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과거사 청산은 근대 국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있었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으로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과거사 청산은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일로써 왜곡․은폐된 과거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사회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은폐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바로잡기 위한 과거사 청산 노력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통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아래서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여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가 계속되면서 그 성과가 희미해지고 있다. 

역사는 진실을 밝혔다고 해서 끝나서는 의미가 없다. 역사의 진실이 영원히 기억되지 않으면 역사의 정의는 없다. 진실은 공식 기록으로 표기되고, 교육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망각과의 투쟁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 권력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과 테러, 의문사, 고문에 의한 조작 등과 관련된 사건들을 되짚어 봄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고자 한다. / 필자 주

 

정치적 숙청

인민정권이 들어서면서 남한 점령지역에서 이른바 ‘반동’과 ‘반역자’에 대한 숙청이 전개되었다. 내각수상 김일성은 6월 26일 방송연설을 통해 남한 빨치산들에게 “유격운동을 전개하여 해방구를 창설하고, 전선과 후방의 연락선을 차단하며, 도처에서 반역자들을 처단하며, 인민의 정권기관인 인민위원회를 복구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와 함께 전 남로당 당수이자 북한 내각부수상인 박헌영은 “반역자들을 체포, 처단하여 인민의 원한을 풀어줄 것”(1)을 지시하였다.

▲ 월북했다가 6.25전쟁 당시 평양에서 위문단으로 서울에 온 영화배우 문예봉 모습

그런데 여기서 말한 ‘반역자’가 누구이며, ‘처단’의 방식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추상적으로 표현된 ‘반역자의 처단’지시가 그 후 남한 점령지역 도처에서 행해진 ‘정치적 숙청’이란 명목의 폭력행사와 무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2)

그러면 정치적 숙청은 누구에 의해 수행되었을까? 공간된 남한의 한국 전쟁사와 관련 증언들은 그 핵심 주체로 ‘정치보위부’와 ‘자위대’를 지적하고 있다. 정치보위부는 북한 내무성 산하의 경찰조직의 하나이며, 자위대는 점령지역 주민들로 구성된 자위조직이었다. 이들 조직들이 숙청을 수행한 주요주체로 파악하는 것은 충분히 근거가 있다. 이러한 북한 경찰조직에 의한 정치적 숙청은 그 규모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남한의 모든 점령지역에서 수행되었다.

정치적 숙청, 즉 정치범 처벌은 과거 이승만 정권에 협력했던 군인과 경찰, 관리들을 처벌하고 반공적 사회단체의 간부들을 심판하며 이를 통해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지극히 정치적인 행위였다. 그러나 남한 점령지에서는 정치범을 심판할 사법재판소 인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구류장 검열도 하지 않고 사람을 바로 처형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런 일이 발생하자 부여군 검찰소 검사장 장시백은 앞으로는 구류장 검열을 3회에 걸쳐 실시하고 불법구속 여부에 대한 예비감시사업을 수행하여 합법성을 보장하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3) 아마 다른 지역에서도 이런 일들이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6.25전쟁 당시 서울에서 개최된 여맹집회 광경(전쟁기념관)

정치적 숙청에서 중요한 문제는 숙청대상과 방식이다. 숙청대상자는 인민위원회 규정에 명시된 친미분자, 민족반역자, 친일분자 등으로 반혁명세력으로 규정된 자들이었다. 7월 중순 각 시·군내무서를 통해 내려진 지시문에는 이들에 대한 상세한 규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시문에 따르면, 친미분자는 국회의원, 남한정부의 각료, 도지사, 경찰서장, 악질경찰, 재판소 판·검사, 반동단체 책임자 등이고, 민족반역자는 테러단체장, 악질테러단원, 미국을 경제적으로 원조한 자 등이며, 친일분자는 일제시 총독부내의 책임자, 도책임자, 도평의원, 군급책임자, 검사, 판사, 일본제국주의를 경제적으로 적극 원조한 자 등이었다.(4)

그러나 이 지시문에 명시된 대상자 기준은 추상적이었다. 이를 테면, “악질”과 “적극적인 협조”등의 용어는 면분주소장과 자위대원들의 자의적인 판단과 해석에 맡겨졌던 것이다. 충북 청원군 북일면에서 작성한 ‘체포대상자 기본재료 수집표’에 따르면 북일면 전체 체포 대상자는 62명이었다. 이들을 직업별로 분류해 보면 판사 1명, 전현직 군인 20명, 전현직 경찰 13명, 전현직공무원 5명, 농업 19명, 전문직 2명, 상업 1명, 노동자 1명 등이었다.

<표> 북일면 체포대상자 직업별 구성(5)

직업

판사

군인

경찰

공무원

농업

전문직

상업

노동자

인원수

1

20

13

5

19

2

1

1

62

%

1.6

32.3

21

8

30.6

3.3

1.6

1.6

100


체포대상자의 53.3%를 차지한 것은 전현직 군인과 경찰이었다. 또 30.6%를 차지하는 농민의 경우 모두 한민당, 대한청년단 등 우익정당원이었다. 이를 통해 북한당국이 처벌대상자를 선별하는 주요기준이 그들의 정치적 배경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에 대한 처벌 가운데 1종으로 분류된 1명은 대농 출신의 현직 검사였다. 2종으로 분류된 24명은 대체로 1등상사 이상의 군인, 우익단체 간부, 초등학교장, 의사 등이었고, 3종으로 분류된 37명은 2등중사 이하의 군인, 촉탁경찰, 우익단체와 정당원, 하급공무원(면서기) 등이었다.(6)

