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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독립정신’ 잊지 말기를<칼럼> 김동환 (사)국학연구소 연구위원
김동환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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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8.23  14: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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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이 지났다. 새로운 정부에서 보낸 첫 광복절이다. 대통령의 독립유공자 후손들에 대한 처우개선 방안도 공언되었다. 그래서인지 더욱 기대감이 넘친다. 행여 이제는 정의로운 사회가 될까, 혹여 애국의 질서도 잡힐 수 있겠지.
 
그러나 쉽지 않은 바람일 듯하다. 뒤집힌 세상이 그 이유다. 광복 이후, 뒤집힌 세상에서 노예처럼 살던 이들이, 다시 뒤집힌 세상에서 주인된 행세로 나섰다. 진정 주인이 되어야 할 인간들의 설 자리는 오랜 세월 뒷켠이다. 뒤집힌 사회는 진정한 주인들의 작은 희망이나 용기마저도 탈진시켰다. 고개 들어 외쳐보자니 뒤집힌 세상의 무게가 너무 힘겹고 무거웠다. 누구 하나 쉽게 시비 걸 용기도 힘도 무너진 상태다. 그저 화석화된 구조를 원망하고 탓하며 살았을 뿐이다.
 
독립운동에 몸 바친 이들의 후손들은 노예된 삶으로 연명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구조적 악순환으로 고착화된다는 점이다. 거꾸로 선 세상에서의 기회는 늘 주인된 노예들에게 먼저 돌아갔고 또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주인이 된 노예와 노예가 된 주인이 맞대면하는 운명적 아노미(anomie), 이것이 우리 사회의 대표적 역설 아닌가.
 
이러한 사회에서는 공정이나 질서 따위는 아랑곳없다. 법의 본질인 정의(正義, justice)는 안정성과 형평성의 명분에 밀려 늘 후순위다. 대의명분보다는 금권이 우선하고 진실에 앞서 눈치가 질서의 잣대가 된다. 기득권의 도덕성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그저 명분 있는 가난이 명분 없는 부(富)에 의해 끝없이 초라해질 뿐이다. 매국의 부귀가 부끄럽지 않고 애국의 가난이 천대받는 이유다.
 
후손들의 삶을 대비해 보면 확연히 나타난다. ‘뉴스타파’가 2015년 조사한 1,177명의 친일 후손 명단 가운데 3분의 1가량이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 출신이었다. 또한 그 중 27%가 유학의 경험도 있었다. 그들의 사회적‧경제적 지위 역시 최상위급에 속했다.
 
반면 같은 해 ‘한국일보’가 광복회 회원 6,83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는 비참하기 그지없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무학'이 4.7%나 되었다. 초등학교 졸업이 22.8%, 중졸이 12.8%였다. 고졸 학력을 가진 사람은 25.7%로, 전체적으로 고졸 이하가 3분의 2였다. 이러니 사회적‧경제적 지위는 늘 하층에서 맴돈다.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5.2%가 월 소득 200만원 미만이었다. 심지어 50만원 미만도 10.3%나 되었다. ‘애국하면 망하고 매국하면 흥한다’는 말도, 이들의 대비된 삶을 보면 허언이 아님을 알 게 된다.
 
우리에게 광복은 희열이자 아픔이었다. 일제의 질곡으로부터 자유를 찾음과 동시에 분단이라는 멍에를 동시에 몰고 왔다. 더욱이 일제에 의해 국내의 발판을 모두 잃어버린 독립운동 세력은 아픔을 넘어 절망적 현실과 부딪히게 된다. 또한 타의에 의해 씌워진 이념의 굴레와 청소하지 못한 일제의 앙금은 또 다른 시련으로 역사를 정지시켰다. 광복 이후 가치의 혼돈에 휩싸여 괴로워하는 어느 독립운동가의 넋두리를 보자.

  “오천년 조국 잃고 사오 십년 일평생을/남북만주 거친 산중 눈 속에 잠을 자며/원수의 총검 아래 수천 동지 희생되고/구사일생 홀로 남은 이내 몸이/이리저리 다니다가 해방 조국 차자오니/주출망량(晝出魍魎) 뛰어놀며 골육상잔 일삼으니/이것도 해방의 공덕(功德)일까/가련타 칠십 평생 피땀 밑에 남은 공로 저기 저 모양일까/두어라 북빙양(北氷洋) 서반구(西半球) 모진 바람 멎은 후/너도 가고 나도 가면/금수강산 자유종을 울릴 때에 우리 동지 모여/독립한 채 높은 집 축하 술잔 높이 들고/자유 만세 고함 소리 정말 해방이 이 아닐까/어헐너루 상사로다.”

희산 김승학의 「자탄가(自嘆歌)」라는 노래다. 필자가 지면에 처음으로 소개하는 글이다. 김승학은 만주와 상해를 오가며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임시정부 주만참의부 참의장, 임시정부 학무부총장, 상해 『독립신문』 사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의 거두였다. 김승학은 생사의 현장에서 풍찬노숙을 하며 살아남은 독립운동가다. 그리고 구사일생으로 해방된 조국을 찾았다.

