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과거사 청산은 근대 국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있었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으로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과거사 청산은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일로써 왜곡․은폐된 과거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사회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은폐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바로잡기 위한 과거사 청산 노력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통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아래서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여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가 계속되면서 그 성과가 희미해지고 있다. 

역사는 진실을 밝혔다고 해서 끝나서는 의미가 없다. 역사의 진실이 영원히 기억되지 않으면 역사의 정의는 없다. 진실은 공식 기록으로 표기되고, 교육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망각과의 투쟁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 권력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과 테러, 의문사, 고문에 의한 조작 등과 관련된 사건들을 되짚어 봄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고자 한다. / 필자 주

 

유엔군의 총공세와 인민군의 전면 퇴각

1950년 6.25전쟁 발발과 함께 파죽지세로 남진을 계속하던 인민군은 7월 말부터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7월 말부터 8월 초 사이에 미군 주력부대가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시작했고 유엔사령부가 구성되어 지휘체계가 정비되었다. 7월 6일 인민군과 미군의 첫 조우에서 미군이 참패하면서 미군과 한국군은 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없었다. 인민군의 진격이 거침없이 계속되는 동안 한국군은 미국의 지원 아래 최저한의 저지전선을 펴면서 시간을 벌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사이 미국은 한국 전쟁에 필요한 지휘체계를 마련하고 지상군을 파견할 준비를 해나갔다. 7월 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한국에 파견할 유엔군사령부의 설치와 맥아더 사령관 임명을 결의하였다. 7월 12일 맥아더와 이승만 사이에 ‘한미대전협정’이 맺어지면서 한국군의 작전권이 미군에 넘어갔고 그에 따라 한국군도 맥아더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의 지휘체계에 편입되었다.

7월 26일 다른 유엔회원국 군대가 도착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유엔사령부가 구성되어 미군과 한국군에 대한 통합지휘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 사이 주한미군사령관 워커는 낙동강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였고, 7월 26일 전군에 낙동강 선으로 철수하도록 명령하였다. 낙동강방어어선은 금강-소백산맥 방어선이 돌파된 직후인 7월 17부터 검토되기 시작했다. 미 사령관 워커는 한국군과 주한미군, 그리고 증원부대의 역량을 전체적으로 분석한 다음, 낙동강선을 최후의 교두보로 하여 이 선에서 총반격을 실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주1)

8월 1일~4일 낙동강방어작전을 위한 이른바 ‘워커라인’이 구축되었다. 이를 계기로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북한 인민군과 유엔군(한국군과 미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유엔군은 마지막 남은 낙동강 남동쪽 부산과 대구지역을 완강히 지키면서 지상전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대규모 공군을 투입했다. 제공권을 장악한 미군은 전략지역과 보급선을 공격하여 인민군의 기동력을 떨어뜨리고 전쟁 수행능력을 약화시켰다.

8월 초까지 남한 지역의 90% 이상을 장악한 인민군은 8월 15일까지 부산을 ‘해방’함으로써 전쟁을 조기에 종결지으려 했다. 그러나 총사령관 김일성의 계속되는 독려에도 불구하고 인민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였다. 이 무렵부터 인민군은 점차 전력이 약화되기 시작한 반면, 유엔군은  미 제2사단과 제1임시해병여단 등이 속속 도착하면서 대대적으로 전력이 증강되었다. 거기다가 600대의 전차와 미 제7기동함대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고, 미 공군은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유엔군 병력은 8월 14만 1,808명에서 9월 1일에는 17만 9,929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전쟁 시작 무렵 13만여 명의 정규군을 확보하고 있었던 북한 인민군은 9월 중순에는 9만 8천명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전차는 100대 정도에 불과했고, 해군과 공군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게다가 보급선이 길어진 상태에서 미 공군의 계속되는 폭격으로 사람의 힘에 의존하여 야간에 보급품을 운반해야 했다. 전쟁 물자를 공급하기 위한 공업시설마저 파괴되어 전쟁수행 능력이 현격히 약화되었다.(주2)

9월 초순부터 유엔군의 대대적인 반격작전이 시작되었다. 9월 6일 미 공군기와 해군 함정은 목포와 군산에 무차별적인 폭격과 포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9월 13일부터는 포격은 인천을 향했다. 9월 13일~14일 이틀 동안 월미도를 비롯한 인천 해안 지역을 향해 대대적인 포격이 있었다. 이날의 포격으로 월미도 전체가 3센티미터나 낮아졌다고 할 정도로 대단한 포격이었다. 9월 15일 다시 한 번 집중적인 화력이 퍼부어진 다음, 오전 6시 30분 미 해병대가 월미도에 상륙하였다. 암호명 ‘크로마이트(주3) 작전(Operation Chromite)’, 즉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된 것이다.

