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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방위군 사건(2)-의문을 남겨둔 채 역사 속으로<연재> 임영태의 한국현대사 망각과의 투쟁(28)
임영태  |  ytlim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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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1.03  00:5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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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과거사 청산은 근대 국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있었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으로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과거사 청산은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일로써 왜곡․은폐된 과거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사회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은폐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바로잡기 위한 과거사 청산 노력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통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아래서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여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가 계속되면서 그 성과가 희미해지고 있다. 

역사는 진실을 밝혔다고 해서 끝나서는 의미가 없다. 역사의 진실이 영원히 기억되지 않으면 역사의 정의는 없다. 진실은 공식 기록으로 표기되고, 교육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망각과의 투쟁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 권력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과 테러, 의문사, 고문에 의한 조작 등과 관련된 사건들을 되짚어 봄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고자 한다. / 필자 주

 

105일 동안 70억 원 횡령

1951년 1월 15일 부산극장에서 피난 국회가 문을 열자 방위군 문제가 곧바로 쟁점으로 떠올랐다. 국회는 제2국민병 처우문제를 의제로 올리고 실정에 보고를 들은 다음 ‘제2국민병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정부에 대책을 추궁하였다. 그러나 책임자인 신성모 국방장관과 김윤근 사령관은 ‘낭설’‘제5열의 준동’이라고 매도하며 반발하였다.

1월 21일 김윤근은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나서 “1백만 국민병은 편성훈련 중에 있는데 일부 불순분자들이 국민방위군 편성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낭설을 퍼뜨리고 있는 것은 유감이다”라고 하였다. 신성모는 1월 26일 국회 본회의 답변에서 “국민병 처우 운운하나 최후 승리를 위해서는 돌발적 사태임에도 불구하고 희생이 적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제5열 준동이 가장 위험한 일이니, 제5열의 책동에 동요되지 말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1)

   
▲ 국민방위군 사건을 다룬 당시의 신문

정부와 책임자들이 이처럼 후안무치하게 나오자 국회가 발칵 뒤집혔다. 여론 또한 더욱 비등했다. “대한민국에는 법도 없단 말인가?”“어떻게 저런 자들을 가만 놔 둔단 말인가!”등 국민들의 장탄식이 끊이지 않았고 분노가 거칠 줄 몰랐다. 결국 국회는 여론을 등에 업고 3월 29일 제54차 본회의에서 ‘국민방위군 의옥(疑獄)(2)사건 특별조사위원회’구성안을 재석 102명에 찬성 54대 반대 0으로 통과시켰다.(3)

‘국민방위군 의혹사건 국회특별조사위원회’는 5개 반으로 나누어 활동을 개시, 4월 25일 중간보고를 통해 부정의혹과 관련된 주요 내용을 발표하였다. 이때 예산영달을 위한 허위인원 조작, 예산지급시 선공제, 납품 허위기재, 횡령과 상납, 국방부 최고위층의 비호 등을 보고하였다. 4월 30일에는「국민방위군폐지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에 상정되어 논쟁 끝에 통과되었다. 

이어 5월 7일에는 특별조사위의 종합보고가 있었다. 태완선 의원은 중간보고보다 훨씬 세밀하고 광범위한 부정사례와 운영부실을 폭로하였으며, 이러한 모든 책임이 행정부와 그 상부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뒤이어 엄상섭, 백남식, 이종형 의원 등이 국민방위군의 참상과 부정사실을 폭로하였다.(4) 국회의 종합보고에 따르면 국민방위군 간부들은 어마어마한 돈을 착복한 것으로 드러났다. 105일 동안에 70억 원에 가까운 돈을 부정한 방법으로 빼돌린 것이다. 당시 국회특위 최종 보고자였던 태완선 의원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횡령액은 인원수 조작과 양곡을 속여 착복한 액수만도 약 44억 원이나 됩디다. 그것도 불과 105일 동안에 저지른 짓이에요. 이것은 운영비 등으로 착복한 것까지 합치면 거의 70억원이나 되는 거액이에요. 그들 장부는 정말 엉망입디다. 돈을 타갔는데 수령자도 없고, 또 급히 꾸미느라고 3월 31일 하루에 모두 지급된 양 정리돼 있는 것도 있더군요.

당시 내 조사에 의하면 1950년 12월 17일에 국회를 통과한 방위군 예산은 209억 8,300만원이었습니다. 이 가운데서 1951년 3월 31일까지 재무부서 국방부로 나간 돈은 176억 4,118만원이고, 국방부에서 국민방위군사령부와 육본 방위국에 영달(令達)한 것이 164억 9,629만원이었어요.

