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17.3.26 일 12:58
홈 > 오피니언 > 기고
정전협정 체제와 동북아시아의 평화:<기고> 고일 일본 시마네 현립대학 조수
고일  |  tongil@tongil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승인 2017.03.20  15:20:25
페이스북 트위터

고일 / 일본 시마네 현립대학 조수 (주1)
번역 / 김은애

 

지난 3월 11일 일본 메이지가쿠인대학(明治學院大學) 국제평화연구소(PRIME) 주최로 ‘한국전쟁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주한유엔군을 다시 묻는다’라는 제목으로 국제심포지엄이 열렸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이시우 사진가가 「유엔체계와 유엔사」, 시마네현립대학(島根縣立大學)의 고일(高一) 선생이 「정전체제와 동아시아의 평화: 유엔군사령부 해체를 둘러싼 국제정치를 생각한다」 그리고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강사인 다카바야시 도시유키(高林敏之) 선생이 「식민지주의적 전쟁으로서의 한국전쟁과 일본-아프리카의 한국유엔군 참가와 한국유엔군 후방사령부」란 제목으로 각각 발제를 했다. 각 원고들을 차례대로 게재한다. / 편집자 주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어 전화가 멈췄다. 열전은 정전이 되고 한반도(조선반도)에는 정전협정 체제가 등장했다. 전쟁의 주된 당사자인 북한 중국과 한국・미국은 열전을 끝냈지만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는 군사경계선을 사이에 둔 정전이라는 군사적 대치가 계속된 것이다.

 본 발표에서는 1970년대에 현저히 드러난 북한 외교에 의한 유엔군사령부 해체를 요구하는 움직임과 그에 대한 동북아시아 국제정치의 전개에 대해 주로 중・미의 관여라는 시점에서 논하고 앞으로의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영속화하기 위한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1) 1970년대 유엔군사령부해체를 둘러싼 북중미 관계와 정전협정체제의 변용

1) 중・미접근과 중국의 역할 변화

정전협정 체결 후에도 한반도 및 동아시아를 둘러싸고 대립상황에 있었던 중・미 양자는 1971년 7월에 키신저 미국대통령 특별보좌관이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대화를 거듭했다. 이 중미 양자 사이에서는 남북대담이나 주한미군문제 등 한반도 정세에 대해서도 협의했다.

 북한 지도부는 중미 접촉이라는 사태를 외교정책 추진의 기회로 살려 정전협정 체제의 타파를 목표로 했다. 북한 지도부는 1971년 7월, 키신저의 중국 방문에 의한 중미 접촉 사실을 중국측을 통해 알게 되고 8월에 들어서 중국을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8월 6일, 김일성 수령은 닉슨 대통령의 방중을 ‘중국의 승리’라 칭송하며 중국의 대미 접촉을 측면 지원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북한은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유엔군사령부 해체에 의한 주한미군의 철수,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의 해체 등 유엔 총회에서의 한반도 문제 토의의 실시를 중국을 통해 미국측에 요구했다.(2)

 이러한 북한의 요구에 응한 중국은 미국과 협의를 진행한다. 1972년에도 저우언라이(주은래)수상이 미국과 절충을 하고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이나 유엔군사령부의 해체를 요구했다. 미국측은 72년의 유엔총회에서 한반도문제 토의를 피할 수 있다면 다음 해인 73년에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의 해체에 대해 이야기하겠다고 제안했고 최종적으로는 중국측의 양보에 의해 72년에는 유엔에서의 토의는 연기되었다. 중국은 미국과의 대립을 회피한 것이다.

 1973년 3월 키신저와의 회담에서 저우언라이는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과 유엔군사령부의 해체, 미군철수라는 문제의 협의를 미국측에 새로이 제기했다. 한편 73년도의 미국측의 안은 73년에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은 종결시키지만 유엔군사령부 해체에 대해서는 다음 해 74년 이후에 다루려고 했다. 73년 6월 19일, 키신저는 황진 주미중국연락사무소장에게 73년 제28회 유엔총회에서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의 활동을 종결하고 74년에 유엔군사령부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 논의하려는 준비를 하고 있다고 제안했다.(3) 결국 이러한 미국측의 제안을 중국이 받아들이는 것으로 타협이 성립되고 73년에 열린 제28회 유엔총회에서는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의 해체가 결정되지만, 유엔군사령부의 해체는 뒤로 미루어졌다. 중・미 타협을 받아 유엔총회에서는 합의형식으로서의 결의가 행해졌기에,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 해체, 유엔군사령부 해체, 한국에서의 외국군 철수를 요구한 북한 지지국가에 의한 결의안이 표결에 부쳐지는 일은 없었다. 결의안 채택이라는 국제압력으로 유엔군사령부 해체 및 주한미군의 철수를 목표로 한 북한이었지만 중국에 의한 점진적인 주한미군 철수 수용의 설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북한에게는 마지막 희망이었던 중국이 미국과 타협을 함으로 인해 73년의 유엔총회에서의 한반도문제 토의는 북한에게 좌절을 안기는 결과가 되었다.(4)

