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과거사 청산은 근대 국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있었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으로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과거사 청산은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일로써 왜곡․은폐된 과거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사회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은폐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바로잡기 위한 과거사 청산 노력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통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아래서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여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가 계속되면서 그 성과가 희미해지고 있다. 

역사는 진실을 밝혔다고 해서 끝나서는 의미가 없다. 역사의 진실이 영원히 기억되지 않으면 역사의 정의는 없다. 진실은 공식 기록으로 표기되고, 교육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망각과의 투쟁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 권력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과 테러, 의문사, 고문에 의한 조작 등과 관련된 사건들을 되짚어 봄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고자 한다. / 필자 주

 

11사단 20연대의 토벌작전 전개 상황

11사단 9연대 3대대에 의한 거창학살 사건은 사건 직후부터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민주화 이후 가장 먼저 진상규명 활동이 가능해졌다. 거창사건과 동일한 부대에 의해 자행된 산청․함양의 경우도 거창사건의 조명과 함께 해결이 가능했다.

그러나 함평을 비롯한 호남지역에서 일어난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다소 시간이 지체되었으나 2005년 12월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마침내 그 진실이 역사의 전면에 드러날 수 있었다.

11사단 20연대 2대대 3중대가 전남 함평에서 대량의 학살사건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다른 부대들도 호남의 여러 작전지역에서 숱한 민간인 학살사건을 일으켰다.

11사단 20연대의 작전지역은 전남과 전북 일부지역(고창, 순창)이었다.

20연대 1대대가 담당한 지역은 전남 담양과 곡성, 전북 순창 등이었는데, 1951년 3월에는 3대대와 함께 화순 백아산 빨치산 토벌작전에도 참여했다. 2대대는 장성을 중심으로 전남 함평과 영광, 전북 고창 등지에서 작전을 수행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2대대 5중대가 함평 민간인 학살사건을 일으켰다. 2대대는 1951년 2월에는 1대대와 함께 전북 순창 회문산 빨치산 토벌작전에도 참여하였다. 그리고 3대대는 1950년 10월 중순 목포․무안을 거쳐 함평․영광 등을 수복하고 화순에 주둔하면서 인근지역에서 토벌작전을 벌였다. 20연대는 호남지역에서 6개월여에 걸쳐 토벌작전을 전개한 다음, 1951년 4월 9일 거창사건으로 문제가 된 11사단 대신 제8사단이 투입되면서 대구로 이동하면서 토벌작전을 끝냈다.(1)

호남지역에서 토벌작전을 벌이던 당시 11사단 20연대의 지휘관을 아래 <표>와 같다.

<표> 11사단 20연대 지휘관(1950.1.~1951.3.)(2)

직위

성명

계급

기 간

연대장

박기병

대령

1950. 10. 04.~1951. 03. 06.

박원근

중령

1951. 03. 07.~

1대대장

최형록

소령

1950. 10. 05.~1950. 10. 31.

이동근

소령

1950. 11. 01.~1950. 12. 25. / 1951. 01. 26.~

김용재

중령

1950. 12. 26.~1951. 01. 25.

2대대장

유갑열

소령

1950. 10. 05.~

3대대장

김필상

소령

1950. 10. 05.~1951. 01. 13.

최형록

소령

1950. 01. 14.~

그런데 20연대 작전지역은 조선노동당 전남도당의 관할지역과 대체로 일치하였다. 인민군 점령시기 전남도당은 광주에 설치되었으나 유엔군의 총반격으로 전황이 급변하자, 1950년 9월 25일 지하당으로 개편하라는 중앙당의 지시에 따라(3), 백아산 기슭의 화순군 북면에 당본부를 정하고 모든 당조직을 비합법 체제로 전환하였다.

10월 5일 전남도당 조직위원회는 인민유격대 전남총사령부와 6개 유격지구를 창설하는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유격지구란 지하로 잠입한 각 시․군당과 유격대의 원활한 지도와 연락을 위해 일정한 지역에 설치하는 연계조직으로 당부가 아닌 일정한 거점조직을 의미하였다. 6개 지구는 광주지구(무등산), 노령지구(담양군 추월산과 가마골), 유치지구(화순과 동나주, 장흥군 유치면 연봉), 불갑산지구(불갑산 용천사), 모후산지구(화순군 모후산), 백운산지구(광양시 옥룡면) 등이었다.(4)

11사단 20연대는 주로 전남유격대가 활동하던 지역을 대상으로 빨치산 토벌작전을 폈는데 그 과정에서 빨치산과는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이제부터 20연대의 활동을 중심으로 이 지역에서 일어나 민간인 학살 사건들을 간략히 정리해보자.

함평과 영광, 불갑산, 그리고 장성

1950년 10월 22일 11사단 20연대 3대대는 목포와 무안을 거쳐 함평군 수복작전에 나섰는데 함평읍의 주요 관문인 학교면 사거리에서 빨치산과 첫 교전을 벌였다. 토벌군은 교전 후 불갑산 방향으로 퇴각하는 빨치산을 추격하는 한편, 사거리 인근마을인 율동과 낙천동, 월산리 월봉․송산․신흥마을 등에서 청장년들을 색출하여 사살하였다. 이런 작전 방식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11사단의 ‘견벽청야’ 작전 지침에 따른 것이었다. 빨치산 치하 지역의 주민들을 적과 동일하게 간주하여 사살한 것이다.