국방부에서 특위조에 보고한 설치할 때부터 3월 31일까지의 방위군 연인원수 27,323,494명이었는데, 이것은 105일 사이의 총인원이니까 하루 평균 260,223명의 장정이 있었다는 셈이지요. 육본 인사국과 병사구사령부 등에서 방위군 숫자를 조사해 보니 도무지 정확한 것을 파악할 수가 없어요. 육본 보고에 의하면 2월말까지 방위군 대원 중 남하하다가 도망·행방불명·동상·질병 등으로 낙오된 자가 272,743명이었어요. 그러니까 일단 목적지에 도착한 장정이 382,743명이라고 하니, 애당초 국민방위군 총인원은 60만 명이 넘었던 것 같아요. 육본에서 장정들의 도착 상황을 알아보려고 각 병사구사령부별로 신체검사를 실시했더니, 그 인원은 213,492명뿐으로 나타났다는 거예요. 그런데 방위군사령부 보고를 보니 연인원은 19,740,554명밖에 없어요. 결국 연인원수에서 7,582,940명, 즉 하루에 72,218명이 틀린다는 것이고, 이 틀린 숫자에 지급된 것을 횡령했다는 결론이 나오지요.”(5)

참고로 이들이 횡령한 돈이 어느 정도로 엄청난 것인지는 윤익헌 부사령관의 기밀비로 지급된 3억 원은 당시 감찰위원회(지금의 감사원)의 1년 총예산의 30배를 웃도는 금액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다.

국민방위군 예산이 국회에서 통과된 것은 1951년 1월 29일이었다. 1, 2, 3월분 예산 209억 830만원의 내역은 국민방위군 장병수를 50만 명으로 잡고, 그들을 위한 최소한의 식량, 취사용 연료대, 잡비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는 장정들의 하루 식량이 1인당 4홉, 취사용 연료대 40원, 잡비 10원씩으로 계상된 것으로 당시 5홉5작이었던 전쟁포로보다도 적은 양이었다.(6) 또한 이 예산에는 사령부와 교육대의 운영비, 장병들의 피복비, 의료비 등과 장교와 기간병에 대한 봉급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어려운 국가재정을 감안하여 불가피하게 최소한으로 책정했다는 정부의 호소가 국회의 동의를 얻어낸 결과였다.(7)

   
▲ 1951년 8월 13일 대구 교외 야산에서 집행된 국민방위군 사건 관련자의 총살 장면

한편, 1951년 6월 11일 헌병사령부는 국민방위군 사건과 관련된 범죄사실을 발표하였다. 그에 따르면, 국민방위군 의혹사건의 부정처분 총액이 현금 24억 2,700만여 원과 양곡 1,800여 가마에 이르고, 방위군 간부들은 근무태만, 정부재산 부정처분 횡령, 문서위조, 시상조치령 제3조5호 위반, 정치관련 및 공갈 등의 범죄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우선, 간부들은 방위병 숫자를 의도적으로 늘려서 타낸 현금과 양곡을 정부에 반납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횡령하거나 정부예산을 예산항목 이회의 용도에 지출하는 방법으로 정부재산을 부정처분하였다. 문서위조는 주로 방위군 간부들이 허위영수증을 작성하여 기밀비 또는 개인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자금을 빼돌린 경우였다. 군수품 등 부정처분 항목에는 주로 방위군 주식용으로 영달받은 백미와 소맥분 등을 젤리, 건빵을 만든다는 구실 아래 상인에게 팔아넘기고, 각 지방교육대에서 반납한 양곡을 사령부 요원 후생미로 임의처분한 것 등이 포함되었다. 이 항복은「비상조치법」위반에 해당해 이들에게 사형언도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밖에 김종회 의원 등 국회의원 30명에게 1억 3,000만원의 의원공작비를 지급함으로써 정치관여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8)

정치자금과 뇌물, 그리고 주지육림

그러면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빼돌린 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와 관련하여 당시 헌병사령관이었던 최경록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28억 원 중 3분의 1은 신정동지회(9)에 정치자금으로, 3분의 1은 관계 요로에 무마비조로, 3분의 1은 방위군 간부들의 유흥비 등으로 소비했습니다. 이 사건은 신성모 국방이 국회 안에 자기를 지지하는 세력을 만들려고 70명의 신정동지회에 정치자금을 댄 데서 일어난 거예요. … 결국 방위군 관계자만 처벌됐지, 사건의 핵심이나 진짜 주동인물은 못 밝히고 말았습니다.”(10)

