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헌 /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위대한 4월 혁명 57돌을 맞는 오늘, 그 후예들은 또 다시 정의의 칼날을 세워 1000만 촛불혁명을 이뤄냈다.

4월의 젊은 사자들이 북진통일론의 외세의존 독재자를 몰아냈듯이 광화문 광장을 밝힌 성난 촛불 대열은 국정농단과 사대매국 범죄자를 파면․구속시켰다.

이처럼 민중의 힘으로 절대 권력자를 자리에서 끌어내렸다는 점에서는 일대 변혁이지만, 낡은 가치체계 청산과 사회․정치적인 새 질서 창출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데서는 미완의 혁명 또는 현재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할 터이다.

4월 혁명이 그 주도세력에 의한 민주주의 혁명과 민족통일 과제, 그리고 평등사회로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여 미완의 혁명으로 평가되고 있다면, 촛불혁명(여기서 말하는 혁명은 사회과학적 개념은 아니다)은 도전받는 진행형이라 하겠다. 촛불혁명은 무한권력의 국정농단 범죄자와 그 공범들을 법정에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반민중․반민주․반민족적 법과 제도를 방패로 범죄의 승복을 거부하는가 하면 국정농단과 사대매국 부역자들이 아직도 권력중심에 버티고 있으면서 촛불시민의 요구(적폐청산)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4월 혁명과 촛불혁명에는 현상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면서도 실질적 항쟁의 유발배경이 되고 있는 본질적 요인이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기본인권을 짓밟으며 차별사회와 권위주위 체제를 가능하게 했던 바로 분단구조였다.

분단구조에서의 집권자(정부)의 존재양식은 이른바 적자생존 법칙일 터이다. 너 죽고 나 살자는 생리이다. 그것은 국가보안법 체계였고, 반공지상주의․종북공안논리 등이었다. 반공과 반북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독재와 탄압도 독점과 차별도 사대매국과 외세공조도 합리화하려 했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 씻을 수 없는 치욕으로 되고 있는 분단구조는 다 아는 것처럼 침략외세에 의한, 우리 민족의 의사에 반하는, 우리 국토와 민족을 남북으로 분단․분열시킨 데서 비롯되었다. 바로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맞서 항일 민족해방투쟁의 사실상 승전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강대국의 전후 패권적 세계전략에 강제 편입되어 마침내는 동족상잔의 비극마저 겪어야 했고, 아직도 외세강점 속에 오욕의 동족 대결이 강제되고 있다. 이승만의 외세의존 독재체제,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와 유신체제, 전두환·노태우의 신군부통치,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사대매국·동족대결 체제는 이러한 분단구조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우리 민족에게 지워진 모든 고통의 근원인 분단구조를 극복하지 않는 한 국가안보를 구실로 하는 외세공조·동족대결정책과 억압과 착취 등 정경유착 권위주의 체제도 계속될 것이고, 이에 맞선 4월 혁명과 5.18 광주민중항쟁, 6월 민중항쟁, 촛불혁명과 같은 민중의 저항도 이어질 것이다. 이러한 혁명과 항쟁은 반민중·반민주·반민족에 대한 민족 이성의 자연적 생리현상이고 역사와 사회발전 과정의 필연적 현상일 터이다.

4월 혁명 57돌을 맞고도 ‘미완의 혁명’으로 불리고 있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 많은 희생이 말하듯 일시적 항쟁이 아니라 언젠가는 반드시 이뤄내야 할 민족문제 해결의 역사적 과제였기 때문일 터이다. 4월 혁명 진행과정에서 드러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는 과제 이행의 상징적 표현으로 남아 있다.

지난 시간들은 역사의 거울로 남아있다.

왜 미완의 혁명으로 남아야 했는지를, 무엇을 바로잡아야 하고, 무엇을 이어받아야 하는지를 역사의 거울을 통해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4월 혁명이 있기까지의 역사적 배경과 진행과정, 그리고 5․16 반동이 있기까지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촛불혁명이 이어받아야 할 역사적 과제는 무엇이며, 어떻게 이뤄내야 할 것인지를 알아보기로 한다.

                                                     

4월 혁명의 직접도화선은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노린 3․15 부정선거였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승만의 영구집권 야욕은 이것이 다는 아니었다.

