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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4)-인민군의 퇴각과 민간인 학살<연재> 임영태의 한국현대사, 망각과의 투쟁(32)
임영태  |  ytlim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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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1.31  01: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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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과거사 청산은 근대 국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있었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으로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과거사 청산은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일로써 왜곡․은폐된 과거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사회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은폐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바로잡기 위한 과거사 청산 노력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통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아래서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여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가 계속되면서 그 성과가 희미해지고 있다. 

역사는 진실을 밝혔다고 해서 끝나서는 의미가 없다. 역사의 진실이 영원히 기억되지 않으면 역사의 정의는 없다. 진실은 공식 기록으로 표기되고, 교육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망각과의 투쟁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 권력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과 테러, 의문사, 고문에 의한 조작 등과 관련된 사건들을 되짚어 봄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고자 한다. / 필자 주

 

인민군의 후퇴와 민간인 학살

1950년 9월 말 인민군이 퇴각할 때 인민군과 좌익에 의해 처형 형식의 대량학살 사건이 벌어진다.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유엔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 북한노동당은 9월 중순경 인민군 전선사령부에 후퇴 명령을 내리는 한편, 각 지방당에 다음과 같이 지시를 내렸다.

   
▲ 6.25전쟁 당시 학살의 현장이 된 대전형무소 건물 사진

1)전세가 불리하여 후퇴한다. 2)당을 비합법적인 지하당으로 개편할 것. 3)유엔군 상륙 때 지주(支柱)가 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할 것. 4)군사시설로 이용될 수 있는 것은 파괴할 것. 5)산간지대 부락을 접수하여 식량을 비축할 것. 6)입산경험자와 입산활동이 가능한 자는 입산시키고 기타 간부들은 남강원도까지 후퇴케 할 것.(1)

이러한 지시를 받은 각 도당위원회는 지시를 이행하는 한편, 9월 28일을 전후하여 모든 조직들을 각 도내의 산악지대로 이동시켰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유엔군 상륙 때 지주가 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할 것”이었다. ‘유엔군 상륙시 지주가 될 요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상당히 모호하였고, 군당, 면당, 리당, 그리고 명령이 집행자인 실무선으로 내려가면서 해석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날 수 있었다.

충북 옥구군 좌익들의 행동 사례에서 이러한 지시가 하급 실무선으로 내려가면서 어떻게 구체화되고 확대 해석되면서 대규모 학살로 연결되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도당의 지시를 접수한 옥구군당 조직부장은 다음과 같은 지시를 하였다.

“1)유엔군 진주 후 적 진영에 가담, 적극적으로 활동할 자를 학살할 것. 2)인민군의 후퇴는 일시적 문제이니 재차 반격하여 올 것은 확실하다. 3)학살방법에 대해여서는 구체적인 방법에 따라 조직적으로 행할 것. 4)학살방법에 대하여서는 모든 사람들을 동원해 놓고 그 중에서 노동당원이나 수매사업 불응, 또는 방해자라고 지적하여 조건을 부여하여 색출한 후 별도로 살해할 것. 5)학살일자는 회합이 종료하는 대로 야간을 이용, 즉시 실행할 것. 6)실행하기 전에 부락 주위 경계를 감행할 것. 7)당원이 핵심체가 되어서 열성분자를 모아 학살조직체를 가질 것. 8)17세 이상 40세까지의 남녀는 대대편성을 하여 북반부에 파견할 것.”(2)

여기에 따르면, “유엔군 상륙 때 지주가 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할 것”이란 중앙당과 도당의 지시가 군당급에서는 “적 진영에 가담, 적극적으로 활동할 자를 학살할 것”으로 구체화되었으며, 학살방법도 ‘학살조직체를 구성하여 대중집회시 대상자를 색출하라’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조직적, 집단적 대규모 학살을 예고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군당의 지시를 받은 면당은 대상자의 범위를 확대했을 뿐만 아니라 학살방법에서도 매우 참혹하였다. 옥구군 미면당에서 각 리(동)에 내린 지시는 “1)학살 대상자 문제에 대하여서는 각 리별로 책임구역을 담당, 책임자 재량대로 반동가족을 일제히 학살할 것. 2)학살 장소에 대하여서는 일제시 일본군이 구축한 반공호를 사용하여 책임자 재량에 일임할 것. 3)학살 장소별로 인민군 2명씩을 배치할 것. 4)살해방법은 총살 및 타살로 하나 죽창, 농기구를 사용할 것. 5)각 리 책임자는 각 리에 도착 즉시 통행금지를 단행할 것. 6)학살 완료 후 명부를 면당에 보고할 것” 등이었다.

면당의 지시와 결정은 학살대상자가 “반동가족 일체”로 확대되었으며, 학살 방법에서도 방공호 사용 등 집단적 학살을 구체화하고 있다.(3)

   
▲ 한국군이 주민들에게 뿌린 삐라(ⓒkonas.net)
   
▲ 휴전 이후 지리산 빨치산들에게 뿌린 삐라. ⓒkonas.net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유엔군 상륙시 지주가 될 모든 요소의 제거”라는 중앙당과 도당의 지시는 군당급에서는 “유엔군 진주 후 적진영에 적극 가담할 자의 학살”로 구체화되었고, 면당급에서는 “일체 반동가족까지의 학살”로 확대되었다. 따라서 인민군의 전면적인 후퇴시에 내려진 정치적 숙청과 관련된 지시는 ‘모든 유생역량의 일소’라는 전쟁논리로 발전하면서 대규모 집단학살의 서곡이 되었다.

