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봉 (원광대 정치외교학 교수)

 

2017년 1월 김대중 탄신 93주년을 맞은 가운데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다. 김대중 같은 훌륭한 대통령을 다시 만나게 되길 기대하며 그의 청와대 시절을 되돌아본다.

27년만의 약속 이행과 50년만의 정권 교체

1997년 12월 김대중이 드디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간첩’으로 몰리기도 하고 ‘빨갱이’로 매도당하기도 하던 그가, ‘친북 정권’ 또는 ‘붉은 정권’이 들어서는 것만큼은 반드시 막아야한다고 발악하던 집권당과 극우수구 언론의 억지와 횡포를 이겨내고, 마침내 청와대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가 고교 1학년이었던 1971년 4월 장충단공원에 모인 100만 이상의 군중을 향해 “새 대통령이 취임하는 7월 1일 청와대에서 만납시다”고 외친 게 퍽 인상적이었는데, 거의 27년이 지나서야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된 셈이랄까. 50년만의 정권 교체가 확정된 다음날 유럽과 미국의 은사들이 나에게 축하전화를 걸었다. ‘평화학의 창시자’ 요한 갈퉁 (Johan Galtung) 교수와 ‘비폭력 정치학의 창시자’ 글렌 페이지 (Glenn Paige) 교수였다. 이 가운데 갈퉁은 1970년대 초 김대중이 연금당하고 있을 때 동교동 집으로 찾아가 만났고 1998년엔 청와대를 방문해 재회했다.

햇볕정책

1998년 2월 김대중 정부의 첫 통일부장관으로 강인덕이 임명됐다. 1970년대 중앙정보부 출신으로 극우언론조차 ‘대북 강경론자’로 소개하는 인물이었다. 김종필과 연립정부를 만들었기에 그의 추천이었을 텐데 실망과 우려를 금할 수 없었다. 내가 몸담고 있던 <경실련 통일협회>를 비롯한 18개 시민운동단체들이 “남북관계와 통일문제에 전향적인 생각을 지닌 것으로 평가되어온 김대중 대통령이 보수우익의 편향적인 대북관을 보여온 강인덕 장관을 임명한 것은 부적절하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나아가 나는 강인덕이 1979년 극동문제연구소를 설립해 ≪극동문제≫라는 월간지를 펴내며 북한 및 통일문제에 관한 써온 글들을 분석해 그의 대북 인식을 심하게 비판했다. 김 대통령이 아무리 진보적인 통일전문가라 할지라도 보수극우적 장관 때문에 정부의 대북정책이나 통일정책이 줄곧 전향적이고 유연하게 펼쳐질지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1998년 6월부터 통일부가 국정원의 전신인 안기부를 거치지 않고 북한 텔레비전 방송을 ‘직접’ 시청할 수 있게 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보통 사람들이 그 전까지 집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보았던 북한의 모습은 모두 안기부의 편집을 거쳤던 것이다. 그런데 1999년 10월 북한이 조선로동당 창립 54주년을 맞아 통신위성을 통해 텔레비전 방송을 내보낸다고 보도하자, 김대중 정부가 기다렸다는 듯 이를 개방하겠다고 발표했다. 보수극우 언론에서는 난리를 쳤지만, 일반인들도 이른바 ‘접시’ 안테나를 달면 북한의 방송을 ‘직접’ 보고들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1990년대 중반 북한의 극심한 식량난이 널리 알려지면서 난 1996년부터 북녘동포 돕기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김영삼 정부 때는 심한 감시와 방해를 받았어도 김대중 정부에서는 오히려 도움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전라도-함경도 자매결연을 추진하기 위해 1998년 10월 일주일간 북녘을 방문했다. 서울과 평양의 잘난 사람들뿐만 아니라 소외당하고 차별받아온 남쪽 민중과 북녘 인민도 함께 만나야 진정한 민족통합을 이룰 수 있지 않겠느냐는 뜻을 품고 말이다. 금강산뱃길 관광도 시작되기 전이라 북녘 방문 자체가 뉴스거리였다. 햇볕정책 덕분이었다. 참고로 그 무렵 ‘햇볕’이란 말 때문에 재미있는 일도 벌어졌다. 보수극우 세력이 햇볕정책은 북한에 굴복하는 약자의 논리라고 비판하자, 김 대통령은 햇볕이 살균 능력도 가진 강자의 논리라고 대응했는데, 이에 북한 당국은 자신들이 세균이냐며 반발하기도 했던 것이다.