 중미 간의 교섭에서는 중국이 미국측에 양보를 거듭해 왔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저우언라이는 북한정부에 대해 주한미군철수에 대해 인내심 강한 대응을 요구했지만 그것은 북한이 아니라 오히려 미국에 득이 되는 것이었다. 73년 유엔총회에서는 북한의 요구를 중미가 공동으로 억누르는 형태가 되었다. 중국은 북한의 대미 ‘대리 교섭자’이며 동시에 미국의 대북 ‘대리 교섭자’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2) 미국측의 유엔군사령부 해체안과 북・중 협조의 소실

 북한의 대미 ‘대리교섭자’로서의 중국의 역할에 한계를 느낀 북한 정부는 1974년에 북・미간의 평화협정체결을 요구한다.(5) 74년 3월 25일, 허담 외교부장은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3회 회담에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문제를 토의할 것을 ‘아메리카 합중국에 정식으로 제기’한다고 발표했다.(6) 북한은 전년의 중국의 타협이라는 경험에 입각하여 이집트나 루마니아 같은 ‘중개자’를 통해 대미 직접 교섭을 모색했다.(7)

 한편 중미 사이에서는 전년에 뒤로 미루기로 결정한 유엔군사령부 해체문제가 논의되었다. 4월 14일, 키신저는 미국을 방문한 덩샤오핑(등소평)부수상과의 회담에서 유엔군사령부 해체에 대해 한국과 협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미국과 중국은 각각의 우방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도 정전협정에 머물러야 한다는 견해를 분명히 했다. 게다가, 상해코뮤니케의 선에 따라 미군 철수에 대한 성명을 작성하는 것도 원칙적으로 가능하지만 그러나 바로 철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상해코뮤니케의 선이란 닉슨의 방중 시에 발표된 상해코뮤니케에서 대만해협의 긴장이 완화되는 것에 따라 대만의 미군을 점진적으로 감소시키고 언젠가는 완전 철수할 것을 최종확인한다고 표명한 것을 의미한다. 즉 한반도의 긴장이 완화된다면 언젠가는 주한미군을 완전철수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할 준비가 미국측에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6월 13일에는 미국의 로드 정책 기획실장으로부터 유엔군사령부 해체에 대한 미국측의 안이 중국측에 제시되었다. 이 안은 유엔군사령부의 해체에는 새로이 창설되는 한미연합군사령관이 정전협정의 서명자로서 유엔군사령관을 대체하는 조치가 필요하며, 한국군과 북한군이 군사정전위원회의 상급 구성원이 되고 중국은 정전협정의 당사자로서 남아야 한다고 했다. 즉 미국측의 제안은 정전협정의 유지를 전제로 한 유엔군사령부 해체안이었다. 이 미국측의 안을 토대로 중미간에 유엔군사령부 해체에 대한 협의가 계속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북중간의 조정은 지장을 초래하게 되었다. 10월 2일, 중국의 차오관화 외교부장은 키신저에게 미국의 제안을 북한측에 전달했으나 답을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즉 북한은 미국측에 의한 유엔군사령부 해체에 따른 남북한과 중미에 의한 정전협정 서명이라는 대체 조치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었다. 북・미간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한 북한측으로서는 미국측에 의한 정전협정의 계속이라는 조치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8)

 한편 북한은 중국과의 조정을 거치지 않고 유엔총회에 임하려고 있다. 이미 8월 16일자로 한국에서의 외국군 철수를 요구하는 북한의 지지국가들에 의한 결의안이 유엔총회에 제출되고, 이에 대해 남북대화의 재개를 북한에 요구하는 한국측 결의안이 9월 3일자로 제출되었다. 이처럼 1974년 제29회 유엔총회에서도 전년과 마찬가지로 한반도 문제가 의제에 포함되었으나 전년과의 차이는 북한 지지국측과 한국 지지국측 사이에서 타협이 성립하지 않고 토의가 표결까지 가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한국측 안이 체결됨과 함께 북한측 안은 부결되었다. 전년에 이어 다시금 북한은 유엔총회에서의 좌절을 맛보게 된 것이다.