좌익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대표적 사례로 일컬어지는 전북 옥구군 미면의 경우, 9월 27~29일 사이에 ‘반동분자 및 그 가족’574명이 학살되었다. 이 사건에서 9월 27일과 28일 이틀간 미면 신풍리에서 학살된 66명 중에는 24명의 여자와 4세의 어린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4)

여수에서는 1950년 9월 27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퇴각하던 인민군과 내무서원(지방좌익 포함)이 내무서 수감자를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노동당원, 내무서원과 인민위원장 등(5)은 내무서장실에서 처치문제를 논의한 다음, “전원 총살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수감자 197명 중 일부를 석방하고 150여 명은 순천으로 호송하여 “재심석방”한다는 구실로 포박한 다음, 도보로 미평(美評)에 이르렀을 때 과수원과 그 일대의 둔덕재, 둔덕재 아래 벽돌공장 주변에서 총살하였다.(6) 순천에서도 역시 9월 27일 순천내무서에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이 내무서 뒤뜰에서 총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7)

유엔군의 지주가 될 요소를 제거할 것

그렇다면 이러한 집단학살 사건이 개별지휘관의 명령 집행과정에서 생겨난 오류 때문일까? 아니면 전쟁을 지휘한 당중앙과 군사위원회의 구체적인 지시에 의한 것일까?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들을 통해 볼 때, 당중앙의 “유엔군 상륙시 지주가 될 모든 요소를 제거할 것”지시는 ‘유엔군에 협조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인적 재원을 제거하라(학살 지시)라기보다는 추상적인 수준에서 내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중앙당의 지시가 군당→면당→리당으로 내려가는 과정에서 집단학살로 구체화되었다.

   
▲ 미군 한국전쟁범죄조사단보고서(KWC) 중 일부
   
▲ 미군 한국전쟁범죄조사단보고서(KWC) 중 일부

 

 

 

 

 

 

 

 

 

 

결국 이는 리(동) 단위의 실무집행자들의 과대 충성심과 전쟁 전부터 내재되어 있었던 주민들 사이의 보복적 감정이 결합되면서 대량학살로 표출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지도부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지시에 따라 행해진 집단학살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북한의 전쟁지도부는 하부단위 당조직에 가담한 남한 주민들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였으며 세부지침을 통해 대량학살의 가능성을 차단하지 못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8)

유엔군의 반격작전으로 1950년 중순 이후 전세가 역전되었고, 그에 따라 북한 인민군은 퇴각을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당은 인민군 전선사령부에 퇴각 명령과 함께 ‘유엔군의 지주가 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러한 지시는 점령지에서 퇴각하면서 정치범과 그 가족들을 대량으로 처형하는 근거로 작용하였다. ‘유엔군의 지주가 될 요소’는  ‘유엔군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의미하였다. 그에 따라 9월 20일부터 각 지역에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되기 시작하였다. 이때 학살된 사람들은 대부분 20~40대의 남자들이었고, 일부 군 포로들도 그 대상이 되었다.

   
▲ 미군 한국전쟁범죄조사단보고서(KWC)#1668 중 ‘한금자 진술조서’(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 미군 한국전쟁범죄조사단보고서(KWC)#1668 중 현장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9월 20일경 수감자들에 대한 조치가 내려졌는데, ‘북으로 후송하거나 후송이 불가능하면 현지에서 적당히 처단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지시에 따라 각 지방에서는 형무소 또는 산중으로 끌고 가서 대부분 학살하였다. ‘미(美) 전쟁범죄 조사단(KWC)’(9) 보고서에 따르면 좌익에 의한 학살의 84.6%가 9월 26일부터 30일 사이에 벌어졌다.(10) 특히 중앙당의 지시는 하급단위로 내려가면서 처형범위가 확대되었다. 군당의 지시를 받은 면당과 리(동)의 좌익조직은 정치범뿐만 아니라 그 가족과 주변사람들까지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였다.

미 대사관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9월 17일에서 28일 사이에 서울에서 1만~2만 명의 정치범들이 행방불명되었는데, 이들은 서대문형무소와 마포형무소에서 수감되어 있다가 의정부와 춘천을 향해 이동한 것으로 여겨진다. 미 대사관 직원과 해병대원들은 약 50명씩 그룹을 지어 매장되어 있는 약 1천구 정도의 시체더미를 발굴하였는데, 이들은 정치범들로 북으로 납북되어 가던 도중에 병이 들어 도보이동이 불편하거나 이동가치가 없다고 여겨져 처형된 것으로 판단되었다.(11)

미대사관 직원들은 경기도 양평의 한강 둑에서 9월 27일에서 30일 사이에 살해당한 정치범 시체 800구를 확인하였다. 9월 30일 유엔한국위원회 조사단 1개 팀이 서울의 학살현장을 조사했는데 발견된 시체는 모두 정치범들로 서울이 탈환되자 북한군이 이들을 마당에 집결시켜 총살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대전형무소(대전교화소), 프란치스코 수도원(정치보위부), 대전경찰서(대전내무서) 등에서 1,500요명이 학살되었다. 이들은 충남 각 지역 분주소와 내무서, 정치보위부에 수감되었다가 대전으로 끌려왔으며, 대전내무서나 충남정치보위부 등에서 취조를 받은 후 인민교화소(대전형무소), 충남정치보위부(프란치스코 수도원), 대전내무서(대전경찰서) 등에 수감되었다. 이들의 수감 이유는 양민, 특히 좌익을 탄압, 구속, 살해하였다는 것이었다.(12)

이들 중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충남 각 지역에서 끌려온 우익인사들로서 1950년 9월 25~26일 형무소 내 밭고랑과 우물, 인근의 용두사, 도마리, 탄방리 등으로 끌려가 총살되었다. 정치보위부(프란체스코 수도원)에 수감된 희생자들은 주로 외국인, 종교인 등으로서 목동성당, 수도원, 용두산 등에서 총살되었다. 대전내무서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은 미군, 한국군 포로와 경찰들로서 9월 27일 새벽에 경찰서 마당에서 총살되었다.(13)

   
▲ 진실화해위원회 좌익에 의한 전주형무소 학살 관련 사진(진실위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 진실화해위원회 좌익에 의한 전주형무소 학살 관련 사진(진실위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또한 전주형무소에서도 9월 26~27일에 인민군과 형무소장과 간수, 지방좌익 등에 의해 최소한 수백 명에서 최대한 1천여 명의 우익인사들이 학살되었다.(14) 전남에서도 300명이 떼죽음을 당했는데 무안에서는 퇴각하는 인민군이 80여명의 주민들을 불에 태워 죽였다고 한다.(15) 전남 임자도에서는 전체 주민의 반 이상이 인민군과 지방좌익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주장되기도 한다.(16) 미군은 9월 28일부터 10월 4일 사이에 약 5,000~7,000명의 민간인, 17명의 국군, 400여 명의 미군이 살해되었다고 밝혔다.(17)

