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과거사 청산은 근대 국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있었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으로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과거사 청산은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일로써 왜곡․은폐된 과거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사회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은폐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바로잡기 위한 과거사 청산 노력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통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아래서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여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가 계속되면서 그 성과가 희미해지고 있다. 

역사는 진실을 밝혔다고 해서 끝나서는 의미가 없다. 역사의 진실이 영원히 기억되지 않으면 역사의 정의는 없다. 진실은 공식 기록으로 표기되고, 교육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망각과의 투쟁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 권력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과 테러, 의문사, 고문에 의한 조작 등과 관련된 사건들을 되짚어 봄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고자 한다. / 필자 주


공중 폭격으로 초토화된 한반도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에서 범한 미군의 범죄행위 가운데 지극히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하다. 하지만 노근리 사건은 그 규모의 면에서는 작은 부분일지 몰라도 정치적 의미는 중요하다. 이 사건의 진실이 드러남으로써 미군의 민간인 학살 행위가 전세계에 공식적으로 폭로되었다. 미국은 학살의 고의성, 즉 상부의 명령에 따른 조직적인 학살이라는 점은 부인하였지만 학살 사실 자체를 공식 인정하고 미국 대통령의 이름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미국 정부가 미군의 민간인 학살행위를 공식 인정하고, 대통령이 직접 유감을 표명한 것은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 미군 폭격으로 화염에 휩싸인 평양시가지(항공사진)

그러나 한국전쟁에서 미군이 범한 민간인 학살과 전쟁범죄 행위는 노근리 사건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이다. 한국전쟁에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의 가장 주된 수단이 된 것은 공중폭격이었다. 한국전쟁에 대한 미군의 최초의 개입도 공중폭격이었다. 전쟁 발발 4일 만인 6월 29일 첫 폭격을 시작한 미공군기는 전쟁 내내 한반도 상공을 누볐다. 한국전쟁 동안 미군은 압도적인 공군력을 바탕으로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공산군(북한 인민군과 중공군)의 기동력과 전쟁 수행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엄청난 공중폭격을 감행하였다.

김학준에 따르면, 북한은 전쟁기간 약 2백만 명에 가까운 인적손실을 입었다.(1) 반면, 커밍스와 할러데이는 최소한 인구의 12~15%가 죽임을 당했다고 평가했다.(2)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5천여 개의 학교, 260여 개의 극장과 영화관, 1천여 개의 병원, 2천8백만 평방미터의 주택 등이 파괴되었고, 25만 두의 소, 38만 두의 돼지, 37만 정보의 농지 피해를 입었으며, 8천7백여 동의 공장과 생산설비가 파괴되었다. 그 결과 북한은 1949년에 비해 1953년 전력공업이 26%로, 연료공업은 11%, 야금공업은 10%로, 화학공업은 23%로 감소되었으며, 철광석, 선철, 강철, 조동, 조연, 전동기, 변압기, 유산, 화학비료, 카바이드, 가성소다, 시멘트 등 생산시설이 대부분 파괴되었다. 이 같은 피해는 대부분 미군의 무차별적인 공중폭격과 야만적인 포격에 의한 것이었다.(3) 

미 극동 공군폭격사령관을 역임했던 오도넬이 밝혔듯이 전쟁초기 6개월 동안 중공군이 개입하기 이전에 이미 북한의 5개 주요 도시, 즉 평양, 성진, 나진, 원산, 진남포가 철저히 파괴되었다. 오도넬은 “나는 전부, 한반도의 전부가 정말 놀랄 만큼 어지럽다고 말하고 싶다.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이름값을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서 있지 않았다. 중공군이 들어오기 전에 우리는 무기를 손에서 놓게 되었으니까, 한국에는 더 이상 목표물이 없었다”라고 말했을 지경이다.(4)

▲ 한국영화 '평양폭격대'의 포스터

재미 목사 홍동근이 북한 고향을 방문하여 조카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䵞년 가을, 미군폭격기 B-29가 80대 이상 연 사흘 신의주를 폭격하고 특히 소이탄으로 폭격하여 전도시를, 집과 사람을 불로 태워버렸다”고 한다. 그 바람에 “신의주 사람 20만 명 중 3분의 2가 타죽고 도시의 80%가 잿더미로 변했다”고 한다. 말 그대로 무차별적이고 야만적인 폭격으로 여자,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불타 죽었던 것이다.(5)

그러나 미군의 공중폭격은 1951년과 1952년에 더욱 심해졌고, 500대 이상의 폭격기를 동원해 북한전력공급의 90%를 차지하던 수풍댐과 발전소도 파괴했다. 정전협정이 체결되는 1953년에는 더욱 극단적이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2개월 전에는 농업용 저수지댐까지 파괴함으로써 자연자체를 완전히 초토화하려 하였다. 미 공군의 무차별적인 공중폭격으로 북한의 주요 기관과 산업시설, 농토와 저수시설 등이 대부분 파괴, 초토화되었다.(6)

미국의 공중폭격은 휴전협정 진행되는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정전협정이 중단되거나 자신들의 요구사항이 먹혀들지 않을 때 대규모 공중폭격을 감행하며 ‘항공압박작전’을 폈다. 미 공군은 북한 전역을 원시상태로 돌려놓기 위해 대규모 폭격작전인 ‘교살작전’을 감행하였다. 1952년 7월 11일과 12일 가공할만한 평양폭격이 가해졌는데 폭격의 목표물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었다. 이때 1만여 통의 네이팜탄과 6만2천 발의 탄약, 697톤의 폭탄이 북한 주민들의 머리 위에 쏟아졌고, 하루에만 평양시민 7,000여명이 사망하였다.