 3) 남북 결의안 동시 체결과 정전협정 체제의 변용

 다음 해 1975년 제30회 유엔총회에서도 중미는 유엔군사령부 해체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다. 예를 들어 중국의 황화 유엔대사는 75년 9월 ‘올해의 유엔총회에서는 한반도 문제를 매듭짓는 것으로 대결을 피하고 싶다’는 뜻의 중국측 제안을 미유엔대사에게 전달했다. 이것은 북한측과 한국측의 결의안이 동시에 채택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즉 쌍방의 안이 채택됨으로 유엔군사령부의 해체를 포함한 한반도 문제에 어떠한 변화도 더해지지 않고 현상황이 유지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미국무성에서는 중국측 안을 ‘합리적인 방법처럼 보인다’라고 평가했다.(9)

 미국측에 나타낸 것처럼 중국은 자국안에서 유엔군사령부의 해체와 주한외국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북한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지지하면서도 미국에 대해서는 협조적인 자세를 계속 취했다. 1975년 9월의 유엔총회에서의 중미대표의 연설에 관한 에피소드는 중미협조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연설에서는 키신저가 유엔군사령부의 해체에는 정전협정의 유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으나 이에 대해 중국측은 미국측의 제안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라고 반격했다. 한편 차오관화는 미국측의 유엔군사령부 해체안을 비난하고 정전협정의 당사자인 북한과 미국에 의한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했다. 그러나 양자의 연설 직후인 9월 28일에 열린 중미외상회담에서 차오관화가 키신저 연설을 향해 ‘실제 사격’을 했다고 키신저가 주장한 것에 대해, 차오관화는 ‘반은 실제 사격, 반은 공포’라고 응답했다. 이처럼 양자에 의한 연설은 한반도 문제로 인해 중미의 관계가 악화되지 않는 범위에서 행해진 것이었다.(10)

 결과적으로 1975년 제30회 유엔총회에서는 북한 지지측 결의안과 한국 지지측 결의안 쌍방이 채택되었다.(11) 중미에 의한 상정은 현실화된 것이다.

 이처럼 1970년대에 들어 정전협정 서명자인 미국과 중국이 접촉하고 양자가 협조하는 것으로 인해 정전협정 체제가 변용됐다. 한반도 정전협정 체제 변용의 내실이란 북중 협조의 소실과 중미 협조의 등장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북한측에서 보자면 한반도에서의 정전협정 체제는 중미전쟁으로서의 성격이 없어지고 ‘북 대(対)한・미’라는 구도로 변화한 것이다. 정전협정 체제에서 중국이 ‘이탈’하고 북한과 한국・미국이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상황이 계속되게 된 것이다.

 4) 유엔군사령부라는 유용성

 여기까지 보아 온 것처럼 미국은 정전협정의 유지를 추구해 왔으나 그러한 정책 안에서 유엔군사령부는 군사적으로 유용한 존재였다. 미국의 정책 검토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유용성이 나타나 있다.

1.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미군이 보유하고 한국에 의한 대북 무력행사를 억제하게 한다.
2. 유엔군사령부는 주한유엔군 방위의 행동을 취할 때 사전협의 없이 주일미군기지를 사용한다는 미일간 밀약의 논거로 되어 있다.
3. 미일지위협정은 주한유엔군 지원을 위해 주일미군기지를 사용할 권리를 제3국에 주고 있으나 이것도 유엔군사령부 없이는 실효하게 된다.(12)

 이처럼 미국에게 있어서의 유용성은 한일 양국정부에 의해 공유되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한미 양국은 한반도 정전협정을 유지할 것을 추구했다. 그렇기 위해서는 유엔군이라는 명분은 편리한 것이었다. 정전협정의 존속이 ‘한국의 평화와 안전 유지에 절대불가결의 요소’라고 한 한국의 김용식 외무부 장관은 주한유엔군 철수 문제에 대해 중요한 것은 미군의 존속이며 미군이 현재의 수준을 유지할 것도 익히 알고 있으나, 상징적이더라도 유엔군이라는 명분이 한미 양국 모두에게 편리한 것 또한 사실이라고 말했다.(13)