두 번의 서해교전

1998년 11월부터 금강산뱃길 관광이 시작되어 동해에서 유람선이 왔다갔다 하는 터에, 1999년 6월 1차 서해교전이 터졌다. 북방한계선 (NLL)을 넘어오는 북한 경비정에 남한 고속정이 대포를 쏘아 침몰시켜버린 것이다. 아마 30-40명의 젊은이들이 죽었을 것이다. 전쟁에서 이겼다고 온 사회가 환호했다. 나는 며칠 간 고민 끝에 다음과 같이 썼다.

“김대중 정부가 기껏 1년 반을 넘기지 못하고 휘청거리기 시작한 가운데, 북녘 땅을 따스하게 비추겠다던 ‘햇볕’은 서쪽 바다 속에 빠지고 말았다. 발단이야 어찌 되었든 수십 명의 젊은 동포가 죽었는데도 한 순간이나마 고통스러워하거나 애도를 표하기는커녕 전쟁에서 이겼다고 고소해하는 축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해군본부는 주요 일간지에 큼지막한 광고를 실어 국민을 상대로 ‘민과 군이 함께 애창할 수 있는 승전가’를 현상 공모했다. 지난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는 모든 노래테이프에 군가 한 곡씩을 끼워 넣어 팔게 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이른바 ‘건전가요’를 듣도록 하더니, 이제 ‘국민의 정부’ 아래서는 국민이 직접 군가를 만들어 즐겨 부르란 말인가..... 남북관계가 더욱 나빠지는 가운데 서해교전을 빌미로 전쟁 분위기에 미쳐가는 우리 사회를 지켜보며 나는 열흘 남짓 밤잠을 설쳐야 했다. 자칭 평화학자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고민 때문이었다. 작년 말 여기 저기 글 쓰고 강연 다니며 무리하느라 얼굴 한 쪽이 비뚤어져 아직 낫지 못하고 있는 터에, 다른 한 쪽마저 일그러져버리면 어찌할까 걱정 되어 애써 잊으려 했지만 잠을 못 이루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와 아울러 <남이랑북이랑 더불어살기위한 통일운동>을 시작했다. 수십 명의 젊은이들이 바닷속에 빠져 죽었는데 이를 환호하는 것은 북한에 대한 왜곡과 편견 그리고 원한과 증오 때문이라 생각하고, 북한을 바로 알아가면서 굶주리는 북녘 동포를 돕자는 취지였다. 서해교전에 따른 고민의 산물이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만큼은 막아보자는 목표였다.

그러나 3년 뒤 2002년 6월 2차 서해교전이 일어났다. 충격 끝에 북한 당국을 향해 다음과 같이 썼다. “당신들의 대포질은 전쟁을 부를 수 있는 분명한 범죄행위다. 3년 전 남한해군의 대포질로 인민군들이 물에 빠져죽은 사건에 대한 복수라면 옹졸하고도 위험한 짓이다.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부르며 폭력의 악순환을 초래하기 마련 아닌가. 미군들이 제멋대로 그어놓은 북방한계선에 관해 남한군부가 억지를 부리며 협상에 응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먼저 대포를 쏜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심각한 폭력이다. 대화의 문은 얼마든지 열려 있지 않은가.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남한당국이 대화를 거절한 적은 한 번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남한의 어선들과 해군함정들이 북한영해를 침범했다고 해도, 죄 없는 젊은이들을 죽인 일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반인륜적 범죄다. 꽃게를 잡는 게 아무리 중요해도 사람 목숨보다 귀중할 수는 없지 않은가.”