▲ 인민군의 서울 점령 당시 용산철도공작창에서 일하는 선반공

이를 통해 내무서장의 지시문에 규정된 것보다 실제 숙청사업을 실시한 면단위 이하에서 숙청대상자의 범위가 훨씬 확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지역 단위에서 결정된 숙청대상자 범위는 중앙의 공식적인 대상자 규모보다 확대 적용되었으며, 숙청의 주된 이유 또한 그들의 경제적 배경이 아니라 해방 전후의 행적에서 보여준 정치적 배경이었다. 또한 숙청대상자의 처벌은 그 지위에 따라 세 등급으로 나누어 차등 적용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부여군의 경우도 이와 유사했다. 부여군정치범은 모두 117명이었는데, 반동사회단체에 참여한 비율이 가장 많았고(54명), 그 다음 경찰(31명), 밀정(16명), 국방군(12명), 테러(3명), 선전(1명) 등이었다. 이 117명 중에서 형사사건으로 제기된 자는 101명이었는데, 5명은 즉결처분되었고, 나머지 96명은 도단위로 이송되었다. 이송된 96명은 경찰 12명, 사법기관 1명, 국군 3명, 반동사회단체 69명, 기타 11명이었다.(7) 

법적 절차와 인권의 강조

숙청대상자를 검거하는 방식에는 자수와 직접체포의 두 가지가 있었다. 자수는 지역의 정치 정보를 확인하고 주민의 충성심과 사상성을 평가하기 위한 기본 방법이었으며, 가장 손쉽게 숙청대상자의 신병을 확보하는 방법이었다. 직접체포는 부락자위대원과 민청원들이 반동분자로 규정된 대상자의 집을 수색하여 체포하는 방식으로 남한정부에서 “주거침입, 약탈”등으로 고발하고 있는 내용이었다.(8)

▲ 한국전쟁 당시 농촌의 풍경. 중국 해방군화보사가 펴낸 <영광스러운 중국 인민지원군>에 실린 이 사진은 중국군이 농가를 찾아 일손을 거들고 있는 모습이다.(출처: 한겨레21, 제800호)

신병이 확보된 숙청대상자는 각면 내무분소와 자위대 본부에 구금된 후 일정한 처리 절차를 통해 처벌받았다. 북한당국의 공식문서에는 이들을 처리할 때 ‘북한의 법령과 지시에 의거하고 인권을 존중하라’는 내용 등이 명기되어 있었다. 1950년 8월 25일 도검찰소에서 각시·군 검찰소 검사장에게 보낸 문서에서 ‘특무 및 보안사업 감시를 철저히 할 것’을 지시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후방에서 자위대원들이 사소한 감정으로 인권을 함부로 유린하는 사실들이 지방에서 속출하고 있음으로 이에 대하여 내무서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이를 철처히 단속할 것이며, 특히 자위대원들이 구타, 수색, 압수까지 하는 사실이 있음으로 이러한 불법한 일이 발행치 않도록 할 것이다.
둘째, 지방정치보위부 및 내무서와 항상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내무서원들이 지방인민들의 말에 취중하여 죄 없는 자를 취급한다든가 극히 경미한 사건으로 감정적으로 인권을 유린하는 비법적 일이 없도록 감시할 것이며,
셋째, 보안 및 특수감시 사건에 현 과도적 사업진행과정에서 피심자들의 영치금품에 대한 규정은 잘 준수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실이 있는바 이에 대한 감시도 철저히 할 것이며,
넷째, 보위취급사건으로서 금번 인민군에 의한 해방 후 특무범죄는 일반수속절차에 의하여 취급케 되었으나 이에 대한 감시사업을 진행할 것이며,
다섯째, 보안사업은 일반수속 절차에 의하여 북반구에서 실시하던 바와 같이 현재 내무서에서 실시되고 있음으로 이에 대한 감시 월말총화를 예심부에서 보낸 예심원료양식에 따라 내무서 구류장 검열은 매월 3회 이상 실시하여 그 결과를 도검에 즉시 보고할 것이다.(9)
 
또한 내무성 문화국에서 발행한 자료집에는 사업의 수행 과정에서 내무원들이 준수해야 할 사항으로 “첫째, 인권을 존중하며 구타, 신문 등의 비인간적인 악행을 하지 말 것. 둘째, 국가재산과 개인재산을 절대 존중하며 보호할 것. 셋째, 공화국 정부의 법령과 지시를 철저히 집행보장 할 것”을 명기하고 있다. 또한 충북 보은군에 내려진 지시문에서는 “이 정권의 독재 아래서 신음했던 사람들 사이에서의 공포와 두려움을 일소하기 위하여, 각 경찰지부와 대중조직들을 가동시키며, 정의의 공정한 행정을 수행하여 사람들을 안심시킬 것”등의 지시가 들어 있었다.(10)

▲ ‘장마’의 영화 포스터

▲ ‘장마’의 영화 포스터

공산주의 혁명이론에 따르면 당원과 혁명가는 인민을 해칠 수 없다. 원칙적으로 인민군을 포함하여 좌익은 인민에 대한 학살을 금했다. 이와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은 “인민군대는 기율이 엄정했고 추호의 민폐”도 없었다고 증언한다. 당과 인민의 군대가 그러한 원칙을 정한 것은 전술적으로도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적 하나를 죽이면 그 가족 다섯을 적으로 만들게”되며, 그러한 행위는 인민대중의 지지를 잃게 만들어 결국 패배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인민군 12사단 독전대장 강동호는 “민가에서 음식을 징발할 때 사람을 절대 죽여서는 안 된다”고 엄명했다. 그는 “부락민의 적의를 사게 되면 결국 살아서 후퇴할 수 없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했다”고 한다.(11) 