이 작전에는 261척의 해군 함정과 미 해병대를 비롯한 7만 5천명의 병력이 동원되었다. 이를 방어하는 북한측 병력은 정규군과 학생, 민간자위대원을 모두 합쳐도 2만여 명 남짓했다. 인민군 주력부대는 부산 교두보 확보를 위해 낙동강전선에 집중되어 있었다. 인민군도 유엔군의 서해안 상륙작전 정보를 확보했지만 실질적인 방어선을 구축할 만한 전력을 배치할 여력이 없었다. 상륙작전에 대한 북한군측의 저항은 완강했지만 대규모 병력과 화력을 앞세운 미군의 진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은 부평, 김포를 공략하며 한강 도하 작전에 나섰고, 한편으로는 경인가도를 따라 영등포로 진격하였다. 9월 26일부터 서울을 공략하기 시작하였고 28일에는 광화문 정부청사를 점령하였다.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낙동강 전선에서도 유엔군은 총반격작전을 감행하였다.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기 위한 유엔군의 반격작전은 9월 16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처음 인민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완강히 지키려 하였으나 곧 무너지고 말았다. 반격 개시 1주일 만에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인민군의 기세는 완전히 꺾이고 말았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후방의 지휘․연락체계가 무너진 인민군은 압도적인 화력과 공중폭격을 앞세운 유엔군의 반격에 정신없이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유엔군은 9월 26일 이미 영동, 청주, 조치원 등을 탈환하였으며, 9월 30일 경에는 38선 이남의 주요지역을 대부분 회복하였다. 10월 1일 한국군은 최초로 38선을 넘어 북진을 계속하였다. 유엔군의 북진에 따라 전쟁의 양상은 또 다시 바뀌었다. 38선을 넘지 말 것을 경고하던 중국이 북한 정권이 위기에 빠지자 참전하였기 때문이다. 전쟁은 내전의 양상을 띠고 시작되었으나 유엔군과 중국인민해방군의 참전으로 국제전으로 변화되었다.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전황이 급변하였다. 그에 따라 북으로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과 좌익세력들은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9월 25일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는  인민군 전선사령부에 대한 퇴각 명령과 함께 모든 당 조직을 지하당 기구로 개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와 함께 각 지방당에 질서정연한 후퇴를 보장하고 지방당 조직을 규합하여 빨치산 투쟁을 시작하라는 임무를 내렸으며,(주4) 남한 전역에서 빨치산 유격대가 조직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한국 군경의 토벌 활동이 전개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이 숱하게 희생되는 일들이 벌어졌다. 

후방 토벌작전을 전담할 11사단의 창설

▲ 최덕신과 박정희. 후방지역 토벌작전을 위해 창설한 11사단장이었던 최덕신은 5.16쿠데타 직후 외무장관을 지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파죽지세로 인민군을 추격하며 북진하던 유엔군 앞에 중국 인민해방군이 등장하면서 전쟁은 새로운 국면이 접어들었다. 10월 19일 린뱌오가 지휘하는 제4야전군 제13병단 소속 6개군 18만 명이 조중 국경을 넘었고, 11월에는 제13병단을 지원하기 위해 산둥반도에서 만주로 이동한 제3야전군 제9병단 소속 3개군 12만명이 또 다시 국경을 넘어 장진호 부근으로 진출했다. 미군은 물량공세를 앞세운 채 계속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산악지역을 이용하여 공세를 펴는 중공군과 인민군의 합동공세에 말려들어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유엔군은 또 다시 남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고, 1951년 1.4후퇴와 함께 서울을 내주어야 했다. 그 사이 남한 내에서는 빨치산의 공세가 격렬해졌고 치안 또한 매우 불안해졌다.

당시 남한 내 빨치산의 전체 규모에 대한 정부의 공식 통계는 없지만 전남의 경우에만 ‘5만명이었다’는 주장도 있고, 정부도 국무회의에서 4만명이라고 판단한 기록(주5)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 수치는 인민군과 빨치산의 위험성을 과장하기 위한 추측에 불과하다. 한국군의 보고 내용에 의하면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적었다. 육군본부 기록에 따르면 1950년 10월 말 현재 38선 이남지역의 공비는 15,000명에 불과했고, 11사단 9연대가 지리산지구에서 작전을 할 당시 주변지역 공비는 무장 1,330명, 비무장 370명으로 모두 1,700명이라고 분석하고 있다.(주6) 결국 정부가 추정한 4만 명 속에는 ‘공비’ 또는 빨치산으로 불리던 인민군패잔병과 지방 민청대원, 자위대원 등의 토착 좌익세력, 북한에서 파견된 내무서원, 정치보위부원, 정치공작대원 등의 북한 정권관련자나 무장세력 뿐만 아니라 군경의 토벌을 피해 피난했던 일반주민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국 정부는 서울 수복 직전 후방지역의 빨치산 토벌작전을 전담하기 위해 11사단을 창설하여 제9연대, 제13연대, 제20연대를 각각 배속시켰다. 사단 사령부 직할대대로는 전차공격대대가 있었다. 11사단은 초기에는 육군본부 직할이었으나 정일권 참모총장은 1950년 10월 4일 육본작전 제207호로 지휘권을 미9군단에 이양하였다. 그러나 그 후 미9군단이 전방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북상하자 11월 3일부터 후방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제3군단에 배속되었고, 12월 14일부터는 다시 육군본부 직할로 소속되는 등 복잡한 경로를 거친다.(주7)

11사단이 후방지역 수복과 빨치산 토벌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사단장은 최덕신 준장이 맡았다. 그는 1950년 9월 25일 초대사단장 취임하였다. 최덕신은 일본군․만주군 출신이 주도하던 한국군에서 드물게 중국중앙군(국민당군) 출신이었다. 그의 부친 최동오와 장인 류동열은 임시정부에서 요직을 받았던 거물급 독립운동가였다. 최덕신은 중국공산당군 토벌작전의 경험에서 얻은 ‘견벽청야(堅壁淸野)’(주8) 개념을 빨치산 토벌 작전에 적용해 초토화작전을 폄으로써 많은 인명피해를 낳는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최덕신은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뒤 5.16 직후 외무부장관을 거쳐 1963년에 서독대사가 되었는데, 그의 서독대사 재직 중인 1967년에 중앙정보부가 현지 교포들을 납치하여 고문한 ‘동백림 사건’이 일어났다. 그 뒤 통일원 고문, 주 베트남 공사, 한국일보 사장 등을 지냈고, 1976년 미국으로 건너간 다음에는 박정희의 유신체제에 반대하여 반정부 활동을 하면서 친북한 인사가 되었다. 1986년에는 북한으로 넘어가 천도교 청우당 위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내다가 1989년에 사망했다.

