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의 ICBM 발사와 이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응, 그리고 미국의 반응 등이 연일 뉴스에 보도되고 있다. 드디어는 트럼프가 “전쟁이 일어나도 저쪽(한국)에서 나고, 저쪽 사람이 죽는 것”이라는 막말까지 했다고 하는데, 공식적으로 한 말이 아니고 미 상원의원의 전언이므로 어느 정도까지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그런 가운데 우리 정부의 대응은 납득이 잘 안 간다. 사드의 추가배치를 서둘러 한다는 것인데, 북이 ICBM을 남을 향해 쏠 것도 아닌데 사드 배치를 하는 것은 이치상 맞지 않는 것 아닐까? 별 뾰족한 대응 방침이 없는 우리 정부로서야 뭔가 하기는 해야 하니까 그런 대응을 한 것 같은데 아무튼 논리적으로는 이상한 것이다.

이러한 우리 정부의 대응에 대해서는 미국에 추종하는 행태라는 비판에서부터 남북대화를 기피하는 북에 대해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라는 옹호, 그리고 국제정세의 냉엄한 현실을 직시한 현실적 대책이라는 평가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 글에서는 정책의 잘잘못이나 그에 대한 호불호를 평가하기보다 그러한 정책, 그리고 그에 대한 호불호가 어디에서 오는지를 역사를 통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또한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해보도록 한다.

우리 조상들은 아주 오랫동안 중화주의에 물들어서 살았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고전소설 중 영웅소설만 보아도 대번에 알 수 있다. 물론 국민 모두에게 가장 친숙한 ‘홍길동전’은 우리나라 사람이 주인공이고,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외에 ‘조웅전’, ‘유충렬전’ 등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대표적인 영웅소설만 보아도 송나라, 명나라가 이민족의 침입을 받을 때 그 나라와 천자를 위기에서 구하는 영웅들의 이야기이다.

왜 그런 소설을 우리나라 사람이 짓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읽고 좋아했는지 의아하기 이를 데 없다. ‘용문전’이라는 소설을 보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호국(胡國)) 출신인 용문이 천명(天命)이라는 명분 아래 호국을 배신하고 명나라를 위해 싸운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는 유교 윤리까지 저버리고, 그야말로 중화주의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상들의 사대주의적 사고는 물론 소설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병자호란 이후 북벌론이라는 것이 대명(大明)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은 이제 많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바이다. 우리가 왜 중국의 한족(漢族)을 위해 싸워야 하고, 그들이 중국 대륙을 다시 차지하는 것이 어째서 우리에게 목숨을 걸 만큼 중요한 것인지 정말 납득하기 힘들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 중 상당수, 특히 지식인층인 사대부 무리들은 그렇게 생각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수용하면서 살아갔다.

하지만 그런 조상들을 비난할 자격이 과연 우리에게 있는 것일까? 우리는 지금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고, 그 나라에 전시작전권을 맡겨 놓은 채로 64년을 지냈다. 물론 이것은 정전협정 이후를 말하는 것이다. 그 이전의 전쟁 기간과 군정 기간까지 친다면 70년이 넘는 세월이 그렇게 지나갔다.

하지만 그것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달리 생각할 수 있으므로 일단 논외로 해보자.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기간을 거치면서 우리가 철저하게 미국중심주의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조상들이 섬기던 중화, 즉 중국이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 강한 자를 위해 자신의 혼마저 바치는 삶은 그리 다르지 않다.

특히 이런 생각이 이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 역시 조상들의 중화주의와 상당히 닮아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중화주의가 미국중심주의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당시 여당 사무총장을 했던 이방호라는 사람은 이런 발언을 했다. “미국이 어떤 나라냐, 지금 세계의 모든 국민들은 두 개 나라를 갖고 있다고 한다. 하나는 모국이고 하나는 미국이라고 그런다.” 귀를 의심하게 하는 발언이다.

그러나 이 발언은 이 사람 개인만의 생각이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충분히 느끼고 있다. 다만 그런 생각을 이렇게 공공연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중화주의가 판치던 시대와 다르다면 다르다고 할까?

이렇게 이야기하면 작은 나라가 생존하기 위한 숙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말하자면 현실주의라는 것이다. 일리가 전혀 없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중국이라는 강대국 옆에서 살면서 그들과 공공연하게 적대적 관계로 살 수 있었겠는가? 현대사회에서 미국과 공공연하게 등을 지면서 과연 살 수 있겠는가?

사실 유엔 안보리의 상임이사국 5개국이 거부권을 갖고 있는 것, 이들만이 핵무기를 가질 권한을 갖고 있는 것 등이 다 현실주의에서 나온 것이다. 이들 5개국은 핵무기를 가질 수 있고, 다른 나라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은 현실주의 이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특히 이 중 미국의 위치는 특별한 것이었다. 미국은 중동과 중남미 등에서 자신의 이익과 배치되면 명분마저 무시하고 군사적 행동을 해왔다. 그리고 그들의 이익과 일치하는 이스라엘의 핵무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이것 역시 이들을 비난하기에 앞서 현실주의라는 면에서 대다수 국가들이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주의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으로 주변 강국을 나누고 우리가 어디에 붙어야 하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해양세력에 붙어서 오늘의 풍요로운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대륙세력에 붙었으면 우리의 현실은 비참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러한지는 따져 봐야 하지만, 자신의 힘이 없이 강한 자만 좇아가다가 식민지가 되어 버리고, 강대국에게 배신당한 쓰라린 과거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구한말의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힘이 있는 나라들과 잘 지내는 것은 좋지만 그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려고 한다면 결국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그들의 배신뿐이다. 그들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만 행동하기 때문이다.

