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통일외교안보 정책에 대한 우려가 예상보다 빨리 현실화되고 있다.

북한은 새 정부가 들어섰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달아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하는가 하면, 인도적지원이나 6.15공동행사 등에 일체 호응하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산가족 상봉의 전제조건으로 탈북민 김련희씨 송환 등 높은 장벽을 두르고 있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기대했던 6.15기념식 축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다른 분야와 달리 감동을 선사하거나 시원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여기에 더해 방미 중인 문정인 통일외교안보 대통령 특보의 ‘북한의 핵.미사일 활동 중단과 한미합동군사연습 규모 축소’ 발언 등에 대해 청와대가 19일 꼬리자르기에 나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문재인 정부의 ‘사드 배치 과정’에 대한 문제제기에 격분한 것으로 알려졌다는 보도가 보수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이래저래 한미정상회담(6.29-30)을 앞두고 문재인 정부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통일외교안보 라인 인선, 소문난 말잔치였나?

▲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은 6일 한·미 연합사령관 및 미 국방부 미사일방어국장과 면담했다. [사진출처 -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시절부터 통일외교안보 분야 전문가들이 너무 많아 누구를 중용할지 선택하기 쉽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들이 돌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시기 청와대나 정부에 참여했던 경험을 가진 인재들만도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전직 청와대 수석 급이나 장.차관 급이 아니고는 명함도 못 내밀 지경이라는 게 중평이었다.

그러나 막상 통일외교안보를 총괄하는 국가안보실장에 통상외교 전문가인 정의용이 임명됐고, 안보실 1차장에는 군출신이, 막판까지 보류됐던 2차장에도 역시 외교부 몫 챙기기는 관철됐다. 중량감 있는 정치인들의 하마평이 무성했던 외교부와 통일부 장관에도 UN 다자외교 전문가인 강경화와 전직 통일부 관료 조명균이 각각 지명(임명)됐다.

실제로 주변 4강과 북한을 두루 살펴 통일외교안보 전략을 세울 수 있는 역량있는 인물이 없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물론 임종석 비서실장이나 서훈 국정원장이 남북문제 등에 밝다고 하지만 맡고 있는 영역이나 역할이 다르다.

문재인 대통령도 참여정부 시절부터 국정 경험을 쌓아왔지만 통일외교안보 분야의 내공은 깊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2012년 대선 과정에서 불거진 NLL(서해북방한계선) 논란이나 남북정상회담 회담록 폭로 건 등에 대한 미숙한 대응이 그러했고, 이번 대선과정에서도 ‘강한 안보’ 외에는 내세운 것이 없었다. 사드 문제에 대한 다소 어정쩡한 태도가 대표적이다.

감동과 내용 부족한 대통령의 6.15 축사

▲ 문재인 대통령은 15일 63빌딩에서 열린 6.15기념식에서 축사에 나서 남북간 합의 준수를 강조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문재인 정부의 통일외교안보 분야에서의 첫 시련은 북한이 먼저 안겨줬다.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북한은 탄도미사일 관련 시험발사를 계속하고 있고, 이 추세로 간다면 최종적으로 미국 본토를 강타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에 머지 않아 나설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더해 새 정부 들어 처음으로 민간단체들의 북한주민접촉 신청을 수리했지만 북한은 초청장을 보내지 않았고, 6.15남측위원회가 제안한 개성에서의 6.15공동행사에 대해 6.15북측위원회는 “국제제재와 압박의 틀”이 작동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통행이 차단되고 군사통제구역으로 변한 예민한 개성지구를 6.15공동행사의 개최지로 승인한 것 자체가 행사파탄을 의도한 것”이라고 거부했다.

기대를 모았던 문재인 대통령의 6.15기념식 축사는 “북한이 핵과 미사일의 추가 도발을 중단한다면, 북한과 조건 없이 대화에 나설 수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는 선에 그쳤고, “핵과 미사일 고도화로 말 따로 행동 따로인 것은 바로 북한”이라고 북한 책임론을 제기했다.