다음날 3대대는 부대를 둘로 나누어 함평읍 수호리 대등마을과 해등마을, 대동면 향교리로 진출하였다. 이때 토벌군은 무작정 총을 쏘며 마을로 진입하여 주민들을 끌어내 대딴봉과 마을 앞에서 살해하였다. 10월 28일에는 나산면 월봉리 안영동에서 청장년 7명을 부역혐의로 인근 연주봉에서 총살하였다.(5)

20연대 3대대는 1950년 10월 30일 2대대와 함께 영광을 수복한 후 화순으로 이동하였다. 함평에는 11월 하순부터 1951년 1월까지 2대대 5중대가 해보면 문장에 주둔하면서 불갑산 인근의 빨치산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던 것처럼 그때 5중대에 의한 ‘함평 민간인 학살사건’이 벌어졌다. 5중대에 의한 함평지역 민간인에 대한 집단적인 학살은 1월 14일로 끝나지만 민간인에 대한 군의 불법적인 학살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2월 20일에도 20연대 2대대의 함평군 해보면 ‘불갑산 공비토벌작전’ 직후 인근 주민들이 군인들에게 총살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불갑산 용천사에는 당조직과 전남인민유격대 불갑산지구가 있어서 당간부들과 좌익단체 관련자들과 상당수 은거해 있었다. 거기다가 한국군에 의한 수복작전이 시작된 이래 2대대 5중대의 무차별적인 학살에 두려움을 느낀 주민들도 대거 산으로 들어와 있었다. 주민들 가운데는 좌익관련 가족들도 있었지만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과 군경의 무차별적인 살상을 피해 어쩔 수 없이 피신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6)

불갑산 토벌작전은 1951년 2월 19일 밤 11시경부터 시작되었지만 본격적인 작전은 다음날 새벽 2~5시 사이에 전개되었다. 이날의 작전에는 2대대 4개 중대와 연대 중포중대, 대전차중포중대, 수색소대가 동시에 투입되었다. 군인들은 작전이 끝난 뒤 용천사 인근에서 붙잡힌 일부 민간인들을 오두재 근처에 파놓았던 방공호로 몰아넣고 총살했으며, 확인사살까지 감행하였다. 현장에서 총살되지 않은 민간인은 불갑지서로 연행되었는데, 이들 중 15세 이상의 주민들은 ‘총살’로 분류, 2월 25일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 옴팍골에서 살해되었다.(7)

▲ 1950년 11월, 장성군 북일면 박산리의 철로 앞 비각에 숨어 있던 빨치산은 철로를 따라오던 국군을 저격한 현장. 철로는 없어졌으나 비각은 여전이 남아 있다. [사진출처 - 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0연대 2대대는 1950년 10월 19일 장성읍에 주둔한 다음, 면 단위로 토벌작전을 확대해 나갔다. 10월 30일 2대대가 삼계면 수옥리에서 작전을 펼치자 빨치산들이 “집에 있으면 군인들이 죽일 것”이라며 주민들을 선동하여 수련산 방향으로 끌고 갔다. 11월 11일에는 수색을 나왔던 5중대원 2명이 빨치산에 의해 살해되었고, 북이지서가 습격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2월 6일 이런 일들을 보복하기 위해 2대대 5중대가 나서면서 대대적인 주민들의 대량학살이 자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학도연맹원들에 의한 부역자 색출과 고문, 학살사건도 발생했다.(8)

12월 8일 장성군 삼계면 발산리에서는 군인과 죽창을 든 청년단들을 피해 산으로 피신했던 사람들이 학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7세였던 정문자는 어머니와 동생(4세)을 잃었는데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하였다.

“어머니가 동생을 업고 산으로 갔는데 산속에서 군인들이 손들고 나오라고 해도 나오질 않고 있다가 이를 본 군인들에게 그 자리에서 바로 총을 맞아 어머니는 즉사하고, 동생은 팔에 총상을 입었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내가 그 동생을 데리로 사창리로 피난을 갔는데 동생이 결국 며칠 안 지나서 죽어버렸어요. 총을 맞아서 그런지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바보가 되어버렸거든요. 그러니 죽을 수밖에 없었죠.”(9)

1951년 1월 27일에는 장성군 황룡면 통안리에서 마을주민들을 학살하였다, 토벌군은 그 이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렸다. 주민들이 마을을 떠나 피난을 가려했으나 빨치산이 나타나 방해하는 바람에 떠나지 못하고 불에 타나 남은 4채의 마을에 모여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자 군이 다시 나타나서 주민들을 산으로 끌고 올라가 살해했던 것이다. 현장에서 살아남은 박노준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하였다.