   
▲ 서천 등기소 창고 정면 사진(KWC 32 Exhibit E, No. 10)
   
▲ 서천 등기소 창고 측면과 정면(KWC 32 Exhibit E, No. 12)

1950년 9월 27일 새벽 충남 서천군 서천등기소 창고에서 좌익세력에 의해 240~250명가량이 학살되었다. 이 사건은 희생자들이 좁은 등기소 건물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불을 질러 불에 타죽었다는 점에서 좌익의 잔혹한 죄상과 만행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거론되고 있다. 이 사건을 직접 실행한 인물은 모두 11명으로 이 중 7명이 정치보위부 소속이고, 나머지는 남로당위원장, 내무서 부서장, 세포위원 등이었다. 가해자 중 한 명으로 서천경찰서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이명식의 판결문과 미 전쟁범죄 조사단 보고서(KWC#32)에 의하면, 이 학살사건을 모의한 사람은 남로당위원장 구재극, 정치보위부장 이병제, 내무서장 장한성, 검찰소장(성명불상), 인민위원장 이구몽 등 5인이고, 학살의 집행은 정치보위부에서 맡았다.(18) 

대한민국을 일류국가로 만드는 길

그러면 한국전쟁 시기 인민군과 지방좌익 등에 의해 학살된 전체 민간인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 이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는 형편이다. 다만 공무원과 민간인 등의 피살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1952년 3월 31일 한국정부 공보처 통계국에서 발간한 『6.25사변 피살자명부』에는 5만9,964명의 피살자 명단이 실려 있다. 이 자료는 범례에서 “6·25 사변 중 공무원 및 일반인이 잔인무도한 괴뢰도당에 피살당한 상황을 조사 편찬하였다”면서, 대상을 “군경을 제외한 비(非)전투자에 한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자료는 인민군 등 좌익에 의해 피살된 민간인의 명단만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19)

이 자료에 의하면, 59,964명의 피살자 가운데 전남지역 피살자가 43,511명으로 전체의 72.6%를 차지했고,(20) 다음으로 전라북도(5,603명), 충청남도(3,680명), 경기도(2,536명),서울(1,383명), 강원도(1,216명) 순이었다. 그 외 경상남도 689명, 충청북도 633명, 경상북도 628명, 제주도 23명, 철도경찰 62명이 좌익에 의해 피살된 것으로 기록됐다. 전체 피해자 가운데 남자가 44,008명, 여자가 15,956명이었다.(21)

한편, 미군이 38선을 넘어 진격할 때 인민군이 북으로 후퇴하면서도 학살이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22) 박계주에 의하면, 전쟁 발발과 함께 북한지역에서도 남한과 유사한 ‘예비’검속이 이루어졌으며 이들에 대한 성분조사를 정치보위부에서 진행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북한은 미군이 압박해 들어오자 결국 이들을 학살하였다. 미군 진주 후 확인되었는데 북한측은 사람들을 새끼줄로 묶어 총살한 다음, 시체를 차곡차곡 쌓았다. 평양의 칠골리, 승호리 근방 사도리 뒷산, 기림 공동묘치터와 용산공동묘지 등에서 학살이 있었다. 함흥의 경우, 함흥 감옥과 충령탑 지하실, 정치보위부 지하실, 덕산 니켈광산, 반룡산 방공굴 등에서 수천 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23)

   
▲ 북한의 신천학살 박물관.
   
▲ 북한의 신천학살 박물관. 북한에서 반미의 소재로 가장 광범하게 활용된다.
   
▲ 북한이 주장하는 황해도 학살 지도

북한지역을 점령한 유엔군(미군과 한국군을 포함)과 우익단체 등에 의해서도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되었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신천군에서만 인구 14만 2,786명 가운데 3만 5,383명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 살해방법 또한 잔인하기 이를 데 없다.(24) 북한의 경우 남한의 연구자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에 좌·우익에 의한 학살 모두 얼마나 사실에 근접한 주장인지를 검증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지역 또한 남한지역 못지않은 대량 학살이 있었을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좌익에 의한 것이든 우익에 의한 것이든 민간인 학살자 수치 추정에서는 상당한 과장이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민간인학살사건 조사를 이끌었던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전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는 좌우익에 의한 민간인 학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시사적인 언급을 하고 있다.

“나는 국내외 언론 인터뷰에 응할 때 보도연맹원은 10만 명 내외로 희생되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 경우가 많았다. 그 후 형무소 정치범, 부역혐의자, 지리산 일대 토벌 과정 희생자들을 포함하면 20만에서 30만 정도의 민간인이 전쟁 초기 대한민국 군과 경찰, 우익단체에 의해 학살당했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내 추정이다. ‘100만 피학살자’를 주장해온 유족들의 주장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인민군이나 좌익에 의한 희생자 수는 전체적으로 5만에서 7만 정도 되는 것 같다. 전남 영광군처럼 한 군에서 3만여 명이 좌우 양측에 의해 학살당한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군 단위에서 최소 500여 명, 최대 2,000여 명이 양측에 의해 학살당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다. 내가 위원회 조사를 지휘하면서 확실히 얻을 수 있었던 결론은 한국전쟁기에 국군, 경찰, 우익 세력에 의한 학살 규모가 인민군 혹은 지방 좌익에 의한 학살 규모보다 훨씬 컸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터부가 된 논리, 즉 전쟁기 ‘빨갱이의 잔혹성’은 어느 한쪽의 사실과 기억만 과장한 것이다. 대한민국 군경은 매우 잔혹했고 실제로 인민군보다 죄 없는 민간인을 더 많이 죽였다. 우리 국가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이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25)

그러면서 “물론 누가 더 많이 죽였는지를 두고 곧바로 체제 문제까지 갈 필요는 없다”면서 한 마디 덧붙이고 있다. “북한은 이런 조사를 못하지만 우리는 이런 조사를 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결론이 난 것이 아닌가? 그 후 새롭게 자료가 공개된다면 더 규명되거나 논의되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26) 그러니까 과거사의 진실을 규명하는 것, 그래서 우익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밝히는 것이 결코 대한민국의 명예를 더럽히거나 품위를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진정한 민주국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이른바 ‘일류국가’로 만들고 ‘국격(國格)을 높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유엔군의 반격과 남반부 인민유격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과 낙동강전선 반격작전 이후 급격히 전황이 악화되자 인민군 주력부대는 소백산맥, 태백산맥을 경유하여 북으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중간에 허리가 잘리는 바람에 1만여 명의 인민군이 퇴각하지 못한 채 영·호남의 산악지역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유격전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전남도당(위원장 박영발)은 9월 28일 화순군 북면 용곡리 백아산 기슭에 도당 본부를, 10월 5일 인민유격대 전남총사령부(사령관 김선우)와 각 지구유격대를 설치하였다. 전북과 영남, 충청 지역의 도당들도 조직을 개편하여 유격대 활동을 전개하였다. 

