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수 / 부산가톨릭대 외래교수, 『수령국가』 저자, 전 민주공원 관장

 

헌법에 의하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어야 한다. 그런 대한민국이어야 하였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주공화국이었던 점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작용에 타율적(독립운동과 항일운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미국에 의해 강제된 해방임을 강조하고자 사용한 표현) 해방이 있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즉, 타율적 해방은 민중중심의 국가체제를 정립해내지 못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고, 그 연장선상에서 미군정과 이익관계가 일치한 이승만과 친일세력들은 보수·반공세력으로 발 빠르게 변신해 영구집권을 꿈꿔왔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의 결과물 또한 직선제 쟁취라는 일정한 민주체제는 성립시켰으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중이 주인 되는 민주적 질서는 아니었다. 비례해서 정치권은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였고, 그렇게 세월은 흘려왔다.

그리고 그 세월은 민중 스스로가 정치를 정치권에 위임한 뒤 소시민의 안락한 개인생활을 위해 물질생활을 추종하였다고 분석한다면 너무 과한 억측일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초유의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다하더라도 그 위임을 철회하고 스스로 주권재민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을까? 하는 물음을 가질 수는 있으나, 역사라는 것이 가정법이 없다고 한다면 그 물음은 유효하지도 않을뿐더러 마땅히 그러한 질문 자체가 불필요한 것이다.

실제로도 목도하고 있는 바와 같이 가면(假面)된 민주적 질서와 대한민국의 적폐는 만천하에 드러났고, 그것도 시민촛불혁명이라는 방식을 통해.

이렇게 만시지탄의 감은 있으나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이다. 민중 스스로가 정치의 진정한 주인임을 자각하고, 헌법적 가치를 박근혜 퇴진투쟁이라는 실천적 행위를 통해 이룩한 경험이어서 그 의미가 더더욱 클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초유의 이번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사태의 해결 종착지는 민주세력으로의 정권교체를 통해 그 적폐청산의 단초를 마련하고, 그 단초 위에서 제대로 된 민주적 가치와 질서를 바로 세우는 대한민국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방향과 컨텐츠는 다음과 같아야 한다.

먼저, 방향은 세계질서의 새로운 변화를 예측하는 이론 중에 하나인 ‘힘의 주기론’에 따라 불확실성의 시대에 잘 대처하는 것이다. ①강대국 간의 힘의 공백이 발생할 때 잘 대처하는 것, 즉 트럼프의 신고립주의와 시진핑의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에 능동적 대처 ②국내 사회의 혼돈과 혼란을 잘 극복하는 것, 즉 해방 이후 누적된 적폐청산을 통해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주국가로 거듭나는 것이어야 한다.

다음으로, 위 결과-방향에 따른 결론으로서의 그 컨텐츠는 ①기존 불평등한 한미동맹체제를 재검토하여야 한다. ②추격발전론이라 할 수 있는 (fast follower) 경제전략을 철회하고 제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는 창의성 중심의 경제체제로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 ③적폐청산의 내용과 범위로는 1:99사회와 신계급사회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 사회체제 개편, 국민통합과 지방분권, 평화안보론과 통일지향성, 참여민주주의의 확대와 경제민주화 등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민주국가론이라는 결론과, 분단국가의 숙명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말이다.

연원적으로 그 길 찾기는 대한민국 5천년 역사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고조선 국가성립 이후 역사적으로나 지정학적 요인과 국가철학 수입경로로 보나 ‘사대(事大)’를 숙명처럼 안고 산 민족이 우리 민족이었다. 그러면서도 ‘실리’, ‘균형’이라는 국가외교철학을 정립해 그 원동력으로 5천년 동안 독립국가을 유지해온 유구한 역사를 만들어냈다.

다만 그 과정에서 고구려와 고려는 외세에 대해 ‘자주’지향적인 국가철학을, 통일신라와 조선은 ‘예속’지향적인 국가철학을 국가의 기본이념으로 좌표화하였다. 그렇게 사대에 함의된 자주와 예속은 대한민국 5천년 역사를 지탱해온 민족유전자(DNA)였다. 2번의 자주국가와 2번의 예속국가체제를 성립시키는 ‘2 : 2’국가체제로 나타나게 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 토대 위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로 남북 분단되어있고, 그 외세 또한 당에서 명-청을 거쳐 미국으로 그 주체가 바뀌어 있다.

