이다.
중인들이 독자적인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사상과 정치세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아직 이런 세력이 존재하고 활동했다는 기록은 없다.
중인은 조선시대에 관직의 실무나 전문성을 가진 그야말로 중간계층이었다. 조선 후기 중인들도 자체적인 모임을 가지고 교류하는 여항문화가 발전했지만 내부에는 언제나 선비들이 중심축의 역할을 했다.

강희언은 30년 이상 연상인 겸재 정선에게 그림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정선이 천문학에 관련된 벼슬을 하고 주역에 관한 저서를 남긴 점을 감안한다면 강희언이 음양과 벼슬을 지낸 것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강희언은 김홍도의 스승이었던 강세황과 교류가 있었으며, 35세 아래인 단원 김홍도와도 친했다.
실제 김홍도의 [단원도]라는 작품에는 정란, 강희언과 교류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 강희언(康熙彦)/인왕산도(仁王山圖)/18세기 중엽/종이에 수묵담채/24.6 x 42.6 cm/한국 개인소장. [자료사진 - 심규섭]


강희언이 그린 [인왕산도]는 독특한 그림이다.
종종 겸재 정선의 [인왕산도]와 견주기도 한다. 진경화법을 따른 것은 겸재 정선의 영향이지만 화면구성이나 표현법은 세대 차이가 날 정도이다.
무엇보다 이 그림의 특별한 점은 하늘의 표현이다.
담채이긴 하지만 하늘을 파란색으로 칠한 것이다. 우리그림에서 하늘은 대부분 아무 색도 칠하지 않거나 시커멓게, 혹은 황색으로 칠한다.
황색은 우리그림의 바탕색이기 때문에 결국 아무 색도 칠하지 않는 것과 같다. 또한 시커멓게 칠하는 것도 아무 색도 칠하지 않는 것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런데 강희언은 이런 전통을 무시하고 파란색으로 하늘을 칠한 것이다.
하늘을 파란 색으로 칠하는 것은 분명 서양화법의 영향이라고 봐야 한다. 그림 속의 약간의 원근투시법이 들어가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심증은 굳어진다.

겸재 정선은 당시 안동 김씨 명문가인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김창업(金昌業)의 문하에 드나들었고, 이들에게서 성리학을 공부했다.
김창업은 사신단을 이끌고 청나라를 다녀온 후 연행록을 통해 비교적 사실적으로 청나라 문화를 소개하여 조선의 선비들을 충격에 몰아넣는다.
그러니까 겸재 정선은 청나라 문화에 우호적이며 낙론의 관점을 가졌던 젊은 노론 세력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는 겸재 정선에게 그림을 배웠던 강희언의 작품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강희언이 청나라를 다녀왔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니까 청나라에서 서양화를 보고 직접적으로 응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깅희언이 중인신분이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다. 당시 중인들은 관직이나 재물의 많고 적음을 떠나 정치적 발언권이 없었다. 하지만 그림은 철학과 미학을 드러내는 정치적 행위이다.
이런 조건에서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서양문화의 수용을 일개 중인신분이 앞장섰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 당시 선비화가였던 강세황은 서양화법을 수용한 그림을 실험적으로 창작한다.
강희언은 강세황과 주변 선비들과의 교류를 통해 청나라 문화와 서양화를 수용했을 것이다.

하늘을 파랗게 칠한 강희언의 그림은 상당히 실험적이었다.
어쩌면 당시 한양에 살았던 선비들에게 충격을 주고 논란거리를 제공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그림을 그린 강희언이 정치적 박해를 받았다는 가록은 없다. 당시 홍대용 같은 젊은 선비는 서양의 천문학을 수용하고 연구하여 저서로 남겼고, 연암 박지원 같은 북학파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강희언의 파란색 하늘도 이런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고 봐야 한다.

아무튼 하늘에 아무 색도 칠하지 않은 것은 하늘에 대한 어떠한 규정도 하지 않는 것이다. 반대로 하늘에 색을 칠하면 하늘을 뭔가로 규정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성리학에서는 하늘을 규정하지 않았다.
하늘을 규정하면 하늘과 사람의 관계를 규정해야 하고, 이 관계에 따라 사회관계가 바뀌는 엄청난 철학적 문제가 발생한다.
특히 하늘을 절대적인 인격체로 규정하는 것은 위험한 이단이었다.
도교와 불교를 유학에 녹여내어 ‘인내천’을 주장했던 동학의 최제우도 하늘에 대한 규정만큼은 피할 정도였다.

파란색의 하늘은 조형적인 문제를 발생시키기도 한다.
하늘의 색은 딱히 파란색이라고 규정하기 어렵다. 하늘의 색은 시간이나 계절, 날씨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따라서 특정한 하늘의 색은 시간이나 계절, 날씨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되면 그림 속의 시공간은 3차원이라는 현실세계에 갇혀 버린다.
또한 하늘을 파란색으로 칠하면 산이나 바위, 나무와 들판도 모두 색으로 칠해야 한다. 하늘만 덩그러니 파란색으로 칠하면 산수화의 중심이 되는 산과 나무가 밀려나 버린다.
흑백은 시각적으로 색상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파란색의 하늘은 개인만의 세계이다.
하지만 우리그림의 시공간은 특출한 영웅이나 개인이 바라보는 세계가 아니라 공동체가 보는 세상이다. 그래서 우리그림은 서구의 사실주의나 현실주의와는 달리 사뭇 철학적이고 관념적이다.

강희언의 파란 하늘은 끝내 조선화단에 수용되지 않았다.
조선의 선비들은 하늘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인격의 완성과 백성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민심이 곧 천심이다’는 말이 있다.
백성들의 마음이 곧 하늘의 마음이란 뜻이다. 천심(天心), 즉 수많은 백성들의 마음을 색깔로 표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오히려 하늘은 수많은 백성들의 다양한 색깔들을 담을 수 있도록 비워두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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