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식 / 전 대동무역 대표

 

우리민족은 옛날부터 농경문화의 발달로 상부상조하는 공동체문화가 면면히 이어져 왔다. <두레>로 표현되는 민간협동체도 바로 이런 공동체문화가 낳은 우리민족의 미풍양속중의 하나다. 이렇게 우리민족은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에 익숙해져 왔고 전통문화로 정착되어 왔다.

우리는 이런 전통문화를 가졌기에 서양의 개인주의문화에는 처음에는 익숙하지 못하였으며 거부감조차 갖게 되었다. 서양문화는 요약하면 상업문화와 유목문화의 결합된 형태로 발전해 왔지만 우리민족의 문화는 농경문화로 정착되어 개인보다는 가족, 씨족 등의 공동체(두레)를 중시하며 발전해 왔다. 따라서 <나>보다는 <우리(집단)>를 중시하는 가치문화가 발달되어 나의 아버지가 아닌 우리 아버지, 나의 어머니가 아닌 우리 어머니, 나의 집이 아닌 우리 집 등의 정서로 이어져 왔다. 서양에서는 ‘마이 파더’(my father), ‘마이 머더’(my mother), ‘마이 홈’(my home) 등 개인을 중심에 둔 문화로 발전해 왔지만 우리민족에게는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로 호칭될 정도로 ‘우리’라는 공동체문화 정서가 훨씬 친숙할 만큼 더불어 사는 삶에 가치중심을 두고 살아 왔었다. 서양사람들은 타인이나 소속집단보다 자기중심의 독립적인 관점을 중시하는 개인주의를 선호해 왔지만 우리민족은 가족과 동료, 이웃 등 소속공동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집단주의정서가 몸에 배게 되었다.

이처럼 전통적으로 이어져 오던 우리민족 고유의 정서는 타율에 의한 8.15 해방과 더불어 진주한 미군정청의 통치로 민족은 38선으로 분단되었고 서양문화가 사회전반에 널리 침습되어 전통문화와 갈등, 혼란을 겪으면서 오늘날에는 미국문화 미국식 생활양식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게 되어 버렸다. 서양의 개인주의문화가 우리사회의 온갖 영역에 침습되어 우리 고유의 <공동체 의식>을 낡은 폐습으로 규정하고 비판하면서 미국식 개인주의 문화를 <신문명>이라 칭송하고 찬양하면서 널리 전파되기 시작했다.

물론 <나>를 중시하는 정서와 <우리>를 중시하는 정서 간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민족은 서양의 개인주의를 우리 민족문화에 적절히 비판적으로 담아내어 우리 것으로 융화시키지 못하고  무조건적으로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마치 서양문화의 개인주의가 우리에게 가장 이상적인 이념인 양 미화하면서 우리 농경문화의 <공동체 의식>을 봉건폐습이라고 매도하면서 배척해 버렸다. 이런 사상조류 때문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개인의 출세주의, 돈이 부귀영달의 척도가 되는 황금만능주의, 돈을 취득하기 위한 개인이기주의가 만연하여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은 날로 잠식되어 갔다.