 또한 일본의 오히라 외상은 73년 8월 1일, 미국에서 열린 다나카 수상과 닉슨의 미일정상회담에 동석했을 때, 한국의 안정이 일본에게 중요하다고 하며 ‘과거에 일본은 조선에 2개 사단을 두었지만 현재의 상황은 직접적인 군사 원조를 제외하고 있기에, 일본은 한국에서 2개 사단이 주둔할 경우의 비용에 상당하는 경제적 원조를 하고 싶다’라고 덧붙였다. 또한 미국무성의 문서에 의하면 일본의 입장에서는 한국에서의 유엔의 존재감은 동북아시아 안전보장체제에서의 불가결 요소라고 되어 있다. 특히 일본은 유엔군사령부의 급속한 변화가능성에 민감했는데 그것은 한국 방위와 관련해 주일미군기지 사용과 직접적으로 연관되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한국에서의 미군의 존재감을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의 안정적 요소로서 생각했다.(14) 이처럼 한・미・일측은 정전협정의 유지 및 유엔군사령부의 존속을 요구했다.

(2) 과제와 전망

 여기까지 1970년대의 유엔군사령부 해체를 둘러싼 국제정치에 대해 개관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오늘날 한반도의 정전협정 체제란 1970년대에 중미전쟁의 측면이 사라지고 ‘북한 대 한국・미국’이라는 구도로 변용한 군사적 대치가 지속되고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동북아시아 지역에 평화체제를 창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할 경우, 1970년대의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어떠한 방향으로 살려야 할 것인가. 70년대 당시에 이미 나타난 아이디어를 참고로 해서 몇 가지 정리하고자 한다.

 1) 다양한 대화의 틀

 이미 1970년대 중반에는 유엔군사령부 해체를 둘러싼 교섭과 함께, 2자, 4자, 6자라는 여러 틀에서의 대화의 형식이 키신저에 의해 제안되었다. 1975년 9월 22일 키신저는 유엔총회의 일반 토론 연설에서 남・북・미・중에 의한 4자회담을 제안했으며, 다음 해 76년 9월 30일, 유엔총회연설에서는 4자 회담에 그치지 않고 그 외의 나라도 포함한 확대회의를 열 것도 제안했다.(15) 그러나 당시의 키신저의 제안은 정전협정 존속을 전제로 했으며 미래적인 평화체제 구축의 구상을 포함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오늘에 이르러서도 정전협정 체제라는 군사적 대치가 이 지역에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고 한다면, 현재 필요한 것은 한반도에서의 평화체제 구축과 동북아시아 지역에서의 평화를 영원히 지속시키기 위한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동북아시아의 안전과 평화 및 한반도에서의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노력의 필요성은 2000년대에 확인되었다. 남북한과 중국, 미국, 일본, 러시아를 구성국으로 하는 6자 회담의 장에서는 2005년 9월에 공동성명이 발표되고, 동북아시아 지역의 ‘영속적인 평화와 안정을 위한 공동 노력’을 약속했으며 한반도에서의 항구적인 평화체제에 대해 협의할 것이 명시되었다.

 또한 2007년 10월에는 남북정상 사이에서 한반도에서의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다자간의 협의에 의해 한국전쟁을 끝낸다는 의사가 확인되었다. 2007년 10월에 한국의 노무현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고 김정일국방위원장과의 사이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는데, 그 성과로서 ‘남북관계발전과 평화번영을 향한 선언’이 발표되었다. 선언의 제4항에서는 ‘남과 북은 현재의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인식을 같이 하고, 직접 관련한 3개국 또는 4개국의 정상들이 한반도 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간다’라는 것이 선언되었다.

 동북아시아에서의 평화를 영속시키기 위한 정신에 기반한다면, 위기라고 말해지는 오늘날이야말로 다음에 말하는 것과 같은 다양한 틀에서의 대화의 장이 기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첫 번째 남북대화의 재개이다. 한국전쟁이라는 내전의 당사자이며 평화문제의 당사자인 한국과 북한 2자의 관계 개선이 필요한 것이다. 2017년 2월 단계에서 남북 당국자 사이에 교섭이 전혀 없었으나, 앞으로 한국정권의 의사 여하에 따라 대북관계의 개선의 조짐도 보일 것이다.(16) 남북 쌍방은 지금까지도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당사자라는 점을 당국자의 회담을 통해 확인하고 1972년, 1991년, 2000년, 2007년에 역사적인 성명, 선언을 발표해 왔다. 이처럼 대화가 진행되고 관계가 개선될 때야말로 통일과 평화에 대한 기대가 높아진다.(17)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적대적인 남북관계에서 벗어나 쌍방이 2007년의 합의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다국간의 협의 개최도 남북이 이 선언으로 돌아갈 수 있을 정도로 관계개선을 함으로써 길이 열릴 것이다. 정전협정 체제가 계속 된다면 한반도에서의 내전도 종결되지 않을 것이며 서로가 총을 겨누는 체제가 계속될 것이다.

