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저는 오랜 기간 학생운동, 통일운동에 참여한 바 있습니다. 2012년부터는 사회운동을 접고 수학 강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현재 주요 관심사는 한국 수학교육을 혁신하는 것입니다.

5년 정도 일선 교육현장에서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전업활동가로 일할 때와는 사뭇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수학이나 과학, 첨단 과학기술을 접하면서 새로운 시각도 갖게 되었습니다.

촛불이 있었고 신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촛불과 신정부 출현은 또 한 번의 정권교체라기보다는 어떤 시대의 종말과 시작 같은 것으로 느껴집니다. 개인적으로는 1970년대 초반 대도시에 출현한 청년 인텔리들의 꿈과 염원이 실현된 것으로 봅니다. 익숙한 표현을 빌리자면 386세대가 시대의 주역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면서 우리가 당연히 생각하고 있는 문제들을 검토해 보는 것도 유익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수학 선생으로 일하면서 갖게 된 이런 저런 생각들을 격식 없이 적어 볼까 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보는 색다른 시선’ 정도로 너그럽게 봐주시길 바랍니다. / 필자 주

 

2007년 12월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었다. 이명박 후보가 당선된 이유는 1차적으로 노무현 정부의 실정에 따른 반사이익이었다. 한편 이명박 후보는 서울시장 시절 청계천 복원을 주도하며 노무현 정부의 실행력 부족과 대비되었다. 결정적으로는 서민생계 악화에 따른 경제적 요구가 반영되었다.

2008년 5월 초 황당한(?) 반격이 시작되었다. 시작은 여고생이었다. 이들은 청계천에 모여 대중가요(거위의꿈)를 부르며 갓 들어선 이명박 정부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나는 청계천에서 이들을 목격했다. 정말 낯선 장면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알던 거의 모든 시위와 다른 이색적인 저항이었다.

그로부터 5~7월 두 달 동안 광화문을 중심으로 전대미문의 대시위가 이어졌다. 여중고생에서 시작된 시위는 대도시 청중년층이 대거 결합하며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되었다. 놀랍게도 이 시위의 주장은 이명박 퇴진이었다. 선거를 치른 지 6개월밖에 되지 않았고 딱히 퇴진의 이유를 특정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퇴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이 시위의 성격과 특징에 대해 잘 모르겠다. 지금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 박근혜가 어색하다. 또는 그냥 싫다. 아마도 보수적 성향을 갖는 고령자들이 노무현이 그냥 싫은 것과 유사할 것이다. 이는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문제이다. 내가 살았던 시대 그리고 거기서 형성된 감수성이 박근혜가 살았던 시대의 감수성과 근원적으로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인구는 1955년생을 경계로 극적으로 갈린다. 55년생부터 대규모 인구 집단이 기다리고 있다. 2005년 태풍의 진원지인 55년생이 50세가 되었다. 이들은 사회 전반을 그들의 구미와 입맛에 맞게 바꾸기 시작했다. 우여곡절이 있을 수 있지만 역사는 돌고 돌아 주류 사회집단의 이해와 요구에 따라 개조되기 마련이다.

2008년 촛불시위의 배경은 새로운 세대(베이비 붐 세대)가 보기에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인정하는 것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적이고 문화적인 요소는 법률적이고 정치적인 요소보다 훨씬 민감하다. 2008년의 이명박은 딱히 잘못한 것은 없지만 그냥 싫었다.

2008년 촛불이 갖는 특징은 상황을 애매한 방향으로 몰아갔다. 시위의 규모가 너무 컸다. 경찰도 함부로 진압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실제 탄핵을 추진하기에는 주장이 모호했다. 무엇보다 탄핵 사유가 무엇인가라는 1차적인 질문에 취약했다.

결국 7월 초가 되면서 촛불시위는 무너졌다. 2008년 촛불의 뚜렷한 특징은 졌다가 아니라 어떻게 명료한 정치적 주장이 결여된 시위가 그렇게 커질 수 있는가였다.