“군인들이 청방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저희 마을 주민 약 80여명을 한갓등이라는 산으로 끌고 갔다. 산에 올라가자 군인들이 주민들을 산중턱에 세 줄로 앉혀 놓은 상태에서 빨치산에 대한 협력 여부를 묻고 각 줄 앞에 군인들이 한 명씩 서서 한 줄씩 사격을 하였는데 그 와중에 나와 김요상, … 등은 살아남았다.”(10)

그런데 군인들은 확인사살까지 했다. 또 다른 생존자 김요상은 이렇게 증언한다.

“한 차례 사격 이후에 군인들이 ‘살아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라, 살려주겠다’고 하니까 여자 2명이 일어났고 군인들은 바로 그 2명을 쏘아 죽였어요. 그러고 나서도 세 번이나 더 ‘살아 있는 사람 있으면 나오라’고 했어요. 또 군인들은 죽은 사람들을 발로 차서 사망 여부를 확인했는데, 여자 한 분은 배에 나뭇가지가 있어 군인들이 몸을 밟으니까 ‘어매야’하고 소리를 내어 다시 총을 맞았지요.”(11)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천운’이었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삶과 죽음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다는 말이 사실일까?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일까?

1951년 1월 30일에는 빨치산이 불갑산으로 퇴각한 뒤,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 원촌마을에 진입한 2대대 군인들이 4세의 여자아이와 그를 업고 숨어 있던 53세의 노인 등을 사살하였다. 2월 18일에는 불갑산 토벌을 위해 장성에서 함평으로 이동하던 2대대 군인들이 가옥이 소각되고 주민들이 소개된 상태에서도 마을에 남아 있던 주민들을 총살하였다.(12)

<지도> 11사단에 의한 고창의 대규모 학살사건 발생지역(13)

 

담양지역에서

담양지역은 북쪽으로 순창군과 접해 있다. 담양의 북쪽 끝 용면 추월산 가마골은 순창군의 회문산과 연결되는 요충지로 이곳에는 전남 인민유격대 노령지구가 자리잡고 있어서 빨치산활동이 활발했다. 당시 상황을 알고 있는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군인들에게 쫓긴 인민군들이 순창이나 정읍으로 못 가고 모두 가마골에 집결하였고, 또 가마골로 피신했던 민간인들도 인민군들 때문에 산을 내려오지 못하는 바람에 가마골에 빨치산이 많아졌다.(14)

담양지역에서는 1950년 10월 15일부터 20연대 1대대에 의해 빨치산 토벌작전이 시작되었다. 담양에 진주한 1대대는 대대본부와 3, 4중대를 담양읍에 주둔시키고, 1, 2중대를 전북 순창으로 이동시켰다.

이 무렵 담양군 무정면 덕곡리에 빨치산 중대본부가 들어와서 50여명이 활동하고 있었다. 덕곡리는 동북으로는 전북 순창군 금과면, 동남으로는 곡성군 옥과면을 접하고 있고, 담양군 용면 가마골과 화순군 북면 백아산과도 연결되는 요충지였다. 제20연대 3대대장 김필상에 의하면 “1950년 10월 중순에 곡성군 옥과면에서 11사단 김용주 대령이 미군과 함께 빨치산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였”으며, 마을에 주둔하던 빨치산에 의해 여자와 아이까지 포함된 경찰가족 7, 8명이 살해, 매장하는 일도 일어났다.

이에 20연대 1대대는 무정면 덕곡리 빨치산 토벌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10월 30일 마을청장년 9명을 빨치산 혐의로 살해하였다. 당시 15세로 사건 현장을 목격한 이춘백은 이렇게 증언하였다.

“오전 7시경부터 마을 주변으로 포가 떨어지고 8시경부터는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어요. 이윽고 9시경에는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왔어요.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사방을 다 포위하지는 않고 순창으로 넘어가는 고개는 열어놓았어요. 그래서 마을에 있던 빨치산과 부역자들은 마을 뒷산과 서흥리를 지나 순창 쪽으로 도망갔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마을에는 아무런 죄가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만 남아 있었는데,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와 집에 있던 청장년 남자들을 마을 앞 모정으로 끌어내고는 구타를 하다가 마을 주변으로 데려가서 총살했습니다.”(15)

▲ 1950년 11월 7일 11사단 20연대 1대대 4중대가 부역혐의자 40여 명을 공개처형한 담양읍 추성경기장 건너편 현장. [사진출처 - 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1월 7일에는 제20연대장 박기병이 담양읍 추성경기장에서 주민들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한 다음 부역혐의자에 대해 공개처형을 실시하였다. 『담양군지』(1980)는 그 사실을 “동년(1950년) 음력 9월 27일(양력 11월 6일(16)) 공산당 악질분자 49명을 검거하여 담양공설운동장에서 주민들을 집결시켜 그들의 죄상을 낱낱이 공개하고 공설운동장 건너편 산기슭에서 당시 주둔군인 제20연대 (1대대) 4중대에게 공개 총살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40여명이 빨치산 혹은 부역자라는 이유로 총살되었던 것이다.