빨치산 출신의 김세원 또한 인민군과 유격대는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의무”를 늘 강조하였고, 인민을 해치거나 피해를 입힐 경우 지체 없이 당에 보고하도록 교육받았다고 증언하고 있다.(12) 이현상이 지휘한 빨치산부대 남부군(13)에서 활동했던 이태는 “보급투쟁 등으로 마을에 내려갈 때 으레 ‘인민성을 제고하라’는 훈시를 했다. 인민은 우리의 주인이니 인민의 거처인 안방에 들어가지 마라. 식량은 절대 빼앗지 말고 설득해서 얻어라. 꼭 필요한 물건 아니면 손대지 말고 불필요한 폐를 끼치지 말라는 것이다”라고 증언하였다.(14)

보복의 장이 된 인민재판과 즉결처분

그러나 북한 공식기관의 지시와 실제는 달랐다. 상부의 지시가 하부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부락단위에서 진행된 숙청 과정에서 중앙에서 지시한 “인권의 존중”, “정의의 행정”등의 원칙이 실무집행자인 각 면분주소원과 부락치안대원들에게 얼마나 제대로 전달되었으며, 또 그게 지켜졌는지 의문이다. 김범찬은 “북한군은 민간인의 학살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남한내에 억눌러 있던 증오감의 표출을 올바로 통제하지 못한 결과 잔인한 보복이 자행된 것”이라고 파악하였다.(15)

공주군 양화면에서는 감옥에 있던 남자를 농민 3명이 주동한 보도연맹원가족 30여명이 모여와서 자신들 손으로 처치하겠다면서 유치장 문을 부수고 난입, 난타하여 그 자리에서 즉살시킨 사실이 발생했다. 8월 30일에는 부여중학생 8명이 공주중학 5년생 한 명을 데려다가 중학 1년 때 자신들에게 피해를 주었다며 나무몽둥이로 난타해 즉사시킨 일도 있었다. 부여군 여성동맹 문교부장으로 있던 여학생은 전쟁 전 퇴학을 당하고 서울로 피신했다가 인민정권에 참가하였는데, 이전에 반동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여학생 4명을 불러다 놓고 죄상을 고백하라고 심문하기도 했다.(16)

▲ 인민재판소 재판 광경.

이 같은 정치적 테러뿐만 아니라 치안대에서 정치범의 재산을 사적으로 갈취하는 일도 벌어졌다. 7월 20일에는 석성치안대 총무부장이 이승만 정권에서 경찰을 했던 자의 재산을 몰수하는 과정에서 재산을 사적으로 훔치는 일도 발생하였다. 조사결과 문제가 확인되자 치안대장이 경찰(역산)의 재산을 몰수, 관리하던 중 잃어버린 것으로 처리하여 법적 처벌은 면하게 하였지만, 가져간 물품은 모두 되돌려 받았다. 그것은 다리미, 구두, 냄비 각 1개씩, 솥 2, 경대 1, 쓰봉(양복바지) 6, 바지 2, 저고리 2, 상의 4, 셔츠 3, 조끼 1, 베개 1개 등이었다.(17)

인민군이나 공식 조직보다는 흔히 ‘바닥 빨갱이’로 불린 지방좌익들이 주로 이런 역할을 맡았다. 이들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인민군들이 그런 게 아니고 다 아는 사람”들이 가족 모두를 죽이는 숙청을 했다고들 말한다. 즉 마을(리)과 면에서 서로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좌익으로 돌변해 ‘사적 보복’을 가하는데 앞장섰던 것이다. 이들 중에는 보복심과 증오심을 품은 불량배로 치안대 완장을 차고 몽둥이를 들고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악행을 저지른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집안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에 더욱 심한 공포의 대상이었다.(18) 

이러한 숙청대상자의 재판과 처벌에 관한 북한의 세부지침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전쟁 후 남한에서 발간된 재판문과 증언 등에 의하면 인민재판과 즉결처분이 일반적인 방식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남한 점령지역에서는 북한과 같이 정상적인 재판소를 구성하여 재판을 할 수 없었고, 따라서 점령지역에서 널리 수행된 방식은 지역주민 전체가 참여하는 가운데 공개적인 심리를 거쳐 형벌을 결정하는 인민재판이 일반적이었다.

▲ 6.25전쟁 당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 ‘장마’(유현목 감독, 1979)의 한 장면.

북한당국이 인민재판을 수행한 것은 우선, 절차적으로 간소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인민재판의 과정 자체가 교육적인 효과를 제공해준다고 보았는데 재판제도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참여의식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위대가 몽둥이를 들고 설치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이뤄지는 군인․경찰과 공무원 출신들에 대한 인민재판은 결국 그동안 남한 군경과 공무원들로부터 탄압받았던 주민들의 보복의 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19) 

이 같은 보복적 숙청은 즉결처분에서 더욱 노골화되었다. 즉결처분에 의한 숙청은 남한 점령 초기와 말기에 주로 자행되었다. 점령지역에서 북한의 내무성 조직이 결성되는 하향식 방식(각 군지역에 파견된 정치보위부원에 의한 내무서의 조직과 면·리(동) 자위대 결성)을 감안할 때 점령 초기 리(동) 단위의 공식적인 치안력이 부재할 수밖에 없었다. 치안력이 부재한 상태에서 그동안 남한정부와 경찰로부터 탄압받던 좌익과 그 가족들이 보복적 행동을 벌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특히 전쟁 발발 직후 남한 군경에 의한 보도연맹원의 대량학살은 좌익의 보복을 부추기는 결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일성과 박헌영의 방송연설에서 강조된 “반역자의 처단”이란 결국 박헌영의 말처럼 원한풀이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인민군 점령시기의 학살

인민재판의 사례로 자주 거론되는 김팔봉의 경우는 남로당 서울시당 중구지역당의 상임집행위원회에서 결정해 출판노조에서 집행되었다. 그는 1950년 7월 1일 잡혀 형을 받았는데 이 시기는 아직 점령체계가 완전히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 원한에 의한 무차별적인 학살이 일어나고 있던 시기였다. 당시 판사 이영기는 오프세트공사 공원이었고 검사는 노동운이었다. 그는 남이 미리 써준 논고문을 읽는데 한자가 나오면 읽지 못했다고 한다. 김팔봉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하였다.