▲ 1950년 12월 6일 아침 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 군인들이 들이닥쳐 주민들을 학살한 동촌마을 들머리(사진: 진실화해위원회)

11사단 산하의 9연대장은 김희준 대령(1951. 1. 22 이전)과 오익경 중령(1951. 1. 23 이후), 제13연대장은 유흥수 대령(1950. 11. 6 이전)과 최석용 대령(1950. 11. 7 이후), 제20연대장은 박기병 대령(1950. 9. 25~1951. 2. 28)과 박원근 중령(1951. 3. 1 이후) 등이 맡았다. 김희준, 오익경, 박기병 연대장과 거창사건 관련자인 9연대 3대대장 한동석 등은 일본군 출신이거나 제주4.3사건, 여순사건 등에서 토벌작전 경력을 가진 인물들이었다.(주9)

11사단의 경우, 창설 목적에 맞게 사단장을 비롯하여 연대장, 대대장 등의 고위지휘관들이 모두 일제시기와 해방 후 남한에서 토벌작전 경험이 있는 인물들로 채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토벌작전 경험이라는 것이 대체로 무차별적인 공격과 초토화 전술 등으로 빨치산과 민간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살상하는 행위와 연결되고 있다는 것은 일제의 독립군 토벌과 제주4.3사건, 여순사건 등에서 이미 확인되고 있다. 이런 경험을 가진 지휘관들로 채워진 11사단의 활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 지는 충분히 예상 가능하였으나 이에 대한 대책은 전혀 없었다.

11사단 예하의 연대들은 각각 전남(제20연대), 전북(제13연대), 지리산지구(제9연대)에 각각 분산 배치하였으며, 여기에 배속된 5개 경비대와 경찰, 청년방위대에게 주보급로와 주요시설 경계임무를 맡겼다.

제20연대는 1950년 9월 25일 경남 삼랑진에서 육군 제6훈련소를 개편하여 창설하였고, 10월 1일 장교 87명, 사병 1,500명으로 연대를 편성하였다. 10월 14일 진주하여 자리를 잡은 광주를 중심으로 전남 전체와 전북 일부를 작전지역으로 하였으며, 1951년 3월 31일까지 4기에 걸쳐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제20연대 제1대대는 담양, 곡성, 전북 순창 등을 담당했고, 제2대대는 장성을 중심으로 함평, 영광, 전북 고창 등에서 작전을 수행하였다. 1951년 2월 초에는 제1대대와 제2대대가 합동으로 순창 회문산 빨치산 토벌작전을 전개했다. 제3대대는 1950년 10월 중순 목포와 무안을 거쳐 함평, 영광 등을 수복하고 화순에 주둔하여 토벌작전을 벌였다.

제13연대는 제주 제5훈련소와 부산 제2훈련소로부터 사병을 보충받아 편성되었고, 1950년 9월 26일 진해에서 11사단에 배속되었다. 10월 18일 연대본부가 전북 남원으로 이동하였으나, 10월 24일에는 연대 전방지휘소를, 11월 6일에는 후방지휘소까지 전주로 이동하여 전북지역 토벌작전을 전담했는데, 주로 임실, 남원, 전주, 고창, 정읍, 무주 등에서 활동하였다, 13연대 제1․2대대는 10월 7일 진주를 거쳐 함양으로 이동하였고, 제3대대와 연대 본부중대는 10월 8일 진해를 출발하여 10월 10일 함양에 도착했다. 13연대는 빨치산 근거지와 이동경로를 따라 전북 각 지역의 토벌작전을 수행하다가 1951년 4월 8일 제8사단 제21연대와 교대하였다.(주10) 11사단이 무리한 토벌작전으로 대량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자 8사단으로 교체한 것이다.(주11)

제9연대는 1950년 9월 30일 대구에서 재창설되었다. 10월 6일 미군 25사단에 배속되어 경북 상주로 이동했다가 11월 20~21일 경남 진주로 이동하여 지리산지역 토벌작전을 전담하였다. 주 작전지역은 경남 산청, 함양, 거창과 전남 구례 등이었다. 제1대대는 12월 2일에는 함양-남원, 산청-함양의 도로와 통신망 확보를 위하여 출동하였고, 12월 7일에는 전북 남원에 도착, 인근지역에서 작전을 전개하였다. 제2대대는 순천과 광양, 하동지역에서 토벌작전을 폈다. 1월부터는 산청과 함양, 거창 등지에서 작전을 수행하며 민간인학살을 자행하였다.  

▲ <지도> 11사단 각 연대별 주요작전지역

11사단 20연대의 함평 민간인 학살

후방지역 빨치산 토벌을 전담하기 위해 창설한 11사단이 처음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곳은 함평이다. 함평 민간인 학살사건은 1950년 11월 말부터 1951년 1월 초순까지 11사단 20연대 3중대에 의해 일어났는데, 같은 11사단 9연대 3대대에 의해 일어난 산청•함양•거창 지역 민간인 학살사건(주12)이 일어나기 1개월 전에 발생했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바로 사회문제가 되었다면 거창과 함양•산청에서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 사건에 대한 사회적 방어기제가 작동하지 않으면서도 똑같은 방식의 학살사건이 반복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함평 민간인 학살사건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전남 함평군 해보면과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에 걸쳐 있는 해발 516미터의 불갑산은 한국전쟁 이전부터 여순사건 등에서 군경에 쫓긴 좌익세력들이 입산하여 무장투쟁을 벌였던 곳이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과 총반격으로 인민군이 밀려나면서 불갑산은 또 다시 빨치산세력의 거점이 되었다. 함평, 영광, 장성, 나주, 무안, 목포, 고창 등 인근지역에서 인민공화국 통치에 앞장섰던 좌익과 부역자, 그 가족과 동조자들, 그리고 그들이 필요해서 강제로 데려온 유지들로 불갑산과 모악산은 붐볐다.