11월 10일에는 담양군 대덕면 운산리․갈전리와 화순군 북면 맹리의 주민들 50여명이 제20연대 3대대 12중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담양군 대덕면 운산리와 갈전리, 화순군 북면 맹리는 모두 동북쪽으로 당시 전남 인민유격대 총사령부가 있던 백아산으로 이어지는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토벌군은 점심 무렵 운산리 산정마을에 도착, 주민들을 불러 모은 다음, 인민위원장 가족 4명과 여맹위원장 출신을 총살하였고, 이어서 마을청년 16명도 총살하였다. 군인들은 산정마을 아래의 저심마을과 하갈마을, 건너편 맹리 월곡마을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지도> 담양군 대덕면․화순군 북면 사건 지도(17)

▲ (1)~(8): 12중대의 이동경로 [1]~[2]: 빨치산의 이동경로 ●: 민간인 피해발생장소

이때 군인들은 선발대로 1개 분대 규모를 인민군으로 위장시켜 먼저 보냈다. 당시 11세의 소년으로 사건 현장을 목격한 정문기씨는 그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오후 3~4시경, 갑자기 1개 분대 규모의 인민군 복장에 인공기를 총에 매단 사람들이 집으로 들어와서는 수색을 하면서 부친(정보순, 당시 38세)에게 ‘동무는 아주 대장을 할 만하네요!’라고 말하면서 포박을 하여 마을 앞으로 데리고 나갔고, 부친을 포함한 주민들에게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라고 강요하며 구타를 했는데, 그중 일부 주민은 끝까지 만세를 안 부르려고 했지만, 주민들이 보기에 분명 인민군인 것 같고 또 구타와 위협이 있고 그러니 안 죽으려는 생각에 만세를 부를 수밖에 없었죠. 근데 끝까지 만세를 부르지 않았던 몇몇은 그날 죽지 않고 살아났던 걸로 기억합니다.(군인들이 갈전리와 월곡에서 인민군복을 갈아입고 주민들을 속였는데, 몇몇 군인들은 몰래 태극기를 주민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 주민들은 끝까지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고, 그래서 안 끌려갔다 한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저의 부친이 먼저 총탄에 맞으셨습니다. 저의 조부님(정충래, 당시 74세)은 당신의 자식이 죽는 모습을 보면서 그 사람들에게 항의를 했고, 그래서 결국 조부님도 부친의 뒤를 이어 그 사람들의 총에 목숨을 잃었습니다.”(18)

1951년 2월 11일에는 제20연대 3대대 10중대가 담양면 남면 무동리에서, 3월 18일에는 제20연대 1대대가 담양군 남면(현 창평면) 외동리에서 각각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외동리에서는 군인들이 마을에 불을 질러 불태우는 바람에 맹인 1명과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 1명은 집에서 나오지 못한 채 불에 타 죽었다.(19)

화순과 나주, 남원에서

화순지역에는 북쪽 북면의 백아산에 조선노동당 전남도당본부와 빨치산 전남총사령부가 자리잡고 있었다. 남면과 동복면에 걸쳐 있는 모후산에도 모후산지구가 들어서 있었고, 남서쪽의 청풍면과 도암면에 걸쳐있는 화학산과 국사봉, 나주 다도면, 장흥 유치면 등에 유치지구가 있었기에 빨치산 활동이 매우 활발했다.

화순지역 수복작전은 1950년 10월 4일 화순경찰이 화순읍에 진주하면서 시작되었지만 본격적인 수복작전은 11월 초순 11사단 20연대 3대대가 화순에 투입되면서였다. 3대대의 각 중대가 동복면, 이서면, 이양면, 남면에 주둔한 다음 수복과 토벌작전을 펴기 시작하여 12월 말에는 북면, 남면 일부, 도암면, 청풍면, 그러니까 백아산과 모후산, 화학산 등의 빨치산 집중지역을 제외하고는 어느 정도 치안을 확보할 수 있었다.(20)

한편, 백아산과 모후산, 화학산 등과 유치지구에 대한 토벌작전은 1951년 2월~3월에 20연대 1대대와 9연대 2대대가 합류하면서 본격화되었다. 하지만 3개 대대를 동원하고도 이 지역을 완전히 수복하지 못한 채, 4월 8일 제8사단에 임무를 넘겨주어야 했다. 백아산의 빨치산이 최종적으로 전멸한 것은 1955년 3월이었다.(21) 그만큼 이 지역의 빨치산 활동이 격렬했다는 이야기다. 결국 그 때문에 토벌작전 과정에서 주민들의 희생도 컸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20연대 3대대에 의해 발생한 최초의 학살사건은 1950년 11월 17일이었다. 당시 화순읍에 주둔하고 있던 토벌군은 광주로 이동 중 화순과 광주의 경계지점 너릿재에서 빨치산의 습격을 받아 대부분 전사했는데, 살아 돌아온 군인들은 화순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던 30여명의 부역혐의자를 다지리 인근 저수지로 끌고 총살하였다. 빨치산에 당한 분풀이를 무고한 비무장 민간인에게 한 것이다.

11월 20일에는 이서면 서리에서 주민 12명을 학살했는데 이 또한 빨치산의 습격으로 입은 피해에 대한 보복이었다. 11월 15일 3대대 군인들이 차량 4대를 끌고 화순읍에서 묘치재를 넘어 동복면으로 이동하다가 묘치재에서 습격을 받아 1명을 제외하고 전원이 사망했던 것이다.