최경록의 주장은 신성모 국방장관이 국회 내에 자신의 지지세력을 만들려고 했고, 이를 위해 국민방위군에서 빼낸 자금이 유입되었다는 것이다. 만일 이게 사실이라면 신성모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을 고려할 때, 결국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자금에 대한 수사는 이후 중단되었고, 횡령 금원에 대한 환수도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욱이 김윤근·윤익헌 등을 급히 총살함으로써 정치자금과 관련도니 진실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 1950년 8월 15일 임시수도 부산에서 광복절 기념식을 마치고 나오는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

국민방위군은 사설단체인 대한청년단·청년방위대와는 달리 법적 존립 근거를 가지고 막대한 국가예산을 지원받았다. 따라서 국민방위군은 당연히 예산 집행이나 군수물자의 관리 등에서 군의 통제를 받아야 했으나 실제로 그러한 통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11) 또한 지휘책임과 관련하여 국민방위군 사건이 발생했을 때, 지휘계통상 책임을 져야할 정일권 육군참모총장과 강문봉 작전국장 두 사람에 대해서는 현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미국 유학을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후임에는 이종찬 소장과 이용문 준장이 각각 임명되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장창국 국민방위국장(제2대: 1951.1.14~4.27)은 책임을 지지 않았다. 장창국 앞에 방위국장은 이한림 준장이었다.(12)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군내부의 갈등관계로 파악하여, 만주군 출신(정일권, 강문봉 등)에 대한 일본군 출신(이종찬, 최경록 등)의 정치적 승리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13)

한편, 국민방위군 사령부에서 군 고위간부들에게 황금메달을 뇌물로 주었다는 사실은 그 당시 수사과정에서 확인되었고, 정황상 그 이상의 뇌물공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 사건은 현역 군간부의 처벌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국민방위군 간부들은 부정행위로 횡령한 자금을 군 내부의 지지자 확보와 자신들의 범죄행위 은폐를 위하여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정치자금 관련처럼 군관련은 더 이상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국민방위군 사건을 통해 당시 정치자금의 주요 통로가 군과 원자물자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군부의 부패는 제1공화국 전반에 걸쳐 만연하였으며 이는 4.19혁명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14)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대금을 횡령하는 방법은 갖가지였다. 우선 본부에서 각 교육대에 지급될 때 이미 3분의 1이 공제된 채 지급되었다고 한다. 홍사중은 “한 번 타오는 영달금은 대충 9,000만원이 된다. 영수증에도 엄연히 그렇게 적혀진다. 그러나 실제로 타오는 돈은 6,000만원 정도밖에 안된다. 사령부에서 3,000만원을 미리 떼이고 오는 것이다. … 교육대에 따라 ‘떼이는’돈에는 차이가 있게 마련이지만, 사령부가 미리 공제하는 돈은 대충 3분의 1 정도였다고 한다. 그 나머지 돈을 가지고 우선 장교와 기간 사병들의 의식주를 해결한다는 것이었다”라고 증언하였다.(15)

사령부에서 3분의 1을 떼이고 받아온 돈을 가지고 교육대 간부들은 어떻게 떼먹었을까? 우선 각 교육대마다에는 2중 경리장부가 있었다. 그것은 이를테면 6,000만원밖에 못 받았으면서도 9,000원의 영달금을 받아쓴 것으로 꾸며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경리과 문관들은 늘 상인들의 도장을 무더기로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산 가격보다 비싸게 산 것처럼 꾸미고, 사지 않은 것도 산 것처럼 위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가운데는 실제 상인도 있었지만 유령상인도 많았다. 도장이 찍힌 백지 영수증을 맡겨놓는 상인들도 많았다. ‘사바사바’로 통하는 세상이었다.

돈이 이처럼 빠져나가고 있어도 상급기관에서는 두 눈을 감고 있었다. 형식적으로 감사반이 왔다가는 경우가 있어도 비리를 적발할 수는 없었다. 위에서 언제 누가 온다는 정보는 이미 며칠 전부터 입수되어 있었고, 그에 따라 경리과의 문관들은 며칠씩 밤을 세워 2중 장부를 완벽하게 꾸며냈다. 하지만 그것은 헛수고였다. 감사는 뒷전이고 밤의 향연에 시간 가는 줄 몰랐기 때문이다. 결국 비리는 한 건도 캐내지 못하고 뒷돈만 두둑이 챙긴 채 돌아갔다.

