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은 전례 없는, 예상치 못하고 생각하지 못한 존재의 질을 생성한다(가따리)


 바기날 플라워
 - 진수미 

 여름 학기
 여성학 종강한 뒤,
 
 화장실 바닥에
 거울 놓고
 양 다리 활짝 열었다.

 선분홍
 꽃잎 한 점 보았다.

 이럴 수가!
 오, 모르게 꽃이었다니

 아랫배 깊숙이
 구근 한덩이
 이렇게 숨겨져 있었구나

 하얀 크리넥스
 입입으로 피워낸 꽃잎처럼

 철따라
 점점(點點)이 피꽃 게우며,

 울컥 불컥
 목젖 헹구며,

 나
 물오른
 한줄기 꽃이였다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이 생각난다.

 여성이 ‘자신의 몸’을 긍정하게 되는 경이로운 순간.

 이 시를 읽고 여성의 특정 부위를 묘사했다고 해서 ‘성적 자극’을 받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만일 이 시가 대다수 사람들이 ‘성적 자극’만 받는다면 이 시는 실패한 시일 것이다.

 아니면 대다수 사람들이 ‘변태’가 되었든지.

 남자들은 모른다.

 여성이 얼마나 자신의 몸을 부정하고 사는 지를.

 그래서 이 시는 우리의 깊은 ‘미적 감수성’을 깨우는 좋은 시다.

 국회의원 회관에서 전시된 작품 ‘더러운 잠’이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나는 원작은 보지 못했다.

 그 작품을 인터넷 신문에서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그 작품을 패러디한 원작에서는 백인 여성이 나체로 누워있고 옆에 흑인 여성이 서 있다.

 그 당시는 흑인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백인은 옆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나체로 ‘당당하게’ 누워있다.

 혹 ‘더러운 잠’의 작가도 세월호가 침몰하는데도 나체로 ‘당당하게’ 누워있는 대통령을 묘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사람들의 그 작품에 대한 평가는 다양한 것 같다.

 ‘더러운 잠’에서 ‘여성의 나체’가 무엇을 보여주는 지에 대해 다양한 견해들이 모아졌으면 좋겠다.

 단지 여성의 비하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미적 충격을 주는지.

 칸트는 우리 가슴 속의 도덕률을 실행할 수 있는 힘은 ‘미적 감수성’에서 나온다고 했다.  

 우리가 ‘미적 인간’이 될 때 이 세상은 우리 가슴 속의 도덕률이 아름답게 빛나는 세상이 될 것이다.

 ‘더러운 잠’이 우리의 사회의 미적 감수성을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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