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지역에서 활동하던 장기수 이준원 선생이 7일 오후 2시 30분경 별세했다. 향년 83세. 고인은 타계하기 전까지 관절염을 앓아왔다.

고인은 1935년 1월 16일 함경남도 함주군 학이천면 은봉리에서 부친 이낙선, 모친 김병녀의 8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 2013년 생존해 있을 때 이준원 선생의 모습. [통일뉴스 자료사진]

모친과 삼촌이 반일단체에 가입해 야학을 하는 집안 분위기 속에서 고인은 자랐다. 특히 모친은 해방 후 웅변대회에서 1등을 할 정도로 사회활동을 열심히 했으며, 리 인민위원장 후보로 나섰다가 ‘여자가 정치에 나서면 안 된다’는 당시 사회분위기로 인해 포기했을 정도로 활동적이었다고 한다.

함주 상통중학교 졸업 후 농사를 지었으며, 1953년 1월 인민군에 입대, 1958년 조선노동당에 입당했다.

1963년 인민군 특수정찰임무로 소환돼 개성~서울 간 밀로 개척사업을 하다가 임진강 건너 남측 노고산에 들어왔다가 민간인에 발각돼 그해 9월 30일 방첩대에 체포됐다.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돼 15년형을 받았다.

징역 확정 후 10월경 고인은 법원 대기실에서 1961년 8월 넘어와 구속되어 있던 황태성 밀사와 우연히 마주치기도 했다.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됐다가 비전향장기수 양희철 선생과 같은 방을 썼으며, 그곳에서 2000년 9월 북송된 비전향장기수 김석형, 안영기, 최하종, 장병락, 조창손 등과 만났다.

1965년 대전형무소로 이감됐으며, 73년 박정희 정권의 야수적인 전향공작 때 강제로 전향 당했다. 1979년 1월 25일 대구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했다.

출소 후 고인은 대구와 달성군으로 주거가 제한된 상태에서 갱생보호소와 목공소 등을 옮겨 다녔으며, 그 해 8월 수형 시절부터 후원하던 교회 권사의 소개로 도봉순을 만나 결혼했다.

남측으로 내려오기 전 북측에선 1960년 결혼해 딸을 낳았으나 홍역으로 잃고, 남측에서 붙잡힌 후 지인으로부터 북에서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은 고인에 대해 “목공 일을 잘 하셨다. 아주 성실하고 인간적인 분이어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신임을 받았으며 사람들이 모두 탐냈다”면서 “대구경북양심수후원회에서 활동하며 장기수 선생님들을 돌보았다”고 회고했다.

빈소는 대구 남구 드림병원 장례식장. 8일 오후 7시 30분에 추도식을 거행하며 9일 오전 8시에 발인한다.

장지는 대구 현대공원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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