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제헌헌법 제1조가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이라 선언했지만 그 때 이 말이 그렇게 큰 감동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독립이 민족의 자주적 투쟁결과가 아닌데다가 헌법도 민족 전체의 의사를 담지 못했던 탓이다. 더구나 권력자들은 이 헌법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제주도의 민중들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도륙하였다.

그 후 군사반란을 일으킨 세력들은 민주공화를 당명으로 채택하였으니 ‘민주공화’에 대한 국민적 불신은 지독했다. 국민주권은 폭압적인 지배를 은폐하는 말이었고, 민주공화국은 정치혐오를 유발하는 단어였다. 그래서 지금도 삼성공화국, 재벌공화국, 마초공화국, 서울공화국, 자살공화국과 같이 반어적 개념들이 난무한 실정이다.

그럼에도 이 땅에 민중들은 폭정과 부패 앞에서 분연히 봉기하면서 스스로 주권자임을 증명하였다. 국민은 참으로 짧은 기간에 공화국을 기록적으로 연거푸 창조하였다. 국민에게 민주공화국은 부패한 권력에 대한 저항의 기반이고, 기성 질서를 근본적으로 대체하는 목표점이었다.

촛불혁명이라고 불러야 마땅한 촛불시위는 4.19혁명, 5.18광주항쟁, 6월항쟁에 이어 또 다시 한국현대사에서 새로운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다. 촛불대중들은 민주공화국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스스로를 헌법의 주체로서 자각하였다.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파면결정은 문서상의 국민을 살아있는 규범으로, 헌법의 핵심으로 재차 확인해주었다. 헌법의 주체로서의 각성된 민중들은 탄핵국면에서 정치의식의 고양을 넘어 한국현대사의 적폐를 극복하는 에너지를 생성하는 중이다.

대통령 파면 이후 각 정당은 정치일정을 앞당기며 대선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더불어민주당을 필두로 여러 정당들이 당내경선절차를 마무리짓기 위해 대선후보간 토론회도 실시하고 있다.

그런데 정당에 관계없이 후보간토론회는 큰 자극을 주지 못하고 여러 정당의 후보들의 정책공약도 큰 흥미를 유발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 맥빠짐은 그들의 발언이 정치적 비전이나 가치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후보들간 토론이 격렬하고 비전이 클수록 더욱 겸연쩍은 느낌을 준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풀어볼 수 있다. 우선은 짧은 대선기간에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1위인 후보가 차기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지레짐작 탓이다. 그런데 더 큰 이유는 이번 조기대선이 촛불대중들의 투쟁결과라는 사실에 있다. 각 당의 대통령 후보들이야 추수 끝난 들판에 이삭을 줍겠다고 나타난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정치적 불노소득자이고 결국 촛불혁명을 완성시키는 사회개혁으로 나가기보다는 정권안정을 위해 다양한 봉합을 시도할 것이라 짐작되기 때문이다.

되돌아보자. 제도정치권은 대통령과 집권세력의 심각한 불법과 비리를 제때에 발견하지 못했다. 무능함으로 세월을 보내다 촛불대중의 위세에 눌려 강제로 탄핵국면에 승차하게 된 것이다. 탄핵은 국회와 헌법재판소의 제도적 통치의 산물이 아니라 민중의 저항과 자기통제의 결과이다. 후보자들은 권력이 원래 국민의 것이고, 국민이 언제든지 되찾아갈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촛불혁명은 정권교체를 넘어서 산적한 쟁점들을 해결하는 것뿐만 아니라 해결하는 방식까지 바꾸기를 요구하고 있다. 촛불대중은 IMF 이후 신자유주의가 야기했던 부정의와 착취, 박탈감과 무력감에서 벗어나 차츰 공동전선을 구축해나가고 있다. 이들은 신자유주의반대에서, 4대강에서, 세월호에서 ‘국가가 무엇인지’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 철학적 대중이 된 것이다.