   
▲ 폼잡고 있는 신성모 국방장관

본부의 비리는 그 규모가 한층 컸다. 국회 조사단이 찾아간 대구의 대용식 공장의 경우가 한 본보기가 될 것이다. 국민방위군 사령부는 장병들의 간편한 휴대용 식품을 만들기 위해 ‘젤리’공장을 차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루 쌀 10가마 정도 구울 수 있는 가마솥을 걸어놓고 하루에 쌀 250가마가 소비된 것으로 조작돼 있었다. 또 젤리를 마련하기 위해 멥쌀 4,500가마를 가마당 25,000원에 팔아 찹쌀을 가마당 120,000원에 사들인 것으로 기록돼 있었으나 모두 유령장부였다. 20여대밖에 사지 않은 자동차도 장부상으로는 250대로 되어 있었다.(16)

이렇게 빼돌린 돈은 어디로 갔을까? 최경록 헌병사령관은 “방위군 간부들은이 착복한 돈으로 대구 교외에 큰 엿공장을 차려놓고 방위군 장정에게 준 쌀로 엿을 만들어 팔았어요. 이자놀이도 하구요. 어떤 자는 대구·부산·마산에 첩과 첩의 집을 이중삼중으로 마련하기도 했어요. 상식적으로 상상도 못할 만큼 죄상이 악질적이었습니다”라고 증언했다.(17)  또한 당시 육군본부 법무감실에 근무하면서 이 사건을 담당했던 김태청(金泰淸, 당시 중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검찰조사에 나타난 바로는 이들은 그 많은 돈을 매일 같이 대구에 있는 금호정(琴湖亭)이라는 요정에 뿌렸다. 그 거액의 예산은 수표가 아니라 현찰로 영달되었는데(은행도 없는 전국 방방곡곡에 산재한 방위군 장정들을 소집, 인솔, 후퇴하기 위해서는 현지조달할 수 있는 현찰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찰이 어찌나 많았던지 그것을 가마니에 넣고 GMC 트럭으로 수송했고, 주둔지에서는 큰 창고에 부려놓고 보초를 세웠다. 요정에 갈 때는 부관이 돈을 트렁크에 가득 넣어서 찝차에 싣고 갔었다. 기녀(妓女)들에게 화대를 줄 때도 몇 장씩 세어주는 것이 아니라 돈을 손에 잡히는 대로 한 뭉치씩 끄집어내어 자꾸 뿌리면 이것을 한 장이라도 많이 주워가지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기녀들을 보고 한바탕 호탕하게 웃어대는 부사령관이었다.”(18)

당시 국회 특별조사위원회 조사위원이었던 서민호 의원의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서도 그런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김 사령관에게 영달된 현금이 얼마 남았느냐고 물었더니, 사령부 안의 한 간 만한 방에 데리고 가는데 5백원권과 1천원권의 새 지폐가 가득차 있어요. 모두 10억원인데, 1억원쯤 쓰고 9억원 정도 남아 있다는 거예요. 김 사령관이나 윤익헌 부사령관이 액수도 세어 보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나가 요정에 마구 뿌렸다는 게 거짓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19) 이들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횡령, 착복한 돈으로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놀아날 때 방위군 장정들은 얼어죽고 굶어죽고 병들어 죽어갔다. 참으로 어이없는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신성모의 실각과 이기붕의 등장

하지만 아무리 사령관 김윤근과 윤익헌 부사령관이 주지육림 속에서 놀아났다고 하지만 술값과 유흥비로 수십 억 원이나 되는 돈을 다 썼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 사건을 처음으로 수사했던 101헌병대장 송효순(宋孝淳, 당시 중령)은 “횡령한 수십억 원의 행방이나 용도에 관한 이야기는 당시의 관련자들이 대부분 현존하고 있어 밝히기가 곤란하군요.(20) 다만 돈이 흘러간 곳이 아주 광범해서 각계의 요로에 거의 다 미쳤다는 것만은 말할 수 있지요. 결과적으로 그 죄상은 천인공노할 만했습니다. 조사 결과 사령관 김윤근 준장이 그 돈을 횡령해서 개인적으로 축재한 것은 별로 없었어요”(21)라고 말했다.

   
▲ 이승만과 김성수

장정들을 아사, 동사, 병사시키고 빼낸 돈 중 많은 부분이 정치자금이나 상납금으로 나갔다는 이야기다. 일부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현금 27억원 가운데 3분의 1은 국회의원들에게 정치자금으로, 3분의 1은 관계(官界) 요로에 무마비로 뿌려졌다는 것이다. 물론 군장성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이 상납금을 받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상급기관의 묵인 없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부정이 공공연히 자행될 수 없었을 것이다. 돈만 뿌린 게 아니었다. 순금으로 군번표를 만들어 장성들에게 주기도 하고, 경무대 비서관에게 지프차를 사주기도 하고, 대한청년단 출신 국회의원들에게는 여비도 제공하였다.

