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 70주기인 19일 북한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는 '반일애국지사, 통일애국인사로 영생하는 몽양 려운형 선생'이라는 제목으로 전날에 이어 추모기사를 연재했다.

사이트는 1946년 2월 11일 남한에서 좌우합작 운동을 벌이던 여운형 선생이 평양을 방문해 고 김일성 주석을 처음으로 만나 건국사업에 대한 의견을 나눈 일화에서부터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흉탄에 쓰러진 후 김 주석이 오랜 세월 그를 잊지 않고 추모한 일들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첫 만남에서 김 주석은 "우리는 맞지도 않는 다른 나라 옷을 입을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맞는 조선식 옷을 만들어 입어야 한다"며 여운형 선생에게 '민주주의적인 통일전선' 사업을 제안했고 이에 여운형 선생은 인민당 당수로서 민주세력의 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투쟁했다고 사이트는 설명했다.

사이트에 따르면, 여운형 선생의 서거소식이 알려진 후 김 주석은 자신을 대신해 민전 대표를 조의 대표로 보내 조사를 하도록 했고 이듬해인 1948년 7월 19일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결성 1돌 기념대회에서도 여운형 선생을 추모하도록 했다.

여운형 선생의 부탁에 따라 그의 자녀인 여연구, 여원구를 자신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했으며, 1979년 1월 1일에는 다시 그 자녀들을 불러 위로하느라고 신년사가 5분 늦어진 일이 있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이때까지 청진과 함흥에 나뉘어 살던 형제들은 얼마 후 김 주석이 평양 하신거리에 4세대의 아파트를 마련해주어 함께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김 주석은 1991년 11월 25일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제2차 토론회에 북측 대표단 단장으로 참가한 차녀 여연구가 44년만에 서울 우의동에 안치되어 있는 아버지의 묘소에 성묘를 하러 갈 때에는 '고 몽양 려운영 선생을 추모하여 김일성'이라는 글귀와 함께 화환을 보내기도 했다.

아직도 논란이 분분한 암살 배후에 대해서는 당시 여운형 선생의 활동이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던 미군정에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미군정이 테러분자를 사주해 백주대로에 서울 한복판에서 선생을 암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암살 사건 직후 경찰은 평안북도 출신의 19세 소년 한지근을 범인으로 발표했으나 배후는 밝히지 못했고 이후 1974년 2월 공소시효가 지나자 극우단체인 백의사로부터 권총을 받아 몽양 암살에 가담했다는 유순필, 김흥성, 김훈, 김영성 등 인물이 나섰지만 이때도 배후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우리민족끼리TV>도 이날 공개한 '영생하는 통일애국지사의 삶'이라는 동영상에서 여운형 선생의  '몽양'이라는 아호는 '민족의 운명과 자기의 인생을 비춰줄 태양을 꿈속에서도 그린다'는 의미로 지었다고 소개하면서 김 주석이 40여년 전에 세상을 떠난 여운형 선생을 잊지 않고 1990년 조국통일상을 추서했으며, 그의 인생을 주제로 한 '해빛이 그리워'라는 예술영화도 만들도록 했다고 전했다.

김 주석 사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여운형 선생의 활동 기록을 조선혁명박물관의 '수령님과 전우관'에 전시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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