1952년 여름 미국은 북한의 78개 도시와 읍, 주요 군사시설을 ‘지도위에서 영원히 지워버리기 위한’작전을 세웠다. 이렇게 진행된 ‘프레스 펌프 작전’첫날 무려 1,254회의 폭격과 2만3천 갤런의 네이팜탄이 평양을 비롯한 인구 밀집지역에 퍼부어졌다. 8월 29일은 전쟁 기간 중 최대의 폭격이 이뤄졌는데 그날 하루 동안 평양은 1,403회의 폭격과 700톤의 폭탄 세례를 받아야 했다.(7) 

이러한 무차별적인 폭격 덕분에 평양에 온전한 형태를 유지한 건물이 거의  없었다. 세간에서는 온전한 건물이 단 세 채밖에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김진계는 “평양시내 건물이란 건물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모두 부서져서 허허벌판이 되어 있었다. 더구나 평양시민들은 오갈 데가 없이 부서진 집 속에 토굴 비슷하게 파놓고 살아가는데 마치 원시인들 같았다. 도시 전체가 완전히 빈민 소굴이요 난민 소굴이었다. 식량도 동이 날 대로 나버렸고 비바람을 피할 천막이나 움집조차도 없었다. 굶주리고 병든 사람이 하나 둘 비참한 최후를 맞고 있었다. 살아 움직이는 사람보다 죽어 나자빠진 시체가 더 흔했다. 아니 살아 있는 사람도 반쯤은 죽어 있었다”라고 증언했다.

▲ 2차대전 당시 공습으로 폐허가 된 함부르크 모습.

다른 곳이라고 나을 게 없었다. 김진계는 “전쟁 후 원산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그곳도 평양과 다를 바 없었다. 아니 평양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 미군은 군사시설뿐만 아니라 민가라도 야간에 불빛만 비치면 굶주린 개가 고기를 본 듯이 공격을 했”다고 말했다.”(8)

미군 폭격기의 투하 폭탄 중에서도 특히 사람들을 살상하는 데서 가공할 역할을 한 것은 석유덩어리로 만든 신형무기인 네이팜탄과 시한폭탄이었다. 네이팜탄은 높은 공중에서 폭발한 다음 조그만 산탄으로 사방에 퍼져 지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불태워버렸으며, 사람의 몸에 붙어서 불태워 죽였다. 시한폭탄은 철저히 인마살상용이었다. 공습으로 희생되거나 다친 사람들을 수습하기에 정신이 없는 동안 이 시한폭탄은 다시 터져 구조대를 살상하였다.(9) 

전쟁초기 미군의 공중폭격정책

한국전쟁 초기 미 공군의 북한지역 폭격은 ‘차단작전(interdiction)’과 ‘전략폭격(strategic bombing)’의 작전 개념 아래서 전개되었다. 차단작전이란 적의 병력과 물자가 전선으로 이동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적 후방의 교통중심지역, 도로, 철도, 병력이동로, 이동병력의 숙소 등을 폭격하는 항공작전이다. 따라서 북한 철도와 도로교통의 중심지였던 평양, 원산, 함흥, 청진, 나진 등 대도시는 공중폭격의 핵심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다.(10)

▲ 미군폭격을 받고 있는 원산시내 모습

전략폭격이란 적의 전쟁수행능력과 전쟁의지를 없애기 위해 선정된 적의 핵심목표를 구조적으로 파괴하는 군사작전을 의미한다. 전략폭격은 적의 군사, 산업, 정치, 경제구조를 괴멸시키는 것과 사기를 파괴하는 것을 주요한 목표로 한다. 전략폭격에 대비되는 개념으로는 ‘전술폭격(tactical bombing)’이 있는데 보통 지상부대나 해상부대의 작전에 기여하기 위해 실시되는 공중폭격을 의미한다. 전쟁 초기 전선의 유엔군을 돕기 위해 극동공군 산하 제5공군이 수행했던 항공작전이 주로 전술폭격에 해당된다.

전쟁초기부터 미 극동공군 지휘관들은 북한지역에 대한 무차별적인 대량 폭격을 주장하였다. 미 극동공군 전략공군사령관 커티스 르메이와 폭격기사령관 오도넬은 처음부터 소이탄을 사용하여 북한 도시지역을 무차별폭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오도넬은 맥아더에게 “북한 내 5개 산업중심지를 불살라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전쟁초기에는 오도넬의 주장이 워싱턴의 정치적 고려 때문에 실현되지 않았다.(11)  

전쟁초기 유엔군은 국제법의 틀 내에서 전쟁을 수행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1950년 7월 4일 유엔사령관 맥아더는 “본인의 작전 통제 하에 있는 군대에 의해 억류되거나 권력 내에 들어온 북한 군대의 인원과 기타 북한 사람들은 무력충돌에 관여한 문명국가들이 적용하고 승인한 인도주의의 원칙에 따라 대우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12) 또한 미국은 “여러 협약들의 인도적 원칙, 특히 1949년 제네바 협약 제3조를 지침으로 삼을 것”이라고 천명하였다.(13)

그러나 전쟁 초기에도 미 공군의 북한지역 폭격은 이러한 원칙과는 달리 전개되었다. 미국은 ‘군사목표’만을 공격대상으로 삼았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미군기가 민간지역에 대해서도 가차 없이 공격을 감행해, 민간인이 대량으로 살상되는 일이 벌어졌다.

▲ 한국전쟁 당시 원산 폭격 모습

미군기의 가장 일차적인 공격 대상이 된 곳은 원산과 평양이었다. 원산은 북한의 주요 항구도시이자 철도요충이었고, 정유시설까지 있었다. 원산항 남단의 조선정유공장은 한반도에서 가장 큰 정유소로 아시아에서도 순위에 들 정도 규모였다. 원산 부두는 대형항구였고, 원산 철도는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3대철도 중의 하나였으며, 원산 기관차 공장은 한반도에서 두 번째로 큰 열차수리시설이었다.

원산은 7월 6일과 7일 처음 B-29의 폭격을 받았고, 7월 13일 다시 대규모 폭격을 당했다. 13일의 폭격에는 B-29기 56대가 동원되었는데 미 극동공군 폭격기사령부 비행기의 98%가 동원된 대규모 작전이었다.(14) 사흘 후 미군 사진분석관들은 원산 선착장과 그 옆 저장시설의 50%가 파괴되었다고 평가했지만 실제로는 원산 선착장 부근의 인구밀집지역을 비롯하여 광범위한 지역까지 피해를 입었다.

