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대에 선 진보, 그리고 새 정부

박근혜 정부에 대한 탄핵은 한국 보수의 몰락을 상징한다. 그와 함께 유신체제로 표상되는 한국적 발전국가모델, 박정희모델에 대한 미몽(迷夢)도 붕괴하고 있다. 박정희식 발전국가모델은 반공규율사회 위에 세워진 관료엘리트와 재벌대기업의 정경유착체제이며 친미·반북과 대기업 중심의, 즉 ‘진보와 노동을 배제하는’ 기형적 모델이다.

탄핵으로 상징되는 보수의 몰락은 기본적으로 ‘배제의 룰’에(백낙청은 이를 ‘이면헌법’이라고 개념화하였다) 안주해온 보수 내부의 취약성에 기인한다. 박정희모델에서 작동하는 배제의 룰을 상징하는 언술이 바로 종북몰이와 안보장사이고, 이것만 내세우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조건에서 보수는 변화를 거부했고 그에 대한 응답이 천 칠백만의 촛불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의 보수 몰락이 박정희식 발전국가모델을 대체하는 새로운 사회적 비전의 형성에 온전히 기초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도 내포한다. 만약 진보적인 세력이(민주당을 포함하여) 집권한다 하더라도 새로운 대안적 모델의 정착과정이 진전되지 않으면 ‘새로운 대한민국’을 희원(希願)하는 촛불의 열망은 실망을 넘어 배신감으로 바뀔지도 모른다. 열망 뒤에 오는 이 배신감은 어쩌면 한국사회를 다시 극우와 파시즘의 부활로 이끌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보수 몰락은 또 한 번 맞이하는 ‘진보의 시험대’이기도 하다.

이는 차기 새 정부 하에서의 한반도평화와 남북관계 전망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보수의 종북·안보장사는 보수의 몰락을 촉진시켰지만, 보수정권 9년 동안 한반도의 군사적 대치상황은 더욱 복잡하고 엄중해졌다. 더구나 미·중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고 남쪽 사회에서 반북의식의 내면화와 제도화는 점점 강화되고 있다. 이는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에 대한 기대와 열망은 넘치지만, 그를 실현할 수 있는 자원과 조건은 더욱 어려운 환경에 접어들고 있음을 의미한다.

트럼프 정부 대북정책의 조야(粗野)함

무엇보다 미국 트럼프 정부의 대아시아·대북 행보는 한반도평화와 남북관계 발전의 환경과 조건을 불가측하게 만들고 있다. 일단 확실해 보이는 것은 트럼프 정부 하에서도 오바마 시절의 ‘아시아재균형’은 지속적으로 추구될 것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다만 오바마의 재균형정책이 미중관계에 대한 고려와 북핵·일본을 앞세운 대중압박 사이의 일정한 균형을 고려하는 것이었다면, 트럼프의 그것은 정책 균형에 대한 고려가 사라진 매우 조야한 형태의 대중압박정책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핵 군비경쟁을 포함한 군사력 중시노선 위에 한·미·일군사동맹 강화와 사실상의 중국 제재인 세컨더리 보이콧 등 보다 강경한 대북제재가 추구될 것으로 보인다. 이 거친 아시아재균형 추구는 한국에 들어설 새 정부의 외교적 입지를 크게 제한시킬 것이다. ‘한미동맹 하에서의 미·중 간 균형 추구’는 이미 사드배치 문제에서 보듯이 이미 크게 도전받고 있다.

한·중·일 순방과정에서 외교적 무지와 이해 부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렉스 틸러슨(Rex Wayne Tillerson) 미 국무장관은 대북정책과 관련하여 기존의 ‘전략적 인내 정책’의 종언을 선언하면서 대북 선제타격을 포함한 모든 옵션을 테이블에 올리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물론 선제타격 옵션은 그냥 옵션일 뿐 실제 현실화되지는 못하리라는 것이 기대와 현실을 반영한 일반적 의견이다. 문제는 “한반도 정세가 통제력을 잃고 위기가 급격히 고조됨에 따라 (…) 한반도의 긴장은 최종적으로 대폭발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환구시보> 3월 22일자) 중국의 우려처럼 한반도 상황이 최악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는 점이다.

한반도에서 한미의 군사력 태세(posture)는 이미 선제타격 중심으로 변화된 지 오래다. 공식적으로도 2012년 이후 한미합동군사훈련이 방어훈련에서 선제공격 위주로 변화되었으며, 사드 배치는 MD 도입을 통해 선제타격 위주의 군사력 태세를 완비하려는 상징적 조치라 할 수 있다.

군비경쟁의 차원을 넘어 군사운용전략까지 포함하는 군사력 태세가 선제타격 위주로 완벽히 변화된 조건 하에서는, 선제타격이 ‘말만의 옵션’일 뿐이라는 주장이 무색해질 수밖에 없다. 북한 역시 이러한 미국의 “무모한 선제타격 기도에 대응하여” 북한의 “군사적 대응방식을 선제공격적인 방식으로 전환했다”고(조선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대변인 담화, 3월 22일) 공공연히 언명하고 있다.

또한 트럼프정부는 미국 핵 비확산전략에 배치됨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전략적 목표 없이” 한·일의 핵무장 용인 등을 시사하는 불가해한 행보를 보이기도 한다. 취임 하루 전 러시아를 향해 “핵무기 경쟁을 하자. 우리는 모든 면에서 그들을 능가하고 오래 견딜 것이다”고 발언한 트럼프의 핵 군비경쟁 언급이 미·러관계 만이 아니라 어쩌면 동아시아에서도 현실화될지 모른다.