 두 번째, 중국을 중개자로 하는 4자 회담이라는 협의의 틀도 필요하다. 중국은 한반도 정전협정의 서명자이기에 앞으로 전쟁을 종결하고 평화협정이 체결될 경우, 그 과정에 중국의 관여는 필수이다. 중국이 관여하지 않고는 정전협정이라는 ‘종잇조각’은 계속 존재할 것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대한 중국의 관여를 요구해 온 것을 생각하더라도 중국이 한반도 문제의 대화의 틀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않다.

 세 번째로 남북한과 중국, 미국, 일본, 러시아 사이에서의 6자 회담이라는 틀을 활성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현재 6자 회담은 휴면중이지만 앞으로 동북아시아 지역의 안전보장 포럼의 역할을 짊어질 가능성이 있기에 조기재개가 바람직하다.

 이처럼 한반도에서의 평화체제 구축, 즉 정전협정 체제에서의 탈각에는 남북대화를 시작으로 다양한 형식에서의 대화의 장이 필요하다. 이러한 다자에 의한 협의의 과정에서 유엔군사령부 해체에 대한 논의도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북한에 의한 핵개발 문제를, ‘북 대 한・미’라는 혹독한 군사적 대치를 동반하는 정전협정 체제 아래에서 국가의 생사를 건 길이라고 한다면, 정전협정 체제에서 평화체제로 이행하는 대화의 과정에서 군사적 대치가 느슨해질 때 그 해결의 싹이 나올 것이다.

 2) 중국의 역할

 이상과 같이 여러 대화의 틀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역할이 중요할 것이다. 1970년대에는 중미접근이라는 국제정치의 구조변동과 함께 정전협정 체제가 변용하고, 중국은 정전협정 체제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미국에 의한 대중봉쇄가 선전된 2010년대의 지금이야말로 중국이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난문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로 인해 중국도 정전협정체제의 당사자라는 점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앞으로의 동북아시아 지역에서의 안전보장협의에서의 주도권을 발휘하는 것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

 중국이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 문제를 중재하는 일에 한층 더 노력이 요구되며, 중국정부의 발언에서는 이러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미국은 북한의 핵 미사일 개발 문제에 대해 중국이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한다. 오바마 정권에서 트럼프 정권으로 이행했더라도 그 노선에 변화는 없다.(18) 한편 중국정부는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대립은 북미 사이, 남북한 사이의 ‘모순’에 있다고 응하고 있다.(19) 중미가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듯하나 중국은 예전의 미국이 정전협정의 유지에 중국의 관여를 요구했던 것처럼, 미국에게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대한 관여, 게다가 북미 대화의 개시를 요구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중국외교부 대변인이 ‘중국은 반도 핵문제의 악순환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각국의 우려와 반도의 현실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기초 위에 서야 하며, 반도의 비핵화와 정전 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이라는 “2트랙 병행” 해결 방안을 제출하고, 이것에 기반한 6자 회담의 복귀를 추진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한반도에서의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구체적인 아이디어, 그리고 6자 회담이라는 틀을 기능시키는 것도 제안하고 있다.(20) 앞으로의 중국의 중재라는 역할에 기대하고자 한다.

-----------------------------------

<주>

1) 일본 시마네 현립대학 북동아시아 지역연구센터 조수

2)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은 1950년 10월 7일 유엔총회에서 미국 등 8개국의 공동제안에 의해 설립되었다. UNCURK에는 한국의 통일독립민주정부수립에 관해 유엔을 대표하고 한국의 구호와 부흥에 관련된 책임을 수행하는 것이 위임되었다. 구성국은 오스트레일리아, 칠레, 네덜란드, 파키스탄, 필리핀, 태국, 터키.

3) 고일 ‘조선전쟁과 그 후: 북조선에서 본 정전협정체제’ “아시아 태평양 연구” 39호, 2014년, 61쪽

4) 1973년 중미 사이의 교섭의 경위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 고일 “북조선 외교와 동북아시아 1970-1973” 신잔샤, 2010년, 194-199쪽을 참조.