▲ 1950년 7월 2일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상태에서 벌어진 인민재판 광경. 양복 입은 이가 김팔봉이다. 그는 이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몽둥이를 맞고 기절한 채 끌려 다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철사로 둘둘 말고 쇠꼬창이가 달린 몽둥이로 내 뒤통수를 내리쳤는데 피를 분수처럼 쏟더래요. 또 한 대 내리치니까 앞으로 꼬꾸라지더랍니다. … 막대기 하나를 주워들고 일어나 반격태세를 취하며 세 발짝 걸어나갈 때 두 놈이 한꺼번에 두 몽둥이로 머리를 내리 치니까 넘어지면서 쭉 뻗더랍니다. … 그 다음에 그자들은 내 발목을 전깃줄로 묶어, 계단 아래로 끌어내렸대요. 목에 힘이 완전히 빠졌는지 한 계단을 내릴 때마다 머리통이 덜컥덜컥 떨어져 구경꾼들은 저 사람 벌써 숨이 떨어졌다고 생각했대요. 같이 사형판결을 받고, 머리를 얻어맞은 문선과장 전재홍씨는 그래도 끌어내릴 때 주루룩 끌려내렸지 머리통이 털거덕거리지는 않더랍니다.”(20)

김팔봉은 그런 상태에서 2킬로미터를 끌려 다니다가 북한군 고위장교가 말려 시체(죽은 것으로 판단됨)를 내무서에 인계하라고 해서 중단되었다. 그는 4일 만에 깨어나 살아났다. 그가 깨어났을 때 인민서원이 “선생님, 정신이 드십니까? 나오십시오”라고 했다고 해서 살아날 수 있었다. 당시 인민재판 판사였던 이영기는 이후 미해병사단 24연대의 노무자로 있다가 체포되었는데, 사회주의자로 보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김팔봉과 함께 참혹한 봉변을 당했던 전재홍은 그때 구타한 사람들이 “덩달아 날뛴 사람들이지 진짜 빨갱이는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고 증언하였다.(21)

인민군 점령시기 우익인사들이 처형된 경우 대체로 일정한 죄목이 있었고, 그 죄목은 주로 양민 특히 좌익을 투옥·살해했다는 것이었다. 처형된 이들의 직업 중에서 경찰과 공무원이 가장 많았던 데서도 그런 점을 알 수 있다. 안봉석의 경우 10명의 좌익을 살해하고 공산주의와 스탈린을 악평했다는 죄로 체포되어 처형될 예정이었으나 간신히 살아남았다. 청년단 단장이었던 김동학은 군산경찰서를 습격한 좌익 3명을 사살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22)

처형자들의 경우 대체로 여러 번의 심문을 거치고 본인의 자술서를 쓴 다음에 학살되었다. 자술서를 쓰는 과정에서 심한 구타나 고문이 있었기 때문에 그 내용이 정확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이갑산의 경우, ‘양민을 투옥하고 학살했다’는 내용의 자술서를 거부하다가 심한 구타를 당했다. 이걸 본 다른 수감자들은 모두 양민을 학살했다는 허위 자술서를 썼다고 한다. 다들 인민재판 때 항소해 보겠다는 생각을 갖고 허위로 썼다고 한다.(23)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피난가지 못한 경찰을 체포하여 곧바로 인민재판에 회부했으며, 체포를 거부하는 경우는 그 자리에서 살해했다. 보도연맹사건 등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경찰과 우익인사에 대한 인민재판과 처형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전쟁 초기 질서가 잡히지 않은 무법천지 상태에서 절차도 없이 마구잡이로 처형되는 경우가 많았다. 재판현장에서 동원된 주민들의 목소리 크기에 의해 생사가 결정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념적 기준이 아니라 평소의 인간관계, 원한 여부 등 사적인 요소에 의해 처형 여부가 결정되곤 하였다.
 

▲ 영화 ‘장마’의 한 장면. 완장을 차고 분노를 표출하는 이대근의 모습이 좌익의 극단적 행동을 상징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

지역단위에서 인민의 원한을 산 반역자는 고급관료나 경찰간부가 아니라 하급경찰과 말단공무원이었다. 8월 중순경 인민군에 의해 점령된 남해군 창선면에서는 8월 20일 은둔 중이던 지역좌익 배용호, 이문세 등이 면치안대를 조직하여 전직 경찰관과 우익단체원 등을 즉결처분 형식으로 수차에 걸쳐 살해하였다. 8월 29일에는 반동분자로 체포되어 감금 중이던 남해경찰서 순경 김성율 등 경찰관 4명을 창선면 거주 보도연맹원 가족 70여명이 동원되어 즉결처분 형식으로 살해하기도 했다.(24) 

그러나 실제로 즉결처분에 의한 학살은 전세가 불리해져 인민군이 퇴각하게 되는 점령 말기에 노골화되었다. 이때 진행된 숙청대상자는 기존의 반역자로 규정된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 해당한 경우가 허다했다. 이 시기의 정치적 숙청은 반혁명세력에 대한 정치적 배제와 죄과에 따른 처벌의 차원을 넘어 “적에게 유리하게 이용될 모든 유생역량의 일소”라는 전쟁논리의 차원으로 바뀌게 된다. 인천상륙작전과 유엔군의 총반격으로 9월 중순 이후 전세가 불리해지자 중앙당의 지시를 받은 인민군 전선사령부는 후퇴명령과 함께 각 지방당에 “유엔군 상륙시 지주(支柱)가 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할 것”등의 지시사항을 내렸는데(25) 이는 하급단위로 내려가면서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의 중요한 근거로 이용되었다.