역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과 노벨평화상

2000년 4월, 두 달 뒤 역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반가움보다 아쉬움이 앞섰다. 그렇게 역사적이고 뜻 깊은 일조차 총선 사흘 전에 발표함으로써 시비를 불러올 여지를 남겼기 때문이다. 마침 그 날 대통령 정책자문위원인 교수와 저녁을 함께 하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털어놓았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에 지지를 보내며 통일운동을 하는 나도 그 소식을 들으며 총선용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야당을 포함한 보수극우 세력들이야 오죽하랴. 국회위원 몇 사람 더 당선시키지 못하더라도 국민의 전폭적인 환영과 지지를 받으며 정책을 펴나가는 게 훨씬 바람직하지 않겠느냐. 대통령이 좀 욕심을 부리더라도 자문위원들이 총선이 끝난 뒤 발표하도록 건의할 수 없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는 대단했다. 온 나라가 흥분의 도가니였다. 곧 통일이 이루어질 것 같았다. 정상회담 한 번으로 사회 분위기가 그토록 크게 바뀔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더구나 나는 글이나 강연을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해온 터였다. “남쪽 대통령과 북녘 수령이 몇 차례 만나면 제도적 통일은 불러올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남쪽 민중과 북녘 인민이 서로 교류하며 화해하는 과정이 없으면 민족통합을 이루기 어렵다. 남북 위정자들의 차가운 머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양쪽 주민들의 뜨거운 가슴으로 분단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

위와 같은 주장은 잘못이었던 것이다. 김대중과 김정일의 2박3일 만남 단 한 번만으로도 남쪽 민중과 북녘 인민 사이의 원한과 증오가 풀리고 화해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상회담 직후 한 초등학교에서도 강연을 요청해왔다. 통일운동을 하며 여기저기서 다양한 계층을 상대로 강연해왔지만 초등학교에서의 강연은 처음이었다. 4-6학년 학생들이 모인 강당에서 질문으로 강연을 시작했다. “그저께 대통령 할아버지께서 어디 다녀오셨지요?” “북한이요.” “왜 다녀오셨어요?” “통일하러요.” “북한 대통령은 누구지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요.” 산뜻한 충격이었다. 이전엔 대학의 북한.통일문제 관련 수업에서도 북한 지도자의 공식 직함을 물어보면 제대로 아는 학생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상회담의 성과가 바로 이런 것 아니겠는가.

물론 정상회담의 성과로 정부 차원에서는 장관급 회담이 남북에서 번갈아가며 여러 차례 열렸다. 대규모의 이산가족 상봉이 다섯 번이나 성사됐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을 통한 남북교류도 크게 확대됐다. 나라 밖으로는 북한과 미국 사이에 공동성명이 채택되었다. 북미 정상회담으로까지 이어질 뻔했다. 2년 뒤엔 북한과 일본 사이에 최초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나는 정상회담의 가장 큰 의미나 성과를 <6.15 남북공동선언> 2항에서 찾았다.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는 대목이다. 1994년 김영삼 정부가 발표한 ‘민족공동체 통일방안’ 2단계인 ‘남북연합’과 1989년-1991년 김일성이 주장한 ‘낮은 단계 연방제’ 사이의 공통점을 바탕으로 통일을 추구하자는 뜻이다. 이렇게 바람직하면서도 실현 가능성 높은 통일정책이 어디 있겠는가. 통일엔 상대가 있어 어느 한쪽의 제안만 고집하면 다른 쪽이 받아들이기 곤란하니 양쪽의 제안 가운데 공통점을 찾아 통일의 길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나는 글과 강연을 통해 이 내용을 강조하며 조금이라도 더 확산시키고자 힘썼다. 이미 15년 정도 지났기에 비밀을 털어놓는데, 그 무렵 행정직과 외무직 고급공무원 시험 출제위원으로 일하면서는 다음과 비슷한 문제를 빠뜨리지 않았다.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 사이에 공통점과 차이점을 쓰시오.”

두 방안의 공통점은 남북이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를 지향해왔기 때문에 급격하게 통일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점을 감안해 잠정적으로 각각의 이념과 체제 그리고 제도와 정부를 유지하는 것이다. 세 가지 특징을 들 수 있다. 첫째, 두 방안 모두 통일의 최종 형태가 아니라 과도기적 형태다. 통일의 모습이 아니라 통합을 준비해 나가는 과정이나 방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둘째, 두 방안 모두 2체제 2정부를 유지하면서 두 정부 사이에 협력체제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남북 정부가 정치, 군사, 외교권을 각각 갖고 협력기구를 운영해 나간다는 것이다. 셋째, 이러한 중간 단계에서 정치, 군사, 경제, 사회 등 각 분야별 대화와 교류협력을 통해 통일의 기반을 넓혀나간다는 것이다.