즉 남은 예속외교를, 북은 자주외교의 지향성을 보여 주고 있으나 그 결과가 썩 그렇게 만족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비록 남은 경제적 풍요로움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대신 그 외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북은 외세로부터 주권적 당당함은 있었으나 인민생활의 낙후가 그것을 단증해주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성찰에 동의된다면 이제 한반도는 그 사대를 새롭게 리셋해야 한다.

앞선 힘의 주기론에서 확인받는 바와 같이 어느 시기보다 동북아시아의 불확실성도 높아져 있고, 4차 산업혁명은 초입기에 들어섰고, 북한은 새로운 젊은 지도자가 건강상의 특별한 사유가 발생하지 않는 한 그 체제의 특성상 50여 년간 통치하게 될 것이고, 대한민국 또한 적폐청산과 사회대변혁을 위한 민주세력으로 정권교체가 거의 확실시 되는 상황에 직면해 있어 여느 때보다 사대를 새롭게 리셋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어 더더욱 그렇다.

그 방향은 다른데 있지 않다. 북한이 좀 더 예속-실질적인 의미는 그들이 말하고 있는 개건(개혁·개방)을 통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남한은 좀 더 자주-실질적인 의미는 불평등한 한미동맹체제에 포섭되지 않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분단체제의 극복과 민주적 질서회복이 가능한 민주정부로의 전환이 이뤄져야 하겠다.

즉 단군민족의 역사라는 사이클로 환원하면 남과 북은 각각 신라(조선)와 고구려(고려)의 기질을 조금씩 바꾸어 투영(交接)하였음은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민족적 하나됨을 상상하고, 또 그렇게 되길 기원하면서 그 문제의식을 대한민국에 국한하여 한번 살펴보는 것이 이 글의 취지이자 목적이 된다.

유구한 단군역사에 있어 사대는 사대교린 정책(事大交隣 政策)의 축약용어일 텐데, 당시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에서 절대강자-중국에게 사대정책을 쓰지 않고 버틸 나라가 몇 나라나 있었겠는가? 아울러 조공이라는 형식을 통해 국가의 자주권과 무역까지 확대하였으니, 이는 당연히 지금과 같은-대한민국의 종미(從美)와 같은 ‘종중(從中)’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지금의 대한민국은 안타깝게도 그 사대가 ‘용미(用美)’라기보다는 ‘종미(從美)’에 가까운 것이 사실이다. 해방과 한국전쟁에 대한 깊은 은혜갚음이 숙명처럼 유전자화 되어 무조건 미국에 스스로를 낮추게 하는 버릇이 생겼고, 그 연장선상에서 국가주권의 상징인 국군통수권을 미국에게 이양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다 정치-경제-문화-사회 전 분야에 걸쳐 종미(從美)가 스며들게 하여 대한민국을 더욱더 미국의 ‘51번째 주’에 편입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그 종미는 친일세력들에 의해 반공·반북으로 둔갑되어 분단체제 위에 기생하는 보수세력으로 그 정체를 숨겨오게 하였고, 그 결과 오랫동안 한국사회가 국가이념과 이데올로기적으로 한미동맹과 반공·반북이념의 덫에 걸려 신음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이른바 분단체제에 기생하는 한국적 민주주의가 민주적 국가체제라는 외피로 씌워진(둔갑된) 것이다. 비례해서 이승만과 친일, 친미, 반북보수 세력들은 그 영속성을 꿈꾸어 왔다.

그러나 역사를 그렇게만-보수·반공의 역사로만 해석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김구가 있어 그(체제)를 넘어서려 했고, 4·19혁명이, 장면 정부가, 신익희 선생이, 장준하가, 87년 6월 항쟁이, 문익환 목사가, 수많은 장기수 선생님들이, 유성환 의원이(통일국시 발언), 전대협이, 시민사회운동세력이, 신영복 선생이 그것을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였고, 그러나 그 실패가 그냥 반복되는 실패이지는 않았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E.H.카의 물음으로 본다면 역사적 정의와 전진이 내재된 실패의 축적으로 볼 수 있었다. 즉 ‘잘못된’ 과거가 극복되고 ‘앞당겨진’ 미래로서의 ‘정의로운’ 현재가 만들어지기 위한 잉태된 고통으로 말이다.