5) 북한은 중국과의 협조 자세를 유지하면서 남북한 사이에서의 대화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1972년에 7.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되었다. 남북 대화에서 북한 지도부는 남북 사이에서 평화 협정을 체결하고, 미군이나 유엔이라는 외부 세력의 영향력을 배제한다는 정책 목표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남북 공동 성명 발표 후 북한은 평화 협정 체결 등의 군사 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남북 정상 회담의 실현을 남측에 요구했으나, 남측은 정치 군사 문제 등의 ‘큰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고 남북 대화를 북의 일련의 ‘평화 공세’를 컨트롤하는 ‘창’으로 이용했다. 즉 북측에서 보면 남북 대화는 생각한 대로 진행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경험에서 북한은 1974년에 평화 협정 체결의 대상으로 한국이 아닌 미국을 선정하게 되었다.

6) “조선시보” 1974년 3월 30일.

7) 1974년 4월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열린 키신저와의 회담에서 미국이 북한과의 대화를 승락할 것인가 아닌가에 대해 물었으며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순간 대통령고문은 8월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 북한 정부가 미정부와의 사이에서 하이레벨의 접촉을 희망하고 있다고 키신저에게 전했다.

8) 고, 앞의 논문, 62-63쪽.

9) 이동순 “미완의 평화: 중미 화해와 조선문제의 변용 1969-1975년” 호세대학 출판국, 2010년, 313-314쪽.

10) 위의 책, 313-321쪽.

11) 북한 측 결의안은 1. 유엔군사령부의 해체, 유엔기 밑에 있는 외국군대의 한국에서 전면 철수, 2.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것을 협정의 실제적인 당사자가 한다, 3. 남북간의 군축 및 무력 불행사의 상호 조치를 취한다 라는 것이었다. “아사히 신문”1975년 8월 11일. 한편 한국측 결의안은 1. 유엔군을 해체하고 유엔군 사령관의 계승자로서 한미 양국군 장교를 지명하는 준비는 한미 양국에 있다, 2. 한미 양 정부는 다른 직접 당사자와 언제든지 이야기할 수 있는 준비가 있다는 것이었다. “아사히 신문” 6월 28일.

12) 고, 앞의 책, 205쪽. 외무성에 의한 ‘이른바 “밀약”문제에 대한 조사 결과’에 대해서는 http://www.mofa.go.jp/mofaj/gaiko/mitsuyaku/kekka.html을 참조. 유엔군사령부 해체와 ‘밀약’을 둘러싼 미일관계의 전개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 이, 앞의 책, 289-296쪽.

13) 고, 앞의 책, 191쪽.

14) 같은 책, 206쪽.

15) “아사히 신문” 1976년 10월 1일자.

16) 당연히 북미 2자가 접점을 만들고 관계 개선의 길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북미간에는 한미 합동 군사 연습의 중지 또는 규모 축소와 북한의 핵 미사일 실험의 동결이라는 ‘거래’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한국의 대북정책이 변하지 않으면 미국의 대북정책 변화의 가능성도 낮을 것이다.

17) 남북 당국자 사이에서는 앞에서 서술한 ‘7・4공동성명’ 외에도 1991년 12월에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 6월에 ‘615남북 공동선언’, 2007년 10월에 ‘104선언’이 합의 발표되었다.

18)  “도쿄신문” 2017년 2월 24일자.
  http://www.tokyo-np.co.jp/s/article/2017022301000978.html (2017년 2월 28일 열람).

19) 예를 들어 ‘북극성-2’ 실험 발사 후,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북한 탄도미사일 문제의 원인은 ‘북미, 남북 모순에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통일뉴스” 2017년 2월 14일자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9758 (2017년 2월 26일 열람)

20) “통일뉴스” 2017년 2월 23일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9860 (2017년 2월 26일 열람)

 

[관련기사]

고일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트위터 뒤로가기 위로가기
댓글
아이디 비밀번호
(현재 0 byte/최대 500byte)
댓글보기(1)
곽태환 (thkwak) 2017-03-22 07:12:06
본논문의 저자가 주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했으면 더 좋은논문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말미에 중국의 역할에 대해 너무 피상적이고 구체성이 결여되어 실망스럽다. 현재 한반도문제를 타결하기위한 중국이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이 해야 하는지를 제언했드라면 더 좋은 논문이 되었을것인데 아쉽다.
0 0
통일뉴스 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후원하기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당주동 3-2번지 삼덕빌딩 6층 | Tel 02-6272-0182 | 등록번호 : 서울아00126
발행·편집인 : 이계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계환
Copyright © 2000 - 2015 Tongilnews. All rights reserved. mail to tongil@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