1952년 부산 피난시기 제 2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간선제로는 당시 국회의원 성향분포상 대통령에 당선될 수 없게 되자, 이른바 ‘발췌 개헌안’을 통과시켜 직선제로 그해 8월5일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 발췌 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이승만과 당시 집권당은 부산 등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다(1952년 5월). 그리고 국회의원 12명을 국제공산당과 결탁한 혐의로 체포했다. 7월 4일 경찰에 포위된 국회의사당에서 기립투표방식으로 163명 찬성, 기권 3명으로 발췌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그외 국회의원들은 체포․연행․구속 상태였다. 국회의원 48명을 태운 버스가 통째로 헌병대에 연행되기도 했다.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위한 개헌은 다시 이른바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으로 이어졌다. 1954년 5월 21일, 3대 국회의원 선거는 자유당의 압승이었다. 다수당이 된 자유당은 이승만의 3선을 가능하게 하는 ‘3선 개헌안’을 국회에 상정했다. 그러나 1954년 11월 27일 국회는 재적 203명 중 찬성 135명, 반대 60명, 기권 7명으로 부결시켰다. 개헌이 필요한 2/3인 136명에서 1명이 모자랐던 것이다. 그런데 자유당은 28일 긴급의원 총회를 열어, 203의 수학적 2/3은 135.333……인데, 0.333은 0.5 이하여서, 수학의 ‘사사오입’ 원칙에 따라 버릴 수 있으므로 2/3은 136명이 아니라 135명이라고 앞서의 부결을 철회하고 3선 개헌안의 가결을 선포하는 억지논리를 폈다. 그리하여 이승만은 제3대 대통령후보로 나서 1956년 5월 15일 70%의 득표로 당선됐다.
 
그런데 이승만과 자유당은 새로운 위기감을 갖게 되었다. 제3대 대선에서 진보당 조봉암 후보가 30%의 득표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진보당은 1955년 9월 18일 발기인 대회를 가졌고, 1956년 5월1일 대선 선거공약으로,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에 맞서 ‘평화통일론’을 내세웠다. 평화통일론으로 30%(216만 표)를 득표한 조봉암을 이승만은 그대로 두지 않았다. 1958년 1월 12일 조봉암 당위원장을 비롯한 당 간부 17명에 대한 일제검거령을 내렸다. 그리고 끝내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을 간첩 등 혐의로 1959년 1월 27일 사형확정 선고를 했고, 같은 해 7월 31일 사법살인을 감행했다(2011년 1월 20일 재심에서 무죄 받음).

이승만 독재정권은 그밖에도 대공 사찰과 언론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1948년 제정된 반인권․반민주․반통일 악법인 국가보안법을 ‘신국가보안법개정안’이란 이름으로 △보안법적용대상자 확대, △이적행위개념 확대 헌법기관(대통령 등) 명예훼손죄 신설, △인심혹란죄(人心惑亂罪), △증거능력 확대, △구속적부심과 보석 결정에 대한 검사의 즉시 항고 등 개정안(3차 개정안)을 무술경관이 야당위원들을 감금한 상태에서 여당위원들만으로 날치기 통과시켰다(1958.12.25, 보안법 파동).

3.15 부정선거는 이처럼 외세의존 반공정권의 영구집권을 노린 분단구조가 빚은 대결시대의 필연적 산물이었다. 반공과 반북, 북진통일론은 그 어떤 것에 우선하는 절대적 가치를 두고 있었기에 각종 부정한 개헌 시도, 평화통일세력 탄압, 반공-법제 강화, 언론 통제 강화 그리고 부정선거로 이어졌다.

마산은 4월 혁명의 첫 봉화대였다. 3.15 부정선거 당일 마산에서는 부정선거 항의와 무효선언을 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 도시로 번졌다. 특히 4월 11일 최루탄을 맞고 숨진 김주열 학생의 주검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자 항의시위와 분노의 함성은 극에 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4월 15일 담화를 발표, “마산사건의 배후에 공산세력이 개입한 혐의가 있다”고 반공의 화신답게 요즘말로 종북몰이 공안망언을 연발했다.
 
서울에서는 4월 18일 고려대생의 대규모 항의로 불을 댕겼다. 3,000여 학생들은 국회의사당까지 진출 ‘4.18 선언문’을 통해 부정선거 규탄과 무효선언, 마산학살규탄과 책임자 처벌, 경찰의 학원 출입 엄금, 평화적 시위 보장 등을 요구했다. 그런데 연좌데모를 마치고 돌아가는 학생들을 반공청년단 등 정치 깡패들의 폭력기습으로 많은 학생들이 크게 다치는 만행이 자행되었다.