바로 그런 관점에서 기회가 드디어 왔다. 분명 왔다. 비록 실패하였지만 지속적인 사회변혁운동과 박근혜-최순실 초유의 국정농단이 평화적인 저항이라는 방식을 통해 적폐청산이라는 국민적 요구로 수렴되면서 실천화하였고, 사회과학적으로도 양질 전환의 법칙과 임계점 원리가 마침내 가능해진 상황까지 다다르게 된 것이다.

국민 모두가, 일부 정치인을 제외한 모두가, 그리고 또한 이념적 스펙트럼은 다르지만 모든 대선주자들이 역사적으로나 시대적으로나 운동적으로나 그 모든 총체로서의 적폐청산을 진정으로, 혹은 그 국민들의 기세에 눌러 흉내라도 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 이를 증거하고 있다 하겠다.

하여 이번에는 이유 불문 그 적폐청산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세력이라면 차이를 차별화하지 않고, 정쟁을 넘어서 그렇게 수많은 민주·통일인사들이, 또 운동세력들이 넘어서려 했던 그 실패의 덫을 반드시 넘어서야 하겠다는 각오를 다져내어야 한다.

특히, 적폐청산과 대통령 선출이 함께 작동되는 현 상황에서는 문재인, 박원순, 이재명, 안희정, 김부겸, 안철수는 더더욱 그러해야 한다. 적어도 민주세력의 적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려면 말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국민적 요구와 시대적 역사적 책무를 그 어느 대선후보들도 이 높이에서 이 문제를 이해하고 넘어서려하고 있지 않다. 심지어 현재 1위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는 문재인 후보조차 현재까지 나온 대선정책으로만 본다면(물론 이후 대선공약에서는 좀 더 구체화 체계화 되리라 본다) 한미동맹의 지속, 강한안보, 국민성장과 재벌개혁이라는 스탠스 정도에서 그 의미를 가져가려 하고 있다. 어찌 이를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시하면 국민성장론도 경제를 경제로만 풀겠다는 것이 아니라, 힘의 주기론에 따른 세계질서 공백과 적폐청산이라는 시대적 역사적 국민요구적 눈높이에서 해결하겠다는 관점과 자세가 서면 보다 반듯한 접근법과 공약이 수립될 수도 있을 텐데, 그렇게 하고 있지 못함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확장한다면 역사적이고 구조적이며 시대적인 기준점과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이는 곧 다가올 제4차 산업혁명과 분단체제에 따른 기형적인 경제구조를 극복해 들어가는 과정에 부합하는 경제가 곧 국민성장 경제라는 것이 보여 져야 함에도 그렇지 못하고 있는 상황적 인식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6.15공동선언과 10.4남북공동선언의 이행은 분단체제 그 자체를 허물어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자립적 민족경제 회복과 서해평화특별지대 창설 등은 재벌개혁을 넘어 통일경제 기반의 축적과 실질적 의미에서의 내수경제 작동, 국제적 불확실성과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어가는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자립경제가 가능하고, 4차 산업혁명의 초입기에 필요한 노동과 창의가 융합될 수 있는 기반이 제공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또한 발화된 적폐청산의 진정한 기준점도 미국에 의해 기생된 분단체제를 넘어서려는 강인한 민주의식과 통일의식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기에 그에 따른 만만의 준비가 필요하다 할 수도 있다.

왜 그런가? 미국과 분단체제에 포섭되어 있는 한 국민들이 요구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그리고 역사가 요구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주주의 체제는 성립될 수 없다 하겠다. 즉 그 민주주의 체제가 민주와 종북이 양립할 수 없고, 불평등한 한미동맹과 자주가 양립할 수 없고, 통일과 분단도 양립할 수 없어서 더더욱 그렇다. 더 나아가는 미국식 신자유주의와도 양립할 수 없다.

적폐청산은 이렇게 양립할 수 없는 적대성과 맞닿아있는 것이다. 분단국가의 덫과 적폐청산, 그리고 한미동맹은 서로 융합할 수 없는 불화성이다. 그럼으로 진정한 적폐청산을 위해서는 분단국가의 덫과 종미의 한미동맹을 넘어서야 하는 것으로 결론난다.

