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쓸까말까 며칠을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나서게 되었다. 지난 3·1절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세워지고 있는 ‘평화의 소녀상’의 명칭이 부적절하기에 이를 바로 잡고자 한다.

평화의 소녀상은 지난 2011년 12월 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1000회차 수요 집회에서, 전쟁의 아픔과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서울의 일본 대사관 건너편에 세워진 것이 그 첫 번째 사례로 알려져 있다. 이후 지금은 부산, 대구 등 전국 곳곳에 소녀상이 건립되었다.

나는 소녀상 건립취지에 누구보다도 공감한다. 하는 일 중에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참회와 사죄·배상, 재발방지를 촉구하기 위한 활동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녀상의 명칭이 처음부터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어 더 이상 간과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서 잠시 ‘상(像)’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 보자. 눈에 보이거나 마음에 그려지는 형체를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을 ‘상’ 이라고 한다. 이 상을 물체로 나타낸 것이 이를테면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이나 광화문의 세종대왕 동상 같은 것이다.

작품 이름을 모르고 로뎅의 작품을 감상한 사람에게 이름을 지어보라고 하면 누구나 ‘생각하는 사람’ 쯤으로 떠올릴 것이다. 세종대왕 동상도 실제 세종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봐도 동상 이름이 그렇게 되어 있으면, 이게 세종대왕이구나 보는 사람마다 그렇게 인정할 것이다.

이처럼 상을 실체로 나타내거나 혹은 실체만 봐서는 누구인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잘 모를 때에는 이름만 들어도 그 의미를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이름을 제대로 짓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평화의 소녀상’은 어떤가. 여기서 ‘상’ 자를 떼어내면 ‘평화의 소녀’가 된다. 떼어내건 안 떼어내건 평화의 소녀라는 이름은 바뀌지 않는다.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일본군에 끌려가 온갖 악행을 당한 피해 여성들이 졸지에 평화의 사절단 같은 느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전쟁 범죄의 피해자인 소녀들을 가리키는 이미지와 평화의 사절이라는 용어는 결코 같은 선상에 놓고 쓸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물론 소녀상에 평화를 기원한다는 뜻도 들어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에 평화란, 반인륜적 전쟁 범죄 피해를 당한 피해자 측에서 먼저 붙이는 수식어가 아니라 가해자가 반성하고 용서를 구할 때 사용하는 용어라야 한다.

적어도 일본은 사실 인정과 참회를 하지 않고 있으며 재발방지를 위한 그 어떤 노력도 없다. 오히려 거꾸로 된 형태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단적인 예로 일본 정부는 최근 들어 소녀상을 더 이상 ‘소녀상’으로 부르지 않고 ‘위안부상’으로 부르고 있다. 참으로 비열하고 후안무치한 자들이다.

과거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 만행을 고발하고 평화를 촉구하기 위해 소녀상을 건립했다면 그 이름은 마땅히 ‘일본군 납치 피해 소녀상’이나 ‘일본군에 끌려간 소녀’ 등 거기에 맞는 이름을 찾아야 한다. 소녀상에 ‘고발’과 ‘지향’이 동시에 들어있다면 당연히 고발이 우선순위이고 더 강조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베트남에 가면 한국군에 의한 양민학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관련 지역마다 추모비가 세워져있다. 그 비의 이름은 ‘평화의 비’가 아니고 ‘증오비’다. 그들은 왜 평화의 비라고 부르지 않고 증오비라고 부르고 있을까. 명칭은 한번 정해 놓으면 고치기가 매우 힘들다. 베트남의 사례는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좋은 참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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