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정상회담,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 그리고 ‘신베를린선언’과 G20 정상회담 등이 이어진 지난 열흘 남짓의 나날은 한반도평화와 관련된 문재인정부의 기대와 희망, 현실과 한계가 착종한 시기였다.

“국제사회의 합의가 쉽지 않고,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인 우리에게 합의를 이끌어낼 힘도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는(조선일보 2017.7.11.) 문 대통령의 말 그대로 한반도가 처한 현실의 벽과 무게가 그만큼 무겁고 복잡하다.

신베를린선언: 햇볕정책의 진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 대통령은 일련의 국제외교무대에서 기대 이상으로 한반도호의 ‘운전자’다운 면모를 보였다. 문재인정부의 한반도평화 구상과 로드맵이 담겨 있는 ‘신베를린선언’에는 북핵문제에 대한 견정한 해결의지와 국내외의 강경한 대북여론을 끌어안으려는 신중한 배려와 균형감각이 깊게 배어 있다.

무엇보다 신베를린선언을 통해 문 대통령은 북한의 ICBM 발사에 대해 “매우 실망스럽고 대단히 잘못된 선택”이라고 비판하면서도 ‘북한 붕괴 불원, 흡수통일 불추진, 인위적인 통일 불추구, 대북적대시정책 불추구’ 등의 이른바 ‘대북 4노(No) 원칙’의 기조를 재확인하고, “군사적 긴장의 악순환이 한계점에” 이르렀기 때문에 더욱 더 ‘대화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는, 대화를 통한 평화 추구의 원칙적 입장을 분명히 천명했다.

반면 문 대통령은 ‘북한체제의 안전을 보장하는 한반도비핵화’와 ‘항구적 평화체제 수립’의 도정에서 “북한이 핵 도발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더욱 강한 제재와 압박”에 나설 것이며 심지어는 “한반도의 평화와 북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강력한 압박의 의지도 동시에 드러내 보였다. 많은 논란을 야기함에도 불구하고, 이 주장에는 두 가지 포석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압박과 대화의 병행, 즉 ‘더 많은 대화’를 위해 ‘더 많은 압박’을 구사하려는 전술적 배합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미국의 압박정책에 동조하기 때문에 (미국과 보수층의) 남북대화 재개에 대한 반발도 잠재울 수 있다”(한국일보 2017.7.8.)는 청와대 관계자의 한마디로 요약된다.

또 하나는 기존의 압박 일변도에서 대화와 관여를 강화하는 정책적 변화만이 아니라 대북정책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서도 고려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20년간 지속된 서독의 동방정책처럼 ‘정권이 바뀌어도 국민의 지지와 국제사회의 협력을’ 얻을 수 있는 대북정책의 초석을 놓기 위해 국내외 강경여론을 끌어안는 배려가 대북압박 강조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김대중·노무현정부 시기의 소위 ‘포용정책 1.x’ 시기에 대한 문재인정부 나름의 성찰의 산물이다.

‘더 많은 압박’으로 ‘더 많은 대화’(?)

그러나 신베를린선언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 의미 부여와 국제외교무대에서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복잡한 현실과 장벽을 헤쳐나가기 위해 문재인정부의 한반도평화구상은 더 많은 질문과 비판에 담금질되지 않으면 안된다.

무엇보다 ‘더 많은 압박과 더 많은 대화’ 주장에 대해서는 오래된 논란이 존재한다. ‘미국의 대북압박에 동조하기 때문에 남북대화에 대한 반발을 잠재울 수 있다’는 주장은 현실에서는 오히려 반대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북한은 일련의 남북 민간교류 시도를 전부 거부하면서 그 이유를 “남측 당국이 미국의 부당한 반공화국제재에 동참해 나서고 있는데 대해 우리 인민들이 격분해하고 있는 분위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대북압박 동조가 남북대화에 대한 미국 등의 이해를 얻을지는 몰라도 북한의 대화문턱을 더 높이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압박과 대화의 병행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압박의 한계와 목표가 분명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압박과 별개로 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또다른 노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중국 압박을 위해 한미일 3국 안보협력을 강화하고, 나아가 북한의 정상적 경제활동까지 봉쇄하는 세컨더리 보이콧(제3자 제재)까지 검토하겠다는 것은 대북압박의 한계와 목표를 한참 넘어서는 일임은 물론이고 한반도평화체제의 환경을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또 압박으로 대화 혹은 더 나아가 핵포기를 유도하겠다는 시도는 이미 지난 20년 동안 아무 성과를 얻지 못했다는 점에서, 북한을 대화로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압박과 별개의 노력이 투자되어야 한다는 것이 명확해지고 있다.