위 결론은 그러나 오해하지 마시라. 기간 한반도 외교역사와 함께 시작된 사대(事大)와 같은 격으로서의 한미동맹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기간 왜곡된 한미동맹으로 인해 축적되어온 그 적폐를 청산하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는 의미의 확장으로서 그 결론을 내렸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즉 ‘이게 나라냐?’라는 울분에 정상적인 한미동맹으로 동맹의 관계를 재정립하겠다는 답변이 필요하고,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안보의 경우도 불확실성이 높아만 가는 동북아질서와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게 될 북핵문제도 과연 ‘강한안보론’에 기초해야만 해결될 문제인지, 아니라면 작금의 세계질서와 국내 현안이 강한안보론과 기존의 한미동맹만으로 넘어설 수 없다는 근본적 성찰이 필요해졌음을 강조해야 한다.

그래서 그 적폐청산의 진정한 기준점이 국익에 바탕 한 한미동맹으로 재편돼야 하는 것이고, 평화에 기반 한 안보체제를 수립하고, 민주적 질서체제에 부합한 경제여야 하는 것이다. 즉 민주주의가 경제이고 삶이고 일자리이며, 평화가 안보이고 국방이고 경제여야 한다면 통일은 사대외교로의 복원과 진정한 민주주의체제로의 성립, 종북이념을 넘어서는 것임을 각인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위에서 살펴본 봐와 같이 대선이라는 정치공간이 지지(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는 만큼, 근본적이고 성찰적인 내용을 공약과 정책으로 입안하는 데는 그만큼 큰 어려움이 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그것과는 별개로 그 공약과 정책으로 외화된 내용과 슬로건등을 보면 과연 그 후보가, 혹은 참모들의 문제의식이 어디까지 맞닿아있는지를 알 수는 있는 것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래놓고 봤을 때 한미동맹 지속과 강한안보론은 단지 기능주의적 접근을 통해 표를 얻겠다는 전술적 사고 외에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는 것이고, 동시에 적폐청산의 바로미터가 될 수도 없음이다.

해서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정말 그것이 그렇게 인식되어지고 강조되어져야 하는 것이라면, 민주세력의 각급 대선주자들은 좀 더 적폐청산의 의미를 역사적으로 시대적으로 국민요구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자세를 가다듬어 강한안보론이 아니라 평화안보론으로 슬로건화 해야 하는 것이다.

즉, ‘변함없는 한미동맹의 지속과 굳건한 안보에 기초하여’ 000 하겠다는 정책과 공약이 수립되는 것이 아니라, ‘한미동맹의 정상화 및 평화가 곧 안보’라는 토대위에 000를 하겠다는 정책과 공약으로 수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 인식적 토대가 사대와 국가경영철학을 보다 민주화·평화화·자주화하여야 한다. 반대로 그러지 못한다면-그러한 인식을 하는 것과 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한 정치적 정책적 차별과 공약 또한 분명해진다.

기간 한미동맹이 과연 대한민국의 이익에 복무해 왔는가? 라는 근본물음 앞에 한-미간의 각급 조약과 협정들이 평등하게 체결되어 있는지 아니면 불평등하게 체결되어 있는지, 또 방위비 분담금이 적정하게 책정되어 있는지 아닌지, 북핵위기가 북한문제인지 아니면 한반도의 문제인지, 평화의 문제를 안보라는 구조로 국한할 것인지 아니면 전 사회적 영역으로 포괄해서 풀어갈 것인지, 남북한 공히 과도한 군비경쟁은 없는지 .... 등등 수많은 의제와 키워드들에 대한 성찰과 결론들 속에서 적폐청산이라는 민심과 부합하게 정책화 공약화가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반면 그렇지 않다면-그러한 문제의식이 없다면, 혹은 있어다 하더라도 이를 가볍게만 터치하면 기껏해야 군 출신을 강조하고, 휴전선과 군부대 방문하고, 강원도 방문해서는 평화공약 남발하고, 기간 민주정부에서 써 먹어왔던 포괄적 안보 강조하고, 한미동맹 강조하고, 정책적으로는 사드배치 재검토하고, 북핵문제 반드시 해결하고(해결할 수도 없으면서) 등등 ... 이러한 관성형 공약(空約)만 남발하게 되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한미동맹이 왜 새롭게 인식되어져야 하는지도 다음과 같은 이유가 발생한다.