   
▲ 회문산 빨치산 사령부 자리에 있는 이현상 약력 설명

한편, 지방당의 기반도 없이 1949년 하반기에 지리산 지구에서 인민유격대 제2병단을 편성하여 유격전을 전개해 오던 이현상부대는 6.25전쟁 발발과 함께 인민군에 호응하여 광범위한 지역에서 ‘협동작전’을 폈다. 하지만 유엔군의 총반격에 지리산지구로 들어갔던 이현상은 고립된 부대를 이끌고 북으로 후퇴하여 1950년 11월 중순경 강원도 평강군 세포면 후평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이승엽은 이현상, 여운철 등과 남한지역의 당사업과 유격투쟁에 관한 문제를 토의한 뒤, 여운철에게 6개도당(충남북, 전남북, 경남북)에 대한 지도권한을, 이현상에게 유격대의 통일적 지도의 책임을 맡겼다.

이에 이현상은 후평리에 집결한 유격대와 퇴각한 인민군, 민간인들로 구성된 ‘남반부 인민유격대’를 조직하여 다시 지리산을 향해 남하하였다. 이현상의 남반부 인민유격대는 승리사단 400명, 혁명지대 60명, 인민여단 150명, 사령부와 기타 직속부대 150명 등 800여명으로 편성되었다.

   
▲ 이현상의 죽음을 보도한 신문기사(동아일보, 1953년 9월 23일자)
   
▲남로당 빨치산 대장 이현상

 

 

 

 

 

 

 

 

이현상부대는 중국군의 참전으로 유엔군이 철수할 무렵인 1950년 12월 태백산맥을 타고 남으로 내려왔다. 12월 말 충북 단양지구에 집결하여 문경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유격전을 벌였다. 유엔군의 공격에 유격대는 제천지구로 이동하였고, 이곳에서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단’으로 부대의 조직을 개편하였다. 1951년 2월 초 남부군단은 속리산으로 남하하였으나 토벌작전이 심해지자 이현상이 부대를 직접 이끌고 덕유산으로 들어갔다.

1951년 7월 중순, 남부군단 총사령관 이현상은 여운철과 함께 덕유산에서(27) 충남북, 전남북, 경남북의 ‘6개 도당회의’를 열고 다음과 같은 결의를 하였다.

1) 당 과업 수행에서 군사에 관한 제반 문제는 군사부장이 운영하며, 당은 정치사업에 치중하여 지방당 재건에 힘쓸 것.
2) 군사부는 각 병단을 통합하여 사단제로 개편하고 군사행동으로 남반부를 장악할 것.
3) 비합법투쟁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배반자가 속출하고 있으므로 사상교양에 힘쓸 것.
4) 6개도당은 군사적 유일체제를 보장하기 위해 지리산에 총거점을 설치할 것.
5) 군사경험이 있는 비무장원을 모두 무장시키고, 소요되는 무기는 승리사단이 제공할 것.
6) 가급적 약탈과 방화를 중지하고 민심 수습에 노력할 것
.(28)

이현상과 여운철이 주도하는 6개도당회의가 열리기 전까지는 각 도당이 독자적인 당 사업과 유격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충남도당의 경우, 도당위원회, 도인민위원회, 도당 유격대 등은 대둔산으로 이동시켜 도당위원장 남충렬의 지도 아래 충남유격대를 조직하였다. 사령부 직속으로 공병부대, 통신중대, 정찰중대 등을 편성하고, 그 아래에 320명의 백두산부대, 130명의 대덕부대, 100명의 압록강부대, 100명의 청천강부대 등을 편제하였다.

   
▲ 빨치산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남부군’의 한 장면

전북도당 위원장 방준표는 지휘부를 회문산으로 이동시키고 그곳에서 유격대를 조직하였다. 사령관 방준표, 부사령관 조병하(도당부위원장)의 산하 직속부대로 이택부대(60명), 보위부대(150명), 백학부대(70명), 돌진부대(60명), 광산부대(50명), 학소부대(40명), 기포부대(120명)를 조직하였으며, 사령관 아래에 제1정치사령과 제2정치사령을 두었다. 제1정치사령은 전주시당유격대(70명), 김제군당유격대(50명), 임실군당유격대(310명), 순청군당유격대(260명), 완주군당유격대(150명), 익산군당유격대(100명), 금산군당유격대(300명), 진안군당유격대(50명), 무주군당유격대(130명), 장수군당유격대(470명), 남원군당유격대(150명)을, 제2정치사령은 정읍군당유격대(60명), 고창군당유격대(590명), 부안군당유격대(160명)를 지휘하였다.

경남도당의 경우는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인민군잔존병력을 중심으로 303부대, 102부대를 조직하였다. 후에 ‘불꽃사단’으로 불리는 유격대를 편성하였는데, 북에서 경남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파견된 김의장(청진시인민위원장)을 사단장으로 하고 노영호(서울공대 2년 중퇴)를 참모장으로 하였다. 또한 전남도당의 경우는 백아산에서 전남인민유격대를 조직하고 도당부위원장 김선우를 사령관으로 하였다. 경북에서는 6.25와 함께 남파된 남도부(29)부대가 활동하고 있었고, 경북도당위원장 박종근이 따로 유격대를 조직, 활동하였다.

1951년 7월 중순, 덕유산에서 ‘6개도당회의’가 개최된 다음, 전남과 경북을 제외한 각 도당유격대들이 이현상의 남부군단 산하로 들어가는 개편이 이뤄졌다. 남부군단 사령관은 이현상, 부사령관은 이영회(30)였고, 산하에 제1전구(전북 북부와 충남)와 제2전구(전북 남부)가 조직되었다. 제1전구에는 충남 빨치산 570명을 68사단으로, 전북 북부지방 빨치산 700명을 45사단으로 각각 개편했다. 제2전구는 전북 남부에 있는 각 유격대를 46사단, 53사단으로 개편하였다.