북한의 <조선인민보>는 “미군이 13일 아침에 500톤의 폭탄을 구름 위에서 주택구역을 선택하여 투하한 결과, 1,249명이 희생되었다. 그 가운데 195명은 여성들이었고, 155명은 어린이였고, 122명은 노인이었다”라고 보도했다.(15) 1950년 8월 5일 북한 외무상 박헌영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의장 말리크에게 7월 13일의 원산폭격과 관련된 공식 항의서한을 보냈다. 박헌영은 서한을 통해 사망자와 부상자를 합해 4,000명 이상의 민간인 피해자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7월 14일 미 공군참모총장 반덴버그는 원산폭격의 성과를 치하하며 만족해했다. 7월 17일 폭격기사령부는 필요시까지 원산을 목표물 리스트에서 제외시키라고 명령했다. 원산지역에서 더 이상 가치 있는 폭격대상을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산에 대한 폭격은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1950년 7월 초부터 약 한 달간 지속된 미군기의 폭격으로 북한 동해안의 중심도시였던 원산은 핵심 산업시설과 교통시설의 60~95%를 상실했고,(16) 수백 채의 민간인 주택과 수천 명의 북한주민들이 희생되었다.

▲ 1950년 10월 20일 400여 명의 낙하산부대가 평양 부근에 투하되는 모습(출처-NARA)

평양 또한 미군 폭격의 주요 대상이었다. 평양은 북한의 정치·경제의 중심지이자 주요 철로가 통과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평양에는 대규모 화물집하장과 철도수리공장뿐만 아니라 만주 심양의 병기창 다음으로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병기창이 있는 곳이었다. 평양병기창은 소총, 자동화기, 탄약, 수류탄, 지뢰 등을 대량생산하고 있었다.

1950년 6월 29일 미공군은 전쟁 발발 후 최초로 평양비행장을 폭격한 데 이어 7월 22일  B-29기 22대가 출격하여 폭격을 가했다. 22개 둘 15대는 나남창고와 병참집적소를, 6대는 평양조차장을, 그리고 나머지 1대는 원산정유공장을 폭격했다. 이날 인구 조밀 주택지구에 70여 발의 폭탄이 투하되어 일반주민의 주택 100여 호를 파괴했고, 농촌지역인 평양 남부 양각리에 27개의 대형 폭탄이 투하되어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다.(17)

평양은 7월 22일부터 일주일 사이에 3번이나 공격을 받았다. 평양 도심 폭격은 8월 7일 절정에 이르렀다. B-29기 49대가 동원되어 “주택지구에 450개의 폭탄을 투하하는 무차별 폭격을 감행”하여 潰호의 일반 주민주택을 완전히 파괴”했다. 북한은 “평양에 래습한 비29 33대는 일반 주택지구와 또 군사시설과는 하등의 관계도 없는 건물들을 무차별 폭격하여 수다한 문화시설 국가기관들을 파괴하였다”고 주장했다.(18)

▲ 미 공군이 평양 폭격 중에 찍은 사진

8월 중순, 평양 조차장이나 병기창과 같은 평양 시내 극동공군의 주요 목표물들은 이미 초토화된 상태였다. 그러나 극동공군사령관 스트레이트메이어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9월 말 맥아더에게 보낸 전문에서 “평양에 남아 있는 가장 중요한 목표에 대한 폭격을 제안합니다. 공격해야 할 목표는 군 막사·훈련소·저장소·조차장 등이고 이 임무에 B-29 폭격기 100대를 투입하여 적의 방공망을 무력화시킴과 동시에 목표들을 한 번에 제거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19)

그러나 맥아더와 미 합참은 전황이 나쁘지 않은 상황에서 평양에 대한 대규모 폭격이 가져올 정치적 문제를 고려해 그 계획에 반대하였다. 미군의 북진에 앞서 B-29기 100대를 동원해 평양을 지도에서 완전히 지우려 했던 스트레이트메이어의 계획은 합참과 맥아더의 제동으로 좌절되었다. 하지만 스트레이트메이어는 수개월 후 유엔군이 수세 상황에 내몰리자 평양초토화계획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충격과 공포, 미제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

오늘날 미 공군은 1950년 7월 30일부터 3일간 계속된 흥남 폭격을 극동공군 전략폭격의 가장 성공적 사례로 꼽고 있다. 불과 3일만에 극동지역에서 가장 큰 산업지역의 하나인 흥남 공업지구를 쓸모없는 폐허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흥남 폭격에는 제22폭격전대와 제92포격전대 소속 B-29기 47대가 동원됐는데, 검은 구름으로 덮여 있는 흥남 상공에서 공중폭격을 했다. 폭격의 효력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폭격 직후 화염이 치솟아 올라 검은 구름을 벗겨냈을 정도였다.(20)

▲ 미군폭격으로 파괴된 흥남송전소 모습(사진출처 NARA)

북한의 조사보고서는 “7월 30일, 8월 1일, 3일의 3차에 걸쳐 흥남지구에 래습한 미군 항공기 115대는 동지구에 약 1,500발의 폭탄을 투하하는 맹폭격을 가한 결과 많은 주택들과 아울러 흥남 비료공장, 제약공장, 본궁공장, 서본궁공장, 카바이트공장, 흥남제련소 등 중요 공장들을 대부분 파괴하였으며 특히 조선 농업발전에 중대한 의의를 가지고 있는 흥남비료공장은 완전히 파괴되었다”(21)라고 평가했다.

1950년 8월 19일 미 공군은 63대의 B-29기를 동원하여 청진시를 폭격했다. 북한은 이날의 청진 폭격에 대해 “청진시에 래습한 미군 폭격기 60여대는 주택지구에 1,012발의 폭탄을 투하하는 맹폭을 감행한 결과 2,626호의 주택이 완전파괴 또는 사용 불가능하게 되었다. … 8월 19일 청진에 래습한 미군 폭격기들은 청진시의 90%를 폐허로 만드는 야만적 맹폭을 감행하였다. 그 결과 청진시민 1,034명(그중 393명은 여자)이 즉사하였으며, 2,347명이 부상당하였다”(22)라고 주장하였다.