토지개혁

북한은 점령지역에서 당과 인민위원회가 복구되자 바로 해당지역에서 사회·경제적 개혁 작업에 나섰다. 북한은 이를 “북반부에서 실시된 것과 같은 민주개혁”으로 표현하였고, 토지개혁 등 제반 조치들은 모두 북한헌법과 법령들에 근거하였다. 남한점령지역에서 실시된 사회경제적 개혁은 토지개혁, 노동법령의 실시, 농업현물세와 민주적 육제도 실시 등이었다. 이러한 민주개혁은 혁명의 대상인 제국주의와 봉건세력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제거함으로써 인민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의 핵심적 내용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실시된 점령지역에서의 사회경제적 개혁은 평화적 조건에서 수행된 북한의 민주개혁과 비교해 보면 여러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 북한에서 토지개혁 당시 농민의 기뻐하는 모습(1949년).

1950년 7월 4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정령으로 「공화국 남반부지역에 토지개혁을 실시함에 관하여」(이하 정령)를 발표하였고, 7월 8일 전농은 “2천4백만 농민을 대표하여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는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정령에 따르면, 토지개혁의 원칙은 북한과 마찬가지로 무상몰수 무상분배였다. 정령은 미국과 이승만 정부가 소유했던 토지는 모두 몰수한다고 규정하였고, 조선인 지주와 계속하여 소작을 주는 자의 토지 역시 몰수하였다. 소작제도는 영원히 폐지하며 자작지는 5정보 또는 20정보까지는 몰수하지 않는다고 규정하였다. 토지소유 상한을 20정보까지 허용한 것은 5정보로 제한했던 북한에 비해 크게 완화된 것이었다.(26) 

몰수한 토지를 분배하는 정량과 방법은 그 리(동)에 거주하는 고용농민, 토지가 없거나 적은 농민 전원이 참가한 농민총회에서 결정하도록 하였다.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주체는 각 리(동)의 농촌위원회였다. 농촌위원회는 농민총회에서 공개적 거수 방법으로 추천되어 뽑힌 사람들로 구성되며 위원수는 5~9인이었고, 시(군)·면인민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그 지도하에 토지개혁 사업을 수행하였다.

정령과 시행세칙이 발표된 후 남한의 각 점령지에서는 토지개혁이 급속히 진행되었다. 정령 발표 후 북한 내각 농림성 산하에 토지개혁을 총괄지도하는 ‘공화국 농림성 남반부 토지개혁지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위원장에는 농림상 박문규가 임명되고 500명의 지도위원이 선발되었다. 이들 500명의 지도위원(또는 전권위원)들이 남한 각지에 파견되어 토지개혁 전반을 지도하였다.(27) 따라서 남한 점령지역에서 시행된 토지개혁은 사실상 철저히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

북한 내각보도에 따르면 농촌위원회는 모두 1만8천개가 조직되었고, 14만 명의 농민들이 참가하였다. 또한 서울시와 황해도(웅진군, 남연백군), 경기도, 남강원도, 충남, 충북, 전북 등에서 완전히 실시되었고, 경북, 경남, 전남에서는 인민군이 완전히 점령한 지역에서만 실시되었다. 전남의 경우는 252개 면 중 208개 면, 경북에서는 251개 면 중 107개 면, 경남의 경우는 239개 면 중 99개 면에서 실시되었다.

토지개혁에 의해 점령지역에서 총 596,202정보의 토지가 몰수되었고, 농민들이 지주들로부터 연부로 구매한 80,994정보에 대한 부채가 폐기되었다. 이는 점령지역 내의 총경지면적의 43.3%에 해당하며, 남한 총 경지면적의 27.4%에 해당한다. 몰수토지는 미국소유지 975정보, 이승만 정부 소유지 39,627정보, 회사·상사 소유지 14,993정보, 지주와 소작토지 524,491정보, 기타 16,116정보 등이었다.(28)

몰수한 토지 총면적 가운데 고용농민에게 28,080정보, 토지없는 농민에게 196,494정보, 토지 적은 농민에게 348,769정보로 모두 573,343정보가 분배되었다. 나머지 22,859정보는 국유화되었다. 모두 2,267,809호의 농민이 토지를 분배받았는데, 이는 토지개혁이 실시된 점령지역 총농가의 66%였다.(29)

이러한 토지개혁이 실제로 어떤 의미가 있고 성과를 낳았는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 이견이 많다. 데이비드 콩드는 “한국의 소작농민들과 농촌 노동자들이 이 계획을 적극적으로 지지함으로써 농지개혁은 남한 내에서 북한 사업의 지지기반을 획득하는 유력한 요인이 되었다”고 평가하였다.(30)

