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고도 찜찜한 ‘종북’ 명예훼손 소송

올 6월 뜻하지 않은 기쁜 소식이 있었다. 지난 수 년간, 나와 풀뿌리통일운동 AOK(ActOin for One Korea)를 ‘종북’이라고 끊임없이 극악스럽게 매도해온 극우매체 <블루투데이>를 상대로 2016년초에 한국법정에 제소한 명예훼손 손해배상 소송에서 법원이 나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피고 권유미(인터넷 매체 <블루투데이> 대표)는 원고인 정연진에게 1천만원을 배상하고 법원이 명시한 관련 기사 22건에 대해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삭제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피고는 판결에 불복, 즉각 항소했고 또 다시 지리한 법정싸움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금액이 전부는 아니지만 같은 매체를 상대로 제소한 이전의 재미동포의 손해배상 소송에서 3백만원, 1백만원의 승소 사례가 있긴 했다. 예상치 못한 큰 배상액은 그만큼 재판부가 원고의 명예훼손의 정도가 심각하다고 판단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블루투데이>는 세계 여성 평화활동가 30명이 분단 70년을 기해 북에서 남으로 DMZ(비무장지대)를 가로지는 ‘위민크로스(Women Cross) DMZ’ 때는 그 행사를 정연진이 '주도'했다며 종북몰이 기사를 아예 시리즈로 연재하기까지 했다. 정말이지 내가 그러한 큰 규모의 국제행사를 ‘주도’할 만한 능력이 있다면 좋겠다.

승소한 것은 기쁘지만 기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원고가 억울하게도 ‘종북’이라는 누명을 썼다는 기조는 ‘종북’ 프레임을 재판부도 인정하고 들어가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법원은 언론매체가 ‘종북 인사’라고 매도한 것은 ‘한국사회에서 심각하게 사회적인 명예와 평판이 실추되는 것’으로 판단했다.

소송 제소를 결정하는데 큰 도움을 준 비영리단체 언론인권센터와 잘 싸워준 변호사님도 고맙고 재판부의 판사들께도 깊이 감사한 마음이다. 그러나 소송이 ‘종북’이라는 극우파의 줄기찬 프레임을 용인하고 명예훼손에 관한 법리적인 판단을 한 것이기에, 분단이라는 족쇄와 한국사회의 한계성을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다고 할까.

박근혜 정부 하에서 ‘종북’ 프레임은 사실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통일운동에 앞장서던 많은 사람들이 이 프레임에 걸려서 맥을 못 추었고, 일반 사람들도 ‘종북’으로 인식되지 않으려고 말과 행동에서 미리 자기 검열을 하게 되는 정도였다.

앞으로는 어떠할까. ‘종북’이라는 프레임은 아마도 이명박근혜 정권 때와 같이 큰 위력을 발휘하진 못하겠으나, 북을 '주적'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뇌리속에서 추방시키지는 못할 것 같다. 종북 프레임은 앞으로도 계속 남남갈등을 촉발시키며 아마도 평화운동, 통일운동권 사람들을 힘들고 지치게 하지 않을지 우려된다.

사회운동에서 프레임은 정말 중요하다. 싸움을 어떠한 틀에서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 스스로의 사고방식과 승부의 향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프레임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서 분단해체를 위한 질기고도 기나긴 싸움에서 우리는 승리할 수도, 패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이도 저도 아닌 오리무중의 세계에 갇힐 수도 있지 않을까.

외세극복을 위한 프레임 - 미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

촛불시민의 열망으로 정권교체를 이룬 이후에도 다시금 통일운동권은 미국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21세기 동북아 평화에 큰 장애물이 될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라는 무기체계를, 수많은 시민들과 지역주민들의 장기간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한반도 남쪽에 배치하고 있는 미국.