▲ 멀리서 바라본 불갑산 모습. 불갑산은 함평민간인 학살사건이 일어났을 때 빨치산들의 주요 활동근거지였던 곳이다. ⓒ커버리지(정찬대)

불갑산과 모악산 일대는 봉우리들이 겹쳐 있고 골이 깊고 울창하며 면적이 넓어서 사람이 은신하기 좋은 곳이다. 이러한 지형적 이점 때문에 이곳에는 전남 서남지역의 각 군당과 무장빨치산세력들이 모여 ‘조선인민유격대 전남 불갑산지구 사령부’를 구성하였다. 특히 불갑산과 모악산의 경우는 지리산은 물론이고 백아산, 백운산 등지의 당․빨치산과도 연결하기 좋은 위치여서 한때 노동당 전남도당과 조선인민유격대 전남사령부가 설치되기도 했다. 불갑산과 그 주변에는 빨치산과 당 본부들뿐만 아니라 피난민들까지 들어와 있어서 상당한 숫자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갑산 주변에서 활동하고 있던 빨치산들은 한국군의 토벌작전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보급품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다. 빨치산과 좌익세력들은 한국군의 토벌작전에 맞서 한국군 부대와 경찰지서 등을 습격하여 실탄과 무기를 확보하고 동시에 주변 마을 등에서 주민들로부터 식량과 부식을 탈취하는 등의 보급투쟁을 벌였다. 이렇게 되면서 이 지역은 밤에는 좌익, 낮에는 우익이 지배하는 양상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낮에는 군경의 요구에 따라 주민들은 도로보수공사나 땔감 사역에 동원되었고 밤에는 경찰지서의 경비를 위한 보초를 서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주민들은 무장을 한 채 한밤중에 들이닥쳐 총을 들이대며 식량을 요구하며 괴롭히는 밤손님(빨치산)에게도 협조하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이처럼 밤낮으로 바뀌며 주민의 생명을 담보로 한 군경과 빨치산 사이에 끼인 주민들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대규모 민간인들이 학살되는 비극적 상황이 연출되었다.

1950년 12월 6일(음 10월 27일) 새벽 동틀 무렵, 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 군인들이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장교마을(속칭 진다리)과 동촌마을을 향해 총을 쏘며 접근해왔다. 먼저, 7가구가 살고 있던 장교마을에 20여명의 군인들이 들이닥쳐 집집마다 불을 지르면서 주민들에게 “살고 싶으면 마을 앞으로 나오라”라고 소리쳤다. 사람들은 군인들의 협박과 강요에 집에서 쫓겨나와 마을 앞 논바닥에 웅크리고 모여 있었다. 그런데 이때 군인들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느닷없이 기관총 사격을 하여 주민들을 학살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이때 학살된 피해자 수는 최소 9명에서 22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무차별적인 총격과 함께 확인사살까지 끝낸 군인들은 같은 시각 학살 작전이 진행되고 있던 인접한 동촌마을로 향했다.(주13)

동촌마을은 80여 가구가 살고 있던 큰 마을이었다. 장교마을에서 학살사건이 시작될 즈음 5중대 또 다른 군인들은 장교마을과 서촌, 고실마을의 세 방향에서 동촌마을로 진입하였다. 군인들은 역시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불을 지르고 큰 소리로 주민들에게 동네 앞으로 모이라고 소리쳤다. 군인들은 동네 앞에 모인 주민들 가운데 여성과 어린이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논으로 몰아넣고 총살하였다. 남은 주민들에게는 성냥을 나누어 주며 미처 타지 않은 마을 집에 불을 붙이라고 내몰기까지 하였다.

“80여 가구쯤 되는 동촌마을은 온통 불바다가 되었다. 대부분 초가집인데다가 초겨울 가움이 계속되던 때라 지붕이 바짝 말라 있어 비록 눈이 쌓여 있었지만 불을 대기가 무섭게 활활 타올랐다. 추수 후 미처 타작을 못한 채 마당에 쌓아놓은 볏가리에도 예외없이 불이 붙었다. 어느 할머니는 불과 몇 분 후 자신의 운명이 어찌될지도 모른 채 ‘먹고 살아갈 볏단에는 왜 불을 지르느냐’고 악을 써댔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주민들은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이집 저집에서 빠져나와 군인들의 지시에 따라 마을 앞길 아래 논바닥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50대, 60대의 노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가끔 할머니와 어린이도 끼어 있었고, 5,6명의 부녀자도 섞여 있었지만 젊은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일부 젊은이들은 마을 뒤로 달아나 버렸고 부녀자들은 불이 붙어 있는 집에서 살림살이를 끄집어내야 한다면서 나오지 않아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이들 앞에 하사관과 장교로 보이는 사람이 나타났다. 논바닥보다 약간 높은 길이나 논두렁 위에 선 그들은 주민들에게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느 장교가 부하에게 무어라고 외치는가 싶더니 ‘따따따’ 기관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논바닥에 서 있는 주민들을 향해 총탄이 일제히 발사된 것이다. 마을 주민들은 머리와 가습에서 피를 뿜으며 모두 쓰러졌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 장교의 명령을 받은 10여명의 사병들은 쓰러져 있는 시체 사이를 돌아다니며 발로 툭툭 차보고 꿈틀거리면 다시 총을 쏘아댔다.”(주14)

장교마을에서 총소리가 들려오자 몇몇 청년들은 마을 뒤로 도망갔다고 한다. 주민들은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은 며칠 전 마을 뒤에 있는 한새들 앞에서 발생한 5중대와 빨치산 사이의 전투 때문이라고 증언하였다. 이 전투에서 5중대 군인 2명이 사망했는데, 5중대장 권준옥 대위는 전사자를 화장하면서 병사들 앞에서 복수를 다짐했다고 한다. 더욱이 학살사건 전날인 12월 5일에는 좌익세력들이 마을 뒷산 고개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꽹과리를 치며 만세를 부르는 등 ‘한새들 전투’의 승리를 자축하며 소동을 피워 군인들을 자극하였다.(주15) 이날 동촌마을에서 학살된 민간인은 33명으로 추정되고 있다.(주16) 인접한 서촌마을에서도 주민들이 여러 명 학살되었다.