어쨌든 촛불은 패배했다. 피해의식도 상당했던 것 같다. 촛불 1년을 맞아 한겨레신문이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촛불집회에 참여할 의향이 있는가? 40.3%, 참여의향이 없는가? 57.2%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안으로 분노와 좌절을 쌓아 가고 있었다.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이 사망했다. 고졸의 비주류 대통령, 서민적이고 솔직했던 성품, 보수주류의 정치보복의 희생양...... 2008년 촛불의 패배와 2009년 노무현 대통령 비극적인 사망이 맞물리며 한국사회의 방향을 바뀌기 시작한다.

거리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결국 선거였다.

2010년 나는 거리를 지나며 현수막과 벽보를 유심히 지켜보곤 했다. 그들 대부분은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민주화 운동 국면에서 나의 선배였거나 동료였거나 후배였다. 그들은 나의 청년시절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나는 그들이 2005~07년 노무현 정권의 실패와 그 후 변화된 정세를 어떻게 보고 있고 세상에 무엇을 내놓을지 궁금했다.

대부분의 메시지는 노무현을 잊지 않겠습니다(달리 표현하면 노무현의 원수를 갚겠습니다)로 요약될 수 있었다. 그것을 넘어 서는 무언가가 없었다. 결국 그들의 비전은 노무현에 묶여 있었다.

여당을 찍지 말자는 주장에 동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친노를 찍어야 하는가는 모호했다. 그럼에도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명확한 잠정적인 결론이 존재했다. 이명박을 찍지 말아야 하고 노무현을 죽인 자들에게 복수해야 한다. 이를 위해 노무현 정부와 친노에 대한 평가는 보류하거나 무시한다. 매장되었던 친노 세력은 그렇게 복권되었다.

특별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선거 국면에 신선한 파열구가 등장한 것은 2011년이다.

무상급식 의제가 떠올랐다. 무상급식이야 그냥 다양한 사회복지 의제의 하나일 수 있다. 정책으로만 보면 노무현 정부 때 이미 수많은 복지 정책이 입안되고 추진되었다. 그러나 2011년 시점은 달랐다. 무상급식을 고리로 한국 사회시스템 전반에 대한 재조정이 가능했다. 밋밋했던 정치판은 새로운 가능성을 잉태하며 꿈틀대기 시작했다.

이 가능성을 반대 방향에서 악용한 것이 오세훈 서울시장이다. 오세훈은 무상급식을 반대하며 주민투표 강행을 시사했고 상황이 불리해지자 주민투표에 서울시장 자리를 조건으로 걸었다.

오세훈은 시대를 잘못 읽고 있었다. 2005년 50세를 돌파한 베이비 붐 세대는 시간이 갈수록 규모와 위세를 키우고 있었다. 어설픈 도전은 화를 불렀다.

이어 한국 정치사의 빅 매치가 시작되었다. 2011년은 유독 중요한 선거가 많았다. 정치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다. 내가 생각하는 빅 매치는 10월 3일 장충단공원에서 진행된 박원순-박영선 사이의 대결이다.

박원순은 안철수가 양보한 조건에서 무소속으로 서울 시장에 입후보했고 박영선은 제1야당의 대표였다. 두 사람은 여당 나경원에 대항할 범야권 후보의 단일후보를 뽑는 행사였다.

여기서 박원순이 승리했다. 이로써 서울시장 선거는 제1 야당의 후보가 없는 상태에서 여당 후보와 무소속 후보가 대결하는 전대미문의 상황으로 치러졌다. 박원순-박영선 대결로 선거는 사실상 끝이었다. 이어 벌어진 실제 선거 박원순-나경원 대결은 박원순의 승리를 확인하기 위한 요식행위에 가까웠다.

무상급식과 제3의 정치세력이 결합하면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한국 밖의 세상은 경천동지할 새로운 국면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2007년 스티브 잡스가 착수한 모바일 혁명은 세계사를 또 한 번 뒤바꾸고 있었다. 우리는 훗날 이를 4차 산업혁명 등으로 일컫게 된다. 2011년의 대한민국에게는 새로운 활로가 필요했다.