사실 해양세력에 붙어서 우리가 지금처럼 될 수 있었다는 논리는 결국 일제 강점기 때의 친일이 옳았다는 이야기를 에둘러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타국과 관계를 설정할 때 현실적인 이득을 취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것을 부정하면 안 된다. 그러나 현실적인 이득이 맹목적인 굴종이나 추종이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실적인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그렇지 못한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선에서 강대국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과연 무엇이 현실적인 것일까? 여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현실이라는 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변하는 것이다. 지금 현재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현실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현존이라고 일컬어야 한다. 현실이라는 것은 과거의 영향을 받아서 미래로 향해 가는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동적으로 현실을 보아야 한다.

전근대사회의 중화주의가 요지부동이었던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세종은 중화인 명나라를 ‘지성(至誠)’으로 ‘사대(事大)’해야 한다는 말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과 우리의 말이 달라서 한글을 만들어야겠다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공포하기까지 하였다. 광해군이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시도했던 것도 이제는 널리 알려진 일이다. 또 실학자들 중 상당수가 중국에 대한 자주성을 주장하였다.

고전소설 중에 ‘최고운전’이라는 작자 미상의 소설이 있다. 조선 후기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신라 말기의 천재 유학자 최치원이 주인공인데 중국 황제의 횡포에 맞서 오히려 그를 혼쭐내는 그러한 내용이다. 앞에서 중화주의에 물든 소설들을 보았지만 그 반면에 이러한 소설도 창작되었고 읽히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조선 후기는 명나라가 쇠퇴하고 ‘중국’이 아닌 ‘대국’이지만 ‘오랑캐’로 일컬어지던 청나라가 일어나던 시기였다. 결국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망시킨다. 그러한 변화 속에서 우리의 조상들 중에서는 변화하는 현실을 간파한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항상 내부의 투쟁을 동반하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소중화주의에 패배하기도 하였지만, 우리의 자주성은 계속 향상되어 나갔다. 그리고 그것을 인식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 갔다.

앞에서는 중화주의와 미국중심주의가 다를 바 없다고 하였지만 사실은 그렇지는 않다. 이전의 중화주의처럼 지금 공공연하게 미국을 숭배하는 사람은 없다. 교묘하게 할 뿐이다. 그리하여 지금은 미국을 ‘사대’하는 것이 아니라 ‘동맹’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마치 둘 사이가 평등한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사실 결정적인 문제에서 우리는 우리 이익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하게 은폐되어 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미국과 우리의 이익이 어긋나는 점이 많을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것은 미국의 위상이 쇠퇴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지금 미국은 우리에게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배타적인 관계를 맺어야 할 만큼의 절대적인 존재는 아니다.

물론 미국의 힘은 여전히 강하다. 하지만 미국 중심주의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정책을 결정할 때 우리는 병자호란 당시의 ‘삼전도의 굴욕’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지금의 국제 정세는 강대국간의 역관계가 유동적인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냉철하게 보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점이 있다. 결국 현대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이고 국민대중의 힘에 의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사회이다. 물론 이것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 부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주객관적 조건이 있다. 지금 우리 국민 대중의 대미 인식역시 이전과는 상당히 다르다. 맹목적으로 미국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던 때와는 상당히 달라졌다는 말이다.

거기에는 단순히 상황의 변화만이 아니라 오랜 세월 지난한 과정을 겪으면서 그것을 위해 앞장서서 실천해 온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거치면서 우리는 미국이 독재정권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나라임을 알기 시작했다.

앞에서 ‘용문전’이라는 소설을 보았지만, 중화주의는 ‘천명’이라는 것을 내세우며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인 불사이군이라는 유교 윤리마저 저버린다. 마찬가지로 미국을 추종하는 이들은 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자유의 나라’ 미국이 독재를 옹호한다는 것을 애써 외면한다.

미국은 ‘자유’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자유’를 억압하는 독재를 지원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랬고, 중남미 중동 등에서 그랬다. 그 결과 미국에 대한 허상이 대중적으로 상당히 깨지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이 지키려는 ‘자유’는 사실은 ‘미국의 이익’이었고, ‘자유주의’는 ‘미국중심주의’일 뿐이었다.

그 후 지난한 민주화 투쟁 과정 속에서 우리는 이제 미국이 우리 민족의 이익과 심대한 충돌을 빚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미국은 한미일 동맹이라는 미명 아래 우리의 이익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까지 강요하고 나서고 있다. 한미일 동맹이라는 것은 또 다른 강대국인 중국과 러시아를 적으로 만드는 것이므로 전쟁의 위험 속에 우리를 몰아넣는 것이고, 우리 민족의 통일을 더욱 멀게 만드는 것일뿐더러, 군국주의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아직도 국민대중의 정서 속에서 거부감이 일고 있는 일본과 무조건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변화하는 상황에 맞지 않는 비현실적인 일일 뿐만 아니라 국민대중의 의식과도 괴리되는 일인 것이다.

조선 후기에 선각적인 조상들이 중화주의를 거부하고 나섰듯이 이제 우리는 미국중심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이제 미국중심주의로는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올바른 대응을 할 수 없을뿐더러 나날이 달라지는 국민대중의 의식에도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우리 조상들이 중화주의를 거부하면서도 새로운 ‘대국’을 거부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식민지로 전락하였다면, 우리는 미국중심주의에서 벗어나서 올바른 자주적인 국가의 길을 가야 한다. 그것은 국민대중의 힘으로 가능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변화하고 있는 국민대중의 의식에 부합하는 길이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의 이익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 사드 배치를 저지해야 하며, 한미일동맹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나아가되 그들이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것에 끌려가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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