가장 큰 차이점은 국가연합이 대외적으로 두 개의 국가인데 반하여, 연방제는 대외적으로 하나의 국가라는 점이다. 연합제는 연립주택처럼 2개의 독립국가가 가까이 붙어서 협력하는 형태인 ‘2국가 2정부 2체제’라고 할 수 있고, 연방제는 한 지붕 두 가족처럼 밖으로는 1개의 독립국가를 이루면서 안으로는 2개의 지역정부가 공존하는 형태인 ‘1국가 2정부 2체제’라고 말할 수 있다.

2000년 10월,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뉴스가 날라들었다.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 속에 들썩거렸다. 사찰에서는 축하법회를 갖고, 교회에서는 축하예배를 올리고, 방송국에서는 축하음악회를 치르고, 백화점에서는 할인행사를 하고, 식당에서는 무료음식을 제공하고, 전국 곳곳의 거리와 건물에는 축하현수막을 내걸고..... 나는 마침 두 달 전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 들렀을 때, 매년 12월 노벨평화상 시상식이 열리는 아울라 강당을 둘러보며 4개월 뒤 김 대통령이 저 자리에 설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터라 더욱 반가웠다.

그러나 거의 모든 주요 일간지에 대기업들의 경축광고가 줄을 잇는 가운데, 출퇴근길에 스치는 중고등학교와 대학의 정문에까지 축하현수막이 걸린 것을 보고 부정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정부의 권유나 압력 때문일 것이라는 의혹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고 다양한 기관이나 단체들이 자발적으로 충성 경쟁을 벌이더라도 민주적이고 성숙한 정부라면 말리는 게 바람직하지 않겠느냐는 뜻이었다.

북미관계 개선과 김대중의 교훈

2001년 미국에 부쉬 행정부가 들어서고 북한을 ‘악의 축’이나 ‘깡패국가’로 부르면서 북미관계가 뒤틀어졌다. 부쉬가 워싱턴을 방문한 김대중도 무시하고 냉대하면서 한미관계 역시 서먹해졌다. 북한의 경의선 연결공사가 중단되면서 남북관계도 꼬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2002년까지 이 모든 상황을 되돌려놓았다. 부쉬가 2002년 서울을 방문하자 그를 도라산으로 안내해 남북을 잇는 철도공사 현장을 둘러보게 하며 다음과 같이 설득했다고 한다.

“레이건 대통령은 러시아를 악의 제국으로 지칭했지만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대화를 했고 데탕트를 추진했다. 결국 공산체제의 변화와 냉정종식을 이룩했다. 닉슨 대통령은 전범자라고 규탄하면서도 중국을 방문하여 관계개선과 개혁개방을 유도했다. 친구와의 대화는 쉽고 싫은 사람과의 대화는 어렵지만, 국가를 위해 필요에 의해 대화할 때는 해야 한다. 미국은 한국전쟁 때 공산당하고도 대화를 했다. 북한의 안전을 보장하고 북한의 살길을 열어주면 북한은 핵과 대량살상무기를 틀림없이 포기할 것이다.....”

결국 부쉬는 김대중의 햇볕정책을 지지하겠다고 밝혔다.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으며 대화를 통해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겠다고도 했다. 바로 이거다. 북한을 압박하려 했던 호전적 미국 대통령을 “젖 먹던 힘까지 발휘해” 설득해 결국 대화와 협상으로 북핵문제를 풀도록 이끌었던 것이다. 내가 김대중을 가장 존경하는 대목이다. 참고로, 10여년 뒤 이명박과 박근혜는 이와 정반대로 미국 대통령이 북한과 대화하려는데 이를 막으며 북한을 압박하고 봉쇄하라고 매달리지 않았는가.

2017년 1월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했다. 남한에선 그의 한반도 정책이 어떻게 전개될지 전전긍긍하는 가운데 몇 달 뒤엔 대통령선거가 실시된다. 우리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어떤 지도자를 뽑아야 할까. 트럼프가 대외정책을 어떻게 전개하든, 미국이 북핵문제를 풀기 위해 대화와 협상을 우선하든 압박과 봉쇄를 중시하든, 남한 지도자가 미국과 북한에 대해 어떤 자세로 무슨 정책을 펴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역사와 정치 그리고 평화와 통일에 대한 깊은 지식과 지혜 그리고 굳센 신념과 철학을 지녔던 김대중 대통령보다 뛰어나지는 못해도 그의 흉내라도 낼 수 있는 지도자를 기대한다.

* 이 글은 월간 ≪아시아문화≫ 2017년 2월호 특집 “국민의 정부, 대통령 김대중”에 실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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