당시 방귀깨나 뀐다는 사람 치고 안 받아먹은 사람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진실로 당시의 정계와 군부, 관료 사회의 난맥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니 그 부정의 진상을 정확히 파헤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국회의 경우,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방위군 부정조사와는 달리 흐지부지되고 말았다.(22)

사건의 수사와 재판 과정도 결코 평탄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승만 대통령의 절대적인 총애를 받는 김윤근 사령관을 구속하고 부정의 내막을 속속들이 파헤친다는 게 쉽지 않았던 것이다. 최경록 헌병사령관의 지휘 아래 조사가 시작되고 1개월 후에 이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는 보고하지 말고 사건을 더 이상 확대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간부 몇 사람 구속하는 선에서 사건을 은폐하려 했던 것이다. 신성모 국방장관도 김윤근 준장만은 구속하지 말고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김윤근 준장은 사령부 안에 연금시키고 부사령관 이하 5명을 구속한 뒤 정식으로 지방고등군법회의에 넘겼다.(23)

   
▲ 박정희와 이선근. 국민방위군 사건 당시 정훈국장으로 1심 재판장을 맡아 사건의 축소, 은폐의 주범으로 평가되는 이선근. 그는 일제시기부터 이승만․박정희 정권에 이르기까지 만주국 협화회 회원, 대동청년단 부단장, 국방부 정훈국장, 문교부장관, 성균관대·영남대·동국대 총장, 대한교련 회장, 정신문화연구원 초대원장 등 온갖 요직을 두루 거쳤다. 유신체제를 찬양, 옹호하는 데 앞장 선 것으로도 유명하다.

국회에서 진상조사를 둘러싸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5월 6일 1심 재판 결과 형량이 형편없이 낮게 나왔다. 김윤근 사령관은 무죄, 윤익헌 부사령관은 징역 3년 6월, 그 외 피고인은 1년 반 정도였던 것이다. 당시 재판장은 국방부 정훈국장인 이선근이 맡았는데, 그는 청년운동 때부터 이미 김윤근, 윤익헌과 잘 알고 지낸 사이였다.(24) 1947년 9월 27일 지(이)청천을 단장으로 하여 결성된 대통청년단의 중앙 임원으로 훈련부장 이선근, 총무부장 윤익헌, 감찰위원장 김윤근이 임명되었던 것이다.(25)

그러자 비난여론이 거세게 일었고, 나라 안은 벌집을 쑤신 듯 발칵 뒤집혔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도 가만있을 수 없게 되었다. 거창 사건 등의 책임을 물어 신성모 국방장관을 자르고 5월 7일 새 국방장관으로 이기붕을 임명하였다. 또 6월 23일에는 정일권 육군참모총장과 강문봉 작전국장을 미국참모대학으로 유학 보내고, 그 후임에 이종찬 소장과 이용문 준장을 각각 임명했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신성모의 실각과 이기붕의 부상에 이어 군 지휘부의 세력판도를 변화시켰다. 이와 함께 국민방위군 간부들은 그들의 엄청난 죄과와 더불어 일종의 ‘정치적 제물’로 군법재판을 다시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 사임성명서를 발표하는 이시영 부통령

이 무렵 여론을 더욱 비판적으로 만든 것은 이시영 부통령의 사임이었다. 이시영 부통령은 임정계열로는 유일하게 이승만 정부의 고위직에 속해 있었지만, 국정에서는 완전히 소외된 채 부통령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국민방위군 사건이 나자 이승만 정부를 통렬히 비판하면서 사임서를 제출하였던 것이다. 이시영 부통령은 사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임기 3년 동안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대체 무엇을 하였던가? … 나는 그야말로 시위소찬(尸位素餐)(26)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니 이것은 그 과책(過策)이 오로지 나 한 사람의 무위무능에 있었다는 것을 또한 솔직히 표명하지 않을 수가 없다. … 내 본래 무능한 중에도 모든 환경은 나로 하여금 더욱 무능하게 만들어 시위(尸位)에 앉아 국록만 축낸다는 것은, 첫째로 국가에 불충한 것이 되고, 둘째로는 국민에게 창피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 탐관오리는 가는 곳마다 날뛰어서 국민 신망을 상실하며 정부의 위신을 훼손하고 나아가서는 국가의 존엄을 모독하여서 신생민국의 장래에 암영을 던지고 있으니, 이 얼마나 눈물겨운 일이며 이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이 아닌가. … 그렇듯 관기가 흐리고 민심이 어지러운 것을 목견(目見)하면서도 워낙 무위무능(無爲無能)한 나인지라 속수무책 수수방관할 따름이니 내 어찌 그 책임을 통감 않을 것인가. 그러한 나인지라 나는 이번 결연코 대한민국 부통령의 직을 이에 사임함으로써 이 대통령에게 보좌의 직책을 다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씻으려 하며, 아울러 국민들 앞에 과거 3년 동안 아무 업적과 공헌이 없었음을 사과하는 동시에, 나는 일개 포의(布衣)로 돌아가 국민과 함께 희락사생(喜樂死生)을 같이 하려 한다.”(27)