보고를 받은 3대대는 보복으로 ‘묘치재 너머 첫 마을’을 찾아서 떠났다. 그런데 동복면에서 묘치재 너머 첫 마을은 경치리이고, 화순읍에서 묘치재 너머 처 마을은 이서면 서리였다. 보복을 위해 출동한 토벌군은 경치리가 아닌 이서면 서리에서 일을 벌였다. 이 또한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빨치산과의 교전이 많고 치열했던 화순에서는 특히 보복 학살이 많이 일어났다. 3대대 12중대는 12월 10일 와천리 사천․와천마을에서 끌어낸 청년들을 근처의 ‘난드리고개’에서 살해하였고, 12월 25일에는 북면 임곡리 임곡마을에서 마을을 불태우고 청장년들을 살해하였다. 또한 1951년 2월 7일에는 3대대 9중대가 남면 주산리 주산마을에서 토벌군을 피해 뒷산으로 피신하는 주민들을 향해 총과 포를 쏘아 살해하였다.(22)

▲ 1950년 10월 빨치산 전남도당본부는 화순군 북면 백아산 용촌으로 이동하고, 인근 수리 새목에는 총사령부가 들어선다. 사진 속의 마을이 백아산 남쪽 기슭의 용촌마을이다. [사진출처 - 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상반기조사보고서]

2월과 3월에는 집중적인 토벌작전이 펼쳐졌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2월 20일경 전남도당 본부가 위치하고 있었던 북면 용곡리 용촌마을이 소각되었다. 그 이전 북면지역 24개 마을이 대부분 소각되고 주민들이 살상되는 피해를 입었다. 한편, 3월 중순에는 남면 유마리에서, 3월 17일에는 도암면 도장리와 동두산마을에서, 3월 하순에는 백아산 북쪽인 북면 송단리에서 마을이 소각되고 주민들이 살상되었다.(23)

<지도> 1951.3.23. 화순군 북면 백아산 소탕전 지도(24)

 

20연대 3대대는 1950년 12월 22일에는 나주군 다도면 판촌리 고마․동판마을에서 토벌작전을 벌이며 주민들을 향해 마구 총질을 하였다. 나주에서도 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이 있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1951년 1월 20일 20연대 2대대의 세지면 동창교 학살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60년 5월 24일자 <전남일보>의 보도로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신문기사는 “1951년 1월 20일 낮, 영산포 쪽에서 국군 화랑부대(11사단) 1개 중대가 입성하여 약 200명의 남녀노소를 동창교 밑 만봉천 개천가에 모아놓고 군경가족을 제외한 뒤 청장년 138명을 골라내 사살하였다”(25)고 보도하고 있다. 이 사건의 가해자는 함평 학살 사건에서 악명을 떨친 권준옥 대위가 지휘한 20연대 2대대 5중대였다.(26)

<지도> 나주군 다도면 일대 소탕전 지도(27)

 

1951년 3월 19일에는 나주군 다도면 도동리 척동마을과 신기마을 주민들이 군의 토벌과정에서 학살되었다. 또한 6월 24일에는 경찰에 의해 문평면 국동리 동막골에서 주민 30여명이 학살되었는데 그밖에도 여러 곳에서 경찰에 의해 토벌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28) 순창과 남원에서도 11사단의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다.(29)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집단학살 사건

호남지역을 비롯한 빨치산 토벌작전은 11사단과 교체한 8사단에 의해서도 계속되었다. 11사단이 활동하면서 벌인 것처럼 대량의 민간인 학살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 뒤에도 불법적인 민간인 학살은 소규모로 계속되었다. 이승만 정부와 군부의 대민인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은 한 불법적인 행위는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터에서는 평상시와 같은 수준의 인권보호를 기대하는 것은 이상론일 수 있다. 토벌작전을 펴는 군인들도 항상 빨치산의 습격에 따른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했고, 때로는 동료의 희생 앞에서 감정적으로 격앙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전쟁터라고 해도 생명에 대한 존중 의식은 확고해야 한다. 내 목숨이 소중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목숨도 소중한 것이다. 만일 그런 사고를 하지 않는다면 총을 든 군인들이 인간의 목숨도 파리목숨처럼 취급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한 위험성 때문에 전쟁범죄에 대한 국제협약이 존재하고, 비무장 민간인의 생명을 보호하도록 규정한 국제법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6.25전쟁 중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한국군은 그러한 국제적 협약과 국제법 규범을 지키지 않았다.

후방지역 토벌작전을 전담하기 위해 만든 11사단의 범죄행위는 앞에서 수도 없이 확인했다. 그런데 학살행위는 교체되기 직전까지도 계속되었던 듯하다.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는 경남 산청군 외공리에서 최소 258명, 최대 276명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연령대는 대체로 20대 초반에서 30대 초반이 대다수를 차지하였으나 10여명의 여성과 1명의 어린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사를 통해 확인된 점은 이들 희생자들이 인천과 서울 등에 소재하는 학교 교복을 입은 사람들도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일부는 서울, 경기지역에서 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파악되었다. 따라서 이들 희생자들은 교도소 수감자 등과 같은 통일된 복장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그야말로 순수한 민간인 피난민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가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소정에서 발굴한 유해의 일부. 이곳에서 최소 268명, 최대 276명으로 추정되는 유해가 발굴되었다. 학살주체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1951년 2월~3월 수백 명의 민간인이 군인에 의해 골짜기로 끌려가 집단학살된 사실은 확인되었다.