또한 브루스 커밍스는 “전에 미국인들이 대한민국에 강요했던 토지의 개량적 재분배를 성공적으로 방해한 지주계급과의 대립은 한국혁명의 반제반봉건적 성격의 본질을 드러내 주었다. 토지재분배는 부산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방에서 이뤄졌다. 비록 전시상황에서 급속하게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토지개혁은 계급구조와 계급권력을 청산시켜 버렸고, 나중에 이승만의 농지개혁을 가능케 했다”고 평가하였다.(31)

그러나 이와는 달리 박명림은 매우 비판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는 “많은 통계와 실제의 사태를 비교 검토한 결과 북한이 시도한 1950년 여름의 남한 토지개혁은 북한이 주장하는 ‘공식 통계에서만의 혁명’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지상(紙上)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실제의 토지혁명이 아니었다”라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그는 “경제적 측면에서 1950년 여름의 남한혁명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지배 주체가 폭력적으로 급격히 바뀌었다는 의미에서의 정치혁명(의 시도)일 뿐”이었다고 말한다.(32)

▲ 1959년 마을 앞에 도열해 이승만 대통령의 방문을 반기는 충북 청주지역 농민들. ‘농지개혁’에 대한 농민들의 열망은 엄청났다.(대한민국정부 기록 사진집)

그러나 이 같은 비판적 평가를 내리는 박명림조차도 “(전쟁이 끝난 후) 남한의 토지개혁을 가속화시킨 촉진요소”가 된 점은 인정하고 있다.(33) 많은 연구자들은 북한의 토지개혁이 긍정적인 요소가 없었다고 보기보다는 기본적으로 한계를 갖고 있었다고 파악한다. 토지개혁으로 분배받은 농지면적이 평균 0.45정보에 불과해 영세소농 농업구조를 변혁시키지 못하였다. 또한 전쟁 중에 진행된 토지개혁이 농민들을 혁명세력화하고 지속적으로 혁명의 성과를 지켜나갈 수 있도록 각성시키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토지개혁을 통해 농민들의 이해와 요구를 실현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농민들을 곧바로 전선으로 동원해야 하는 전쟁의 요구가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전쟁 승리를 위한 동원을 염두에 두고 진행된 혁명은 근본적으로 정치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한계로 인해 토지개혁은 사전준비작업도 없이 매우 짧은 기간에 졸속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남한에서는 오랫동안 지주의 인격적 속박을 받으며 봉건적 가치관과 윤리에 익숙한 농민들을 정치적으로 각성시키고 혁명의식으로 무장시켜 이러한 토지개혁과 반제반봉건혁명의 자발적 주체로 나서게 만들기 위한 예비 투쟁과 선전교양사업이 진행되지 못하였다. 이는 북한의 토지개혁 진행과정과 남한 점령지에서 진행된 그것을 비교해 보면 금방 그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다. 점령지에서는 당과 인민위원회의 복구와 동시에 토지개혁이 진행되었지만, 농촌위원회를 중심으로 “토지개혁은 농민 스스로의 힘으로”라는 원칙의 표방에도 불구하고 중앙지도요원들과 좌익들에 의해 졸속으로 진행되었다.(34)

더욱이 토지개혁의 성과를 공고히 하고 복구된 인민위원회의 재정 확립을 목적으로 시행된 현물세제의 실시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 또한 적지 않았다. 농민들에게 부과된 현물세는 그 전 지주에게 납부하던 소작료보다 적었지만, 현물세 조기실시납부운동이나 시행 과정에서 보여준 관료적 방식과 “숨막히는 철저성과 비인간성”(35) 등으로 많은 긍정적 요소를 감퇴시켰다. 

군사적 동원 정책

토지개혁과 함께 북한의 점령정책 가운데 핵심적인 것은 군사적 동원이다. 전쟁이라는 수단을 통해 수행된 혁명의 승리를 끝까지 보장해 주는 것은 다름 아닌 전쟁의 궁극적 승리이기 때문이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전선에 필요한 인력과 물자의 지속적인 동원이 최우선적으로 필요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북한의 김일성 수상은 1950년 6월 26일 방송연설을 통해 “모든 사업을 전쟁 목적과 적들을 소탕함에 복종시키고, 인민군대에 대한 전인민적 방조를 조직하며, 전선을 계속 증원 보충하며, 일체 필수품을 공급하며, 군수품의 긴급수송을 보장하며 부상병들에 대한 광범하고 따뜻한 구호사업들을 조직할 것”을 지시하였다.

▲ 한국전쟁 당시 ‘인민의용군’ 모습(전쟁기념관)

이와 함께 북한당국은 군사적 동원화를 위한 구체적인 방침을 마련하였다. 6월 26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정령을 통하여 「군사위원회 조직에 관하여」를 발표하였고, 국내의 일체주권을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7인의 군사위원회에 집중시켰다. 군사위원은 위원장 김일성을 비롯하여 박헌영, 홍명희, 김책, 최용권, 박일우, 정준택 등이었다. 이어 6월 27일에는 전시상태가 선포되고 지방주권기관의 일체 업무가 ‘도(시)인민위원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군대표와 내부기관 대표 등으로 구성되는 지방군정부’에 이관되었다. 군사위원회의 지도를 받는 지방군정부의 임무는 “1)공민들에 대한 의무노동의 부과 2)군부대 및 군사기관을 위한 숙식과 기타 건물 제공 3)자동차 등 수송시설의 동원 4)통행금지 및 필요한 경우에 수색 또는 행동이 수상한 자에 대한 억류 5)상업과 공공기관, 공공기업소 등의 사업을 통제하는 일” 등이었다.(36) 

이러한 방침에 따라 시행된 군사적 동원 정책은 전선에 필요한 인적자원을 동원하기 위한 의용군 모집과 후방기지 강화 및 물자의 동원을 위한 전선원호사업 등이었다. 북한은 이미 7월 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지역에 동원을 선포함에 관하여」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을 통해 전체 인민에 대한 동원을 선포하였다. 이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 지역’은 남한과 북한의 모든 지역을 의미했다. 동원 대상은 1914년부터 1932년 사이에 출생한 만 18세에서 36세에 해당하는 전체 주민이었다. 전쟁의 시작과 함께 가장 먼저 남북 인민에 대한 동원이 시작된 것이다.

