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고...'. 스러져가는 '통일의 집'을 지난 17일 <통일뉴스>가 방문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고..' 목은 이색의 싯구가 떠올랐다. 서울시 도봉구 수유동 251-38번지. 골목 끝자락 흰색 문설주 위에 걸린 '통일의 집'. 바로 늦봄 문익환 목사와 부인 봄길 박용길 장로가 마지막까지 기거한 집이다.

늦봄과 봄길이 떠난 '통일의 집'을 지난 17일 <통일뉴스>가 찾았다. 4.19민주영령이 안식하고 있는 4.19민주묘지를 향하는 길목. '통일의 집'을 가리키는 표지판은 녹이 슬었다. 표지판을 따라 걸음을 옮기자 골목 끝 '통일의 집'이 한눈에 들어왔다.

문 목사의 부모 문재린 목사와 김신묵 여사가 이 동네를 왔다가 마음에 들어 정착한 집은 1960년대에 지은 단층 주택으로, 상공부가 당시 관사로 활용하려고 지었다고 해 '상공부 주택'으로 통했다. 

1970년대 문 목사 가족들이 이사했다. 1994년 문익환 목사 사후, 홀로 거주하던 박용길 장로를 위해, 1997년 건설노동자들이 붉은 벽돌집은 흰 색으로 칠하고, 지붕에 창문을 내는 등 수리를 했다. 

'누구나 통일을 논의할 때 쓸 수 있는 공간'이라는 뜻의 '통일의 집'은 문 목사 사후 박용길 장로가 붙인 이름이다. 

▲ 녹슨 표지판이 '통일의 집'을 안내하고 있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2011년 박용길 장로 소천 이후 방치된 '통일의 집'.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박 장로 생전 방문한 적이 있던 기자는 '통일의 집'을 바라보자, 꼿꼿이 서서 주름진 얼굴로 어서오라 손짓하는 박 장로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잠시. 대문을 열고 들어간 '통일의 집' 마당은 풀만 무성했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축대는 쓰러지려 했다. 집안에 들어서자 곰팡내와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문 목사가 생전에 책을 읽고 글을 쓰던 안방에는 수많은 선물과 상패, 유품들이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한 듯했다. 문 목사의 부모가 살았고, 훗날 '기도하는 방'으로 쓰이던 방은 정리되지 못한 창고였다. 세 아들이 살고, 후에 박 장로가 기거하던 방은 수많은 상자가 차지하고 있었다. 

문 목사가 책상머리에 두던 장준하 선생의 사진액자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각계에서 받은 유묵은 겹겹히 쌓여 먼지가 앉았다. 박 장로가 직접 쓴 각계 인사의 전화번호판은 역사를 증언했지만, 그냥 끄적인 종이로만 남았다. 2만 5천여 점에 달하는 유품은 삭고 있었다.

그 누가 이곳이, 문 목사 내외와 동지들이 민주화와 통일을 논하던 곳이라 생각할 수 있으랴. 주인없는 집은 사실상 방치된 상태. 집안을 둘러보니 '아이고' 소리가 절로 가슴을 쳤다. 개미와 좀벌레가 제집 삼아 돌아다니는 것이 눈에 띠자 억장이 무너졌다.

북간도 명동촌에서부터 이어온 밥 한 숟갈을 50번 씩 씹으라는 말을 열심히 실천하며, 민주와 통일을 토론하던 문 목사 가족의 밥상머리 교육의 장은 온데간데 없었다. 2011년 박 장로의 소천과 함께, '통일의 집'은 모두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리고 '통일의 집'은 폐허의 길을 걸었다.

▲ '통일의 집' 내부. 박용길 장로가 정리해 둔 모습 그대로이지만, 먼지가 켜켜이 쌓였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통일의 집' 안방. 2만 5천여 점에 달하는 유물 보존 및 정리가 시급하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문 목사 사후 박용길 장로가 기거한 방은 상자들로 가득했다. 정리된 듯해보이지만, 상자 속 유물은 삭는 중이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집에서 만난 문영미 '이한열기념사업회' 학예연구실장과 김준엽 '문익환 통일의 집' 사무국장은 연신 안타까움을 보였다. 이 두 사람은 오는 2018년 6월 1일 문익환 목사 탄생 100돌을 맞아 '통일의 집'을 박물관으로 탈바꿈해 시민들에게 돌려주려 한다. 

문영미 실장은 "가옥이 너무 낡아서 많이 훼손될 위기이다. 화급하다. 사료들이 잘 보관되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자료가 분실된 것이 한둘이 아니다. 사료들이 처박혀있다"며 "집을 소독하고 자료를 제대로 정리하고 사람들이 와서 볼 수 있도록 하려면 엄청난 예산과 공간이 필요하다. 시작이라도 해야 하는데 아직 어려운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김준엽 사무국장도 "통일 등과 관련한 사료가 2만 5천여 점이다. 우리사회의 가치이자 유산이다. 그런데 방치되어 있다"며 "이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탓으로 넘길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문제의식을 가져야 하는 부분"이라고 '통일의 집' 보존의 시급성을 알렸다.

'통일의 집'을 어떻게든 살리려는 이들의 아쉬움은 '그래도 비는 안 샌다'라는 위안만이 묻어있었다. 문 목사와 박 장로의 숨결이 담긴 89.97㎡의 '통일의 집'이 '비는 안 새는' 데 만족해야 하는 탄식.  이 탄식이 과연 몇 사람만의 것이어야 하는가.

▲ 정원철 추계예대 교수가 제작한 문익환 목사 초상화.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박용길 장로 생전에 걸린 문 목사 관련 액자만이 예전 '통일의 집'을 떠오르게 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차디찬 거리에서 이뤄낸 촛불혁명으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문 목사가 꿈꾸고 박 장로가 그리던 민주.평화.통일의 세상이 이제 다시 시작된다는 기대감에 시민사회는 잔뜩 부풀어 있다. 하지만 '통일의 집'을 둘러보며 시민사회가 정작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를 떠올렸다.

문익환 목사 탄생 100년인 2018년 6월 1일을 기념해 '통일의 집'을 박물관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지난해 '사단법인 통일의 집'(이사장 최찬환)이 설립됐다. 하지만 아직 시민사회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탓인지 어려운 상황이다. 

의구한 '통일의 집'을 지키고 보존하는 '인걸'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흩어진 민주.평화.통일운동가들 그리고 시민들이 뜻을 모으면 문익환.박용길의 꿈은 되살아날 수 있다.

'통일의집' 후원은 아래 주소를 클릭하면 된다.
http://문익환.닷컴/board/write.html?pid=101&fno=3

▲ 박용길 장로가 직접 쓴 전화번호판. 고은, 임종석, 장영달, 함세웅 등의 전화번호가 빼곡히 적혀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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