물론 문재인 정부의 대처를 동시에 문제삼아야 하나, 결국 문재인 정부도 ‘한미동맹’이라는 분단체제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사드 문제에서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분단시대의 한국인들이 미국을 보는 시각은 대한민국을 지켜준 혈맹, 또는 분단의 원흉이라는 양극단의 시각이 존재해왔다. 미국은 자유대한을 지켜준 고마운 혈맹인가, 아니면 분단의 원흉이자 분단을 지속시키는 적군인가. 분명한 것은 전자는 ‘시혜자’로서의 역할만을 강조하고 후자는 ‘가해자’로서의 역할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통일운동권에서는 ‘반미’투쟁이라는 프레임으로 대미관계를 설정한다. 물론 코리아의 분단에 미국이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고 반미투쟁은 필요하다. 그러나 ‘반미’ 프레임 만으로 앞으로 미국을 상대해 낼 수 있을까. 앞으로 통일운동 선상에서 어떻게 대미관계를 설정해 나가야할지, 좀 더 효과적인 프레임이 없는지는 고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러한 프레임 설정의 변화는 지금까지의 미국 보다는 앞으로의 미국을 생각할 때 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트럼프 행정부 하에서 지금까지 없었던 많은 새로운 변화가 감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측을 불허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전쟁을 부추기는 광폭 언행으로 인해 미국내 반전평화세력, 또한 백인우월주의와 맞서는 평화주의 세력이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연대의식과 불꽃같은 저항정신으로 나서고 있다.

▲ 지난 8월 9일 트럼프 대통령의 ‘화염과 분노’ 발언에 맞서 Globalzero, MoveON, CodePink 등 미국의 평화단체들이 워싱턴DC에서 긴급시위를 조직했다. 백악관 앞에 많은 시민활동가들이 모여서 집회하는 모습. [사진 제공 - 서혁교]
▲ 미국 전국적으로 백인우월주의에 대항하는 집회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8월 19일 보스턴에서는 4만여명이 집회에 참석했다. [사진 출처 - ANSWER 홈페이지 www.answercoalition.org]

지난 8월 14일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에서 열린 트럼프의 전쟁시사발언을 규탄하는 반전집회에서도 재미동포들보다 미국인들의 참여가 월등하게 많아서 집회를 주최한 우리들도 놀랄 정도였다.(정연진의 '원코리아운동'이야기 67편 참조) 8월 9일 미국의 전국적인 반전평화단체들이 백악관 앞 시위를 조직한 직후여서 미국인들이 더 많이 참여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며칠 전 미국의 라디오 방송(National Public Radio)의 한 대담프로에서는 라틴계 소수 민족은 지금까지는 남미 여러 나라 별로 미국에 대한 입장이 조금씩 달라서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는데, 트럼프의 이민자 억압 정책과 서류미비자(불법체류자) 탄압으로 인해 남미권에서도 대통합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한목소리로 단합된 적이 없었다고 무척 반가운 기색을 표했다.

저항의 움직임 또한 만만치 않다. 9월 16-17일에는 워싱턴DC에서 적어도 수십만이 모이는 대규모 저항운동 집회가 개최될 예정이다. 민권, 반전, 평화, 백인우월주의 반대 및 인종차별금지, 이민자 및 소수계를 위한 정의 등의 기치를 내걸고 대규모 전국집회를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트럼프 행정부 하에서는 지금까지 미국의 노동자 계층과 민중이 싸워서 쟁취해온 사회적, 경제적 수많은 권리가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고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더욱 가중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미 연방의회 대의정치는 특수 부유층만의 이익을 대변할 뿐이라며, 수많은 활동가들이 대규모로 집결하여 민회를 개최할 예정이어서 앞으로의 움직임이 기대된다.(웹사이트 참조 www.congressofresistance.org)

전쟁세력 대 평화세력이라는 프레임

2010년 6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미국 영화제작자협회(PGA: Producers Guild of America)의 연례 컨퍼런스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 때 <CNN>을 설립한 테드 터너가 기조연사로 나와서 한 연설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 미국 영화제작자협회(PGA)의 연례 컨퍼런스에서 유엔 재단을 설립한 테드 터너를 소개하는 엘리자베스 고어. 2010년 6월 로스앤젤레스. [사진 - 정연진]
▲ 미국 영화제작자협회(PGA)의 연례 컨퍼런스에서 기조연사로 ‘전쟁반대’ 발언을 하고 있는 테드 터너. 2010년 6월 로스앤젤레스. [사진 - 정연진]

엘 고어 전 부통령의 딸인 엘리자베스 고어의 소개로 무대에 등장한 테드 터너는 미국이 유엔에 빚을 너무나 많이 지고 있어서 유엔에 기부하고자 했는데, 유엔 사무총장이 정부가 아닌 민간인에게서 유엔이 기부를 받을 수는 없다고 하기 때문에, 당시 본인이 가진 전 재산의 3분의 1인 10억 달러를 가지고 유엔 재단을 만들었다고 소개한다.