예속관계의 확립과정과 세계관의 변천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의 종결로 말미암아 많은 잉여물자가 적체되어 미국경제가 또다시 공황상태로 허우적거리게 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한국 같은 미군 진주국에 마샬 플랜에 의거, 원조라는 명목으로 그들 잉여물자를 쏟아 부어 숭미사상을 불어 넣어 구세주로 행세하였으며 원조의 혜택을 받은 일부 친미 권력자, 졸부가 된 매판자본가로 하여금 숭미사상 개인주의를 더욱 확대 유포케 하였다. 미국은 이렇게 무상원조라는 명목으로 한국에 들여 온 소비물자를 시중에 판매하여 취득한 판매대금을 대충자금이라는 명목으로 정부 세입예산에 편입시켜 그들이 원하는 부문에 사용할수 있도록 세출예산을 통제하였는 바 이 대충자금이 한국정부 예산의 절대액을  차지할 때도 있어 이 정부예산을 통하여 한국사회를 미국식 민주주의(?)로 개편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미국은 이렇게 돈의 힘으로 친미세력 숭미세력을 양성하여 한국사회를 주도하는 지배계층이 되게 만들었으며 그들로 하여금 대한국정책, 대아시아 정책을 요리할 수 있게 되어 한국이라는 나라는 미국의 아시아정책 나아가 세계전략에 중요한 교두보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북한과 군사적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한 명분으로 군사작전통제권을 한국정부에서 이양받아 주권국가의 상징인 국군통수권은 허울만 남게 되었다. 이렇게 미국은 군권과 금권(정부예산)을 장악할 수 있게 되어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 한국에서 집권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도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미국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기 위하여 아첨과 굴종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풍토이다 보니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는 요식행위에 불과하고 투표하는 민중은 개, 돼지처럼 취급하여 얼마든지 투표를 조작할 수 있을 만큼 힘이 없어 안중에도 없었으며 따라서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은 엷어져만 가게 되었으며 힘있는 외세에 의지하는 사대주의사상이 사회지도급 인사들에게는 팽배하게 되었다. 집권자의 입장에서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권력을 쥐어준 실제적인 힘에만 의존하면 안정된 권세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선거권자는 아무런 실질적 힘이 없었기 때문에 천대받고 무시당해 왔었다.
                      
분열과 탄압

8.15 해방이 되자 여운형은 일본총독부와 회담하고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해방된 민족의 독립열망에 힘입어 지방에까지 건준조직을 급속히 확대하여 갔으나 1945년 9월 8일 미군이 38도선 이남에 진주하면서 자생적인 건준을 불법화하고 미군정을 실시하게 되었다. 이에 미군정을 지지하는 친일지주들과 친일분자 등 일부 우익세력과 건준을 지지하는 민족세력 간에는 끊임없는 갈등과 분쟁이 조성되어 미군정청은 1948년 7월 국방경비법을 제정하여 미군정을 반대하는 민족세력을 이적죄, 간첩죄 등으로 처벌하였으며 1946년 10월 대구 민중봉기, 미군정의 남한만의 5.10단독선거에 항거하는 제주도민의 4.3사건, 이승만 정권 수립 2개월 만에 발생한 여순 사건 등등 미군정과 갓 태어난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무수한 민중을 처단, 탄압하기 위하여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분단을 법제화하고 반공국가 건설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어 실질적으로 헌법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통치수단으로 존재하여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리하여 정권을 지지하는 소위 우익과 정권을 반대하는 소위 좌익(좌우익의 구별은 사상 이념적 차이라기보다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대한 지지여부로 구별하였음) 간에는 불신과 증오로 우리민족의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은 엷어져만 갔다.

더욱이 동족상잔의 6.25전쟁이 발발하게 되자 이승만은 1950년 6월 25일 긴급명령으로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발동하여 인민군 치하에서의 부역행위자들까지 처벌하게 되니 민중들은 서로 밀고하고 서로 경계하며 불신만 깊어지게 되어 화목했던 마을공동체는 삽시간에 원수로 변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인한 강제징집으로 피를 나눈 혈육끼리, 이웃끼리 ,같은 민족끼리 전쟁터에 끌려 나와 남과 북의 군대로 참가하여 서로 죽여야 하는 동족살육의 비극이 연출됨에 따라 우리민족의 미풍양속이었던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은 사라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민중은 빨갱이로 지목하여 탄압하였으므로 무수한 무고한 민중들은 한많은 세월을 보내야했다. 지금 우리 후대들은 상상이 잘 되지 않아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전쟁기간 인민군은 대구, 부산을 잇는 낙동강 계선 이외 남한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해방)하기도 하였으며 국군 유엔군은 대부분의 평북지역 함남지역, 부전호 지역까지 점령(해방)한 바 있어 남북의 국민들 대부분은 인민군 통치도 받아 보았고 국군 유엔군 통치도 잠시나마 맛보게 되어 한 가정에서도 형은 국군으로, 동생은 인민군(의용군)으로 차출되어 형제간에 총부리를 겨누고 싸워야 하는 비극도 연출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1천만의 혈육의 이산가족이 산생되어 오늘날까지 이 민족적 상처를 아물게 하지 못하고 있다.