이 집단희생의 가해자와 관련하여 1960년 5월 19일자 부산일보에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산청군 시천면 사(糸)리에서 본사현지특별파견취재부 발(發1)] 경호강 300리 물줄기가 5만 마일의 지리산 허리를 감돌고 있는 각 지역 산촌에서 최소한 1,300명의 주민학살의 비극이 밝혀졌다.
당시의 시천면 특공대장 김남준(金南俊, 41)씨에 의하면 이제 대로 드러난 참살사건은 …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점동부락 뒷산 소진골짝에는 84년(1951년) 3월 12일 하오 2시 피난민을 이민시켜 준다고 양민을 끌고 와 500명을 송두리째 생매장한 학살사건이 김종원이가 인솔해온 11사단 9연대 화랑부대에 의하여 감행된 것이 알려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300명의 부락 청년들을 인솔, 전투에 직접 참가했던 김남준씨의 산 증언이며, 84년(1951년) 3월 12일 상오 10시 쏟아지는 비를 무릅쓰고 1대의 장갑차를 앞세워 검은 ‘택시’에 몸을 실은 김종원이 세 ‘추럭’에 태운 군인들의 호위 아래 11대의 ‘버스’로 이곳에 끌고 와 비 내리는 하오 2시 사리에서 10(리) 떨어진 외공리 점동부락 뒷산 소징(소정) 골짜기에 몰아넣고 능선의 상봉에서 모포와 솥, 냄비까지 소지했던 부녀자와 어린이 등 500여 명을 총살하고 떠나갔다는 것이다.”(30)

그러나 이 기사 내용이 정확한지에 대해서는 확인하기 어렵다. 11사단 9연대는 이 사건이 발생하기 한 달 전 거창사건을 일으켜 이미 문제가 되고 있었던 상태였고, 경남지구 민사부장이었던 김종원이 직접 9연대를 인솔하고 학살사건을 지휘했다는 증언 또한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군부대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1951년 2월~3월경 한국군이 이 학살사건의 주체라는 사실은 증언과 발굴내용을 통해 대체로 확인되고 있다. 증언자들은 버스에 민간인 수백명을 태우고 와서 골짜기에서 집단으로 학살했다고 증언하고 있고, 발굴을 통해 학살자들이 카빈 소총을 소지하고 있는 잘 편제된 정규군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31)

백야사 창설과 ‘견벽청야’의 재적용

이와 같이 대규모 학살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킨 11사단이 교체되고 4월 6일부터는 8사단이 토벌작전을 진행하였다. 8사단이 토벌작전을 진행하는 동안에는 11사단처럼 무차별적인 대규모 민간인 학살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1951년 겨울부터 빨치산 세력을 완전히 궤멸시킨다는 목표로 백선엽을 사령관으로 하는 ‘백야사(Task Force Paik)’가 발족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백야사는 이른바 ‘쥐잡기 작전(Operation Rat Killer)’이란 이름의 토벌작전을 전개하였고 그 과정에서 민간인 희생이 대폭 늘어났던 것이다.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는 이승만의 후방안정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백야사를 승인하였으며, 그리스에서부터 자신의 휘하에 두었던 다즈(William Dods) 중령을 60명으로 구성된 미고문단의 선임자로 임명하여 백야사의 작전을 지원하게 하였다. 미고문단은 장비 지원과 함께 작전연락, 통신, 공중연락과 정찰, 심리전을 담당하였으며, 미극동사령부는 수백만장의 투항권유 전단(32)을 지리산 일대에 뿌렸다.

백야사 예하에는 수도사단과 제8사단, 서남지구전투사령부 등의 군과 함께 남원치안국 전방사령부, 태백산지구전투경찰사령부, 지리산지구전투경찰사령부가 배속되어 군과 경찰이 합동으로 작전을 폈다. 백야사는 육군본부 작전지시 113호에 의해 1951년 11월 25일 대구에서 진주로 이동하였고, 11월 26일에 서남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김용배 준장)로부터 서남지구 빨치산 토벌 임무를 인수하여 1․2․9경비대대, 107․110․117 예비대대 등을 인수하였는데, 예하에 배속된 부대 병력은 총 3만여 명에 달하였다.(33)

▲ 지리산지구 전적비. 거꾸로 선 역사의 현장.
▲ 어린아이를 구하고 있는 국군상과 민간인을 치료해주는 국군의 모습 조각. 그러나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허구다. 역사의 진실과 정의를 세우고 기억하는 투쟁이 필요한 이유이다.