미 공군은 8월 29일 또 다시 23대의 B-29기로 청진조차장을 폭격했다. 북한은 𔄠월 29일 청진시에 래습한 미군 항공기 23대는 거의 폐허로 화한 도시에 또 다시 337발의 폭탄을 투하하는 맹폭을 감행하여 주택 141호를 또 다시 파괴하였다”고 했다. 북한의 보고서에 등장하는 23대는 폭격기사령부 자료상 등장하는 B-29기 실제 출격수 23대와 동일하다. 북한측 보고서의 정확성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23)

1950년 8월 12일 폭격사령부는 나진을 폭격했다. 해군기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류 저장시설과 철도시설을 갖춘 나진시를 괴멸시키기 위한 군사작전이었다. 같은 날 B-29기 폭격기 5대가 동원돼 함흥조차장도 공격했다. 8월 27일과 28일에는 황해도 겸이포와 함경북도 성진(지금의 김책시)의 제철공장이 폭격당했다. 겸이포의 제철공장은 한국 최대의 강철생산공장이었다. 8월 27일 미군 폭격기 25대는 겸이포 제철공장의 40%를 파괴했다.

▲ 함경북도 성진제철소의 폭격 전 모습

8월 28일 47대의 B-29기들이 성진을 폭격했다. 미군기들의 공중폭격으로 성진제철소와 주변지역이 초토화되었다. 성진제철소의 90%가 파괴되었는데 이는 사실상 해당 지역의 전면적 파괴를 의미했다. 미공군기는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제철소 중 하나를 지도에서 지워버린 것이다. 폭격 전후 제철소 인근의 모습을 통해 폭격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폭격 후 사진에는 뼈대만 앙상히 남은 중심건물과 잔해조차 볼 수 없는 주변 건물들, 그리고 수많은 폭탄구멍만 보였다.(24)

▲ 함경북도 성진제철소의 폭격 후 모습

한국전쟁 초기 제공권을 완벽히 장악한 상태에서 수행된 미 공군 B-29중폭격기의 북한지역 폭격은 북한에 커다란 인적·물적 피해를 안겨주었다. 미 공군이 사전에 획득한 구체적 정보에 입각해 정밀폭격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경우도 일부 있지만, 대부분은 전략폭격 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시설 파괴와 민간인 희생을 야기했다. 이는 말 그대로 “충격과 공포”였고, 한편으로는 “미제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와 적개심”을 불러 일으켰다.(25)

그러나 북한정권은 미 공군의 대대적인 폭격에 어떤 방식으로든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북한은 교통성 산하에 전시철도복구연대를 조직하여 파괴된 철도를 신속하게 복구했다. 복구연대는 군대처럼 강한 조직과 규율 속에서 움직였다. 또한 모든 철도관리국에 철도복구대를 조직하여 중요지점에 배치하고, 해당 지역민을 적극 동원했다. 북한은 피해지역 자체적으로 집계된 피해보고서와 위에서 파견된 검열위원들의 조사보고서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피해통계를 정밀하게 작성했다.

1950년 8월 23일에 작성된 함경남도 흥남시 용성기계제작소의 폭격피해 조사보고서는 8월 19일 진행된 미군기의 폭격 양상과 공장의 피해내역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보고서에 의하면, 용성기계제작소는 8월 19일 미 공군의 500㎏ 직격탄에 의해 기능자 양성소와 인근 학교건물이 완파되었다. 보고서는 파괴된 건물 내부에 있던 교사용 책상, 학생용 책상, 칠판, 도서함, 서류함, 시계, 봉투, 노트 등의 피해수량과 금액까지 분석하고 있다. 공중폭격의 양상과 피해규모 집계가 매우 세밀하게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26)

미군 폭격은 북한에 큰 타격을 주었다. 전쟁초기 북한 도시의 학생들은 학교 건물에 대한 미공군기의 공중폭격으로 9월 신학기 수업도 진행할 수 없었다. 9월 1일 개학 이후 평남 대동군 서포인민학교 1, 2학년 학생의 출석률은 20%였고, 중화군 중화중학교 출석률은 23%, 역포중학교 함촌분실 3학년 출석률은 18.4%에 그쳤다. 수업진행도 당초 계획의 20~50%밖에 실행되지 않았다.

이에 조선노동당 조직위원회는 각 도시의 철도연변, 공장지대, 항만 등 폭격 위험이 높은 지역의 학교는 개학 중지를 명령하고 방공대책을 세우도록 지시하였다. 특히 빈번한 폭격에 시달리던 생산기업소와 운수직장의 노동자들은 철저한 방공시설과 방공대책 교육을 받았다. 북한은 다양한 방공대책을 세웠고, 대량폭격에 대응할 방안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북한은 이 같은 노력을 통해 나름대로 미군기의 폭격에 대처할 수 방안을 찾을 수 있었다.(27)

미 공군의 폭격정책 변화

전쟁초기 미 공군은 워싱턴의 정치적 고려와 견제 때문에 무차별적인 폭격을 자제하고 있었으나 중공군의 참전과 함께 정책도 달라졌다. 11월 5일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미 극동공군 지휘관들에게 “북한의 모든 설비와 시설, 마을은 군사적이고 전술적인 목표물이 되었다. 유일한 예외는 만주국경과 한반도 내에 위치한 수력발전소뿐이다”(28)라고 지시하였다. 그는 극동공군의 주요 사령관 앞에서 북한의 도시와 농촌 자체를 주요 군사적 목표물로 간주하라고 지시했다. 스트레이트메이어는 맥아더의 정책을 소각과 파괴를 위한 ‘초토화 정책(scorched earth policy)’이라고 불렀다.(29)

▲ B-29중폭격기의 폭격 모습. 하늘에 폭탄이 우박처럼 쏟아지고 있다. 저렇게 많은 폭탄들이 한반도 전역을 초토화시켰다.

그러나 맥아더는 이틀 전인 11월 3일까지만 해도 신의주를 불태워버리자는 스트레이트메이어의 주장에 반대의견을 피력했었다. 하지만 스트레이트메이어의 계속되는 설득에 마침내 맥아더가 강계에 대한 소이탄 공격을 승인했다. 맥아더는 “귀관이 그렇게 바란다면 강계를 불태워버리시오(Burn it if you so desire). 강계뿐만 아니라 적에게 군사적 중요성을 지니는 다른 도시들 또한 본보기로 불태우고 파괴하시오”(30)라고 말했다. 이는 강계뿐만 아니라 북한 전역에 대한 소이탄 공격, 초토화 작전을 승인한 것이었다.