   
▲ 이강천 감독의 영화 ‘피아골’(1955) 스틸 사진

남부군단은 쇠퇴하고 있던 각 도당 빨치산을 수습하여 통일된 지도체계 아래 효과적인 유격전을 펴고자 했지만 이에 반발하며 이현상의 지시에 불복하는 등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전남도당의 경우 처음부터 남부군단 산하의 사단편제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총사령관 이현상은 경남 산청군 삼장면 조개골에 주거점을 두고 개편된 남부군단을 지휘하였다.(31) 

남한지역에서 각도 유격대를 남부군단 산하로 편입하여 조직을 개편하고 있을 무렵, 북한 인민군과 중국군의 재공세와 함께 유격대를 제2전선의 역할을 맡도록 하는 지령을 내렸다. 1950년 12월, 1951년 1월과 3월 세 차례에 걸쳐 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총참모장 남일, 작전국장 유성철의 이름으로 각 도당 조직과 상관없이 군사활동만을 목적으로 한 ‘지대’로 개편하도록 하라는 지령문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령은 통신수단이 없었던 때문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그 때문에 당초 지시와는 6개월간의 시차가 생기기도 하였다.(32)

좌우익에 의해 3만 명이 학살당한 영광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남한 각 지역이 한국 군경에 의해 수복되기 시작하고, 입산한 당원 등 지방좌익과 인민군 패잔병들이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던 시기 남한 곳곳에서는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현상이 벌어졌다. 낮에는 한국 군인과 경찰이 마을로 들어오고 밤에는 빨치산들이 마을로 내려와 활개를 치면서 특히 빨치산 거점 지역을 중심으로 군경과 빨치산 양쪽에 의해 민간인들이 대거 희생되었다.

토벌작전을 벌인 한국 군경은 미수복지역의 주민을 ‘빨치산’혹은 ‘비무장 빨치산’, ‘빨치산 동조자’로 여겨 토벌대상으로 삼았고, 식량을 제공하거나 짐을 져다 나르는 등의 노역행위를 이유로 주민들을 학살했다. 한편, 빨치산들은 아직 치안이 회복되지 않은 지역을 습격하거나 밤에 마을에 나타나 식량을 비롯한 각종 물품을 빼앗아갔으며,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주민들을 괴롭혔다. 빨치산 활동 근거지 인근 주민들은 군경에 협조한다는 등의 이유로 ‘반동’으로 몰려 살해되거나 곤욕을 치렀다. 이 같은 군경과 빨치산의 등살을 피해 주민들은 피신생활을 해야 했고, 피신 중에 군경에 걸려 희생당하기도 했다.(33)

   
▲ 경남 산청군에 있는 지리산 빨치산 토벌 전시관
   
▲ 빨치산 토벌 전시관에 있는 사진
   
▲ 빨치산 토벌 전시관 앞의 부조상

인민군이 후퇴한 다음 좌익이 택한 게릴라투쟁 가운데 주요한 활동이 매복기습전으로 국군의 병력과 군수물자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빨치산은 이 같은 매복기습전을 통해 통신수단을 파괴하기 위해 전선을 절단하거나 차량의 이동을 방해하기 위한 도로 파괴 등을 감행하였다. 이에 군경은 주민들을 동원하여 전신주나 도로를 지키기 위해 보초를 서도록 했는데 이때 빨치산의 습격을 받아 희생당하기도 하였다. 빨치산의 철로 폭파로 기차에 타고 있던 민간인들이 희생되는 일들도 벌어졌다.

빨치산이 출몰하는 상황에서 지역 경찰서는 치안공백 상태를 메우기 위해 방위대와 치안대, 경비대를 조직하여 치안을 맡겼고, 민간차원에서도 자율적으로 치안위원회와 자치위원회, 각종 청년단체를 조직하여 치안 활동을 폈다. 이들 조직들이 경찰을 대신하여 야간경계(야경)를 서다가 빨치산의 습격으로 희생당하기도 하였다. 또한 빨치산의 보급투쟁 때 짐꾼으로 끌려가 행방불명이 되거나 희생당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34)

인민군 퇴각 후 국군의 점령지 수복 이후에 빨치산 등 좌익세력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주로 군인, 경찰, 공무원, 마을 이장, 대한청년단원 등 우익인사와 그 가족들이었다. 이미 말했듯이 이와는 관련이 없는 무고한 지역주민들도 많이 희생되었으며, 영유아와 부녀자, 노인들까지 포함된 가족전체나 마을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학살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인민군과 좌익에 의해 가장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곳은 전남지역이었는데, 특히 인민군 퇴각 후에 사건들이 많이 발생하였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전남지역에서 빨치산 활동이 가장 활발했기 때문이다. 전남지역의 경우 1950년 10월부터 수복작전이 펼쳐졌으나 늦은 지역은 1951년 3, 4월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군경이 주요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처럼 군경의 수복작전이 늦어지고 치안확보가 안 되면서 곳곳에서 좌익에 의해 우익인사들과 주민들이 살해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림>영광지역 좌익에 의한 피해자 분포

   
▲ 출처: 진실화해위원회,『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02(2009), 506쪽

전남 지역에서 특히 피해가 컸던 곳은 영광군이다. 영광지역에서는 우익뿐만 아니라 좌익에 의한 피해도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컸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규모는 자료에 따라 3,000~21,225명으로 큰 편차를 보이고 있다. 대한민국공보처 통계국이 펴낸 『6.25전쟁 피살자명부』(1952)에 의하면 21,225명이 좌익에 의해 피살된 것으로 나타났고,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의하더라도 영광군에서 최소 3,000여명 이상이 좌익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나타났다. 좌우익에 의해 학살된 영광군의 민간인은 3만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35) 영광의 경우, 특히 군경의 수복이 늦어지자 1950년 10월 초순 좌익이 다시 들어와 ‘반동 숙청’작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주민들의 희생이 크게 늘어났다. 진실화해위원회에 따르면 조사된 전체 피해자의 약 88%가 이 시기에 살해되었다.(36)

한국전쟁시기 수많은 민간인이 좌우익에 의해 학살되었다. 3만 여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고 알려진 영광지역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모든 지역에서도 대량의 민간인의 희생이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민간인뿐만 아니라 군인들의 피해를 포함하면 한국전쟁 희생자 수는 엄청나다. 처음 전쟁을 시작했을 때 북한지도부는 이런 피해를 예상이나 했을까?

