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보혁기자(bhsuh@tongilnews.com)


남북정상회담으로 물꼬를 트기 시작한 남북관계 개선 흐름이 인적, 경제적 측면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평화체제 수립 논의가 수면으로 부상하고 있다.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남북한은 이산가족 상봉, 각종 당국간 회담, 그리고 경의선 철도복구 사업 등 구체적인 화해 협력 조치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같은 조치들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크지만, 결국 분단상황을 대변하고 있는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대체를 핵심으로 하는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문제를 해결 과제로 부상시키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평화체제 수립과 관련하여 2+2 방식을 선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대통령은 지난 8월 24일 안보관계 장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앞으로 남북한이 한반도 평화체제에 합의하고 미국, 중국이 이를 지지함으로써 과거의 불행한 유산을 완전히 청산하고 평화공존과 교류를 이룩해야 한다"고 말했다. 6.15 남북공동선언 발표가 2개월 지나가는 시점에 열린 회의에서 김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이후 화해 협력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으나 남북한의 군사적 대결상태에 대해서는 아직 손을 못대고 있다"며 평화체제 수립에 강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이에 따라 앞으로 김대중 정부 후반 대북정책의 목표는 평화체제 수립 또는 그를 위한 긍정적 환경 조성으로 모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현정부의 이같은 입장은 남북한간 인적, 물적 교류 등으로 화해 협력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고 향후 남북관계를 통일지향적으로 만들어나가기 위해서는 평화체제 수립이 필연적이라는 판단에 근거하고 있다.

한편 남북관계 개선이 구체화되는 가운데 한-미 양국은 이같은 상황에 대응하는 군사동맹관계를 재확립하려는 움직임으로 지난 주를 분주하게 보냈다. 한미 양국은 지난 21일 제32차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와 20일 제22차 한미 군사공동위원회(MCM)를 잇달아 개최하여, 남북관계 진전에 따라 조성된 한반도 정세 인식과 북한의 군사력 평가 및 양국간 군사동맹관계의 강화 방안을 모색하였다.

여기서 양국은 남북관계 진전이 한-미간 확고한 동맹관계에 의해 가능했다고 평가하고 남북한간 긴장완화를 환영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의 군사력 감축 등 구체적인 조치들이 동반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이를 근거로 향후 한-미 동맹관계의 지속적 강화와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 입장을 재확인하였다. 이번 연례안보협의회를 마치고 윌리엄 코언 미 국방장관은 최근 남북간의 관계 개선으로 군사적 긴장이 완화되었다고 평가하면서도 북한의 화학, 생물학,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의 개발이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같은 점을 고려할 때 미국은 4자회담에서 평화체제 수립 논의를 희망하는 한국정부와 달리 북한의 군사력 감축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정보당국은 최근 남북간의 관계개선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는 북한의 재래식 무기 및 장단거리 미사일 개발로 군사적 위협에 처해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뉴욕타임즈>는 22일 주한미군 사령관, 국방정보국 관계자, 국방성 관리들이 공동으로 작성하고 코언 국방장관이 승인한 한 비밀보고서에서 북한의 군사력 위협이 다시 강조되었다고 보도하였다. 신문은 나아가 이 보고서가 남한정부의 대북정책 효과에 대해서도 의심하고 있다고 논평하였다.

이 신문에 의하면, 보고서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화해와 변화의 약속을 보여주었지만 근본적인 변화의 조짐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특히 북한내에서 "경제개혁, 개혁적 마인드를 가진 지도자, 군사력 감축, 반미선동의 감소와 같은 구체적인 증거가 거의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미 군사당국의 이같은 한반도 정세인식은 남북관계 개선을 원칙적으로 지지하면서도 최근 한반도 상황이 북한 군사력의 감축을 비롯한 한반도 긴장 완화로 연결되지 않고 있다는 판단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은 북한의 북-미 평화협정 체결 주장은 물론 남한정부의 2+2 방식의 평화체제 수립에도 소극적인 입장인 것으로 판단된다. 우리정부는 미국정부에 평화체제 수립 논의를 4자회담에서 할 것을 제의할 것으로 알려졌지만, 최근 일련의 한-미 군사 회담에서 미국측이 이와 관련하여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는 점도 이런 판단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김대중 대통령이 선호하는 2+2 방식의 평화체제 수립과 관련하여 한-미 양국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수립 방식에 앞서 이에 관한 논의 시기 조절이 더 우선인 것으로 보인다. 평화체제 수립에 관한 한-미간의 서로 다른 초점은 최근 남북관계 개선을 내심 다르게 바라보고 있지 않느냐 하는 추측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즉 우리정부는 관계개선를 평화체제 수립의 필요조건으로, 미국은 한반도 특히 북한의 대량살상무기의 제거 계기로 각각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한편 평화체제 수립의 실질 당사자의 한 축인 북한의 태도 역시 이 문제 해결의 향배에 큰 영향을 미칠 변수이다. 북한은 최근 구체적인 관계개선 양상에도 불구하고 이를 남한정부의 2+2 방식의 평화체제 구축과 직접 연결시키는 징후나 태도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북한은 최근 한-미간 군사회담에서 보이는 미국측의 대한반도 정세인식 및 북한 군사력 언급을 의식하여 주한미군 철수와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대체(조선불교도연맹 한성기 부장, 22일 평양방송)와 외세의 개입 중단(노동신문 23일 논설)을 촉구하였다.

이같은 일련의 북한 입장은 미국과는 평화협정 체결, 남한과에는 상호불가침선언이라는 북한의 일관된 논리에 기초해 있는 듯이 보인다. 또 지난 25-26일 제주도에서 처음 열린 남북 국방장관회담 공동보도문에는 경의선 관련 군사협력을 제외하고는 구체적인 긴장완화 조치가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그리고 정전협정 당사국 중의 하나인 중국은 현재 북한지역에 군대를 주둔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평화협정 체결에 직접 나서는 것에 소극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이는 북-미 평화협정 체결을 선호하는 북한의 요구이기도 하다.

결국 4자회담에서 2+2 방식의 평화체제 수립 논의 가능성은 단기적으로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일각에서는 점진적 기능주의 접근방법이 제시되고 있다. 즉 경의선 복구사업 등 남북간 구체적인 협력사업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접촉하게 될 군 당국간 상호 대화과정을 통해 군사적 신뢰구축을 높여나간다는 것이다.

실제로 경의선 복원사업 과정에서 군 병력이 지뢰 제거 및 도로 공사에 투입될 예정이다. 이때 남북한간에 상호 정보교류 및 협력을 위한 군 직통전화 및 군 당국자간 실무회담 등이 불가피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군 상-하위 차원에서 남북간 직접적인 접촉이 이루어지고 그 과정에서 오해와 불신이 해소되어 가면서 한 단계 높은 신뢰구축의 동기가 마련된다는 논리이다.

그리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대한 미국의 소극적인 태도가 나타난 이상 남북한간 신뢰구축의 고리를 마련하여 평화체제 수립 환경을 한반도 내에서 먼저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따라서 그 출발이 되는 제주에서의 1차 국방장관회담에 이어 11월 중순 북측 지역에서 열릴 2차 회담이 주목받는 이유 중의 하나도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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