북한 내부자료에 따르면, 남한에서는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7월 초에 이미 조선의용군 본부가 조직되었다. 조선노동당은 ‘의용군 초모사업에 관하여’라는 결정을 통해 1)의용군은 18세 이상의 청년으로 하되 빈농, 청년들을 많이 끌어들일 것, 2)각도에 할당된 징모수는 책임완수할 것, 3)전 남로당원으로서 변절자(보도연맹가입자)도 의무적으로 참가시킬 것 등을 규정하였다.(37)

▲ 중학생의 의용군 모집 선전 집회(전쟁기념관)

7월 26일에는 군사위원회 결정 제23호로 ‘전시 의무로력동원에 관하여’를 선포하였다. 7월 1일의 동원선포와 조선인민의용군 본부 설치, 의용군 초모사업에 관한 노동당 결정만으로 부족하였기에 좀더 강력한 동원을 결정한 것이었다. 이 정령은 북한지역만을 대상으로 한 결정이었다. 북한 군사위원회는 7월 30일에는 언제라도 모든 주민들을 군인으로 동원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공화국 공민 중 18세로부터 37세까지의 전체 남자들에 대하여 군사증의 교부를 완료”하도록 결정하였다. 이는 모든 인민의 총동원을 의미하였다.

남한에서는 초기에는 의용군 모집이 자원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서울에서는 7월 1일부터 6일까지 철도, 체신 등의 각 부분 노동청년 13,000여 명이 인민의용군 대열에 참가하였다. 7월 3일 오전 11시 서울운동장 앞과 금화국민학교에서는 민주학생연맹 주최로 시내 85개교 16,000여명의 학생들이 전선의용군에 참가할 것을 결의하고 시가행진을 벌인 뒤 ‘미제국주의 완전소탕 애국학생 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7월 10일에는 수송초등학교 교정에서 민주학련 주체로 2만여 명이 참가하는 학생의용군 환연회가 개최되었다. 시내 90여개 중고등학교와 대학에서 지망한 의용군 수가 1만명을 돌파했다고 발표되었다.(38)

의용군 모집은 각 도·시·군인민위원회 산하 군사동원부의 지시하에 각 면인민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수행하였다. 면인민위원회에는 도와 군에서 파견된 심사원이 배치되어 의용군 모집사업을 지도하고, 입대자를 심사하였다. 의용군 모집에서 흔히 사용된 방법은 면인민위원회 지시에 따라 각 사회단체별로 군중집회를 개최하고 즉석에서 집단적으로 모집하는 방식이었다. 이때 민청은 의용군 모집을 위한 중추조직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 같은 군중대회를 통한 의용군 모집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빠져나가기 어려운 함정이 있었기 때문에 대량의 즉석 모집이 가능하였다.

북한당국은 전시동원령이 내려진 지 한 달 보름만인 8월 15일까지 북한에서는 80여만 명의 의용군이 자원하였으며 남한에서는 40여만 명의 젊은이들이 의용군 모집에 참가했다고 발표하였다. 이렇게 모집된 의용군은 1~2일간의 간단한 훈련을 거쳐 전선으로 동원되었다. 각 군에는 의용군 훈련을 위한 임시훈련소를 설치하였는데 국민학교 교정이 주로 이용되었다. 각 도에서는 9월 초에 의용군을 중심으로 여단을 편성했는데 경북은 안동사단, 충남은 대전여단, 전남은 광주여단 등이 있었다.(39)

의용군 모집은 초기에는 자원성이 일부 적용되었으나(40) 후기로 가면서 거의 강제징병에 가까웠다. 김남식은 “의용군 모집은 자원성을 무시하고 강제성을 띠게 되었으며, 학생들은 18세 이하만 등교하게 하고 나머지는 민청에 가입시켜 의용군에 입대할 것을 강요하였다”고 말한다. 서울에서는 민청원들을 거리의 요소에 배치시키고 지나가는 청년들을 민청사무실로 연행하여 강제입대시키는 일도 있었다.(41)

▲ 의용군 모집에 동원된 여학생들(전쟁기념관)

한편, 당시 미 CIA보고서는 “서울 학생들의 절반 이상이 대거 북한군에 입대하였다”면서 이러한 사실을 두고 “북한에 의해 강제된 측면도 있긴 하지만, 이는 과거 이승만 정권이 얼마나 남한 민중들로부터 지지를 못받고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석하였다. 개전 초기 북한 정규군이 입은 피해규모를 생각할 때 의용군에 의한 병력 보충은 북한의 전쟁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커밍스는 “1950년 여름 내내 북한군대는 대부분이 남한출신이고 일부 북으로부터 내려온 남한 게릴라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할 정도였다.(42)

남한을 점령한 북한은 의용군 모집과 함께 인민군의 전투 수행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기 위하여 주민을 동원하였다. 이른바 ‘전선원호’로 표현되는 이러한 동원에는 전선에 필요한 물자의 동원과 후방복구를 위한 노력동원 등이 대표적이었다.(43)

북한당국은 6월 27일 「전시상태에 관하여」라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을 통해 북한지역의 물자동원을 명시하였지만 남한지역에 대한 법적 구속력을 갖는 물자동원령은 발표되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되고 미군기의 폭격으로 전선보급이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북한당국은 전선에 필요한 물자를 현지에서 조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 인민군 원호사업 연락소를 리(동) 단위까지 설치하여 물자를 동원하였다. 북한당국은 점령지에서 물자를 동원할 때 의무동원이 아닌 대중운동 형식으로 수행하려 했으나 원활하지 않았다.