                       <그림> 영광지역 군경·우익에 의한 민간인희생 발생 장소

   
▲ 출처: 진실화해위원회,『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04(2010), 165쪽


이념전쟁과 학살의 시대를 넘어

영광뿐만 아니라 전남의 많은 지역에서 한국 군경 토벌대와 빨치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양측에 의해 학살되거나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당해야 했다. 나주, 화순, 영암에서는 군경이 여러 차례 합동작전을 폈고, 빨치산도 기습과 매복 작전으로 대응하였다. 화순에서는 읍내를 비롯하여 중심지가 수복되자 빨치산은 지리산으로 연결되는 화학산, 천운산, 모후산, 백아산 등지에서 저항을 계속하였다. 빨치산의 저항이 격렬했던 함평의 경우 11사단에 의해 토벌작전이 펼쳐지는 와중에 대규모 민간인 학살 사건이 연이어 벌어졌다. 1951년 2월 19일 군유산 작전을 통해 손불면, 신광면 일부가 겨우 회복되었으며, 2월 20일 대규모 토벌작전인 ‘대보름 작전’이후에야 함평 전체가 한국군 수중에 들어왔다. 영암과 장흥지역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다.(37)

   
▲ 분단된 한반도. 세계 최강의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전쟁까지 벌이며 서로를 증오한 지 60년이 넘은 이제 화해할 때도 되었다.

전북지역 또한 빨치산 활동이 활발했던 지역이었다. 1950년 9월 20일 유엔군이 군산 앞바다를 통해 상륙하였고, 9월 28일 전북경찰국 선발대가 미 제25사단 정찰대와 합동으로 전주를 수복하였다. 같은 날 미 제25사단 제24연대가 남원, 순창을 거쳐 정읍에 진주했다. 10월 1일에는 순창경찰서를 되찾았으나 빨치산 백암부대의 공격으로 다시 남원으로 후퇴해야 했으며, 미수복지역의 우익인사들은 정읍, 담양, 장성, 순창의 각 면으로 피난하였다. 이후 군경과 빨치산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었다.

고창, 남원, 금산, 임실, 완주 등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다. 군경은 빨치산 근거지 주변의 주민들을 토벌작전 와중에 총살하는 일이 빈발했고, 빨치산 또한 우익과 그 가족들을 살해하였다. 주민들은 매일 군경의 토벌을 피해 피난을 갔고, 밤에는 빨치산을 피해 다니는 일을 반복하였다. 지리산을 끼고 있던 함양, 산청, 거창, 하동 등 서부 경남 지역도 전남북과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칠곡, 청도, 봉화 등 경북 산간 지역도 상황은 이와 비슷하였다. 충청과 경기·강원지역이라고 다를 게 없었다. 인민군과 국군이 각각 두 차례씩 점령과 수복을 반복했던 경기지역의 경우에는 상당한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38)

강화지역은 38선이 통과하는 황해도 연백군, 경기도 개풍군과 불과 2킬로미터 이내에 위치하고 있어서 한국전쟁 전까지 인천, 서울, 개성, 연백을 잇는 중요한 해상지역이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펼쳐지자 강화지역의 내무서원과 지방좌익들은 9월 18일 일단 철수했다가 9월 22일에 재진입하였다. 재진입한 내무서원과 지방좌익들은 산업조합창고에 감금된 다수의 주민들을 9월 29일~30일에 양사면 인화리 중외산 중턱에서 집단으로 총살하였다. 10월 1일에는 평양으로 압송되던 우익인사들이 개성 송악산 중턱에서 총살당하는 사건도 일어났다.(39)

이처럼 점령과 후퇴, 재정복과 또 다른 반정복이 반복되는 동안 그 사이에 끼인 인민들은 늘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수많은 민간인들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벼랑 끝에 놓여 있었다. 좌익이든 우익이든 어떤 명분으로도 법적 절차를 밟지 않고 민간인을 학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시기에는 이러한 사고나 주장은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의 순진한 주장으로 여겨졌다. 설령 그렇게 생각했을지라도 전쟁이라는 위급한 상황에서, 목숨을 빼앗는 총구 앞에서 이를 옹호하기 위해 강하게 주장을 펴지 못했다. 그 때문에 수많은 민간인들이 아무 잘못도 없이 국군과 인민군, 좌익과 우익 사이에서 죽어가야 했다.

민간인 학살은 명백한 전쟁범죄 행위이다. 비록 이념이 다른 진영끼리 싸우는 전쟁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생명권을 빼앗고 인권을 유린할 권한은 어느 쪽에도 없다. 혁명이나 이념은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아무리 고귀한 혁명의 이념도 인간의 생명을 학살하는 전쟁범죄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공산주의, 현실사회주의는 혁명전쟁의 정당성을 말하지만 이 세상에 ‘정의로운 전쟁’이란 없다.

   
▲ 철마는 달리고 싶다.

한국전쟁을 통해 좌우익 양측은 수많은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으나 전쟁범죄와 관련된 처벌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전쟁범죄 행위가 역사의 단죄까지 피해갈 수는 없다. 그건 좌익과 우익, 국군과 인민군을 넘어서는 문제이다.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양측은 모두 비난받아 마땅하다.

