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내 가슴에 비가 내리네(베를렌느)


 점
 - 네루다

 아픔보다 넓은 공간은 없다
 피를 흘리는 아픔에 견줄만한 우주도 없다.


 얼마 전에 17살 미성년 소녀가 7살 초등학교 2학년 여아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한 사건이 있었다.   

 우리는 모두 경악하지만 사실 ‘일어날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우리는 남의 아픔에 공감하지 않는다.

 몇 년 동안 암 투병을 한 분이 말한다.

 병문안 오는 사람들이 너무나 싫었단다.

 진정으로 자신의 아픔에 공감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위로하는 ‘잔혹한 모습’이 견딜 수 없었단다.

 우리는 남의 아픔 앞에서 ‘악마의 웃음’을 짓는다.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우리 사회를 휩쓸면서 ‘나부터 살고 보자!’가 삶의 지침이 되었다.    

 남의 아픔에 공감하지 말아야 겨우 생존할 수 있는 잔혹한 세상.

 우리는 일상에서 느낀다.

 우리는 하루 종일 수없이 남과 부딪친다. 그때마다 무심히 각자의 길을 간다.

 우리 가슴 속엔 ‘살의(殺意)’가 커 간다.

 우리 가슴 속의 살의가 모이고 모여 누군가가 그 살의를 실행에 옮긴다.

 살인자들은 우리의 속마음을 실천한 사람들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살인자들을 향해 돌멩이를 던진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는 누군가가 살인을 해야 한다!

 가끔 죽었다 살아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3일장의 풍습이 생겼다는 설도 한다.

 그럼 병원 냉동실에 갇힌 죽은 자는 다시 살아 날 수 있을까? 

 만일 죽은 자가 희미하게 의식을 회복한다면?

 사람들은 말한다.

 “다시 살아난다면 후손들이 싫어할 거예요. 이미 유산 상속이 다 정해졌을 텐데요.”   
 
 한 사람의 아픔이 점 하나로 사라져 버리게 하는 우리 사회는 얼마나 무서운가!

 점 하나의 비명 소리는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점 하나가 되어 절규하는 사람의 ‘아픔보다 더 넓은 공간은 없다’. 

 그의 ‘피를 흘리는 아픔에 견줄만한 우주도 없다.’

 나는 오래 전에 모 전철역 3층에서 점 하나가 되어 절규한 적이 있다.    

 아무도 내 비명소리를 듣지 못했다.
   
 나의 절망스런 눈빛을 다들 눈앞에서 보고도 보지 못했다.

 다행히 아내가 와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그 때를 생각하면 내 가슴 속에서 눈물이 흐른다.

 우주만큼 넓은 내 아픔이 점 하나가 되어 누구의 눈에도 뜨이지 않았던 경험.  

 누구나 있을 것이다.

 이런 경험을 하고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내가 살인을 하지 않고 사는 건, 그래도 나는 삼시 세끼를 먹고 살 수 있는 따스한 가정이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주변에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 사람은 무슨 힘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그가 살인을 한다고 해서 어느 누가 그에게 돌멩이를 던질 수 있을까?
 
 (돌멩이를 던질 수 없어 우리는 그를 정신병자로 만드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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