이승만 정권의 불법과 불의에 저항하여 1960년 4.19민중봉기로 민주주의를 맛보려 했으나 1961년 박정희 일당의 국시를 반공으로 하는 군사쿠데타로 국가보안법체제에 반공법이 덧붙여져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며 말하지 말라”라는 장님으로 만들어 암흑세상이 되어 버렸으니 막걸리 마시고 취중에 정부비판하면 소위 “막걸리 반공법”으로 “관제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히게 되니 이웃끼리, 혈육끼리, 동족끼리는 옛날과 달리 불신만 팽배해 <우리>라는 민족정서는 사라지고 <나>만이 득세할 수 있는 개인주의 사조가 대치하게 되어 버렸다. 세상에 믿을 사람은 <나>자신 밖에 없는 불신의 세상을 상상해 보시라!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8.15 해방 후 급격히 밀려든 미국식 사고방식과 사회체제로 <우리>라는 민족 공동체의식은 발붙일 여지가 사라졌으며 더욱이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인하여 우선 <나>가 생존하기 위하여 주위 혈육이나 이웃, 민족 공동체는 생각할 겨를이 없게 되었으며 <반공>이라는 기치 하에 정권에 순종하지 않는 이웃은 무조건 <빨갱이>로 낙인찍어 불신과 타도의 대상이 되어 국민을 편갈라 버려 운명을 함께 해야 할 배달민족이라는 개념은 옛말이 되게 했다. 따라서 집성촌을 이루며 평화롭게 살던 부락 공동체는 급격히 붕괴되고 각자가 살길을 찾아 도시로 몰려드니 바로 옛날의 화목했던 이웃이 아니라 서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신의 이웃이 되어 서로 경계하며 경쟁하며 살아야 할 <경쟁 상대자>로 변모하게 되었다 사실 일반민중은 지배층과는 달리 이념이나 사상, 신념도 없이 친미 집권세력 편에 서느냐, 외세를 반대하는 민족진영 편에 서느냐에 따라 니편, 내편으로 갈라져 서로 불신하고 증오하는 민족분열의 비극이 전개됨에 따라 우선 내 한목숨 부지하기 위하여 지배자의 폭력에 굴종하게 되고 내 형제 내 혈육, 내 이웃이나 친지 등 타인을 고려할 겨를도 없이 나의 생존을 위하여 아부하고 굴종하는 풍토 속에서는 불신이 앞을 가려 <우리>라는 정서는 찾을 수 없고 우선 나만 살겠다는 개인주의, 이기주의만이 창궐할 수밖에 없었다.

필연적으로 초래된 경쟁사회

<우리>라는 민족 고유정서가 봉건잔재로 지탄받는 사회조건 속에서는 <나>가 일가친척 없는 황야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이웃끼리 친구끼리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과 경쟁을 하여 경쟁자를 타승하지 않으면 <나>가 살아남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나> 아닌 타인들은 비록 친구이고 이웃이고 혈육이라 할지라도 <나>의 진로에 경쟁자로 밖에 보이지 않아 상대를 거꾸러트려야 내가 승리할 수 있는 무한경쟁사회가 도래하게 되었다.

우리는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 디딘 유치원 때부터 자기도 모르는 사이 경쟁을 체험하게 되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취업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경쟁을 하면서 친구들을 밟고 일어서야 비로소 <나>의 생존이 보장받게 된다. 우리는 성년에 도달할 때까지 무수한 경쟁 속에서 어떨 때는 승리하고 어떨 때는 석패의 아픔을 맛보면서 공교육을 수료하고 나서도 <나>의 능력(?)에 따라 사회성원의 일원으로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죽을 때까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생을 마쳐야 한다.