▲ <지도> 함평11사단 사건 발생지역(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장교, 동촌, 서촌마을 등에서 각각 ‘작전’을 끝낸 5중대는 해보-장성 간 24번 도로를 따라 월야면 계림리 죽림마을과 장성군 삼서면 수해리 방향으로 나아갔다. 군인들은 수해리 2구 신죽마을 앞에서 20대에서 40대의 남자들을 선별하여 3열로 정렬시킨 후 총살하였다. 사건이 일어난 신죽마을과 월곡, 양현 마을 등 70여 가구 가운데 절반이 불에 탔으며, 신죽마을의 경우는 거의 모든 집들이 불에 탔다. 심지어 군인들은 월야면과 삼서면 경계에 있는 대도천에서 마을주민에게 냇물을 업어서 건너게 해달라고 해놓고 물을 건넌 다음에는 군인들을 업어준 주민 2명을 총살했다.

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에 의한 주민학살의 전조증상은 이 사건 이전에 이미 일어나고 있다. 1950년 11월 27일 광산군 본량면 덕림리(지금의 광주시 광산구 덕림동) 주민 7명이 사전신고를 하지 않고 함께 모여서 새끼를 꼬면서 변소에 빠져 죽은 노루고기를 삶아 먹고 있다가 5중대원들에게 연행되어 학살되었다. 당시 계엄 아래서 3명 이상이 모이려면 어떠한 경우에도 사전에 군경에 신고를 해야 했다고 한다. 하지만 빨치산과 무관한 시골 농민들이 마을에 함께 모여서 새끼를 꼬고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죽은 산짐승 고기를 먹다가 변을 당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주17)

50여일에 걸친 ‘죽음의 공포’

11사단의 함평 민간인 학살은 12월 7일에도 계속되었다. 20연대 2대대 5중대 군인들은 이른 아침부터 월야면 월악리 내동, 지변, 성주마을과 바로 이웃에 있는 월야리 순촌, 송계, 동산, 괴정 등 7개 마을에 들어가 전날과 동일한 방식으로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이 마을들은 월악산의 서남쪽 자락에 옹기종기 자리잡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동래 정씨와 진주 정씨가 집단으로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다. 군인들은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총을 쏘면서 동네를 포위하고 불을 지르며 주민들을 불러냈다. 군인들의 인솔 아래 주변 마을 사람들은 남산뫼로 모였다. 영문도 모른 채 모여든 500여명(주18)의 주민들 앞에서 선무공작대장 윤인식과 5중대장 권준옥이 일장연설을 했다. 이때 권준옥은 “너희들 같으면 도저히 시국을 안정해 나갈 수 없다. 너희들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주19)

▲ <자료사진>함평학살사건을 보도한 한국일보(1950. 5. 21)

이어서 군인들은 주민들을 나이에 따라 분류하였다. 17세 미만과 17~45세, 45세 이상, 그리고 군경가족으로 분리하였다. 먼저, 군인과 경찰가족 또는 유가족은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군인에게서 온 편지를 갖고 있는 사람도 나오라고 했다. 이때 정병우는 호국군(주20) 장교라고 신분을 밝혔다가 오히려 그 자리에서 총살당했다. 그는 증명서를 내 보이며 자신은 “방위군(호국군) 소위인데 후퇴를 못하고 이 마을에 숨어 있다가 여러분들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2킬로미터쯤 떨어진 월야면 계림리 시목마을 사람으로 집에 있으면 공비들에게 신분이 탄로날까봐 이 마을 처갓집에 숨어 있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권준옥은 ‘뒤로 돌아서’라고 명령한 뒤 그가 돌아서자 뒤통수에 두발을 쏘아 사살했다.(주21)

놀라운 일이었다. 왜 그는 미처 후퇴하지 못한 호국군 장교에게 그동안의 경과도 물어보지 않은 채 즉결처분했던 것일까? 이탈군인으로 보아서 즉결처분한 것일까? 어쩌면 자신의 위세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어 주민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살인에 도취되어 극도의 흥분상태에서 판단력을 상실한 것이었을까?

권준옥은 17세 미만과 45세 이상의 주민들에게는 마을로 내려가 아직 타지 않은 집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다. 군경 가족을 제외하고 이제 17~45세의 남녀 사람들만 남게 되었다. 구덩이처럼 움푹패인 곳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엎드려’라는 구령소리와 함께 병사들의 M1소총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불을 뿜었다. 3정의 기관총도 함께 불을 뿜었다. 사람들은 일제히 엎드렸으나 총알을 피할 수는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총을 맞고 쓰러진 상태에서 권준옥은 이렇게 외쳤다. “살아 있는 사람은 모두 일어나라. 여러분은 하느님이 돌봐서 살아있는 것이니 모두 살려주겠다.” 50여명의 주민들이 일어났다. 그러자 권준옥은 다시 ‘엎드려’ 소리를 외쳤고, 동시에 병사들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1차 확인사살이었다.

