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개성

현대는 개성을 추구하는 사회이다. 개성은 각 사람마다 독특한 자기성격을 말한다. 이러한 개성은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할 때 드러난다. 사람들은 패션과 머리모양 혹은 자기만의 스타일로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개성의 표현이 겉치장으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욕설과 고함을 지르는 모습도 개성의 표현이고, 술자리에서 화가 난다고 술판을 엎는 것도 나름의 표현방법이다. 학생들이 침이나 가래를 뱉는 방법도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고, 팔자 걸음걸이며, 옆 친구를 치면서 말하거나 사람 몸에서 나는 독특한 냄새도 그 사람의 개성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수용되는 개성이 있는 반면, 배척 당하는 개성도 있다. 심지어는 개성과 개성이 충돌하는 경우도 많다.

개성은 있지만 표현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이는 집에 황금송아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존심이 강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의지도 강하지만 표현방법은 상당히 떨어진다. 어릴 적부터 학습과 훈련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그야말로 본성이다. 이러한 본성이 가로막히면 사회활동을 하는데 여러 가지 장애가 발생한다. 자신감을 잃거나 눈치를 보고 신념을 가지기 어렵다는 말이다.

예술교육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예술은 자신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자 방법이다. 예술이 사람의 개성과 생각을 표현하는 주요 수단이라는 것은 예술 특유의 성격 때문이다. 이른바 창작물을 `자기의 분신이나 자식`으로 비유하는 경우가 있는데, 좀더 유식하게 말하면 `예술의 자기복제기능`이라는 성격이 있다.

미술, 문학, 음악, 무용 따위의 예술 행위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결국 자신의 정서와 미감, 생각이 배어 나온다. 똑같은 선생이 같은 내용으로 미술을 가르쳐도 나오는 작품은 그야말로 제각각이다. 반복적으로 물감을 섞어 색을 만드는 행위는 통일시킬 수도 없고, 수천 번의 붓질과 힘의 강약에 의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통제하고 결정하는 것은 외부의 힘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이다. 비록 그 차이가 크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어차피 개성의 차이는 종이 한 장만큼 미세하다.

어떤 사람은 커다란 차이가 나야만 개성이 특별하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좀더 넓게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철수와 영희의 차이를 정확히 구분하고, 쌍둥이 엄마는 쌍둥이형과 아우를 정확히 구분하며 성격적인 차이까지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인은 한국 사람을 보고 너무 비슷하게 생겨 알 수 없다고 불평하고, 우리도 동남아시아 노동자들을 비슷비슷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개성과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니라 관심이 없고 느끼지 못하는 것뿐이다.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여성의 누드를 그린 작가가 얼마나 많은가. 풍경은 어떻고, 정물은 어떤가? 비슷한 소재와 기법과 분위기의 작품은 세계적으로 수천 점이 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문제삼지 않는다.

하지만 입시중심이나 돈벌이 중심의 교육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과 개성을 표현할 기회를 박탈해 버렸다. 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것이 자본과 대중문화이다. 사람들은 자기 표현에 대한 본성을 노래방에서, 혹은 영화를 통해, 모델이 쓰는 화장품과 패션을 통해 표현한다. `자기복제`가 아니라 `모방복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방복제는 현실과 환상의 괴리감이 크다. 결국 자신만의 개성이 아니라 조작되고 만들어진 `개성상품`을 소비하게 되는 것이다.

개성과 인간의 존엄, 그리고 창조성과 다양성이 필요한 현대에는 예술이 더욱 필요하다. 화가나 전문가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예술의 주인공이 되는 그 날은 과연 언제일까?


곧은 마음-참대


▶참대/김종성/조선화/165*90/1992

이번에 소개하는 작품은 북한화가 김종성이 그린 <참대>라는 조선화이다. 대나무를 그린 작품으로는 상당히 큰 편에 속한다. 높이가 165cm면 사람 키와 맞먹는다.

이 작품은 조선화인데 마치 수묵화를 보는 듯하다. 단번에 그어 내린 듯한 대나무와 잎의 붓질이 그렇고, 앞과 뒤의 원근표현도 농담처리에 의존하고 있다. 무엇보다 배경을 여백으로 남겨놓은 화면구성이 수묵화와 닮아있다.

수묵화는 북한에서 조선화가 정립될 당시 양반들의 취향이며, 관념적이라고 비판받았던 전통방식의 그림이다. 따라서 조선화는 수묵화의 관념성을 배격하고, 인민이 좋아하는 색채와 원근, 사실기법을 중심으로 발전했고 수묵화는 사라졌다. 그러던 것이 90년대 들어 동양화가 다시 북한에서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북한미술의 조심스런 변화이자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사실 북한의 조선화는 재료나 기법 면에서 동양화와 유사한 점이 많다. 한지나 개량된 닥지를 사용하며, 수성물감과 서예 붓과 비슷한 둥근 붓을 사용한다. 한지에 수성물감을 사용하면 아무래도 물감이 종이에 번지는 기법이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또한 여백을 적절히 활용하는 부분도 공통점이다. 우리가 북한의 조선화를 보고 크게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들이 이질감을 느끼는 것은 그림의 내용이지 형식은 아니다. 풍경화의 경우 화려한 색채와 입체감 때문에 시원한 눈 맛을 느낀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대나무 중에서 `참대`를 소재로 그린 작품이 많다. 우리말에서 `참`이란 말은 `정말`로, 영어로는 `really, truly`라는 의미이다. 다른 말로 `정말 곧은 대나무`라는 뜻이다. 북한의 천재소녀 오은별도 참대를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대나무는 절개의 상징이다. 바로 곧게 뻗은 나무이기 때문에 `삐뚤어지지 않은 마음`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이 그림에서 참대의 의미는 북한 노동당과 수령에 대한 올곧은 신념의 상징으로 표현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북한사회가 추구하는 가치는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똑같은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뭐 그리 특별한 것이 있겠는가.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과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추구하는 진리와 가치가 전쟁을 하고 사람을 죽일 정도로 다른가? 결코 아니다. 전쟁을 하는 것은 종교의 차이나 가치의 차이가 아니라 정치와 권력, 경제이익의 목적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인류 보편적인 사랑, 인간의 존엄성, 다양성, 개성, 사회공익, 질서, 국가에 대한 충성, 불의에 대한 분노, 이웃사랑 따위의 일상적 개념들은 북한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어떤 사람은 `북한은 충분히 이상한 행동을 하고도 남을 체제이다`라고 하지만 오히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의 정신상태를 꼭 확인해 봐야 한다. 김정일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북한의 노동당원이 200여만명인데, 그 200여만명이 다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생각은 정상일까?

우리가 느끼는 이질감은 다르거나 틀린 가치가 아니고 `익숙치 않음`일 수도 있다. 이런 문제는 서로 악수를 하고 술과 밥을 같이 먹고 오랫동안 사귀면 해결된다. 중요한 것은 참대나무처럼 곧게 지켜야할 가치를 찾고 공유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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