이시영 부통령이 사임하자 5월 15일 새 부통령 선출이 있었다. 이때 야당이 미는 김성수(金性洙)와 정부가 지지하는 이갑성(李甲成)이 맞붙었다. 3차까지 가는 접전 끝에 78대 73으로 김성수를 부통령에 선출함으로써 이 대통령에게 정치적 패배를 안겨주었다.

최후의 심판과 불신의 벽

이시영 부통령의 사임으로 비판여론은 더욱 거세졌다. 사태가 수습되기는커녕 갈수록 악화되자 이기붕 국방장관은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해 단호한 재수사를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5월 17일 김윤근 사령관이 구속되었고, 1개월에 걸친 재조사 후 사령관 김윤근 준장, 부사령관 윤익헌 대령, 재무실장 강석한 중령, 조달과장 박창원 소령, 보급과장 박기환 중령, 군수처장 김희 대령, 회계과장 장의두 소령, 회계과장 보좌관 노용식 대위, 제15교육대장 박철 중령, 제27교육대장 임병언 대령, 제10교육대장 송필수 대령 등 11명을 고등군법회의에 송치하였다.(28)

   
▲ 영천시 청통면 은해사 근처 치일리에 있는 국민방위군 추모비. 전투와 관련되지 않은 국민방위병의 사망에 대한 추모비는 이 비가 전국에서 유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영천시장과 정선군수 명의로 되어 있는 비문에는 이들이 순직하였다고 표현되어 있다.(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재판은 논란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동일한 범죄에 대하여 재심하는 것은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어긋나는 게 아니냐는 법리적인 문제가 제기되었던 것이다. 재심 군사재판이 여론의 압력에 떠밀려 열림으로써 법리적으로는 많은 논란의 소지를 안고 있었던 셈이다.

역사적인 재심재판은 1951년 7월 5일 처음 시작되었다. 군사재판은 비공개가 원칙이었지만, 이 경우는 달랐다. 일반에게 완전히 공개했던 것이다. 몰려든 인파를 위해 교정에 확성기까지 설치했고, 국방부장관, 최경록 헌병사령관, 김석원 장군, 그리고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 김창룡까지 방청을 나왔을 정도로 온 국민의 지대한 관심 속에서 진행되었다.(29)

재판에 앞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국방경비법과 비상조치법(비상사태하 법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 가운데 어느 것을 적용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비상조치법에 따르면 비상사태하에서 막대한 군수물자를 부정처분한 자는 사형에 처할 수 있었다. 1차 군사재판에서는 국방경비법이 적용되었기 때문에 가벼운 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비상조치법을 적용시키기로 하였고, 일반 여론도 극형으로 흐르고 있었다.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결심공판은 3일 후인 7월 8일에 있었고, 언도공판도 7월 19일에 있었다. 결과는 이미 예상했던 대로 5명의 피고인(김윤근, 윤익헌, 강석한, 박창원, 박기환)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김윤근 사령관의 형량에 대해서는 재판관들(30) 사이에서도 이견이 많았다. 김윤근은 부사령관의 농간에 놀아난 허수아비였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얼마나 엄청난 부정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인식하지 못했으며, 단지 무능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31)

그러나 당시의 여론이 김윤근을 살려두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게다가 횡령한 돈을 받아먹은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만일 진상을 계속 파헤치면 다치지 않을 권력층이 없을 지경이었다. 따라서 가능한 재판을 신속하게 끝내고 최소한의 희생자로 사건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는 김윤근도 하나의 정치적 제물에 불과했다.