경쟁적수가 없으면 오히려 무료하게 느낄 정도로 우리는 경쟁이 일상화된 생활 속에서 당연시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북한이라는 적수(경쟁자)를 상정할 수 있어야 집권자의 통치에 악용되어 국민의 권리가 침해당하더라도 분단논리로 감내하게 만들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영남정권을 연장하기 위하여 “우리가 남이가?”라는 자극적인 영호남 편가리를 하여 호남출신 김대중 대통령 후보를 봉쇄하는 도구로도 이용될 수 있었다.

이렇게 경쟁이 일상화된 소위 자유경쟁사회에서는 상대적수를 넘어트리기 위해서는 “빨갱이”로 친북, 종북으로 몰 수도 있으며 심지어 간첩으로 몰아 사회적으로 매장시킬 수 있는 비장의 무기로도 악용할 수 있게 되어 더불어 살아온 민족공동체 의식은 국사책에서만 볼 수 있는 봉건유습으로만 남게 되었다. 물론 우리는 모든 경쟁을 배격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되살려 공정한 경쟁, 선의의 경쟁은 촉진하여 금수저, 흙수저론의 근원을 차단하여 조화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지향해 나가자는 것이다.

안보강화론의 허와 실

우리는 6.25전쟁 직후부터 정부의 안보강화론에 동조하면서 국방력 강화를 위해 허리띠를 조이면서도 참고 견디어 왔다 1970년대에는 정부에서 발표하기를 남북의 국방예산을 비교해 보면 우리가 북한을 앞질렀다고 자랑하면서 멀지 않아 남북의 국방비가 더욱 현격하게 차이가 나 북한은 경쟁에서 탈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북한체제는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말을 들어 왔다. 그런데 2010년경 이후부터는 남한의 국방비가 북한의 30배 이상이 되었다고 하는데도 북한은 붕괴되지도 않았으며 지금도 더욱 안보불안을 떠들면서 사드(THAAD) 배치문제로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다.1970년대부터 매년 북한의 국방비를 압도해 왔다는데 아직까지 북한은 경쟁에서 낙오되지 않았고 체제도 붕괴되지 않았다면 정부의 발표는 허위선전이었던 말인가? 우리는 북한의 30~40배의 국방비를 쓰면서도 아직까지 안보불안에 떨어야 한다는 것이 납득되는 말인가? 분명히 정부의 안보정책에 문제가 있어 근본적인 발상부터 재고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6.25전쟁 이후부터 남과 북은 치킨게임을 해 오지 않았는지 지금쯤은 되돌아 볼 때가 되었다고 믿는다. 남과 북의 혈육끼리 서로 상대를 전복하려고만 내달려와 민족전체가 공멸할 위기에 까지 도달했다면 과거의 아집에서 벗어나 발상의 전환을 꾀할 때가 되었지 않는가?

헤어져서는 안 될 단일민족이 외세에 의하여 남북으로 분단되어 전쟁까지 겪었다면 남북 어느 편도 힘으로는 상대를 제압할 수 없을 만큼 서로가 준비해 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려 한다면 피차간 많은 희생을 해야 할 것이라는 것쯤은 각오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북한은 핵무기와 그 운반수단을 보유하고 있는 현황에서는 비록 미국이 개입되더라도 힘으로는 절대 상대를 굴복시킬 수도 없고 또 만일 전쟁이 발발된다면 한반도는 폐허로 변모되고 민족은 공멸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안보강화론은 첨예화된 남북 긴장상태를 완화할 수 없다는 것을 분단 이후의 역사가 말해 주고 있다. 안보강화론에 의한 대결정책은 혈육끼리 불신과 증오만 심화시켰을 뿐 평화와 안정을 가져오지 못했으며 더구나 상대체제의 붕괴 와해는 초래하지 못하고 필연적으로 국방력 강화를 위한 외세의존 구조만 산생하여 민족의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동족대결정책으로는 평화를 꽃피울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분단역사에서 확인하였으므로 민족의 에너지를 더 이상 허비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안보강화론에 의한 대결정책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가져오지 못했다는 것이 분단역사에서 입증되었으므로 첨예화된 긴장상태를 해소하고 평화와 안정을 정착시키기 위해 발상의 대전환을 통하여 대화정책으로 전환해 보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는가?