아마도 전쟁을 처음 시작한 북한지도부는 한국전쟁이 이처럼 참혹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적어도 한 달 안에 전쟁을 끝내 미군이 개입할 수 없게 되면 전쟁을 쉽게 끝날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북한지도부의 예상을 훨씬 넘어 3년 이상 계속되었고, 한반도는 초토화됐으며 엄청난 인명이 살상되었다. 전쟁의 결과, 남북통일은커녕 평화적인 대화조차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남과 북에는 서로를 향한 적개심이 넘쳐흘렀고, 남북은 서로를 반드시 제거해야 할 ‘철천지원수’로 여기게 되었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인 한반도에서는 전쟁이란 방법으로 통일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한반도의 전쟁은 남북뿐만 아니라 반드시 주변 강대국의 전쟁 개입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은 아직도 적대관계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상대방을 죽이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를 인정하고 힘을 합해 공생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가 되었지만, 아직도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쟁을 돌아보면 평화가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평화를 지키는 데서부터 남북의 통일도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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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김남식,『남로당 연구』, 455쪽. 한편, 안용현에 의하면, 전선사령관 김책은 1950년 9월 20일 각 지역에 ‘유엔군과 국방군에 협력한 자’를 살해하고, ‘살해방법은 당에서 파견되는 지도위원과 협의하여 각급 당 책임자의 책임아래 실행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명령문은 9월 28일 전북 옥구군 미면 신관리 192에 사는 인민위원장 겸 노동당 세포위원장이었던 조억연이 소지했던 것이라고 한다(안용현,『한국전쟁비사』2, 경인문화사, 1992, 357~358쪽).

2) 대검찰청, 『좌익사건실록 11』(1975), 61쪽; 권영진,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남한점령지역 정책에 관한 연구』, 고려대 석사학위논문, 1989, 90쪽 재인용

3) 대검찰청, 『좌익사건실록 11』(1975), 50~64쪽 ; 권영진, 위의 논문, 91쪽

4) 대검찰청, 『좌익사건실록 11』(1975), 64~74쪽; 권영진, 위의 논문, 91쪽

5) 이 회의에는 유목윤을 수반으로 한 조선노동당 여수시당위원회, 이창수를 수반으로 한 여천군당위원회, 김병완을 수반으로 한 여수내무서, 최봉성·유목윤 등을 중심으로 한 정치보위국 여수위원회, 김수평·마인석 등을 중심으로 한 여수시 인민위원회, 이창수를 수반으로 한 여천군인민위원회 관계자들이 참석했다.(미군전쟁범죄조사단보고서[KWC]#27; 진실화해위원회,「순천·여수지역 적대세력에 의한 피해사건」,『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02, 173쪽, 195쪽 )

6) 미전쟁범죄조사단보고서(KWC#27); 진실화해위원회,「순천·여수지역 적대세력에 의한 피해사건」,『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02, 173쪽, 195쪽

7)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198~199쪽

8) 권영진, 위의 논문, 92쪽

9) 미국 국립문서기록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약칭 ‘NARA’)에 소장된 미 육군 범무감실(Office of the Judge Advocate General Army) 문서군(RG 153)에는 미국의 한국전쟁범죄조사단(Korea War Crime: KWC, 전쟁범죄조사단) 자료가 많다. 이 전쟁범죄조사단은 한국전쟁 시기에 “유엔군의 적에 의해 자행된 전쟁의 규칙과 관례 위반 사건들을 감독, 지휘”하고 “전쟁범죄 증거의 조사와 축적”을 위해 조직되었다. 전쟁범죄조사단은 한국전쟁에서 좌익전쟁범죄자들에 대한 조사와 체포, 그리고 재판 책임을 맡을 조직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조직되었다. 1950년 10월 13일 전쟁범죄조사단은 미8군 법무과 내에 설치되었고, 1952년 9월 한국병참관구로 이관되었다. 이 조직은 전쟁이 끝나고 1954년 5월 31일에야 해체되었다. 전쟁범죄조사단의 주요 활동은 좌익의 전쟁범죄로 추정되는 사건을 조사하고 이후의 전범재판에 대비하기 위해 사건 기록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조사 활동은 주로 거제도 포로 심문을 통해 이루어졌고, 전범 증거를 입증하기 위한 현장 조사가 실시되었다. 이와 함께 증거들을 획득하는 또 다른 방법은 포로교환 작전으로 회수된 미군 유해와 귀환자들의 진술이었다. 한국병참관구 이관 이후 조사단의 조사 활동은 주로 귀환한 포로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전선이 고착화되면서 1952년 말 조사단의 활동은 중간보고서 준비를 위한 사건파일의 검토와 재도표화에 집중되었다. 그 결과 한국에서 일어나 1,956개의 사건이 전쟁범죄 조사와 분석 대상으로 워싱턴의 법무감실과 육군 본부, 그리고 극동군 사령부에 제출되었다. 전쟁범죄조사단은 북한과 중국군이 저질렀다고 여겨지는 잔학행위를 조사하고 방대한 사건 기록을 체계적으로 정리․보존했다. 이 기록들 일부는 한국전쟁의 잔학행위를 조사하기 위한 미 의회 청문회에 증거 자료로 제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은 전범재판을 열지도 않았고 국제재판소에 제소하지도 않았다. 유엔군 포로들의 순조로운 귀환을 위해 전범 자료를 이용하지 않겠다는 것이 미군의 정책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전쟁범죄의 가해자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미국의 상황이 자리잡고 있었다. 결국 전쟁범죄 조사 활동은 상대국을 비난하는 선전전 성격과 전쟁 이후를 대비한 증거 수집의 양상을 벗어나기 힘들었다.(양정심, 「한국전쟁기 미군의 전쟁범죄 조사와 처리 - 전쟁범죄조사단(KWC)을 중심으로」,『한국민족운동사연구』(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0년 9월) 전쟁범죄조사단 문서(KWC)는 국립중앙도서관의 인터넷 검색을 통해 원문 이미지 자료를 직접 열람할 수 있다. 한국전쟁 시기에 일어난 인민군과 좌익의 전쟁범죄 행위는 주로 이 문서를 통해서 확인되고 있다. 이 문서 내용 가운데는 검증되지 않은 일방적 주장도 들어 있어서 주의를 요하는 부분도 있다.