이들이 처형된 후에도 국민방위군 간부들에 의해 부정처분된 예산이 이승만과 정부 고위층에 유입되었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었다. 대한청년단 출신의 김종회 의원이 국민방위군용 군수물자를 부산으로 유출하여 3억여 원을 횡령하여 이를 이승만의 비서에게 정치자금으로 전달하였다는 폭로가 있었고, 국민방위군 예산이 국회 내 이승만 지지세력과 정부 고위층, 군부 내의 간부 등에 정치자금으로 유출되거나 상납되었다는 주장 제기되었던 것이다. 또한 신정회동지회 소속 국회의원들에게 수억 원이 제공되었다는 최경록 헌병사령관의 발표도 있었다.(32) 

그러나 뇌물을 받아먹은 정치인과 장성들은 조사 한 번 제대로 받지 않고 몇 명의 방위군 간부들에 대한 처형으로 사건은 어둠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박순천 의원은 국회에서 “알고서 먹었든, 모르고서 먹었든, 직접으로 먹었든, 간접으로 먹었든, 먹은 것은 사실 아니야? 불의를 모면서 은폐하려는 것은 불의와 다름없다. 양심이 있거든 내가 먹었노라고 자백하라!”소리쳤지만, 그것은 허공을 향한 외침일 뿐이었다. 더욱이 정치자금과 관련된 열쇄를 쥐고 있던 김종회 의원이 1953년 5월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이 문제는 완전히 어둠 속에 묻히고 말았다. 

그런데 국민방위군 사건과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얼마나 컸든지 사형집행도 공개적으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간에는 사형은 선고했지만 집행은 하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는 해외로 빼돌릴 것이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돌았을 지경이다. 사형집행은 8월 13일 오후 2시에 있었다.(33) 대구에서 약 10㎞ 정도 떨어진 화원(花園) 야산에서였다.

   
▲ 국민방위군 추모식 제막식(영천시·정선군)

이렇게 해서 발단 8개월 만에 국민방위군 사건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 상처는 영원히 지워질 수 없었다. 국민들 가슴속에 자리 잡은 정부에 대한 불신과 군대 기피현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직접 끌려갔던 사람들은 당시를 회상만 해도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수치심을 가눌 수 없었을 것이고, 장교들은 씻기 어려운 공범자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건이 일어난 지 60년이나 지난 뒤에도 국민방위군의 망령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 더 큰 문제이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국가권력이 직접적으로 총을 들이대어 국민을 학살한 것은 아니지만 국가권력의 잘못된 정책과 집행으로 인한 ‘미필적 고의에 의한 학살사건’이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2014년 4월 16일에 일어난 세월호 사건 또한 ‘국가권력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학살 사건’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국가권력의 안일과 나태,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책임의식의 부재, 관료들의 도덕적 불감증 등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다. 국민방위군 사건이 그랬던 것처럼 세월호 사건도 오랫동안 한국민의 가슴에 큰 상처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

한편, 신성모가 사임하고 국방부 장관이 된 이기붕은 국민방위군 사건을 단호하고 빠르게 처리함으로써 국민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이 사건을 통해 자신감과 인기를 얻게 된 이기붕이 이승만의 후계자로 부상하면서 자유당 정권의 2인자가 되었고, 여기서 4.19혁명의 싹이 마련되었던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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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부산일보사, 위의 책, 169~172쪽

2) 이때는 ‘의혹(疑惑)’을 ‘의옥(疑獄)’이라고 표현하였다.

3) 중앙일보사 편, 위의 책, 115쪽

4)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방위군사건보고서, 468쪽

5) 중앙일보사 편, 『민족의 증언 4』, 121~123쪽

6) 당시 전쟁포로는 ‘제네바 협정’에 근거하여 유엔군이 관리하고 있었는데, 급식수준이 한국군보다 나았다고 한다.

7)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보고서, 494쪽

8)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보고서, 494~495쪽

9) 2대 국회는 6.25전쟁으로 조소앙, 원세훈, 안재홍 등의 중도파 정치거물을 비롯하여 27명이 서울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거나 피살되었다. 나머지 175명의 의원들은 공화구락부 40, 신정동지회 70, 무소속 5, 민우회 20, 민주국민당 40 등으로 야당세력이 절대 우세한 상황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신정동지회는 민정동지회와 국민구락부가 통합하여 만든 조직으로 대한청년회 출신이 주도하는 친여성향의 원내교섭단체였다(연시중,『한국 정당정치 실록 2』, 지와 사랑, 2001, 20쪽

10) 중앙일보사, 『민족의 증언 4』, 113~114쪽

11) 육군소장 출신의 이명재는 자신이 국민방위군에 국고금을 줄 때 현역군인 경리장교를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신성모 장관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증언하였다. 그는 또 경비를 지출할 때 사인한 바 없으니 육군이 책임질 일도 없다고 주장하였다(군사편찬연구소장, 「한국전쟁증언록」, ha02028, 10108 이명재증언록;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495쪽).