김승학이 맞닥뜨린 해방 직후의 조국은 이념 갈등의 진창이었다. 그 공간은 자칭 애국지사가 넘쳐나고 이념의 이해관계 속에 골육상잔으로 피가 튀겼다. 김승학은 이것이 해방이 가져다 준 결과라는 것에 탄식했다. 나아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자신마저도 부끄러워했다. 위의 시에서 사라져야 할 ‘너와 나’는 바로 그러한 부류들이다. 자화자찬하는 애국지사, 이념에만 함몰된 애국지사, 나아가 친일의 가면을 숨긴 사이비 애국지사들이 그들이다. 마음을 더 아프게 하는 것은 그 뒤에 이어진다.

  “을유 팔월 십오 일 후 국토광복 되었다고/춤을 추며 환국하자 기술 없다 박대하니/옷밥 없는 가련 신세 이 곳 저 곳 천대로다⫽닉구사구 걸머지고 가도(街道) 행상 떠나거나/부두 노동 날품팔이 하루 하루 벌이로다/아들 손자 있건마는 학비 없어 공부 못코/구두닦이 신문팔이 한평생을 보낼쏜가⫽늙은 부모 어린 자손 보리죽도 못 먹이니/고려 말 두문동 칠십 이인 고려 백정 되던 저 신세/너도 나도 복철(覆轍)이다 가련타 이 신세 어이할가⫽이서방과 김선생은 틈을 타서 만나보면/주고 받고 하는 말이 우리들도 독립을 하지 말고/일찍이 구미(歐美)나 건너가서 유리창을 닦았더면”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자조적 탄식이 그대로 터져 나오는 부분이다. 김승학이 한탄한 해방 후의 삶도, 앞의 설문조사 결과와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그가 가진 기술이라고는 독립운동 밖에 없었다. 그의 30년 직업이 독립운동이요 취미와 특기 역시 독립운동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그의 과거가 식민의 그늘이 온존했던 해방 공간에서 그가 천대 받게 된 가장 큰 원인이었다.

어디 빌붙어 먹을 것 입을 것을 해결할 수 없었다. 행상과 부두노동으로 호구지책을 했다. 공부 못시킨 아들과 손자는 구두닦이나 신문팔이 외에는 할 것이 없었다. 백정 신세가 된 두문동 현인(賢人)들의 복철지계(覆轍之戒)를 새기지 않았던 것도 후회하고 있다. 그리고 독립운동 따위 안하고 유럽이나 미국으로 건너가 돈이라도 벌었더라면 하는 후회 섞인 넋두리도 묻어난다. 자조감을 넘어 서글픔마저 엿보게 된다.

일제강점기 조국 독립에 모든 것을 바쳤던 독립운동가들은 누구인가. 독립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이들이다. 가지지 못한 이들은 기꺼이 목숨을 바쳤고, 부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가졌던 이들은 평안과 안락을 스스로 포기했다. 수많은 재산을 바쳐 독립운동에 몸 바친 김교헌 집안, 이회영 집안, 윤세복 집안으로부터 무명의 가난했던 독립운동가들까지, 식민의 공간을 다시 해방의 공간으로 돌리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친 것이다.

김승학도 무엇 하나 다르지 않았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귀영화의 기회도 적지 않게 있었으나, 뒤집힌 세상과의 야합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몸 바친 인물이다. 때로는 무장투쟁의 선봉에서, 한 때는 임시정부의 중심인물로서, 그리고 한 시절 『독립신문』의 사장으로서, 항일을 이끌고 고무(鼓舞)시켰던 김승학이다. 그러던 그였기에 해방 후의 「자탄가」는 너무도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한다. 독립운동의 거목이 해방 공간에서 절망하며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승학이 던져준 마지막 한 마디는 극적 반전을 준다. 그는 후회어린 삶속에서도 끝까지 나라사랑의 뜻을 접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썩어도 준치’아닌가. 비참하리만큼 힘들고 고달프지만 독립운동으로 걸어 온 길을 결코 후회하지 않겠다는 다음 일성이 그것이다.

  “잊지마세 잊지마세 그렇다고 독립정신 잊지마세”

「자탄가」의 마지막 구절이다. 김승학은 마지막 이 구절을 채우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각 없이 함포고복(含哺鼓腹)하는 이 세상에서, 생각하며 배곯았던 때를 고민케 하는 부분이다.
 
지금의 우리는 위와 같은 정신으로 장렬산화(壯烈散華)한 선열들의 희생 위에 서 있다. 우리의 풍요라는 삶의 바탕엔 그들의 목숨과 바꾼 고귀한 씨자본이 숨을 쉰다. 이제 우리는 그들에 대한 채무변제에 대해 자문할 때 아닌가. 그러나 채무변제는커녕 그러한 삶을 대물림시킨다는 이 조국이 너무 부끄럽다.
 
먼저 간 독립운동 선열들은 조국의 오늘을 무어라 말할까. 그들도 김승학처럼 죽어서도 말할 듯하다. 오직 한 마디, “후손들이여, 독립을 위해 택한 떳떳한 길 위에서, 주인으로 살려고 함이 너무 힘들고 어려웠다. 그러나 후회없노라.”고.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195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대학에서 행정사를 전공하였고, 한신대학교 강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국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저술로는 『단조사고』(편역, 2006), 『종교계의 민족운동』(공저, 2008), 『한국혼』(편저, 2009), 『국학이란 무엇인가』(2011), 『실천적 민족주의 역사가 장도빈』(2013)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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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소나무 (qnseksrmrqhr) 2017-08-26 12:25:51
소식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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