자 그럼 마지막 장면으로 가보자. 2012년 대선이다.

당시 여당의 후보는 박근혜다. 박근혜 후보는 육영수를 닮았다. 나는 아주 어려서 TV에서 봤던 육영수를 기억한다. 품위 있고 고상한 자태였다. 박근혜의 올림머리는 육영수와 많이 닮았다. 내가 그럴진대 나이든 어른들은 어떻겠는가? 박근혜는 박정희의 아바타였다.

야당 후보는 문재인이다. 당신들은 대통령이 되기 이전의 문재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기억하는 김대중은 1980년 사형선고를 받고 수형생활을 하던 모습이다. 그림을 통해 본 모습이지만 수의를 입고 머리를 깍은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는 사형수 신분으로 머리를 깎고 수형세월을 버틴 한국 민주화의 거목이다.

김영삼은 1983년 광주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23일 단식하던 장면이 기억난다. 김영삼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지만 김영삼은 역사의 고비마다 특유의 결단력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 세운 걸출한 정치 리더였다.

기타 등등

그런데 문재인은 기억나는 것이 거의 없다. 굳이 떠올리자면 노무현 장례식을 지키던 우직한 경상도 사나이의 모습이다. 눈물을 흘리며 감정을 드러낼 만도 하건만 그는 시종일관 담담한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그로부터 불운했던 대통령을 지켰던 충직한 정치적 동지를 기억했을 법하다. 나는 사람 좋고 뚝심 있는 멋있는 중년 남자로 기억한다.

이걸 대통령 후보에 대한 기억으로 내세우기에는 빈약하다. 그럼에도 그 이외에는 별다른 경력이 없다. 이는 문재인 후보가 이전의 야권 지도자와는 다른 성격의 리더이기 때문이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냉전반공 세대의 리더인 박정희 그리고 그들의 후계자들과 격돌하며 성장했던 사람들이다. 강한 자와 싸우는 과정에서 온갖 시련과 신화를 만들어냈고 특유의 카리스마와 정치적 경륜을 쌓았다. 반면 문재인은 난숙할 대로 난숙한 베이비 붐 세대가 그들의 이해를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낸 리더이다.

결국 2012년 대선은 박근혜와 문재인의 대결이 아니라 냉전반공-민주진보 진영이 시대와 시대의 우열을 놓고 경합했던 선거이다. 시대의 주역으로 등장한 베이비 붐 세대는 시대를 돌파하는 개척자형 리더가 아니라 자신의 시대를 추인할 안정적인 리더를 선택한 것이다.

선거는 철저히 미래가 아니라 과거로 향하고 있었다. 2012년 선거는 마치 박정희와 노무현의 싸움 같았다. 여기에 가세해 더욱 먼 과거로 선거판을 몰고 간 후보가 이정희이다.

나는 한때 그녀가 대표이던 당에 몸담은 바 있고 개인적으로는 그녀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2012년 대선의 이정희는 2012년 대선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정희는 박정희의 친일 전력을 문제 삼으며 다카기 마사오를 호명했다. 문재인이 선거를 1970년대 암울했던 유신으로 몰아갔다면 이정희는 선거를 아예 일제시대로 몰아간 것이다.

2010년에 1955년생은 55살이었다. 이미 사회 전체가 민주화세대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다. 선거를 세대의 관점에서 본다면 2012년 선거는 지기 어려운 선거였다. 국정원 개입 등 부정선거를 이유로 들 수 있지만 민주화 세대의 규모와 성장 양상은 부정선거를 압도할 만했다. 결국 민주화 세대를 하나로 결집하는 비전과 안목이 문제였다. 

 

*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 1995~05년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 등 통일운동
* 2005~12년 진보연대 등 사회운동
* 12년~ 주) 지성의숲에서 수학 강사로 활동
* 현재는 한국 수학교육의 혁신에 관심을 두고 있음
* 최근 지은 책으로는 수포자탈출실전보고서, why 인공지능과수, 암호와소수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