11월 4일 27대의 B-29기들이 강계지역으로 출격했다. 그러나 이날 기상이변으로 2차 목표인 청진으로 타킷이 바뀌었다. 27대의 비행기 중 3대는 기지로 돌아왔고, 나머지 24대가 레이더조준에 따라 청진을 폭격했다. 이날 B-29기들이 사용한 무기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에서 악명을 떨친 소이탄(Incendiary bomb)이었다. 이때부터 한국전쟁에서도 B-29의 소이탄 공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다음날 청진시를 정찰한 비행기는 여전히 청진시가 “수많은 커다란 화재”에 휩싸여 있으며, 도시 북쪽으로 피난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보인다고 보고했다. 24시간 이상 지속된 불길의 존재자체가 폭격의 파괴적 위력을 증명해주었다.(31)

11월 5일 22대의 B-29기가 동원되어 애초 계획되었던 강계지역을 폭격하였다. 극동공군은 사진분석을 통해 “강계의 군 보급품집적소, 교통중심지, 고위사령부의 65%가 소이탄 공격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평가했다.(32)

11월 8일 신의주 공습에는 78대의 B-29기가 동원되었다. 78대 중 69대는 신의주 도시 전체를 소이탄으로 육안공격했고, 7대는 신의주 국제교량을 GP폭탄(General Purpose Bomb)(33)으로 공격했다. 2대는 신의주 동쪽 9마일 지점의 복선철도교량을 레이죤폭탄으로 폭격했다. B-29 중폭격기와 함께 제5공군 소속의 전폭기 87대도 동시에 폭격작전을 수행했다. 이날 하루 동안 신의주에 640톤의 폭탄과 총 8만5천발의 소이탄이 투하되었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신의주에는 1만4천호의 가옥과 126,000명의 시민들이 거주했으니, 11월 8일 하루 동안 건물 1채당 평균 6.07발, 사람 1명당 평균 0.67발의 소이탄 공격을 받은 셈이었다. 도시 전체는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34)

▲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끊어진 압록강교. 오늘날 중국은 이걸 손질해서 관광자원으로 써 먹고 있다. 압록강단교 중국 땅에서 바라보는 북한은 아직도 금단의 땅이다.

이때 합동참모본부와 맥아더는 만주지역 오폭 가능성을 철저히 경계하면서 국제교량 또한 북한쪽 구간만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미군의 공격으로 압록강교 북한 쪽이 파괴되었다. 오늘날 중국은 압록강단교(鴨綠江斷橋)를 손질해 관광지로 활용하고 있다. 이날 극동공군은 언론브리핑을 통해 도시의 90%가 파괴되었다고 평가하면서 군사적 성격만 지니는 목표물만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모순적인 주장이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타당했다. 미국은 북한지역의 도시와 농촌지역 자체를 군사적 목표물로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한국전쟁 당시 미군기의 ‘오폭’으로 파괴된 중국 단둥(안동)시

한국전쟁 초기 신의주에는 14,000천호의 가옥에 126,000명의 주민이 거주했고, 도시 내에는 장·두부·성냥·소금·젓갈 등의 경공업 공장들밖에 없었다. 신의주에는 전략적 관점에서 중요한 산업시설이 전혀 없었다. 1951년 7월에 최종 완료된 국제민주여성연맹조사단(국제여맹조사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11월 8일의 폭격으로 인해 총 3,017호의 국유 및 시 소유 건물들 가운데 2,100호가 파괴되었고, 11,000호 이상의 민간인 주택들 가운데 6,800호가 파괴되었다. 5,000명 이상의 주민들이 살해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4,000명 이상의 여성과 어린아이들이 포함되었다. 14개 중등학교 가운데 12개가 소이탄에 의해 파괴되었고, 국제협정에 따라 커다란 적십자 표시를 해두었던 2개의 시립병원도 전소되었다.(35) 그밖에 부상당한 사람들도 3,155명에 달했다.(36)

폭격 이후 신의주 주민들은 대부분 흙과 나무로 간신히 모양새만 갖춘 토굴 속에서 살아야 했다. 일부는 뼈대만 남은 가옥에 벽돌과 돌조각을 쌓아 올려 추위와 싸웠다. 국제여맹조사단이 촬영한 신의주 시내의 한 오막살이 모습을 보면, 집 주인으로 보이는 한 여성과 아이들이 지상에 지붕만 놓여있는 허술한 집 곁에 줄서 있고, 그 뒤로 완전히 폐허가 된 신의주 시내 풍경이 펼쳐져 있다. 지하에서 힘들게 겨울 버텨냈을 신의주 여성과 아이들의 힘든 삶이 생생하게 전해져 온다.(37)

소이탄 공격, 끝이 아니라 시작

1950년 11월 맥아더의 공세적 지시 이후, 전선과 압록강 사이에 위치한 북한의 주요도시들을 완전히 파괴해버리겠다는 유엔군사령부의 군사정책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1950년 11월의 폭격은 정점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다.

▲ 2차 대전 시기 B-29의 소이탄 폭격으로 화염에 휩싸인 도쿄(1945년 3월 10일)

1950년 11월 한 달 동안 진행된 미군의 북한지역에 대한 공중폭격은 대단했다. 거의 하루도 빼지 않고 북한지역에 대한 폭격이 이뤄졌다. 이때부터 공산군과 유엔군이 대치하고 있는 전선과 압록강 사이의 모든 도시들이 폭격 목표물이 되었다. 미 공군은 북한군과 중공군의 존재 자체를 따지지 않았다. 미 공군의 작전 목표는 적이 점령한 모든 도시들을 완전히 파괴하여 적의 피난처를 빼앗고 병력과 물자의 은닉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 공군의 공중폭격이 가져다 준 도시파괴의 심각성은 스스로 분석한 폭격평가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미 극동공군이 1950년 11월에 북한 도시의 파괴양상을 제시한 것에 따르면, 만포진 95%, 고인동 90%, 삭주 75%, 초산 85%, 신의주 60%, 강계 75%, 희천 75%, 남시 90%, 의주 20%, 회령 90% 등이었다.(38)

