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게 보인다 大智若愚 (노자)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 황지우

 초경(初經)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란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廢人)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이오네스코의 희곡 ‘코뿔소’는 개성을 잃고 군중 속으로 함몰되어가는 인간상을 그리고 있다.

 ‘마지막 인간’으로 끝까지 저항하는 인간은 어떤 인간일까?

 우리가 고귀한 인간성으로 생각하는 ‘지식’과 ‘교양’을 가진 인간들은 온갖 변명을 하며 앞장서서 코뿔소로 변해간다.

 일제강점기 때 모습이 이러하지 않았을까?

 ‘마지막 인간’은 칠칠치 못하고 만사태평인 배랑제였다.

 나는 고향에 가면 배랑제 같은 친구들을 찾는다.

 그들과 함께 남루한 술집을 찾는다.

 거기엔 언제나 남루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어느 새 나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시절, 내 안의 유토피아를 만난다.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도 스스럼없이 술잔을 주고받고 함께 어깨 걸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곳이다. 

 그 중의 한 친구는 폐인이 되었다.

 그는 ‘편안해진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본다’

 그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廢人)’ 잘 견디며 살고 있다.

 ‘바깥을 거닌다, 바깥;/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래서 그는 결국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그와 함께 어릴 적 소풍 갔던 산사에 간 적이 있다.

 그는 초점 없는 눈빛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그 눈빛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는 폐인이 되지 않고서는 이 세상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나의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廢人)을 내 자신이/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나는 술집에 갈 기회가 있으면 일부러 일찍 간다.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잠시 폐인 흉내를 내 본다.

 내 안의 바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망가지지 않고 한 세상을 산다는 건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래서 우리는 ‘바보 노무현’을 그리도 안타까워할 것이다. 

 다시 ‘바보 노무현’의 시대가 왔다.

 우리 모두 바보가 되어야 지킬 수 있는 ‘고귀한 시대’ 다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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