과연 반북 반공만이 애국 애족인가 되돌아 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우리 모두 수용하자는 것이 아니고 같은 동포, 같은 민족 혈육끼리 질시 대결할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면서 대화를 하기 위한 분위기를 우선 조성해야 할 것이 아닌가? 남북이 서로가 서로를 짓밟아야 했던 군사적 대결상태에서 품었던 증오와 불신을 녹여 없애고 민족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분위기를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나가도록 <우리>라는 정서를 회복시켜야 할 것이다. 사상과 이념, 제도는 시대와 조건에 따라 변화되지만 민족이라는 토대는 <우리>가 절멸되지 않는 이상 영속하는 것이므로 사상과 이념은 민족을 위해 복무해야지 민족이 사상과 이념을 위해 희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외세에 의존하거나 청탁하지 말고 당사자끼리 해결하려는 자주적인 <우리>정신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다. <나>라는 이기적이고 편협한 틀에서 벗어나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으로 대범하게 승화시킬 때만이 역사의 죄인이 되지 않을 것이다. 7.4공동성명, 6.15선언, 10.4선언 정신을 이어받아 통일문제를 우리끼리 자주적으로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남북의 당사자가 <우리>라는 민족정서에 공감하고 공동운명체라는 것을 통감할 때 새로운 민족사가 전개될 것이다.

갈라진 민족의 혈맥을 잇기 위한 다방면의 대화가 과연 북한의 통일전선전략에 속아 넘어가는 것인가? 이 논리는 우리 자신의 성숙된 주체성과 정체성을 너무나 무시, 부정하는 소아병적 허구적 논리라는 것이 7.4성명 등 남북화해시대에 이미 입증된 바 있으며 대결을 조장하고 대화를 기피하는 구실에 불과하다. 안보불안을 해결하고 민족의 평화와 안정을 누리기 위해서 직접 당사자인 남과 북이 대화하고 타협하고 협력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있다면 북한의 통일전선 전략에 동조했다고 비난하더라도 달게 받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통일전선 동조론은 대화기피를 위한 허구적인 논리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는 대화를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당당히 대화상대를 <우리>라는 민족공동체 성원으로 받아 드리고 유대감을 표시한다면 구원(舊怨)은 사라지고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첫 발을 내디딜 수 있게 될 것이다.

맺는 말

8.15해방 이후부터 급격히 밀려들어온 미국식 개인주의 사상조류 때문에 우리 민족 전통생활양식인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은 낡은 폐습으로 비판받고 설 자리를 잃고 있지만 70여년의 분단을 체험해 본 지금쯤은 <우리>라는 전통정서를 새롭게 조명해 보고 재평가해 볼 때가 되었지 않은가 생각해 보게 된다. 사상과 이념, 제도 등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전변되지만 민족이라는 정체성은 절멸되지 않는 한 영속된다. 따라서 개인주의,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공 산주의의 고수를 위해 민족공동체의 이익을 희생할 것이 아니라 <우리>민족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사상과 이념이 복무하도록 발상의 전환을 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 한겨레는 타의에 의하여 남북으로 분단되어 온갖 민족적 불행의 근원이 되었으므로 또다시 주변외세에 의존하거나 청탁하는 행위는 아무런 실질적 효과도 없을 뿐 아니라 외세를 이 땅에 끌어 드리는 배족행위이므로 어떻게든 직접당사자인 남북의 우리민족이 지혜를 모아 분열을 극복하고 평화와 안정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을 되살려 개인이기주의에서 파생된 경쟁의식을 올바로 지양하여 영호남지역주의, 북한을 적으로 규정하는 안보지상주의 등 분파의식을 극복할 수 있어야 대화로 통합을 이룩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고 믿는다. 물론 장구한 기간 적대의식 속에서 살아 온 우리들이 하루아침에 이를 극복하기는 어렵겠지만 비극적인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대오각성하여 통 큰 용단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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