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향 장기수 박봉현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전북본부 고문이 25일 오후 5시 32분 별세했다. 향년 98세. 유족으로 미망인 정순희 여사와 영숙, 명숙, 지연, 종찬 3녀 1남의 자녀가 있다.
빈소는 전주 모악 장례식장 201호에 마련됐고, 26일 오후 7시 6.15전북본부 주최로 추모식을 거행한뒤 27일 발인해 전주 금상동 하늘자리(봉안당)에 모실 예정이다.
고인은 전북 순창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난 1919년 출생해 1940년 일본 대정대학 사범대학에 입학했고, 1947년 연희전문대학 철학과 졸업 후 고향 순창에서 교원으로 재직했다.
한국전쟁시기 북행해 평양에서 재정건설전문학교 교원으로 봉직하다 1954년 조국통일 사업차 남파돼 1960년 체포돼 무기형을 선고받고 32년 옥고를 치른 뒤 비전향 상태로 출소했다.
이후 전북통일연대 고문, 6.15전북본부 고문, 전북겨레하나 고문 등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권오헌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은 “선생은 학대와 제재 등 긴장이 이어지는 감옥에서도 틈틈이 꽃을 가꾸시는 일로 유명하셨다”며 “‘아무리 가혹한 탄압 속에서의 생활일지라도 아름다운 정서마저 빼앗길 수는 없다’는 마음으로 채송화, 해바라기, 오이, 호박 등을 가꾸셨다”고 추모했다.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는 “지식인으로서 이론이 겸비된 비전향 장기수 선생이셨다”며 “힘든 감옥 생활 속에서도 장난도 잘 치고 그분 덕에 웃음보가 터지고, 낙관적인 분이셨다”고 회고했다.
또한 “감옥 안에서 내가 지켜야할 양심과 사상이 있는가 하면, 비전향으로 나왔지만 엄혹한 큰 감옥인 사회에서 사상과 양심을 지킨다는 자세로 본다면 모범적으로 사는 게 감옥보다 더 힘든 거라고 말씀한 것이 기억난다”며 “이치를 깨닫고 눈치가 있어 염치없이 살지 않으셨고 그래서 수치스럽지 않게 깨끗하게 사셨다”고 3치론(눈치, 염치, 수치)으로 고인의 한생을 상찬했다.
<고 박봉현선생 약력>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리 창신리에서 1919년 6월20일 셋째 아드님으로 출생 |
(수정2, 1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