대화와 협상의 입구에 들어서는 방안과 관련하여 국내외적으로 가장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이른바 ‘쌍중단론’이다. 대북적대시정책의 상징인 한미합동군사훈련의 중단·축소와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중단이 본격적 대화국면을 이끄는 현실의 유일한 조건이라는 이 주장은 한국의 시민사회가 일찍부터 제기해왔고 중국은 물론 미국의 조야에서도 그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미합동군사훈련은 합법이지만 북한의 핵·미사일 시험은 불법이므로 양자의 교환이 불가하다는 외교 당국자의 ‘기준’ 설정으로 ‘대화로 가는 유일한 입구’는 사실상 봉쇄되는 형국이다. 안보딜레마가 엄존하는 한반도 상황에서 군사력 태세의 합법·불법의 기준 논란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시간제한이 있는 북핵 로드맵

한미정상회담에 대해 격렬히 비난을 퍼부었던 북한은 문재인정부의 신베를린선언 등에 대해서도 일단 부정적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사실상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조선신보』는 베를린선언의 ‘대북제안’에 대해 “친미사대와 동족대결의 낡은 틀에 갇힌 채로 내놓은 제안이라면 북측의 호응을 기대할 수 없다”며 “조선반도(한반도) 긴장 격화의 주된 요인인 미국과의 합동군사연습을 중지할 결단을 내릴 수 있는가”라고 물으면서, 문재인정부가 을지프리덤가디언 연합훈련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보고 대남정책의 방향을 결정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조선신보 2017.7.11.)

문재인정부의 ‘더 많은 압박과 더 많은 대화’는 결국 다시 ‘쌍중단’의 원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북한은 ICBM 능력의 일정한 완성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협상테이블에 나오기보다는 ‘대북제재에는 추가 시험, 군사적 공격에는 핵 확전 위협’으로 대응하는 비례성 핵능력 강화노선을 견지해나갈 것이다. 이는 북한 외무성 대변인이 "만약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또다시 제재결의가 나온다면 우리는 그에 따르는 후속조치를 취할 것이며 정의의 행동으로 대답할 것"이라고 언급한 것에서 확인되고 있다.(조선중앙통신 2017.7.14.)

향후 북한은 ICBM을 비롯하여 목표한 핵능력의 확보 국면에 들어섰다고 판단하면, 그때부터는 남한과 일본, 괌 등을 대상으로 하는 ‘북한 생존에 필수적인 핵능력’에 대해서는 협상 불가를 고수하면서, 미국과는 ICBM 폐기 협상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이는 베를린선언이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졌던 김대중정부 당시의 남북관계 내외 환경과 문재인정부의 그것이 크게 다른 상황임을 의미한다. 문재인정부의 북핵 문제 시간표는 지난 시기와 달리 ‘북핵문제가 임계점에 임박해있는’ 시간제한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즉 지금 과감하지 않으면 이후 더 많은 대가를 치르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한반도 핵문제는 본질적으로 ‘북한의 게임’이 아니다. 북핵문제가 임계점에 달한다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핵이 ‘북한의 자위력’이 될 수 없는 상황으로 변화하는 역설적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북한이 미국 본토에 대한 2차 핵타격능력을 일정한 수준에서 갖추게 될 경우, 한미 당국은 실제로 ‘모든 옵션’을 검토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미국 트럼프정부는 한국의 핵무장이나 한반도 전술핵 배치보다 북한이 20여기의 핵무기 수준에 머물러 있을 시기에 선제 타격하는 것을 더 선호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정부가 핵무장이나 전술핵 배치에 강한 반대의사를 보이고 있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신베를린선언의 “한반도의 평화와 북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언급이나, “6.25 이후 최고의 위기 상황”이라는 문 대통령의 발언은 바로 이런 우려스런 상황 전개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북한의 기회도 시간제한이 있다