그런데 또 다시 권준옥이 외쳤다. “이번에는 꼭 살려주겠다. 살아있는 여러분은 진짜 명당집 자식이고 또 하느님이 돌봐준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일어나라.” 권준옥은 “정말 살려주겠다”는 말을 수차례나 반복했다. 한번 속았던 사람들은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반복되는 감언에 또 다시 10여명의 사람들이 일어났다. 그러자 권준옥이 외쳤다. “여러분은 진짜 하느님이 돌봐주신 것이니 살려주겠다. 동네에 빨리 가서 불을 꺼라.”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10여명이 사력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그때 그들을 향해 기관총을 불을 뿜었고, 한 사람도 도망하기 못하고 모두 쓰러졌다. 2차 확인 사살이었다. 그런 다음 중대장은 “살아있는 사람은 모두 확인해서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3차 확인사살이었다. 그 와중에도 생명이 붙어 있는 사람이 있었다. 사건 당일 유족 중 일부는 학살현장에서 시신을 수습하였고, 생명이 붙어 있던 몇 사람은 집으로 데려왔으나 치료를 할 수 없어서 대부분 사망하였다.(주22) 권준옥은 스스로 절대자 흉내를 내며 마을사람들의 목숨을 파리목숨처럼 죽였다.

▲ <자료사진>함평민간인 학살사건을 보도한 신문(1960년 5월 20일자 한국일보)

학살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2월 9일에는 5중대 군인들이 100여 가구가 살고 있는 함평군 월야면 외치리 외치마을과 함평군 나산면 이문리에서 주민들을 학살했으며, 12월 31일에는 함평군 해보면 대창리 성대마을에서 학살을 저질렀다. 이때 군인들은 청년방위대원을 시켜 총살한 시체를 방죽(못, 웅덩이)에 던져 넣기도 했다. 1951년 1월 12일에는 함평군 해보면 상곡리 모평마을에서, 1월 14일에는 나산면 우치리 소재마을에서 주민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때 소재마을 학살사건이 발생하자 이오섭 나산면장이 강력히 항의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오섭 면장은 소재마을 학살사건 소식을 들은 다음, 이대로 가면 더욱 큰 화가 면 전체에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권중옥 중대장을 찾아가 항의하고 나섰다. 그는 함평경찰서 나산지서장 나병오 경위를 설득하여 그와 함께 경찰과 청년방위대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도보로 8킬로미터 떨어진 5중대 본부를 찾아갔다.

“나는 나산면 면장입니다. 어제 화를 입은 우리 소재마을 주민들은 아무죄도 없습니다. 좌익도 우익도 아닌 선량한 백성들입니다. 죽임을 당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면민들을 죽이려거든 차라리 나를 죽이십시오. 면민 없는 면장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주23)

면장의 항의에 권 대위는 버럭 화를 내면서 권총을 빼어들고 “건방진 자식, 쏴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이 면장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고 외쳤다. “쏠테면 쏘시오.” 그러자 중대장과 다른 군인들이 합세하여 이 면장을 군홧발로 짓밟고 주먹으로 치는 등 뭇매를 때렸다. 나아가 군인들은 나병오 지서장이 차고 있던 권총까지 빼앗았다. 그러나 목숨을 건 이면장의 항의사건은 함평군에서 자행되던 11사단 군인들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제동을 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주24)

▲ 대량학살이 일어난 현장인 지변마을 건너편의 남산뫼 모습ⓒ커버리지(정찬대)

이 무렵 빨치산 토벌작전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는 점도 있겠지만 나산면장의 항의는 군 당국에 자성의 계기로 작용하였다. 40일 동안 함평군 월야면, 해보면, 나산면 등 일대를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제5중대의 학살행위는 이후 멈춰졌다. 더욱이 이 일이 있은 지 8일 후인 1월 23일에는 제5중대장 권준옥이 연대 병기장교로 옮겨가고 이영오 중위가 새 중대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이후 ‘공포의 5중대’는 불갑산 작전에 투입되는 1951년 2월 20일까지 단 한 건의 민간인학살사건도 일으키지 않는 ‘얌전한 5중대’로 돌변하게 된다.(주25)

1950년 11월 말부터 1951년 1월 중순까지 사이에 함평군 인근에서 학살된 민간인 숫자는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의하면 최소 249명이다. 함평군의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262명으로 비슷하게 접근한다. 그러나 1960년 제4대 국회의 「양민학살진상조사보고서」에서는 524명으로 집계되어 차이가 크다. 제4대 국회의 조사가 단 하루만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사건이 일어난 지 9년만에 이뤄진 조사라는 점에서 가장 근접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국회조사의 원자료 등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정확한 근거를 확인하기 어려운 난점이 있다. 다만 당시의 국회 속기록을 바탕으로 마을 단위의 피해자를 합친 전체 피해자 규모는 607명으로 늘어나는 것은 확인이 된다. 따라서 11사단에 의한 함평 민간인 학살사건의 희생자 수는 최소 249명에서 최대 607명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주26)

함평 민간인 학살의 책임자들

1950년 11월 27일부터 1951년 1월 14일까지 사이에 전남 함평군 해보면, 월야면, 나산면과 광산군 본량면, 장성군 삼서면 수해리 등지에서 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 군인들에 의해 학살된 사건을 보통 ‘함평 민간인 학살사건’ 또는 ‘함평 11사단 사건’ 등으로 부른다. 이 함평 민간인 학살사건은 그 후 같은 11사단에 의해 벌어지는 경남 거창과 산청․함양 등지의 민간인 학살사건의 전초전이었다. 만일 이 사건이 ‘거창사건’처럼 처음부터 널리 알려져 문제가 되었다면 그 다음 학살사건을 방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런 일을 일어나지 않았고, 이 사건의 가해책임자들은 누구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

▲ ‘함평 민간인 학살’ 사건의 증인 김일호씨의 자필증언. 그는 5중대장의 연락병을 지냈다.(ⓒ함평사건희생자유족회)