터너는 “미디어의 역할은 오락이 아니라 정보전달에 있고 이 역할에 대해 우리는 50년, 100년을 내다보는 자세로 임해야한다”면서, “자기 이웃에 폭탄을 투하하고 싶은 사람들 어디 있나 손들어 보라. 여기 저기 폭탄을 투하하고 다니면서 미국이 과연 세계 여러 나라들의 ‘친구의 나라’라고 말할 자격이 있나?”라고 미국의 대외정책을 강력하게 질타했다.

“석유를 확보하기 위한 전쟁 -당시 이라크전- 당장 중단해야한다. 전쟁은 정말로 미친 짓이다. 핵무기를 가진 미국이 세계의 다른 나라들과 협력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미국의 핵무기 정책을 비판하면서 “핵무기를 없애는데 나머지 여생을 바치고 싶다”라는 말도 했었다.

그가 만든 유엔재단은 그 이후로 세계 전쟁 지역 주민들을 돕는 많은 일을 해오고 있다. 아직 그가 미국의 전쟁정책에 획기적 전환점을 만들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미국내 영향력있는 인사들 중에서 전쟁반대를 주장하는 인사들은 생각하는 것 보다 꽤 많이 있고, 이들은 이번 트럼프 행정부 하에서 더욱 강고히 목소리를 높일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세력에 주목하고 평화를 위한 연대세력을 점 점 더 크게 확대시켜 나가야한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정복자는 ‘역사의 가해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자는 의미있는 시도도 일어나고 있다. 지난 8월 30일 로스앤젤레스 시의회는 연방공휴일의 하나인 ‘콜럼버스의 날’(10월 두 번째 주 월요일)을 정복자의 입장에서 콜럼버스를 기리는 날에서 피해자의 입장에서 재평가 하는 ‘원주민의 날’(Indigenous People's Day)로 변경하는 조례안을 찬성 14, 반대 1표의 압도적인 차이로 가결시켰다.

▲ 미연방 공휴일인 콜럼버스의 날을 LA시의회가 ‘원주민의 날’로 개정하자, 원주민 후손들이 LA시의회 밖에서 환호성을 지르고 있는 모습. [사진 제공 - 미주 중앙일보 김상진 기자]

이 조례를 발의한 미치 오패럴 시의원은 “콜럼버스와 수하들이 저지른 잔혹한 행위(atrocities)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했고, 마이크 보닌 시의원은 이 결정이 “원주민들에게 사죄하는 작은 첫 걸음이 될 것”이라 선언했다. 콜럼버스데이의 개명은 그동안 정복자의 시각에서만 보고 침략을 합리화하던 역사에서 침략당한 피해자들의 고통을 되돌아보고 기리는, 아주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지 않을까한다.

침략자의 시각이 아닌 침략당한 자들의 역사적 아픔을 돌아보는 이번 LA시의회 결정에 원주민 후예들이 환호를 지르며 기뻐하는 것을 보니 감동적이었다. 이 땅에 평화가 실현되려면 세계 역사에 저질러진 무수한 침략와 수탈의 역사에 대해 그러한 전쟁의 역사를 정당화하지 않고 침략을 침략이라 기록하는 이러한 역사 바로잡기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평화는 단순히 ‘싸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도, 힘없는 나라의 백성들도, 평등하고 당당하고 조화롭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실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적극적인 평화담론을 더 많이 개발하고 평화세력이 결집될 수 있는 행동을 전개해 나가야한다.

평화세력들간의 강력한 연대와 공조에 의해서 미국의 전쟁세력이 앞으로 활개치지 못하는 세상을 분단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을 위해서, 또 우리들 후손을 위해서 만들어야 한다. 코리아의 평화와 통일은 결국은 지구상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벌어야하는 검은 세력들과의 싸움이 될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이미 반 트펌프 전선에서 많은 세력이 코리아의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우리들과 연대를 형성하고 힘을 모을 수 있을 것 같다. 지구상에서 침략당하지 않고 평화롭고 인간답게,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기 원하는 모든 세력들, 그리고 미국내에서 강력하게 반 트럼프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평화세력들과 전쟁반대 프레임으로 힘을 합쳐, 단순한 반미가 아닌 승미의 길을 개척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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