광장의 정치는 부패한 권력자 자리에 새로운 권력자를 앉히는 것으로 끝난다면 참으로 덧없는 사태진행이 아니겠는가! 정치인 중에는 엘리트들이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주술로 촛불대중을 주저앉히려는 사람도 늘어가고 있다. 그러나 촛불대중은 이러한 현실안주와 숙명론을 극복하고 권력의 성질을 바꿀 것이다.

민주공화국, 촛불이 보여준 민주공화국은 현재의 상황에서 제도 전반을 혁신할 수 있는 유효한 정치적 출발점이다. 그러나 민주공화국은 그 자체로 완성된 공화국도 역사적 진보를 불가역적으로 보증해주는 기계도 아니다. 민주공화국은 시민의 각성과 희생만을 보증으로 요구하는 위험한 장치이다.

학자들은 최근의 촛불시위로 시작된 대변화를 주권자혁명이라고 부른다. 부패한 엘리트집단에서 또 다른 엘리트집단에 권력을 곱게 발송해주는 것이 촛불대중의 임무는 아닐 것이다. 주권자혁명은 기득권자들이 고착화시켜놓은 국가제도의 봉인을 뜯는 일로 발전해야 한다.

프랑스 철학자 발리바르는 혁명에는 역설적으로 ‘봉기의 정치’와 ‘구성의 정치’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국민의 역량을 강화하는 제도개혁이 필요하다. 일부 정당들은 개헌일정을 제시하며 연대를 모색한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고치자고 한다. 대통령제가 정권몰락과 탄핵의 근본적인 이유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권력은 제왕적으로 남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권력을 고쳐야 한다. 견제하는 민주주의를 심화시켜야 한다. 한곳만 망가졌다면 현재의 사태는 있을 수 없다. 정치계급은 대의정치 부문 중에서 어느 하나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는 점을 새겨야 한다.

대통령제를 고치는 것보다는 국회의원의 연임을 제한하고 공직참여의 연한을 규정하는 것, 국민발안과 국민소환을 현실적으로 제도화하고, 국민에 의한 통제수단을 강화하는 시도로서 헌법안을 제시하면 좋겠다. 그것이 아니라면 조롱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촛불대중만이 원칙과 대안 속에서 봉기의 정치와 구성의 정치를 번갈아 수행하고 있다. 그들은 헌법의 원리를 전방위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이후 민주공화국을 외치던 열기는 지난 주말을 고비로 잦아들었다. 그들은 어디로 갔나? 무대를 성주로 옮긴 모양이다. 그들은 성주의 사드농성장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외칠 모양이다. 민주공화국의 정치원리는 국가의 중대사를 대통령과 참모들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최소한 국회와 국민의 견제를 받고 국민과 함께 중대사를 결정해야 한다는 원리이다. 결과가 불가역적일수록 더욱 신중하게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원래 작은 나라의 비민주적인 최고권력자는 패권국가의 희생제물이 되기에 적합하다. 혼자 만사를 결정하기 때문에 어떠한 저항력(협상력)도 그에게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작은 나라일수록 민주주의는 국제적 생존수단이다.

사드 농성장에서 민주공화국은 권력자의 자의적 결정과 밀실외교의 배제를 의미한다. 평화의 소녀상 앞 수요집회에서 민주공화국은 피해자를 위한 합의는 피해자들의 사전동의를 최소한으로 요구한다. 문명고의 역사교과서 파동에서 민주공화국은 청춘의 뇌와 미래는 교육부의 식민지나 학교장의 사유물이 아니라고 말한다.

촛불대중은 모두가 민주공화국의 원칙대로 살 것을 요구한다.

 

 

서울대법학박사

전 국민대, 전남대 교수
현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2011년 <국가범죄>로 임종국상 수상

로베르토 웅거 <주체의 각성(2012)> 야스퍼스 <죄의 문제(2014)> 번역
국가폭력 및 인권문제에 관한 논문을 민주법학에 규칙적으로 투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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