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1946년 중국 동북해방전쟁 당시 국가적인 후방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숭고한 의리로 중국 인민에게 사심없는 원조"를 했다는 것이다.

북한 대외용 월간 잡지 <금수강산> 2월호는 지난해 재발간된 『중국 동북해방전쟁을 도와』 내용을 지난달에 이어 연이어 실었다. 지난달에는 군대 지원을 주로 다뤘으며, 이번에는 물자 지원 등을 소개했다.

▲ 북한이 지난해 재발간한 책『중국 동북해방전쟁을 도와』.[캡처-금수강산]

잡지에 따르면, 1946년초 중국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이 금주, 심양, 장춘, 매하구, 길림, 교하 등을 차지하고 동남만과 남북만을 차단하자, 결국 중국 공산당은 단동, 통화지구를 내놓게 됐다. 그러자 남만지역 인원 철수가 불가능하게 됐다고 한다.

이에 북한 김일성 주석은 북한 북부지역을 중국 동북 남만과 북만을 연결하는 길로 사용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를 위해 북한 내부에서는 '조선주재 동북국판사처', 대외적으로 '평양리민공사'라는 명칭으로 물자수송, 인원수송, 물자교류를 담당하는 기관이 설립된 것.

1946년 7월부터 1949년 2월까지 약 2년반 동안 동북국판사처를 통해 북.중은 20여개 협정을 체결하고, 물자대금처리는 무역협정에 따라 1년씩 갱신했으며, 중국 공산지도부의 정권대표부 역할도 했다.

이외에도 당시 북한은 중국 측에 다량의 군사물자도 지원했다고 한다. 잡지는 "1946년 봄 마오쩌둥의 지시로 평양을 방문한 천윈(陳雲) 중국 공산당 조직부장이 일제침략군에게서 노획한 무기와 탄약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고 전했다.

그러자 김 주석은 10만 여 정의 무기와 탄약, 폭약, 군복천, 군복, 의약품을 보냈으며, 그해 8월, 이듬해 6월에도 많은 양의 포와 무기를 또 지원했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포병연대, 공병부대를 조직해 동북지역에 파견했다고 잡지가 소개했다.

또한, 중국 동북, 남만, 북만 통로가 막히자, 중국 반변부대가 북한을 거쳐 동북만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조치했고, 상해의 중국 공산당 간부와 군사인원이 남포를 거쳐 하얼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했다고 한다. 소화 요동군구 지휘관, 전투원이 철수할 때도 북한을 거쳐갔다.

이와 함께, 북한은 단둥이 국민당에 넘어가자 남만 무장장비 85%, 2만여 t의 전략물자를 북한 지역에 숨겨줬고, 일제가 버린 2천여화차분의 물자도 무상 혹은 일부 물물교환 방식으로 중국에 넘겼다. 그리고 중국 물자이동을 위해 남양철교를 이용하도록 했으며, 훈춘군수생산기지가 공격받자, 아오지석유공장으로 옮기도록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평안북도가 생산한 쌀, 다량의 의약품, 생활필수품, 소금을 지원하고 수풍발전소 전기도 중국 측에 공급했다고 잡지가 전했다.

이밖에도 당시 국민당이 공산단에 반대하는 세력을 활용해 '내응외합(內應外合)' 책략을 쓰려고 하자, 북한은 1946년 4월 용정에서 '해란강대학살사건' 주구청산대회를 열어 국민당 지령을 받은 이들 18명 중 7명을 즉결처분했다고 한다.

또한, 리홍광지대는 1946년 12월 임강보위전이 시작되기 전 7개월 동안 백두산지구 국민당 협조세력을 토벌하고, 북한 청년들로 조직된 길림보안총대 제7대대는 제7지대로 개편한 후 지역 세력을 숙청했다. 목단강군구사령부는 1백여 차의 전투를 거쳐 북만지역 반공산당 세력을 소멸했다.

이로써, 2차 국공내전(제3차 국내혁명전쟁)이 발생하기 전에 중국 동북지역에는 국민당 동조세력이 힘을 잃었다고 잡지가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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