미국이 해방과정에 도움을 주었고, 한국전쟁에서도 우리(대한민국)를 도와 민주주의체제를 유지하게 해주고, 원조를 통해 한국경제 발전에 일정한 기여를 했고... 그래서 고맙고 은혜의 나라라는 인식, 이 정도까지는 그래 그럴 수 있겠지? 정도는 된다. 그러나 그것과-고마움과는 별개로 좀 더 깊게 한미관계를 재인식한다면 일제로부터 해방과 한국전쟁의 개입이 과연 진정으로 미국적 국익요구와 상관없이 정말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체를 수호하기 위해서만 도와주었을까?

천만의 말씀이지 않는가. 해방과 전쟁개입은 당시 냉전체제라는 세계질서 하에서 미국의 국익을 극대화하거나, 혹은 수호하기 위해 대한민국을 도와주었을 뿐이다. 또한 초창기 원조를 통한 한국경제 지원도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제국주의의 침략경제이고, 한국경제를 미국의 하청경제화를 그 전제로 하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그것과-고마움과 서로의 국익에 따라 맺은 한미동맹을 미국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는데, 우리만 혈맹으로 인식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라는 물음이 포기되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더해서 미국이 북한과의 핵 대결을 펼치고 있으면서도 핵무기 없는 세상, 대량살상무기(WMD)의 축소 등을 외치고 있지만, 진작 역설적으로 이제까지 원자탄과 ICBM, 각종 대량살상용 첨단무기를 사용한 유일한 국가가 미국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되어져야 하는가?

그 연장선상에서 북핵문제만 하더라도 이성적 영역으로만 따지자면 한국전쟁 이후 핵의 공포 속에서 계속 생존해왔던 국가는 오히려 북한이라고 한다면 ... 이러한 인식 근거가 과연 틀린 것인가? 한국전쟁 때 맥아더가 핵 공격 작전을 세운 이래로 남한에 핵배낭, 핵지뢰, 전술핵, 핵우산(이는 핵배낭, 핵지뢰, 전술핵이 폐기되고 난 이후 미국의 한반도 핵정책으로 나타난 것)으로 나타났고, 이를 해마다 팀스피리트 훈련(현재는 키-리졸브훈련)이라는 미명하에 핵전쟁 연습을 지속시켜 온 사실을 외면하고 한미동맹관계와 북핵문제 해결의 근본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비례해서 역지사지로 볼 때 바로 이에 대응하기 위해 북한도 핵문제를 발생시켰으며, 이 핵문제를 통해 미국과의 담판을 통해 한반도의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여 과도한 국방비를 줄여 경제발전(북한의 입장에서는 인민생활 향상)에 투입하겠다는 것이 북한 핵문제의 본질이 된다는 인식이 과연 종북적인가?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결론적으로 위와 같은 인식과 관점에 도달하여 한미동맹과 북핵문제를 본다면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시키는데 방해하는 주범은 북한이 아니라 반대로 미국이 된다. 동북아의 패권유지라는 미국적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긴장은 그 근본근거를 제공하는 요인이기 때문에 오히려 미국의 입장에서는 절대 그 반대 결론-북핵문제가 미국문제라는 사실을 절대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해석이 불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불편하다 하여 언제까지 이 문제를 덮어두고 외면한 채 한미동맹의 정상화와 북한의 핵문제 해결을 주장할 수만 있겠는가?

또 그러한-위와 같은 인식을 하는 것과 공약으로의 정책수립은 약간 별개문제라는 것, 그러한 문제의식을 충분히 인정하더라도 힘의 주기론이 작동되고 국내의 적폐청산이라는 그 무거운 과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해결되어야만 한다면 이제까지 해왔던 관성적인 의미에서의 한미동맹 강화와 북핵문제가 북한문제로만 국한되어 한미동맹, 대북정책을 풀어가서는 절대 해결할 수 없음도 자명한데, 이것까지 부정되어져서는 안 된다.

하여 민주세력은, 그 세력을 대표한 대권주자는 이번 대선국면에서 반드시 이제까지 한국사회가 포박당한 그 덫-분단과 한미동맹의 덫을 극복해내고, 민주국가론이라는 완성된 정치철학으로 무장하여 그 책무를 공약화하여 해결함은 물론, 그러한 책무해결에 국민들은 따뜻한 지지와 성원을 보내고 참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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