함평학살 사건의 직접적인 가해자는 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중대장 권준옥 대위)이다. 같은 2대대 소속인 6중대와 비교하더라고 5중대는 규율도 미약했고 통제도 잘 되지 않았을 정도로 문제를 안고 있었다. 특히 민간인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5중대장 권준옥은 오히려 앞장서서 이 학살사건을 주도하며 가히 광적인 학살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었다. 중대장 권준옥과 일부 병사들은 부녀자에 대한 성폭행으로 원성이 자자했을 정도로 그 전부터 문제를 일으켰으며, 주민들의 생명을 파리 목숨처럼 쉽게 빼앗는 범죄행위를 일삼았다. 권준옥은 남산뫼 사건에서 젊은 여자를 연행하는 것을 막는 아버지를 총살하였고, 결혼을 앞둔 처녀를 성폭행한 다음 총살하기도 하는 등 인간으로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행위를 거리낌 없이 저질렀다.(주27)

그러나 이 사건에서 5중대장 권준옥이 이처럼 잔혹한 행위를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저질렀던 것은 상부의 비호, 묵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11사단장 최덕신은 빨치산토벌과 관련한 사단작전에 대해 중국 고대부터 내려오던 이른바 ‘견벽청야’를 사단작전으로 언급했는데 이는 아래로 내려가면서 ‘빨치산이 출몰하는 지역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일선에서 토벌작전을 벌이던 하급지휘관들은 사단장의 이 같은 언급과 이를 받아들인 상부의 지시가 빨치산 출몰 지역 주민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는 것을 용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5중대 주변에서 활동했던 경찰과 병사들의 다음과 같은 증언에서 그런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주28)

“사건 전에 작전회의에는 3번 정도 참석하였으며, 한번은 월야와 삼서면 경계지역에 작전회의에 참석했는데, 대대에서 내려온 공문을 보고 중대장이 공산주의자라고 인정하고 부역을 한 사람은 무조건 50명씩 죽이라고 했는데, 결국은 덮어놓고 죽이라는 얘기였습니다.”

“5중대 군인들이 이발소에 와서 자신들이 주민들의 집에서 금반지, 분첩 등을 가져왔다고 자랑삼아 이야기하였으며, 이중 분첩은 이발소에 주고 가곤 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전이었는데, 5중대 군인들 간에 어깨에 힘을 주고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 내용은 상부로부터 하루에 공비 50명씩을 죽이라는 지시가 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함평 사건의 지휘체계는 사단장 최덕신, 연대장 박기병, 대대장 유갑열, 중대장 권준옥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5중대장의 연락병이었던 김일호는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중대장이 대대장한테 무슨 명령을 받았는지 뭔지 모르지만, 저 부락에서 도망해 나올 때 나이 많은 노약자, 말하자면 나이 많은 노약자는 빼버리고, 가운데 든 사람, 중간에 든 사람은 총살범위다. 그러니까 소대장한테 연락을 해라”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다.(주29)

▲ 전남 함평군 민간인 학살 사건 합동위령제(사진 함평군/ 뉴시스 2012.12.6.)

지금까지 20연대 작전명령철을 찾지 못하여 사단 혹은 연대의 실제 명령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지만, 이들의 증언을 통해 볼 때 상부(연대장, 대대장)에서는 부역한 사람들까지 공산주의자, 공비와 동일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중대장은 작전회의에서 “우리가 … 대한민국을 회복시키려면, 그런 놈들을 없애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 위해서 왔다”고 말했는데, 작전회의에 참석한 바 있는 월야지서 토벌대장 오정인은 이 회의 이후 그 말을 ‘덮어놓고 죽이라는 얘기’라고 해석했다고 증언했다. 이는 5중대장을 비롯한 회의 참석 지휘관들이 모두 그렇게 이해했다는 이야기이며, 따라서 5중대 군인들도 상부의 명령이나 묵인 아래 불갑산 인근 동네의 청장년기의 주민들을 모두 빨치산 협력자, 부역자로 간주하고 총살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권준옥이 현장에서 지휘한 몇 곳에서 총살직전 주민들을 선별한 경우가 있었지만 대부분은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으므로 적어도 지휘부에서 불갑산 인근 지역의 민간인을 사실상 공비로 간주해 사살해도 무방하다는 지침을 내렸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주30)

함평 민간인 학살사건과 관련된 군의 작전명령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11사단 9연대에 의해 저질러진 경남 거창 신원면, 산청․함양 민간인 학살사건을 통해 이 사건의 지휘․명령계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거창학살사건 재판과정에서 9연대장 오익경은, 예하부대장에게 하달한 작전명령(작명)부록에서 “적의 손에 있는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라고 명령하여 비전투원의 살해를 용인했으며, 재판석상에서도 “이적행위자를 발견시는 즉결하라는 지시를 하였”다고 시인하였다. 그는 이적행위자란 “적에 가담되어 아군작전에 직접, 간접으로 (거슬리는) 행동하는 자”를 지칭한다고 설명하였으며, ‘미수복지대에도 양민이 있었지만 대대장에게 즉결처분 권한을 부여한 것’은 “조속한 시간 내에 공비를 완전 소탕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주31)

거창 신원면 사건의 경우, 연대장이 공비소탕을 위해 미수복 지역의 공비협력 가능자들을 사실상의 공비로 간주해서 사살하는 것을 용인하는 내용의 작전명령을 내렸으며, 대대장 이하 지휘관들은 이 명령을 곧 ‘이적행위자를 교전 중인 적과 동일시하여 총살하라는 것’으로 해석하여 군․경 가족과 노인, 아동을 선별한 후 주민을 집단총살하였다. 이것은 거창군 신원면 사건 발생이전에 발생한 11사단에 의한 함평 민간인 학살사건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 함평민간인학살 희생자 고유제(사진: 함평누리뉴스)

특히 함평 11사단 사건 중 남산뫼 등에서 주민을 선별하는 과정을 보면 이듬해 2월 경남 거창 등지에서 주민총살 직전 선별과정과 대단히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주민 선별 후 총살’은 공식화된 작전명령에 포함되지는 않았을지라도 작명부록이나 혹은 비공식화된 지침으로 하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최덕신 사단장의 ‘견벽청야’ 작전개념은 연대, 대대 혹은 말단 지휘관에게는 적의 근거지, 즉 함평지역의 경우에는 미수복지역이었던 불갑산이나 태청산 인근을 초토화시키면서 적으로 의심될만한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총살하여도 무방하다는 명령으로 해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주32)