결국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동결’ 조치 없이는 당분간 남북 당국간 대화가 쉽지 않을 것임을 예고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같은 상황에서 문정인 특보의 ‘북한의 핵‧미사일 활동 중단과 한미합동군사연습 규모 축소’ 발언이 나왔다. 실제로 문 대통령 후보시절 캠프에서 심도있게 검토된 것으로 알려진 방안이다.

기존 보수 정부들과는 다른 남북 협력관계 구축을 모색하면서 부딪힌 과제는 역시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 문제를 어떻게 대처해나갈 것인지와 집권 첫 해에 대북정책 로드맵을 어떻게 작성할 것인지로 귀결됐다. 이에 따라 전문가 집단에서 제기된 방안이 ‘두 개의 대화틀’과 ‘평창 동계올림픽’ 카드였다.

두 개의 대화틀과 평창 동계올림픽 카드

▲ 내년 봄 한미합동군사연습을 잠정 중단하거나 축소할 명분으로 평창 동계올림픽 카드가 거론되고 있다. 사진은 지난 4월 강릉에서 열린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 여자세계선수권대회에 참석한 북측 선수단이 열띤 응원을 보내준 남측의 남북공동응원단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있는 모습.  [자료사진 - 통일뉴스]

해마다 되풀이되는 한미합동군사연습, 그 중에서도 매년 봄, 3월께 대규모로 실시되는 키 리졸브-독수리훈련은 정전상태에 처한 한반도의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키 리졸브는 한반도 유사시 미국 증원 전력을 전개하는 군사훈련이며, 독수리훈련은 후방지역 전투자산을 전방으로 이동하는 야외기동훈련이다. ‘연례적이고 방어적인 훈련’이라는 명칭이 무색한 실정이다.

새로 들어선 문재인 정부는 평창 동계올림픽을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축제로 치러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북한의 참가가 필수다. 따라서 내년 봄 키리졸브-독수리훈련을 지혜롭게 넘겨야 할 상황에 놓여 있다. 이를 시간상으로 역산하면 오는 10월 열리는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내년 군사연습에 대한 모종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같은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9월말 이산가족 상봉행사, 2월 평창 동계올림픽 북한팀 참가 성사를 목표로 적십자회담과 체육회담이라는 가장 명분있는 두 개의 대화틀부터 가동한다는 구상을 검토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구상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북한의 호응을 이끌어내야 한다. 따라서 문정인 특보는 한미군사연습의 규모를 축소하거나 이른바 ‘전략 자산’으로 통칭되는 핵항공모함이나 전략폭격기 등을 동원하지 않는 방식을 제시한 셈이다. 청와대는 ‘개인 의견’이라고 일축했지만 문 특보의 발언은 이같은 맥락을 공유한 토대 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정철 숭실대 교수는 “문정인 특보의 발언은 우리가 지원해야 한다”며 “평창 올림픽을 평화적으로 치르기 위한 다른 대안이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실제로 경제발전과 핵무력발전을 동시에 추구한다는 ‘병진노선’을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한 적이 없는 북한 김정은 정권은 2015년 1월 미측에 “미국이 올해에 남조선과 그 주변에서 합동군사연습을 림시중지하는 것으로써 조선반도의 긴장완화에 기여할 것을 제기하고 이 경우 우리도 미국이 우려하는 핵시험을 림시중지하는 화답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다”고 처음으로 제안한 바 있다. 물론, 미국은 망설임 없이 곧바로 이 제안을 걷어차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은 위원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우리는 미국과 그 추종세력들의 핵위협과 공갈이 계속되는 한 그리고 우리의 문전앞에서 년례적이라는 감투를 쓴 전쟁연습소동을 걷어치우지 않는 한 핵무력을 중추로 하는 자위적국방력과 선제공격능력을 계속 강화해나갈 것”이라고 밝혀 주목받았다. 군사연습 장소를 ‘우리의 문전 앞’이 아닌 떨어진 곳에서 하는 방안도 해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0월 한미연례안보회의까지는 실제로 시간이 많지 않다. 이달 말로 예정돼 있는 한미 정상회담에서 큰 가닥이라도 잡아야 할 절박감이 있는 셈이다.

