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
예술은 전례 없는, 예상치 못하고 생각하지 못한 존재의 질을 생성한다(가따리) |
바기날 플라워
- 진수미
여름 학기
여성학 종강한 뒤,
화장실 바닥에
거울 놓고
양 다리 활짝 열었다.
선분홍
꽃잎 한 점 보았다.
이럴 수가!
오, 모르게 꽃이었다니
아랫배 깊숙이
구근 한덩이
이렇게 숨겨져 있었구나
하얀 크리넥스
입입으로 피워낸 꽃잎처럼
철따라
점점(點點)이 피꽃 게우며,
울컥 불컥
목젖 헹구며,
나
물오른
한줄기 꽃이였다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이 생각난다.
여성이 ‘자신의 몸’을 긍정하게 되는 경이로운 순간.
이 시를 읽고 여성의 특정 부위를 묘사했다고 해서 ‘성적 자극’을 받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만일 이 시가 대다수 사람들이 ‘성적 자극’만 받는다면 이 시는 실패한 시일 것이다.
아니면 대다수 사람들이 ‘변태’가 되었든지.
남자들은 모른다.
여성이 얼마나 자신의 몸을 부정하고 사는 지를.
그래서 이 시는 우리의 깊은 ‘미적 감수성’을 깨우는 좋은 시다.
국회의원 회관에서 전시된 작품 ‘더러운 잠’이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나는 원작은 보지 못했다.
그 작품을 인터넷 신문에서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그 작품을 패러디한 원작에서는 백인 여성이 나체로 누워있고 옆에 흑인 여성이 서 있다.
그 당시는 흑인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백인은 옆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나체로 ‘당당하게’ 누워있다.
혹 ‘더러운 잠’의 작가도 세월호가 침몰하는데도 나체로 ‘당당하게’ 누워있는 대통령을 묘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사람들의 그 작품에 대한 평가는 다양한 것 같다.
‘더러운 잠’에서 ‘여성의 나체’가 무엇을 보여주는 지에 대해 다양한 견해들이 모아졌으면 좋겠다.
단지 여성의 비하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미적 충격을 주는지.
칸트는 우리 가슴 속의 도덕률을 실행할 수 있는 힘은 ‘미적 감수성’에서 나온다고 했다.
우리가 ‘미적 인간’이 될 때 이 세상은 우리 가슴 속의 도덕률이 아름답게 빛나는 세상이 될 것이다.
‘더러운 잠’이 우리의 사회의 미적 감수성을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