10) “Historical Report,”RG 153 Records of the Office of the Judge Advocare General, War Crime Division, Entry 182.; 이나미,『이념과 학살』, 선인, 2013, 58쪽

11) 이나미, 위의 책, 59쪽

12) 진실화해위원회,「대전지역 적대세력사건」,『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01, 2009, 485쪽

13) 진실화해위원회,「대전지역 적대세력사건」(2009), 485~486쪽

14) 진실화해위원회, 「전주형무소 등 전주지역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사건」,『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2009, 137쪽

15) 전남일보 광주전남현대사 기획위원회, 『광주전남현대사 2』, 실천문학사, 1991, 224쪽; 김동춘, 『전쟁과 사회』, 돌베개, 2000, 226쪽

16) 김동춘, 위의 책, 226쪽

17) 서용선,『한국전쟁기 점령정책 연구』, 국방군사연구소, 1995, 66쪽; 이나미, 위의 책, 59쪽

18) 진실화해위원회,「좌익에 의한 서천등기소 창고 집단희생사건」,『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01, 2008, 246~248쪽; 이나미, 위의 책, 110~112쪽

19) 김성동, 𔄞.25때 좌익이 학살한 5만9964명 명부 발견”, <월간조선>, 2002년 4월호

20) 『6.25사변 피살자명부』에 의하면, 전남지역 피살자 43,511명 중 절반에 가까운 21,225명이 영광군에서 피살된 것으로 나타났다. 영광지역 여성 피살자는 전국 여성 피살자의 절반 가까운 7,914명이다. 이러한 내용은 이 자료의 신뢰성에 약간의 의문이 제기될 수 있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숫자의 정확성과 상관없이 전남지역에서 좌익에 의한 피살자 비중이 이처럼 높은 것은 이 지역에서 빨치산 활동이 활발했기에 좌우에 의해 상호 학살이 상승효과를 일으켰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전남지역에서 좌익에 의한 피살자 숫자가 이처럼 많은 것이 빨치산 활동과 관련이 있다면, ‘학살의 84.6%가 9월 26일부터 9월 30일에 일어났다’는 ‘미 전쟁범죄조사단 보고서’내용과는 모순된다. 빨치산 활동은 주로 인민군이 퇴각한 이후인 1950년 10월부터 1955년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의하면, 군경에 의한 수복 이후 적대세력(인민군·좌익 등)에 의해 발생한 피해사건의 희생자·상해자·강제연행자로 확인된 피해자는 대략 1,343명이었다. 이 가운데 전남지역 피해자가 총 984명으로 전체 피해자의 73.7%, 전북지역 피해자는 186명으로 전체 피해자의 13.85%를 차지하여, 전남북지역이 전체 피해자의 87.12%를 차지한다. 이는 전남의 영광, 함평, 나주, 화순, 영암 등지의 산악지대에서 인민군 후퇴 후 입산한 지방좌익과 인민군 패잔병 등으로 형성된 빨치산에 의해 인근 마을 주민들이 피해를 많이 당했기 때문이다(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Ⅲ』, 2010, 289~290쪽).    

21) 김성동, 위의 글, <월간조선>, 2002년 4월호

22) 유성봉,「호림부대와 우리들」,『박천향토지』(박천군민회), 1979, 291쪽

23) 박계주,「지옥유폐 130일-원산, 대학살사건의 전모」,『자유공화국 최후의 날』, 정음사, 1955, 44쪽; 김동춘, 위의 책, 227쪽 재인용

24) 임영태, 『북한50년사』(1999), 287쪽

25) 김동춘,『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사계절, 2013, 333~334쪽

26) 김동춘, 위의 책, 334쪽

27) 𔃶개도당회의’를 덕유산 북방에 있는 삼도봉을 품고 있는 민주지산(충북 영동군, 전북 무주군, 경북 김천시의 경계에 있는 높이 1,242미터의 산)에서 열었다는 설도 있다. 충청·전라·경상의 삼도를 가르는 삼도봉은 옛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를 백제가 접경을 이루었던 산이다. 당시 삼도봉은 유격대의 안전한 근거지로서 ‘민주지산(民主之山)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김남식, 『남로당연구Ⅰ』, 돌베개, 1984, 458쪽).

28) 김남식, 위의 책, 458쪽 ; 류경완, “허찬형④, 빨치산-산위의 날들”, 통일뉴스, 2013.06.25.

29) 남도부(南到釜)의 본명은 하준수이다. 경남 함양 출신의 하준수는 학병동원을 피해 지리산으로 숨어들어 보광당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벌였고, 해방 후에는 건준 활동을 하였으나 미군정의 탄압으로 지리산으로 숨어들면서 야산대를 조직, 활동하였다.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하였고, 1949년 8월 조선인민유격대 제3병단 부사령관(사령관은 제주4.3사건의 지도자였던 김달삼)으로 남파되어 태백산 일대에서 유격대를 지휘하였다. 6.25전쟁 직전 김일성으로부터 ‘남도부’라는 가명을 받고 유격활동을 위해 남파되어 경북 일대에서 유격투쟁을 벌이다가 1954년 1월 대구에서 체포되어 1955년 8월 어느 날 총살되었다. 그의 행적은 이병주의 대하소설 『지리산』으로 널리 알려졌고, 노가원의『남도부(南道富): 전설적 남한유격대 총사령관 하준수의 일대기』(1993, 월간 말)를 통해 재차 주목받았다.

30) 이영회는 해방 후 남로당에 가입하였고 1947년 5월 국방경비대에 입대했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 때 1대대 2중대를 인솔하여 여수경찰서를 습격한 뒤 순천으로 갈 때 정찰중대장이 되었다. 지리산 입산 후 1949년 7월 인민유격대 제2병단(사령관 이현상)과 합류하여 부사령관 겸 제5연대장을 지냈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충남도당 경리부장을 지냈으며 이현상이 지휘하는 남부군단 2전구 정치주임, 경남지구의 불꽃사단과 지방 무장부대를 통합해 만든 57사단장으로 활약했다(김남식, 위의 책, 460~461쪽 ; 류경완, “허찬형④, 빨치산-산위의 날들”, 통일뉴스, 2013.06.25.). 

31) 김남식, 위의 책, 461쪽

32) 김남식, 위의 책, 460~462쪽

33)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Ⅲ』, 279쪽

34)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Ⅲ』, 280쪽

35) 진실화해위원회,「영광지역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사건」,『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02, 2009, 512~518쪽; 김성동, 𔄞䞕때 좌익이 학살한 5만9964명 名簿 발견 靈光 대학살 2만1225명”, <월간조선>, 2002년 4월호

36) 진실화해위원회,「영광지역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사건」(2009), 512~518쪽

37)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Ⅲ』, 288~289쪽

38)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Ⅲ』, 281~285쪽

39)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Ⅲ』, 2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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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소나무 (qnseksrmrqhr) 2017-01-31 12:55:38
소식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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