백야사의 작전방식은 “국내 공산유격대를 격멸소탕하고 그들이 사용하는 물자와 보급품 일체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작전은 결국 토끼몰이식 방식을 채택하여 지리산을 포위한 3만여 병력이 산정을 향해 포위망을 좁혀 들어가면서 산간마을의 가옥과 시설을 모두 소각함으로써 빨치산이 거점으로 이용할 수 있는 근거를 완전히 제거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결국 앞서 문제가 되었던 11사단의 ‘견벽청야’ 작전을 또다시 도입한 것이었다.(34)

백야사는 1951년 12월 2일부터 1952년 3월 14일까지 총 4기에 걸쳐 작전을 실시하였다. 제1기 작전은 1951년 12월 2일부터 12월 14일까지로, “지리산을 남북으로 분할하여 남쪽에 수도사단을, 북쪽에 제8사단을 배치하여 지리산을 포위한 후 이들 부대를 기동타격대로, 기타 부대를 저지부대와 거점수비대로 하여 포위망을 압축하면서 빨치산의 근거지를 분쇄하고 반복수색으로 그 잔당을 색출, 격멸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어서 1951년 12월 16일부터 1952년 1월 4일까지 진행된 제2기는 운장산, 회문산, 백아산지구 등으로 분산된 빨치산을 근거지별로 각개격파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1952년 1월 4일부터 1월 31일까지 진행된 제3기는 지리산지구로 재잠입한 빨치산 토벌을 위해 지리산, 백운산, 덕유산에 전투부대를 동시에 투입하여 빨치산 잔당을 격멸하기 위한 작전이었으며, 마지막으로 1952년 2월 4일부터 3월 14일까지 진행된 제4기 작전은 백아산, 모후산, 조계산지구에 대한 소탕작전이었다.(35)

이와 같은 4기에 걸친 백야사의 작전 중 가장 많은 민간인 희생이 발생한 것은 1951년 12월 2일부터 12월 14일까지 진행된 제1기 작전이었다. 총 전과(사살 6,600명, 생포 7,115명)에서 보듯 당초 예상했던 빨치산 숫자 4천여명의 무려 4배가 넘었다. 이는 백선엽의 주장에 따르면 “공비들에 포섭된 비무장 입산자가 많았음을 입증”(36)하는 것인데, 여기서 ‘비무장 입산자’란 결국 대부분이 토벌을 피해 지리산으로 피신했던 일반주민을 뜻하며, 이들이 모두 백야사의 토벌대상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한 사건들도 모두 백야사 제1기에 발생한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경남 산청군 삼장면에서 1950년 겨울부터 지리산 일대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일가족이 1951년 초겨울 백야사 토벌군에 의해 학살되었으며,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에서도 1951년 12월 백야사 토벌군에 의해 마을이 소각되고 주민들이 소개되는 과정에서 총살되거나 불에 타 죽는 일들이 벌어졌다. 백야사의 작전 초기에 또다시 11사단의 ‘견벽청야’ 내지는 ‘초토화작전’이 반복되었던 것이다.(37)

한편, 백야사는 토벌작전과 함께 광주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하여 토벌과정에서 생포된 일반 주민들을 수용하였는데, 열악한 수용소 환경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추위, 장질부사(장티프스), 기아 등으로 사망하였다. 또한 백야사는 작전 기간 중 빨치산 귀순자 생포자를 중심으로 구성된 사찰유격대도 토벌작전에 동원하였다. 사찰유격대는 백선엽 등 만주군 출신의 항일유격대 토벌 경험이 활용된 것이기도 하였다.(38) 사찰유격대는 입산시 경험과 조직 정보 등을 이용해 토벌작전에 가담하는데 각 지역 경찰서장이 사찰유격대를 직접 지휘했다.

1950년 10월부터 1952년 3월까지 11사단, 8사단, 백야사 등 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과 경찰, 청년방위대, 우익청년단 등의 합동작전 등으로 빨치산 세력은 궤멸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까지 무고하게 살상되었다.

지금까지 토벌작전 과정에서 학살된 민간인 문제는 주로 11사단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지만 11사단 외에도 전국에 걸친 토벌작전과 각 지역에서 경찰에 의해 발생한 사건도 수없이 많았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토벌작전과 부역혐의 등으로 학살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지역이 없을 정도이다. 또한 토벌작전과 부역혐의 학살사건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 특징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전쟁을 두고 ‘톱질전쟁’이라고들 이야기한다. 한국군(유엔군)과 인민군(공산군)의 반복적인 정복과 재정복이 반복되면서 그 사이에 끼인 민간인들은 그야말로 톱질을 당하듯이 잘근잘근 잘려나갔다.(39) 그와 같은 한국전쟁의 특성 때문에 유독 민간인의 피해가 막심했다. 우리는 무고한 민간인의 인명을 무참하게 살상한 전쟁 범죄자, 범법자들을 기억함과 동시에 전쟁의 참혹함을 깨닫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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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진실화해위원회, 「전남지역(담양․․장성․화순․영광) 11사단 사건」, 167~168쪽

2) 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59, 1987, 930~933쪽; 보병 제20연대, 「부대역사일지」(1970), 35쪽;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167쪽

3) 김남식, 『남로당연구 Ⅰ』, 돌베개, 1984, 455쪽

4) 김영택,「한국전쟁기 남한 내 적색 빨치산의 재건과 소멸」,『한국현대사연구』제2집, 2003년 겨울, 132~134쪽; 진실화해위원회, 「전남지역(담양․․장성․화순․영광) 11사단 사건」,『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04, 2009, 166쪽