더구나 전술핵 없는 북한의 핵 억제전략은 근본적 한계가 있다. 전략핵무기로는 위협과 협박은 가능하지만 실질적 핵 억제전략을 구사하기는 어렵다. 또 만의 하나 핵무장 도미노가 일어나 동아시아의 핵무기 경쟁이 현실화되면 북한의 안전은 더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러시아도 그런 상황은 결코 용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북한 역시 핵문제가 임계점에 도달하기 전에 동결 협상에 나서는 것이 한반도의 파국을 막는 길이고 북한의 안전을 최대의 실익과 함께 확보하는 길이다.

북한이 문재인대통령의 신베를린선언에 대해 일방적 거부 대신 구체적 내용을 조목조목 따지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북한은 신베를린선언의 4대 제안을 우선 가능한 부분부터 수용해서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 임해야 한다.

특히 휴전협정 64주년을 맞아 군사분계선에서 적대행위를 중단하자는 제안과 10.4선언 10주년을 맞아 이산가족 상봉을 재개하자는 제안은 남북의 군사당국 회담과 적십자회담을 통해 즉각 실현 가능한 제안들이다.

북한이 남북관계 재개의 조건으로 제기하는 해외 북한식당의 여종업원 송환문제는 국정원의 과거 활동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와 적폐청산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남측의 여건상 어떤 결정도 내리기 어려운 문제이고, 또 그 과정 자체가 상당한 시간을 요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이런 사정을 고려할 때 남측 당국이 오는 27일 정전협정 체결일을 맞아 MDL에서 확성기를 통한 심리전 방송 중단 등의 군사적 긴장완화 조치를 선제적으로 취할 경우, 북한 역시 적절한 시점에 이러한 신뢰구축 노력에 호응해서 군사당국 회담에 나서는 것이 순리이다. 이 조치는 북한이 주장하는 ‘정치군사적 대결상태’ 해소의 중요한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성과를 10.4선언 10주년의 이산가족 상봉으로 이어가야 한다. 남북관계의 복원 과정이 시작되면 ‘더 많은 대화’를 위한 소위 ‘올바른 조건’ 제약도 큰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한미가 북한 핵·미사일 동결이 협상을 통해 이뤄야 할 목표의 하나라고 분명히 인식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북한 역시 한미합동군사훈련의 축소·중단이 대화나 협상의 전제조건이 아니라 협상을 통해 북한이 획득해야 할 목표의 하나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문재인정부 초기에, 남측만이 아니라 북한 역시 정확한 현실인식에 바탕하여 과감한 관계 개선에 나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반도평화는 과거 ‘도발-제재-추가 도발’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은 물론이고, 어쩌면 임계점을 넘어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한반도평화 프로세스에는 남측만이 아니라 북한의 기회 역시 ‘시간제한’이 부과되어 있다.

* 이 글은 필자의 7월 12일자 <창비주간논평> “한반도 운전석에 앉은 문재인정부: 신베를린선언 이후의 남북관계”를 토대로 일부 내용을 추가한 것이다.

 

 

이승환은 1958년 경북 포항에 태어나, 고려대 경제학과, 경남대 북한대학원(정치학 석사)을 거쳐 경남대 대학원 정치외교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이승환은 통일맞이 정책위원장, 열린정책연구원 정치아카데미 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시민평화포럼 공동대표이며, 또한 민화협 집행위원장,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는 지난 15년여에 걸쳐 남북 민간교류 활동을 전개해왔으며,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6.15남북공동행사 등을 진행해왔다.

그가 쓴 글로는 “문익환, 김일성 주석을 설득하다”(창작과비평, 통권 143호, 2009), “6월항쟁 20년, 남북 및 북미 관계의 변화와 통일담론”(창작과비평, 통권 137호, 2008), “2000년 이후 대북정책담론 연구”(북한대학원, 2008) 등이 있다.

개인 블로그 http://blog.naver.com/lsh2k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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