한편 9월에 접어들면서 인민군 원호사업을 더욱 조직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조국보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러한 위원회를 통해 원호사업과 함께 파괴된 시설 복구사업을 위한 노력동원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혁명적 개혁에 뒤이어 진행된 전선원호와 노력동원은 남한 인민들이 감당하기에 너무 벅차고 힘든 일이었다. 결국 의용군 모집과 인민군 원호로 대표되는 군사적 동원은 그나마 미미했던 정치·경제적 개혁의 성과마저 상쇄하고 말았다.(44)

전쟁이 끝난 다음, 남한에서 반공주의가 깊은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이승만 정부의 강한 이념 통제와 억압적인 정치 상황, 그로 인한 피해의식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북한의 점령정책의 문제점, 인민군 점령시기의 부정적인 경험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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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남반부의 노동당 전체당원들과 전체인민들에게 호소한 박헌영 선생의 방송연설”(1950. 7. 1); 권영진,『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남한점령지역 정책에 관한 연구』,(1989), 78쪽 재인용

2) 권영진,『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남한점령지역 정책에 관한 연구』,(1989), 78쪽

3) 김수현,『한국전쟁기 북한의 점령지 지배정책』(2006), 34쪽

4) ‘경기도 시흥군 내무소장 강룡수에 의해 각 면내무서 분주소장 앞으로 보낸 지시문(1950. 7. 20)’; 권영진, 위의 논문, 62쪽 재인용

5) 권영진, 위의 논문, 84쪽

6) 권영진, 위의 논문, 84쪽

7) 김수현, 위의 논문, 19쪽

8) 권영진, 위의 논문, 85쪽

9) 김수현, 위의 논문, 37쪽

1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무성 문화국, “해방지구에서 새로 선발된 내무원들을 위한 학습자료집 1”; 권영진, 위의 글, 86쪽 재인용

11) 중앙일보사편,『민족의 증언 3』, 1985, 90쪽; 이나미, 위의 책, 41쪽

12) 김세원,『비트』(상), 일과놀이, 1993, 52쪽; 이나미, 위의 책, 44쪽

13) 유엔군의 반격으로 인민군이 후퇴한 후 남부지역 6개 도당 산하 무장역량을 통합하여 만든 유격부대로 이현상이 총사령관이었다.

14) “그러나 중국해방군처럼 ‘해방지구’를 갖지 못했고 언제나 추위와 굶주림에 떨어야 했던 우리에게는 ‘인민성’을 발휘할 여유가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이태 『남부군』, 두레, 2003, 364쪽; 이나미, 위의 책, 42쪽).

15) 김범찬, 「한국전쟁의 신화에 대한 도전적 해석」, 『사회와 사상』, 1989년 6월호, 142쪽

16) 김수현, 위의 논문, 37쪽

17) 김수현, 위의 논문, 37쪽

18) 서용선, 『한국전쟁기 점령정책 연구』, 국방군사연구소, 1995, 40~41쪽; 이나미, 위의 책, 38쪽

19) 권영진, 위의 글, 87쪽

20) 중앙일보사편, 『민족의 증언 2』, 59~60쪽

21) 중앙일보사편, 『민족의 증언 2』, 56~66쪽

22) 이나미, 위의 책, 54쪽

23) 우종창, 「1950년 여름, 대전형무소를 휩쓴 광기」,『월간조선』 2000년 6월, 271~274쪽

24) 권영진, 위의 글, 88쪽

25) 김남식, 위의 책, 455쪽

26) 박명림, 위의 책, 266쪽

27) 박명림, 위의 책, 266쪽

28) 권영진, 위의 글, 111쪽

29) 박명림, 위의 책, 276쪽

30) 데이비드 콩드, 『한국전쟁: 또 하나의 시각 Ⅰ』, 과학과사상, 1988, 458쪽

31) B. 커밍스 & J. 할러데이, 『한국전쟁의 전개과정』, 태암, 1989, 89쪽

32) 박명림, 위의 책, 282~283쪽

33) 박명림, 위의 책, 283쪽

34) 권영진, 위의 글, 114~115쪽

35) 현물세 부과의 경우, 정확한 “농작물 실수확고 판정에 근거하여 실시되어야 할 대신에 다만 상부 예산에 맞추어 할당 부과”되는 등의 폐단이 있었다. 또한 수확물을 산출할 때 벼이삭의 알 수까지 세어서 예상수확고를 미리 조사하고, 그에 해당하는 징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판정위원 전체에게 연대책임을 물었다. 게다가 농업현물세 징수작업과 과정에 대해서는 검찰기구가 감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징수 방식과 과정은 농민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숨 막히는 압박이었고, 가혹하다고까지 여겨지게 하였다.(박명림, 위의 책, 288~293쪽 참고) 

36) 권영진, 위의 글, 133쪽

37) 박명림, 위의 책, 207쪽

38) 권영진, 위의 글, 134~135쪽

39) 권영진, 위의 글, 137쪽

40) 권영진, 위의 글, 138쪽

41) 김남식, 위의 책, 534쪽

42) B. 커밍스 & J. 할러데이, 위의 책(1989), 86쪽

43) 권영진, 위의 글, 140쪽

44) 권영진, 위의 글, 143~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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