5) 진실화해위원회, 「함평수복작전 민간인희생사건」,『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02, 2008, 106~107

6) 진실화해위원회, 「불갑산지역 민간인희생사건」,『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03, 2009, 50~51쪽

7) 진실화해위원회, 「불갑산지역 민간인희생사건」(2008년 하반기), 58~62쪽

8) 진실화해위원회, 「전남지역(담양․․장성․화순․영광) 11사단 사건」(2008년 하반기), 205~206쪽

9) 진실화해위원회, 「전남지역(담양․․장성․화순․영광) 11사단 사건」(2008년 하반기), 208쪽

10) 진실화해위원회, 「전남지역(담양․․장성․화순․영광) 11사단 사건」(2008년 하반기), 225쪽

11) “그때 나는 느낌이 이상하여 뒷줄로 옮기는데 군인이 저에게 와서 개머리판으로 쳐 무릎을 구부린 채로 엉거주춤하게 있다가 바로 총소리와 함께 넘어졌는데 앞사람과 옆사람의 피와 살점들이 저의 온몸에 흥건하게 묻어 군인들이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위의 보고서, 225쪽)

12) 진실화해위원회, 「전남지역(담양․․장성․화순․영광) 11사단 사건」(2008년 하반기), 229쪽

13) 진실화해위원회, 「고창 11사단 사건」,『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008, 160쪽

14) 진실화해위원회, 「전남지역(담양․․장성․화순․영광) 11사단 사건」(2008년 하반기), 178쪽

15) 진실화해위원회, 「전남지역(담양․장성․화순․영광) 11사단 사건」(2008년 하반기), 170쪽

16) 담양군지는 11월 6일로 기록하고 있으나 유가족들은 11월 7일로 증언하고 있어 하루 차이가 있음.

17)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184쪽

18) 진실화해위원회,「전남지역(담양․장성․화순․영광) 11사단 사건」(2008년 하반기), 185쪽

19)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194쪽

20) 진실화해위원회,「화순지역 경찰에 의한 민간인희생사건」,『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04, 2009, 20~21쪽

21) 진실화해위원회,「전남지역(담양․장성․화순․영광) 11사단 사건」(2008년 하반기), 246쪽

22) 진실화해위원회,「전남지역(담양․장성․화순․영광) 11사단 사건」(2008년 하반기), 235~236쪽

23) 진실화해위원회,「전남지역(담양․장성․화순․영광) 11사단 사건」(2008년 하반기), 247~257쪽

24) 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59, 1987, 1137쪽;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256쪽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는 최소 74명의 주민이 학살된 사실을 확인하였다.

25) 진실화해위원회,「나주 동창교 민간인집단희생사건」,『2007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007, 284~286쪽

26) 진실화해위원회,「나주 동창교 민간인집단희생사건」, 293쪽

27) 진실화해위원회,「나주지역 민간인 희생사건」,『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04, 2009, 627~695쪽

28) 진실화해위원회,「순창지역 민간인희생사건」(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3); 「남원지역 민간인희생사건」(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 참고

29) 백선엽에 따르면 전단은 총 9백92만장으로 지리산을 하얗게 뒤덮을 정도였다.(백선엽, 『군과 나』, 대륙연구소, 1989, 226쪽)

30) 진실화해위원회,「서부경남(거창․함양․하동․산청) 민간인희생사건」,『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07, 2010, 267쪽

31)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266~268쪽

32) 백선엽에 의하면, 전단은 총 9백92만장으로 지리산을 하얗게 덮을 정도였다.(백선엽, 『군과 나』, 대륙연구소, 1989, 226쪽) 지리산에 숨어 있던 빨치산들은 이 전단지를 담배말이나 화장지로 잘 썼다고 한다.(백선엽/유광종기자 정리, [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69) 2기 토벌작전 개시, <중앙일보 북한네트워크>, 2010.9.7)

33) 진실화해위원회, 「경남 산청․거창 등 민간인희생사건」, 『2010상반기 조사보고서』05, 750쪽

34)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750쪽

35)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Ⅲ, 255~256쪽

36) 백선엽, 위의 책(1989), 229쪽

37) 진실화해위원회, 「경남 산청․거창 등 민간인희생사건」, 『2010상반기 조사보고서』05, 785~796쪽

38) 일제는 만주에서 항일유격대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귀순자를 앞세워 비밀아지트를 파괴하는 한편, 심리전 공작을 폈다. 이와 함께 일제는 조선인만으로 특별히 구성된 간도특설대를 조직하여 운영하였는데, 이 간도특설대에는 백선엽, 김백일, 송석하, 신현준, 김석범 등 한국군의 중추를 구성하는 주요인물들이 대거 참여하였다.(김효순, 『간도특설대』, 서해문집, 2014 참고)

39) 이와 관련해서는 박명림,『한국 1950 전쟁과 평화(나남출판, 2002); 김동춘,『전쟁과 사회』(돌베개, 2000)을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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