12) 남정옥, 위의 글, 188쪽

13) 김세중, 「국민방위군 사건」,『한국전쟁과 6.25전쟁』, 연세대한국학연구소, 2000, 118쪽

14) 서중석,『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사, 2007;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496쪽

15) 홍사중, 위의 글, 561쪽

16) 중앙일보사 편, 『민족의 증언 4』, 118~119쪽; 부산일보사, 위의 책, 194쪽

17) 중앙일보사 편, 『민족의 증언 4』, 113~114쪽

18) 김태청, 「국민방위군의 기아행진」, 『신동아』 1970년 6월호, 196쪽

19) 중앙일보사, 『민족의 증언4』, 119쪽

20) 지금은 관련자들이 대부분 사망했지만, 송효순이 이 증언을 한 1970년대 초반(1972년 중앙일보 연재)만 해도 국민방위군 사건 관련자들이 대부분 시퍼렇게 두 눈 뜨고 살아 있던 상황이었다. 

21) 중앙일보사, 『민족의 증언 4』, 111쪽

22)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방위군사건 보고서, 468쪽; 부산일보사, 위의 책, 206~212쪽; 중앙일보사 편, 위의 책, 126~127쪽

23) 부산일보사, 184~185쪽

24) 이선근은 일제강점기부터 미군정, 이승만정권, 박정희정권에 이르기까지 변신을 거듭하며 영달을 누린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이선근은 일제강점기 조선일보와 송도보통학교 교사로 있다가 1937년 만주로 가서 만몽산업주식회사 상무이사가 되어 관동군에 군량미를 공급하였으며, 만주국 협화회(協和會)의 협의원(빈강성 오상현 안가촌 분회 부분회장)을 지냈다. 해방 후 조선청년당, 대동청년단(부단장 겸 기획위원장)을 하였고, 1947년 9월 서울대학교 학생처장을 맡아 국대안 파동을 수습하였다. 1950년 2월 국방부 정훈국장이 되었으며, 1954~56년 문교부 장관을 지냈다. 문교부 장관 재직 중 1956년 정·부통령 부정 선거에 적극 개입하여 국회 불신임안으로 불명예 퇴진하였다. 1956~62년 동아대학교 교수, 성균관대학교 총장, 대한상무회(재향군인회) 회장, 경희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박정희 정권 시기에는 영남대학교 총장(1969), 동국대학교 총장(1974), 대한교련 회장(1976), 정신문화연구원 초대 원장(1978)을 지내면서 유신 체제를 적극 찬양, 옹호하는 나팔수 노릇을 하였으며, 전두환의 집권도 찬양하였다.(정운현, “만주서 일본군 군량미 지원한 ‘유신’나팔수”, 오마이뉴스, 2004.8.1; 반민족문제연구소, 「이선근: 역대 부도덕한 정권의 밑받침이 되어준 이론가」, 『청산하지 못한 역사 3』, 청년사, 1994; 서울신문, 1976년 6월 23일자, 1980년 8월 20일자)

25) 이경남,『분단시대의 청년운동』(하), 삼성문화개발, 1989, 224쪽;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466쪽

26) 자신의 직책은 다하지 않고 그냥 앉아서 녹만 타 먹는 것. 자신뿐만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을 겨냥한 이 말은 한동안 세간의 유행어가 되었다.

27) 중앙일보사 편, 위의 책, 129~130쪽

28) 중앙일보사 편, 131쪽

29) 중앙일보사 편, 136, 143쪽

30) 중앙고등재판장에는 병기감 심언봉 준장, 심판관에는 감찰관 안춘생 준장, 육군수도국장 김형일 준장, 작전국장 이용문 준장, 법무사에는 계철형 중령, 검찰관 김태청 중령, 검찰관보 김동섭 소령 등이 선임되었다(중앙일보사 편, 위의 책, 131쪽). 변호인단은 내노라하는 쟁쟁한 변호사들로 무려 10명이나 되었다. 엄상섭, 조주영 등 2명의 현역의원과 김달호, 전봉덕, 이병하, 이병용, 김훈채, 오완수, 한규용, 장후영 등 8명의 개업변호사가 가담했다(부산일보사, 위의 책, 213쪽).  

31) 중앙일보사 편, 143쪽

32) 연시중, 『한국정당정치실록 2』, 지와사랑, 2001, 20쪽; 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인물과사상사, 2004, 209쪽

33) 사형선고 후 한동안 형이 집행되지 않자 국민여론이 또다시 들끓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총애하던 김윤근만은 어떻게 하든 살리고 싶었으나 방법이 없었다. 형을 집행하게 된 것은, 이기붕 국방장관이 이 대통령에게 국민감정을 설명하면서 8.15 광복절 이전에는 사형을 시켜야 한다고 설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부산일보사, 위의 책, 2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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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소나무 (qnseksrmrqhr) 2017-01-05 13:16:59
소식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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