이것은 폭격작전을 수행한 미 공군의 평가에 근거한 것으로 축소된 것이었다. 여기에 따르더라도 만포진, 고인동, 남시, 회령 등의 도시는 90% 이상이 파괴되었다. 이는 사실상 도시 전체가 원폭 피해를 입은 것처럼 완전히 폐허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당시 미 극동공군은 폭격결과를 엄격한 기준으로 축소해서 발표했는데, 이 정도이면 완전한 파괴수준이었다. 실제로 소이탄의 집중폭격은 원폭에 버금가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닐 수 있었다.(39)

▲ 2차 대전 시기 일본 도쿄를 폭격하는 B-29 중폭격기 편대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북한 주요도시들을 초토화시킨 소이탄은 이미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 공습에서 가공할 파괴력을 입증해 보여주었다. 미 공군은 일본 공습에서 본토에만 160,800톤의 폭탄을 투하했는데 이들 대부분이 소이탄이었다. 특히 1945년 3월 9~10일에 가장 파괴적인 폭격이 도쿄지역에서 감행되었다. 미 공군 군사실의 공식집계에 의하면 이틀간의 폭격으로 도쿄 전체의 1/4에 해당하는 267,171채의 건물이 완파되었고, 1백만 8,005명이 거주지를 상실했다. 또한 83,793명이 사망하고, 40,918명이 부상당하는 인명피해를 입었다. 폐허가 된 도시에서 시체를 치우는 데만 25일이나 걸렸을 정도이다.(40)

실제로 도쿄지역의 사망자 규모는 원자폭탄이 투하된 히로시마나 나가사키보다 컸다. 미군사령부가 노획한 일본 측 자료에 의하면, 도쿄의 사망 및 실종자수는 197,000명이었고, 히로시마의 실종자 및 사망자수는 130,000명이었다. 특히 히로시마의 사망자수는 폭격 이후의 부상으로 상당기간 고통 받으며 생존했다가 죽은 사람들의 수까지 합한 것이었다. 폭격 후 즉사하지 않고 상당기간 생존하다가 죽은 사람수는 히로시마 사망자수의 절반에 이르렀다.(41) 이처럼 소이탄이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고 민간인을 대량으로 살상한다는 사실은 이미 5년 전 일본에서 입증되었다.(42)

▲ 2차 대전 시기 일본 도쿄를 폭격하는 B-29기의 공격으로 불타오르는 도쿄 모습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 도시지역에 투하된 소이탄은 목조건물의 방화에 유리한 M-69 소이탄이었던 반면, 한국전쟁 시기 북한 도시지역에 주로 투하된 폭탄은 500파운드 M-76 소이탄이었다. M-69는 석유를 기본으로 하는 소이탄(oil-based incendiaries)의 일종인 반면, M-76은 석유와 금속의 장점이 합해진 석유-금속 소이탄(oil-and-metal incendiaries)의 일종이다. M-76은 석유소이탄의 장점인 넓은 지역에 퍼지는 방사성(放射性)과 분말금속 소이탄의 화력상승효과가 합해진 강력한 무기였다.

M-76은 굽(goop)이라고 불리는 마그네슘과 원유의 화합물이 들어갔는데, 분말 마그네슘과 만난 석유는 진한 농도의 반죽덩어리로 변한다. 보통 불타는 마그네슘은 강철도 녹일 수 있는 1,980℃까지 온도가 상승한다. 따라서 ‘굽’은 목조건물뿐만 아니라 차량·열차·철로·공장 등의 파괴에도 유용한 폭탄원료였다. 마그네슘은 물과 융합되면 폭발성이 있는 수소 등의 가스를 형성시키기 때문에 진화도 어렵게 만들었다. 불타는 마그네슘은 밝은 불꽃을 내며 인체에 해로운 흰색의 산화마그네슘 연기까지 형성시켰다. 신의주 폭격사진에서 유난히 하얀 모습을 보여주는 연기는 산화마그네슘의 존재를 말해준다. 8만5천발의 M-76에서 만들어진 산화마그네슘의 연기가 일순간 신의주 상공을 가득 매운 것이었다.(43)

▲ 대전 시기 B-29의 폭격 후의 도쿄 모습(1945년 3월 11일)

1951년 5월 북한 북부지역을 탐방한 국제여맹 조사단의 한 그룹은 자신들의 이동경로에서 보았던 북한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노선은 평양에서 개천, 희천, 강계를 거쳐 만포까지 갔다가 평양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평양에서 개천까지 가는 도중에 조사단원들은 완전히 파괴되어 폐허로 된 네 개의 작은 도시들을 보았다. 수많은 불탄 촌락들과 농민들의 주택들도 보았다. 조사단원들은 도중에서 파괴되지 않은 도시를 하나도 보지 못했다. 피해를 입지 않은 촌락은 거의 없었다. 조사단원들은 여섯 곳에서 산불을 보았다. 그 중 두 곳은 그들의 눈앞에서 불붙기 시작했다.”(44)

이 보고서에서 알 수 있듯이 1950년 11월부터 시작된 미 공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북한의 도시와 농촌들은 이미 그 형체조차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1950년 11월의 소이탄 공격은 북한 민간인 거주지역 파괴의 정점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네이팜탄 공격과 기총소사, 그리고 초토화

미 공군의 폭격작전이 잔혹했던 이유는 무차별적인 공습 때문만은 아니다. 미군기는 지역을 완전히 소각하기 위해 진화작업에 나서는 주민들을 향해 기총소사를 통해 조직적으로 살해했다. 국제여맹 조사단원들이 만난 주민들은 하나같이 폭격 이후 전폭기가 등장해 진화작업을 벌이는 주민들을 향해 기총소사를 했다고 말했다. 미 공군이 소이탄 투하 직후 도시주민들에게 기총소사를 가한 것 자체가 심각한 범죄행위지만 더욱 심각했던 것은 이런 행위가 도시를 완전히 초토화시키기 위해서 행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미군기는 극도로 인화성이 강한 소이탄을 도시지역에 투하한 다음, 화염이 수일동안 꺼지지 않고 계속될 수 있도록 기총소사를 통해 주민들의 진화작업을 방해했던 것이다.(45)