트럼프 정부는 대화와 타협 대신 ‘힘에 근거한 위협과 강압’을 우선하는 쪽으로 대북정책의 기조를 잡고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한국의 새 정부는 한반도의 핵 선제타격 경쟁이 통제력을 잃고 대충돌로 발전할 일말의 가능성조차 차단하면서 궁극적으로는 한반도 정세를 진정시키고 협상의 국면으로 전환해나가는 과제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임박한 북한의 ICBM 발사(?)

지난 3월 18일 북한은 대출력엔진 지상분출시험을 실시한 후 “세계는 이번에 조선이 대출력발동기지상분출시험에서 이룩한 거대한 승리가 어떤 사변적의의를 가지는가를 곧 보게 될 것”이라는(조선외무성 대변인성명, “우리 공화국을 위협하고 압박하려 든 미행정부규탄,” 조선중앙통신 3월 20일자) 의미심장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미국 CNN 보도에 의하면 3월 24일에도 같은 시험이 있었다고 한다.

북한의 연이은 대출력엔진 분출시험은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 준비를 서두르는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북한은 기왕 ICBM 발사를 할 거면 한국의 새 정부에 부담을 주기보다 새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 발사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 때문에 이렇게 서두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의 조기 ICBM 발사가 강행된다면 이는 매우 심각한 후과를 불러올 것이 분명하다. ICBM 발사는 북핵문제의 임계점이자 사실상 미국의 최종 레드라인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핵·미사일 동결협상’으로 표현되는 한반도 위기 타개의 1단계 협상이 사실상 별 의미가 없어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이 되면 한국의 새 정부는 한반도 위기 전환을 위한 제대로 된 협상의 시도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미국의 MD(미사일방어체제) 본격화와 한·미·일군사동맹 강화에 완전히 편입되는 길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며, 국제적 대북제재의 확대 속에서 개성공단이나 금강산관광 재개는 물론 남북관계 개선 노력도 한계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또 아직 정책담당자를 제대로 임명조차 못하면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트럼프 정부는 북한의 현실화된 위협을 미국 내의 불신임 위기 타개와 대중 압박의 기회로 최대한 활용할 것이다. 한국 새 정부의 출범 이후 한반도 협상 국면이 시도도 되기 전에 북한이 ICBM 발사나 핵실험을 강행하는 것은 결국 “트럼프를 살려주는 셈”이고 “북한은 미국에 이용당한 채 희생양으로 전락”하는(정세현, “4월은 잔인한 달, 북한이 위험해진다,” <프레시안> 2017. 3. 28) 결과만 가져올 수도 있다.

‘일단 본때를 보여주고 나서 협상할 테면 하라’는 북한의 방식이 이 중대한 정세전환의 시기에 또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오바마 정부의 대북정책 실패는 다른 의미에서 북한의 실패이기도 하다는 점을 북한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지금 남조선의 각계각층 인민들은 (…) 북남관계를 파국에 몰아넣은 박근혜패당의 반공화국대결정책을 《실패한 정책》으로 락인하면서 하루빨리 북남관계를 개선하고 평화와 자주통일의 길을 열어나갈 것을 한결같이 주장하고 있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정책국 대변인담화, 2017. 3. 26)는 북한의 주장대로라면, 북한의 조기 ICBM 발사 등의 행위는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개선을 향한 한국 국민의 열정과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되는 셈이다.

‘전환’의 시간과 조건

북핵문제가 점점 임계점에 달해가고 있는 조건에서 한국의 새 정부는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한반도 상황이 통제력을 잃고 최후의 파국으로 들어서는 것을 막을 실마리를 잡아야 한다. 북핵문제가 임계점을 넘어서게 되면, 협상을 통한 해결 가능성이 사실상 어려워지고 한반도 군사긴장은 통제력을 상실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힘을 통한 평화’를 강조하는 트럼프가 미국 내의 점증하는 대북 선제타격 주장들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군사력 사용에 매우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으나, 미국 본토가 직접 공격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더 이상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한반도 위기 해소는 ‘상호위협감소’를 향한 일보 전진의 길에서만 가능하고, 그것은 1차적으로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의 동결과 북한을 향한 무력시위의 중단·축소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한미합동군사훈련의 잠정적인 중단·축소와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의 중단이 남북관계와 한반도 상황을 교착시키고 있는 핵심문제에 바로 접근하는 첩경이다(이승환, “4차 핵실험 이후, 한반도와 남북관계는?,” <창비주간논평> 2016. 1. 13). 그리고 이것은 북핵문제가 임계점에 도달하기 전에, 즉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을 동결하는 협상이 의미가 있을 때 가능한 접근이다.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전환을 위한 환경과 조건은 결코 녹녹치 않다. 한국의 새 정부도, 북한도 이러한 한반도 정세전환의 환경과 조건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승환은 1958년 경북 포항에 태어나, 고려대 경제학과, 경남대 북한대학원(정치학 석사)을 거쳐 경남대 대학원 정치외교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이승환은 통일맞이 정책위원장, 열린정책연구원 정치아카데미 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시민평화포럼 공동대표이며, 또한 민화협 집행위원장,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는 지난 15년여에 걸쳐 남북 민간교류 활동을 전개해왔으며,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6.15남북공동행사 등을 진행해왔다.

그가 쓴 글로는 “문익환, 김일성 주석을 설득하다”(창작과비평, 통권 143호, 2009), “6월항쟁 20년, 남북 및 북미 관계의 변화와 통일담론”(창작과비평, 통권 137호, 2008), “2000년 이후 대북정책담론 연구”(북한대학원, 2008) 등이 있다.

개인 블로그 http://blog.naver.com/lsh2k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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