이러한 기습사건은 부정선거에 분노한 학생들에게 거리로 뛰쳐나오게 하는 윤활유 역할을 했다. 광화문 네거리 등 장안을 가득 메운 학생들과 시민들은 반공회관과 서울신문사를 불 질렀다. 또한 내무부, 시경찰국, 이기붕 자택을 공격했으며, 다시 경무대로 진출했다. 그러나 살인경찰은 시위대에 실탄사격을 가해 대규모 유혈사태가 자행되었다. 노동자 61명, 고등학생 36명, 무직자 33명, 대학생 22명, 초등․중학생 19명, 회사원 10명과 그외 5명 등 186명이 숨지고 6,000여명이 크고 작게 다쳤다. 그리고 시위는 이제는 독재정권 타도로 그 양상이 달라졌다.

이승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무위원 전원 경질,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 취소, 자유당 총재 사퇴, 구속학생 전원 석방 등 조치로 사태를 모면하려 했다.

그러나 4월 25일 27개 대학교수 258명이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며 교수 시위에 나서자, 26일 이승만의 하야성명이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하와이로 망명했다.

마침내 4월의 혁명 대열은 12년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따라서 독재자의 북진통일론도 반공과 독재에 억눌렸던 민중에 의해 파탄 나게 되었다.

그러나 독재자와 그 정치집단의 퇴출만으로 혁명이 완수될 수 없는 이유로 앞에서 밝힌 바 있다. 4월 혁명이 있기까지의 역사적 배경이 분단구조에 있고, 이러한 민족 모순의 본질적 해결 없이는 독재와 폭압 독점과 차별은 되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4월 혁명 과정에서 반드시 새겨둘 일은 주도세력에 의한 혁명완수의 중요한 임무가 방기되었다는 점이다. 4월 혁명의 주도세력은 어떤 다른 정치 집단이 아니라 학생들이었다(당연히 시민, 민중이 포함된다). 그런데 대통령 하야와 망명이 있고, 과도정부가 들어서는 과정에서 주도세력은 손을 놓고 있었다. 상․하양원제, 내각․책임제 개헌, 그리고 총선으로의 이행에는 오히려 보수야당이 뛰어들어 중심역할을 했다. 그들은 집권하고서도 신․구파로 갈라져 싸움만 하다가 5.16 군사 쿠데타를 당했다.

한편 학생들은 혁명 완수에서는 그 임무를 방기했지만, 분단구조의 민족모순 해결의 역사적 과제에서 손을 떼지는 않았다. 서울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각 대학 대표들은 1960년 11월 1일 민족통일연맹 발기인대회를 가졌고, 분단의 땅, 남북관계 발전에 지혜를 모으게 되었다. 그리고 1961년 5월 3일 민족통일 연맹 대의원대회에서는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했다. 하루 뒤 5월 4일 북측학생위원회는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꽉 막힌 남북사이 숨통을 열 수 있는 역사적 사변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군사쿠데타로 학생회담은 좌절됐고, 이후 4월 혁명은 ‘미완의 혁명’으로 남게 되었다.

                                                     

다시 오늘의 촛불현장을 돌아본다.
 
국정농단․사대매국 범죄자와 그 공범 일부는 법정에 세웠지만, 촛불대열이 요구했던 적폐청산 진행은 제자리 걸음이다. 아니 오히려 일부 부문에서 도전을 받고 있다. 범죄자는 파면 당했어도 범죄자 집단의 정책들은 어김없이 집행되고 있다. 사드 장비가 불법 밀반입되고, 일본군 성노예 범죄에 대한 야합이 정당화되고 있다. 대선을 앞둔 유력 후보자들조차 적폐 중에 적폐인 분단구조 해결과 자주통일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오히려 오늘 분단구조가 불러온 외세공조 동족대결 범죄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동족을 겨냥한 외세공조의 핵전쟁 연습이 이어지고 핵 항공모험, 핵잠수함, 핵전략폭격기, 스텔스전투기가 빈번히 우리의 땅과 하늘, 바다에서 요동치고 있다. 특히 침략외세는 수십 년 동안 주권국가의 존엄성과 자주권을 짓밟으며 제재와 압박을 자행하고 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선제공격‧참수작전 등으로 공갈 협박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촛불 대열의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불신과 대결시대에서 화해와 단합 협력시대를 열었던 6.15, 10.4 선언시대로 돌아가야 한다. 동족을 겨냥한 외세와의 공조 체제는 더 이상 자행되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남북사이 대화의 창을 열어야 한다. 가장 손쉬운 일부터, 5.24 조치 해제, 금강산관광 재개, 개성공단 재가동을 해야 한다.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전쟁의 먹구름을 걷어내야 한다. 남북이 손을 잡으면 어떤 강대국도 침략자도 간섭하지 못한다. 평화와 통일은 우리 민족의 의지에 달려 있다. 우리 민족끼리 힘을 모아 자주통일 평화번영의 길을 열어내자.

(이 기고는 <사월혁명회보>와 함께 실립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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