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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 일제에 탄압받고 '냉전과 전쟁의 최대 피해자'돼대종교 환국 71주년 학술회의, 해방후 대종교 본격 조명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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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8.15  23:4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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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종교는 14일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광복이후 대종교 환국과 한국현대사'를 주제로 대종교 환국 제71주년 기념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광복 72주년을 맞아 특별한 학술회의가 열렸다. 대종교 환국(還國) 71주년을 기념해 ‘광복이후 대종교 환국과 한국현대사’를 주제로 대종교가 1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학술회의를 개최한 것.

일제시기 전반기에 총본사를 만주로 옮겨 독립운동의 주류를 이루며 청산리대첩의 금자탑을 쌓아올린 대종교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2월 28일 환국해 위세를 떨쳤지만 세를 잃게 된 과정을 처음으로 조명하는 학술회의다.

‘대종교와 한국 근현대사’를 주제로 첫 발표에 나선 정영훈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대종교총본사 환국기념’ 사진(1946.6.16)을 예시하며 이시영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비롯한 각료급 5명, 당시 대종교 총전교인 윤세복은 물론 김교준 등 이후 총전교가 되는 인물들, 그리고 한글운동의 핵심인물로 월북해 북한 초대내각 무임소상을 맡은 이극로 선생 등 쟁쟁한 인물들이 포함됐다고 짚었다.

또한 역사적으로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한 안재홍, 이극로, 명제세, 윤기섭을 비롯해 남북협상에 참여한 조완구, 이극로, 윤기섭, 김두봉 등도 모두 대종교인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참여한 사실상 친이승만 단독정부를 지지한 우파인사들도 상당수가 있었다. 이시영 부통령과 이범석 국무총리, 안호상 문교장관, 신성모 국방장관, 정인보 감찰위원장, 명제세 심계원장 등이 그들이다. 이에 반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참여한 대종교인들로는 김두봉과 이극로가 대표적이다.

   
▲ 정영훈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환국기념 사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정영훈 교수는 발표문을 통해 대종교의 침체 원인으로 임오교변(1942) 등 일제시기 철저한 탄압과 해방후 냉전과 전쟁의 최대 피해자가 된 점, 독재정권과 친일파세력의 대종교 배척 등을 꼽았다. 이외에도 △서구중심주의 사상의 보급, △탈민족주의 확산, △인물난과 재정난, △교단의 분열을 지적했다.

이숙화 외국어대 강사는 대종교가 환국 직전인 1942년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던 ‘임오교변’을 주제로 ‘환국 직전의 대종교’를 분석했다. 1920년 청산리전투 이후 일제의 말살정책으로 영안, 밀산 지역 등을 전전하며 교세가 축소된 대종교는 일제의 만주국 시기 다시 기지개를 켰지만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과 대종교 총본사 간부 전원을 체포한 임오교변(壬午敎變)으로 사실상 맥이 끊기다시피 한 상태에서 해방을 맞았다.

이숙화 강사는 국내에서 발생한 조선어학회 사건과 임오교변이 대종교 3대교주 윤세복이 조선어학회 간사장 이극로에게 <단군성가> 작곡가 주선을 의뢰한 편지를 일제가 빌미삼아 발발했고, 이극로가 윤세복에게 보내려는 편지 <널리펴는 말>을 날조해 대종교 간부들의 체포 구실로 삼았다며 연관성에 주목했다. 결국 10명이 일제의 고문으로 사망, 임오10현(壬午十賢)으로 추서됐고, 8월 12일 소련군의 진입으로 옥문이 열리면서 생존 출감한 이는 6명에 불과했다.

고병철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는 ‘해방 이후 대종교 환국과 교단 재건’을 주제로 발표, 해방후 ‘종교단체’로 환국해 단기(檀紀) 연호를 제정하고 개천절을 국경일로 지정하고 홍익대학을 운영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1960년대 사실상 쇠락한 과정을 제시했다.

고 연구원은 “1949년 6월 이후 국가보안법이 본격 가동되고 좌우익 갈등이 우익의 주도권으로 정리되고 한국전쟁으로 정인보, 명제세, 안재홍, 정열모 등이 납북되면서 대외적으로 활동량이 축소”됐다며 “이승만 정부 시기 우익의 주도권 확보와 한국전쟁”을 주요 변수로 정리했다. 이 외에도 “기독교 우위 정책”을 꼽았다.

   
▲ 대종교가 광복 이후의 대종교를 재조명한 것은 사실상 처음이다. 홍수천 총전교 등 대종교 간부들이 이날 기념식과 학술회의에 참석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박용규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는 ‘환국 이후 대종교 인사들의 정치 활동’을 주제로 발표에 나서 ‘통일 민족국간 건설 운동’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참여한 내용을 상세히 다뤘으며, 특히 대종교 인사들을 △좌우합작 노선의 인사, △합리적 보수 인사 △극우 인사로 분류했다.

좌우합작 노선의 인사로는 이극로, 안재홍, 윤세복, 조완구, 정열모, 이병기, 김두봉을 들었고, 합리적 보수인사는 “대다수가 여기에 해당한다”며 이시영, 정인보, 김승학, 이동하, 황학수, 조성환, 박찬익, 김영숙, 안호상, 이범석 등을 꼽았다. 극우 인사로는 “이승만의 독재정치를 옹호”한 신성모를 예시했다.

최윤수 대종교 삼일원장은 ‘대종교 환국의 종교적 의의’를 주제로 발표, 60년대 초까지 50만, 30만으로 추산되던 대종교 신도수가 “1970년대 제도권 교육이 정착되고 산업화 되면서 대종교는 급격히 위축”됐다며 “고유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선불교나 선교, 신교, 또는 한얼교 등의 여러 종단으로 흩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학술회의에 앞서 진행된 ‘대종교 환국 71주기 기념식’은 홍수철 대종교 총전교가 개회사를, 김영두 대종교 종무원장이 인사말을 했으며, 박우균 한국민족종교협의회 회장과 도천수 단군민족평화통일협의회 상임공동대표가 축사를 했다. 또한 33구의 강제징용희생자 유해를 모셔온 일본 도쿄 국평사 주지 윤벽암 스님도 자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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