진화작업을 방해하기 위한 또 다른 활동은 소이탄 투하 직후에 도시 전역에 시한폭탄을 투하한 것이었다. 화재진압과 교량복구사업은 남북한을 막론하고 해당 도시 거주민들이 담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 공군이 시한폭탄을 무차별적으로 투하한 것은 남북한의 민간인들을 조직적으로 살상하기 위한 비인도적인 전쟁범죄 행위였다. 이것은 민간인들을 희생시킴으로써 그들 사이에 공포심을 낳게 만드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북한주민들은 소이탄이 만들어낸 화염을 보면서도 기총소사와 시한폭탄의 두려움 때문에 감히 불을 끌 엄두도 못 냈다.(46)

▲ 1950년 11월 23일 함경도 갑산, 미군폭격으로 성한 집이 드물다.

도시민들에 대한 저공비행 기총소사의 임무는 제5공군 전폭기들의 몫이었다. 실제로 B-29중폭격기가 대량으로 투입된 주요 작전에는 제5공군 전폭기들이 집중적으로 투입되었다. 1950년 11월 8일 78대의 전폭기들이 신의주를 폭격했을 때, 87대의 전폭기들이 신의주 상공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B-29중폭격기의 임무가 대도시지역을 소이탄으로 ‘대량소각’하는 것이라면, 제5공군의 전폭기들의 임무는 대도시지역을 ‘완전소각’하는 일을 적극 지원, 방조하는 것이었다.(47)

이처럼 제5공군 소속 전폭기들은 대도시 파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들의 보다 중요한 역할은 북한지역 촌락의 파괴에 있었다. 맥아더의 소위 ‘초토화정책’발표 이후 민간인이 거주하는 촌락 또한 완전파괴와 소각의 대상이 되었다. 남한지역에서 그랬던 것처럼 북한지역에서도 전폭기들의 근접지원작전과 무장정찰 과정에서 수많은 촌락들이 무차별적으로 파괴되었다.

전폭기들은 적 병력이나 보급품을 찾아내기 위해 각별히 애쓸 필요가 없었다. 이들 대부분은 임무구역에서 적 병력이나 보급품을 수색하다가 적절한 목표물을 발견하지 못하면 해당 구역 내의 촌락과 도시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적 병력이나 보급품의 존재 유무는 중요하지 않았다. 민간인 거주지역 자체가 훌륭한 공격목표였다. 기지로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마을은 탑재한 무기를 모두 “소진”할 수 있는 좋은 목표물이었다. 전폭기들은 출격하면서 자신이 갖고 나간 무기들을 마을에 모두 쏟아 붓고 난 후에 기지로 돌아왔다.(48)

미 공군 전폭기들은 북한 폭격에서 네이팜탄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대부분의 F-51전폭기는 110갤론의 네이팜을 채운 연료통을 네이팜탄으로 사용했다. 특히 북한지역에서 활동한 전폭기들은 네이팜탄을 적 파괴의 핵심무기로 활용했다. 네이팜탄을 이용한 대규모 파괴의 대상은 북한군이나 중국이 아닌 북한 민간인 거주지역이었다.

B-29기가 M-76 소이탄으로 대도시 대량파괴작전을 수행하고, F-51과 F-80 등의 전폭기들이 네이팜탄으로 촌락들을 소각하는 동안, 제5공군 소속의 B-26경폭기들 또한 ‘밤낮을 가리지 않고’북한 도시와 농촌지역을 파괴했다. B-26기도 다른 비행기들처럼 네이팜탄을 대량으로 활용했는데 이들은 특히 야간폭격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보였다. 1950년 11월 B-26기들의 작전양상은 B-29기 만큼이나 파괴적이었다. 이들은 대도시와 중소도시, 촌락을 가리지 않고 편대를 이루어 해당 지역을 불태워버리고는 사라졌다. B-29기들이 규모가 큰 도시들을 중심으로 대량파괴를 진행하는 동안, B-26기들은 인근의 주요 중소도시와 촌락을 광범위하게 파괴하였다.(49)

▲ 1950년 11월 미 공군의 원산폭격 후 모습. 그래도 아직 공장의 굴뚝들은 남아 있다.(출처: 전쟁기념관)

<뉴욕타임즈>의 종군기자 바렛(G. Barrett)은 이 무렵 북한의 농촌지역을 방문한 후, 네이팜탄 공격을 받은 마을을 보았다. 중국군이 마을을 점령하기 3~4일 전에 네이팜탄 공격이 있었는데 시체가 전혀 매장되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시체를 묻어줄 사람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자는 우연히 한명의 늙은 여인과 마주쳤는데, 유일한 생존자였다. 그녀는 4명의 가족 시신이 있는 검게 그을린 마당에서 몇 벌의 옷을 쥔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주민들은 마을과 들판에서 사살되었다. 그들은 네이팜탄 공격을 당했을 때 취했던 자세를 정확히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한 남성은 막 자전거를 타려는 참이었고, 50명의 소년과 소녀들은 고아원에서 뛰놀고 있었다. 가정주부 한 사람은 이상하게 아무 상처도 없었다. 그 작은 마을에 약 200구의 시체들이 놓여 있었다.(50) 말 그대로 잔혹한 집단학살이다.

북한 도시와 촌락에 대한 소이탄 공격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50년 11월 17일, 유엔군사령관 맥아더는 주한미대사 무초를 만나 공군의 활동내용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렇게 단언했다. “불행히도 이 구역은 사막화될 것입니다.”맥아더가 말한 “이 구역”이란 유엔군과 공산군이 대치한 전선과 북중 국경선 사이의 북한지역 전체를 의미했다. 폭격 명령권자인 맥아더의 발언은 단순한 ‘예언’이 아니라 분명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실제로 북한지역을 폐허로 만들어버리겠다는 그의 의지는 현실로 나타났다.