이정철 교수는 “외교부 관성에 따른 조기 한미 정상회담이 문제”라며 “내부적으로 정책조율을 할 시간이 없는 걸 알면서 정상회담의 필요성을 밀어붙인 외교부의 행태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조기 한미 정상회담 개최를 일관되게 반대해 왔다.

한미동맹 논란과 조기 한미 정상회담

문정인 특보의 워싱턴 발언이 알려지자 보수언론과 야당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집중공격에 나섰다. 결국, 19일 청와대는 문정인 특보 발언 진화에 나섰다. “문 특보의 발언은 어디까지나 개인 아이디어 중 하나로 보면 될 것 같다”는 것. 국방부도 내년 한미합동군사연습을 예정대로 진행한다고 확인했다.

문정인 특보가 북한이 제안한 적이 있는 ‘한미합동군사연습 잠정 중단 - 핵시험 잠정 중단’ 카드를 의식해 한미합동군사연습 규모 축소 내지는 전략자산 불참을 제안했다가 보수적 여론에 문재인 정부 전체가 밀린 셈이다.

박창일 대북지원민간단체협의회 부회장은 “지난 9년 동안 ‘선 핵폐기’만 주장하다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며 “정권이 바뀌었으면 앞 정권의 잘못을 고치는 것은 당연하다”고 전제하고 “보수세력이 잘못은 전혀 반성하지 않고 새 정부의 새 정책을 반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우드로윌슨센터와 동아시아재단이 공동주최한 컨퍼런스에 문 특보와 함께 참가한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9일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전화인터뷰를 통해 “그런 전략 자산들, 소위 핵잠수함이나 핵전략폭격기 같은 경우가 2010년 이전에는 거의 동원된 적이 없다”며 “한미훈련 축소가 아니라 한미훈련 정상화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또한 “이런 대결의 악순환을 가지 말자는 차원에서 만약에 북한이 핵과 미사일 추가적인 도발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한미군사훈련에 전략적 자산을 동원하는 문제를 제한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 이런 차원”이라고 해명했다. 기존 구상과 맥락이 닿는 해명인 셈이다.

뿐만 아니라 문 특보의 사드배치와 한미동맹 관련 발언에 대해서도 “사드란 무기체계 하나 때문에 지난 반세기 이상 이어졌던 굳건한 한미동맹이 흔들리지 않는다”면서 “미국 내 일부 인사와 한국 내 일부 정치세력들이 이 문제를 악의적으로 이용해서 마치 사드배치 문제가 한미동맹을 해치고 있고 한미동맹이 어떤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에 대한 ‘그건 잘못된 입장’이라는 것을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통일분야 전문가이자 새 정부의 국정자문기획위원회 기획분과 위원이기도 한 홍익표 의원의 설명이 사실은 기존 문재인 정부 주변의 주류의 시각을 더 적절히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문정인 특보와 미국 방문에 동행한 김종대 정의당 의원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정작 미국보다 국내에서 "미국 정책에 거스른다"며 온통 난리”라며 “이런 분들이 두려워서 청와대마저 소심해진다면 한미 정상회담은 아예 필요가 없다”고 비판하고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야 합니까? 미국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맹세라도 할까요?”라고 반문했다.

청와대의 ‘꼬리 자르기’나 ‘진화’가 오히려 너무 성급하거나 비겁한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 문 대통령의 이례적인 높은 지지율이 통일외교안보 정책이라는 암초를 만나 주춤거릴 지도 모른다. 높은 지지율이 떠받치고 있는 집권 초기가 통일외교안보정책을 펴기에는 그나마 나은 조건일 것이다.

(추가,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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