1951년 8월 헝가리 기자 티보 메라이는 취재활동을 위해 압록강을 건넜다. 메라이의 표현에 의하면 “북한에는 더 이상 도시가 존재하지 않았”고, “압록강에서 평양에 이르는 북한지역은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예전에 20만 명이 거주하던 도시를 지나갈 때조차 그가 본 것은 오로지 지상 위로 솟아오른 굴뚝뿐이었다. 북한의 도시와 촌락지역은 상당부분이 이미 초토화되어 있었지만, 앞으로도 2년 동안 폭격을 더 견뎌야 할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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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김학준,『한국전쟁』, 박영사, 1989, 346쪽

2) 커밍스&할러데이, 『한국전쟁의 전개과정』, 태암, 1990, 83쪽

3) 강정구,『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 역사비평사, 1996, 230쪽

4) 강정구, 위의 책, 228쪽

5) 홍동근, 『미완의 귀향일기-상』, 한울, 1988, 119쪽

6) 임영태, 『북한50년사 1』, 들녘, 1999, 263쪽

7) 최장집 편,『한국전쟁연구』, 태암사, 1990, 126쪽; 임영태, 위의 책, 263쪽

8) 김진계구술·김응교기술, 『조국-상』, 현장문학사, 1990, 182쪽

9) 강정구, 위의 책, 230쪽

10) 김태우, 『한국전쟁기 미 공군의 공중폭격에 관한 연구』, 서울대박사학위논문, 2008, 71~72쪽

11) 김태우, 위의 논문, 73쪽

12) 조시현, 「한국전쟁기 미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의 법적 성격: ‘국제인도법’과 ‘국제인권법’을 중심으로」,『한국전쟁기 미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의 성격과 의미』(진실화해위원회, 2008), 13쪽

13) 조시현, 위의 글, 14쪽

14) 김태우, 위의 논문, 83쪽

15) <조선인민보> 1950년 7월 26일자; 김태우, 위의 논문, 87쪽 재인용

16) 폭격기사령부는 8월 10일 조선정유공장 폭격직후 목표의 95%가 파괴되었으며, 현재 지점에 정유소를 재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평가했다. 원산조차장 또한 동쪽과 북서쪽 작업장과 수리창의 60%가 파괴되었고, 원산 기관차수리공장은 70%가 파괴되었다.

17) 미국 무력간섭자들과 리승만 도배들의 만행에 대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조사위원회 보도 제1호」(1950. 8. 18), 『조선중앙연감 1951~1952년』, 조선중앙통신사, 1952, 150쪽; 김태우, 위의 논문, 94쪽 재인용

18) 「미국 무력간섭자들과 리승만 도배들의 만행에 대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조사위원회 보도 제2호」(1950. 9. 18), 『조선중앙연감 1951~1952년』, 조선중앙통신사, 1952, 158쪽, 160쪽; 김태우, 위의 논문, 96쪽 재인용

19) 김태우, 『폭격: 미 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창비, 2013, 126쪽

20) 김태우, 위의 논문, 102쪽

21) 김태우, 위의 책, 132쪽

22) 「미국 무력간섭자들과 리승만 도배들의 만행에 대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조사위원회 보도 제2호」(1950. 9. 18),『조선중앙연감 1951~1952년』, 조선중앙통신사, 1952, 159쪽, 165쪽; 김태우, 『폭격: 미 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134쪽 재인용

23) 김태우, 위의 논문, 111쪽

24) 김태우, 『폭격: 미 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140쪽

25) 김태우, 위의 논문, 116쪽

26) 김태우, 위의 논문, 119쪽

27) 김태우, 『폭격: 미 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2160~162쪽

28) 그러나 1952년에 들어가면 수력발전소와 저주지들까지 폭격대상에 포함된다.

29) 김태우, 위의 논문, 228쪽

30) The Three Wars of Lt. Gen George Stratemeyer, His Korean War Diary, 254쪽; 김태우, 위의 논문, 230쪽

31) 김태우, 『폭격: 미 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292~293쪽

32) 김태우, 위의 논문, 233쪽

33) 자유낙하폭탄으로 조종사의 기량에 의해 명중률이 좌우된다. 그러나 산과 같은 곳에 마구 뿌려대는 전투에서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 무작위로 떨어뜨린 폭탄이 자유롭게 활강하여 공격목표를 파괴한다. 정밀폭격이 아니라 사실상 무차별적인 폭격에 주로 사용되었다.

34) 김태우, 『폭격: 미 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295쪽

35) 1922년 헤이그법률가위원회는 「공전(空戰)에 관한 규칙」을 국제사회에 제안했는데, 이는 현재 국제법학자들에 의해 관습법으로 인정되고 있다. 공전규칙에는 ‘폭격으로부터 보호되는 건물’에 대한 조문 제25조가 있다. 이 조문에 의하면, 커다란 십자가로 보호된 역사 사적과 병원은 폭격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할 대상이다(『국제조약집』, 연세대출판부, 1986, 913쪽).

36) 김태우, 위의 논문, 235~236쪽

37) 김태우, 위의 논문, 236~237쪽

38) 김태우, 『폭격: 미 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301쪽

39) 아라이 신이치 지음/ 윤현명·이승혁 옮김, 『폭격의 역사』, 어문학사, 2015, 139~143쪽

40) 김태우, 위의 논문, 242쪽; 아라이 신이치, 위의 책, 159~162쪽

41) Stockholm International Peace Research Institute, Incendiary Weapons, Stockholm: Almqzist & Wikesell International, 1975, 37쪽; 김태우, 위의 논문, 243쪽

42) 김태우, 위의 논문, 243쪽

43) 김태우, 위의 논문, 243~244쪽

44) Womena International Commission for the Investigation of War Atrocities Committed in Korea, "Report of the Women's International Commission for the Investigation of Atrocities Committed by U.S.A. and Syngman Rhee Troops in Korea", 1951. 7, 40~41쪽; 김태우, 『폭격: 미 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304~305쪽 재인용

45) 김태우, 위의 논문, 245~246쪽

46) 김태우, 위의 논문, 246쪽

47) 김태우, 위의 논문, 247쪽

48) 김태우, 위의 논문, 251쪽

49) 김태우, 『폭격: 미 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314~315쪽

50) <뉴욕타임즈>, 1951. 2. 9일자; 김태우, 위의 책, 330쪽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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