설령 5중대의 상급부대인 대대와 연대, 사단에서 직접 주민 살상명령을 내리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특정 지역 주민을 공비 내통자로 간주하고 벌인 무리한 토벌작전을 묵인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그 때문에 ‘견벽청야’ 작전개념의 토벌작전은 산간지대 인접 지역 대대와 중대에서는 주민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로 나타나고 말았다. 특히 거창 신원사건이 폭로된 1951년 3월 이후 이전의 모든 작명이나 작전내용이 변조, 조작, 은폐되었다.(주33)

당시 5중대장은 권준옥 대위였고, 2대대장은 유갑열 소령, 20연대장은 박기병 대령, 11사단장은 최덕신 준장이었다. 따라서 함평11사단의 민간인 학살사건의 책임은 이들 상급 지휘관에게도 있으며, 빨치산 토벌을 위해서는 ‘전투의 필요(necessity)’를 넘어서는 민간인의 무차별적인 총살을 묵인, 방관한 국가에 최종적인 책임이 있다. 한편, 당시 「정기작전보고」(1950. 10.)에 의하면 11사단이 미9군단의 지휘를 받았으므로 미9군단도 함평지역의 민간인 집단학살에 대해 보고를 받았거나 인지하였을 가능성이 높다.(주34)

(필자의 사정으로 연재가 4주 늦어졌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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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 (上)』, 1995, 295쪽

2) 임영태, 『북한50년사 1』, 들녘, 1999, 249쪽

3) 크로마이트는 크롬이라는 광물이 들어있는 철광을 말한다. 크롬은 강도와 내성을 강화하기 위해 주로 합금으로 사용된다. 크롬에 철과 니켈을 더하면 크롬철이 되는데 부식과 산화에 내성이 강하다. 스테인리스강은 크롬과 철의 합금으로 크롬 함량이 10~26%이다. 크롬 합금은 기름관, 자동차 내관, 금속식기 등의 제품에 많이 사용된다. 인천상륙작전에 왜 이런 이름을 붙였는지 그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는다.

4)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Ⅲ』, 2010, 278쪽. 김남식에 따르면, “①전세가 불리하여 후퇴한다. ②당을 비합법적인 지하당으로 개편할 것. ③유엔군 상륙 때 지주가 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시킬 것. ④군사시설로 이용될 수 있는 것은 파괴할 것. ⑤산간지대 부락을 접수하여 식량을 비축할 것. ⑥입산경험자와 입산활동이 가능한 자는 입산시키고 기타 간부들은 일시 남강원도까지 후퇴케 할 것” 등의 지시가 내려졌다고 한다(김남식, 『남로당연구Ⅰ』, 돌베개, 1984, 455쪽).

5) 전시 중 경무대에서 있었던 국무회의에서 내무부 장관이 보고한 내용이다(「1950년 10월 21일 제115회 국무회의 회의록」). 

6) 한성훈, 『한국전쟁시기 거창학살 사건에 관한 연구』, 연세대 석사학위논문, 2005, 29쪽

7)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3, 244쪽

8) 적군에 유용하게 쓰일만한 모든 물자를 없애버림으로써 적군의 활동 근거지를 아예 없애버리는 전술. 손자병법에 소개된 전술로 중국에서 오랫동안 내려온 대표적인 전쟁 수행 방식의 하나이다. 적의 활동 근거를 제거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없애버리는 전술을 사용하는 것이기에 전투에 직접 참가하는 병사들보다 민간인의 피해가 더욱 크다. 일본군이 만주 등지에서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모든 것을 불태우고, 민가를 없애고 사람들을 소개시킨 것과 같은 초토화 작전도 이와 유사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9)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Ⅲ, 244쪽

10)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Ⅲ, 247쪽

11) 진실화해위원회, 「경남 산청․거창 등 민간인 희생사건」,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05, 749쪽

12) 일반적으로 거창사건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비슷한 시기에 같은 부대에 의해 산청과 함양에서도 대량의 민간인 학살사건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13) 진실화해위원회, 「함평 11사단 사건」, 『2007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007, 490쪽; 김영택, 『한국전쟁과 함평양민학살』, 사회문화원, 2001, 203쪽

14) 김영택, 「한국전쟁과 함평양민학살」, 한국근현대사학회 제64회 월례발표회(200.12.8)-http://m.blog.daum.net/himnom/15516028 (인터넷 검색-2016.11.24 12:42)

15) 진실화해위원회, 「함평 11사단 사건」, 489~491쪽

16) 김영택, 위의 글(2001)

17) 진실화해위원회, 함평 11사단 사건, 487~489쪽

18) 주민의 수에 대해서는 250~700명까지 다양한 증언이 있다.

19)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493쪽

20) 국군은 전투 예비병력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1948년 11월 30일 창설되어 1949년 8월 31일 해체되어 그 역할을 청년방위대에 넘겨주었다.

21) 김영택, 위의 글(2001);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493쪽

22) 김영택, 위의 글(2001);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494~495쪽

23) 김영택, 위의 글(2001)

24) 김영택, 위의 글(2001)

25) 김영택, 위의 글(2001)

26)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520~521쪽

27)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528쪽

28)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532쪽

29)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532쪽

30)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532~533쪽

31)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533쪽

32)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535쪽

33) 김주완, “1,424명 거창민간인 학살사건 작전명령서 사후에 조작됐다”, <경남도민일보>, 2006. 12. 26; 진실위조사관백서준비모임, [남겨진 진실 미완의 화해⑤ 산청·함양·거창 민간인 학살] 작명 5호 "전원 총살하라", <오마이뉴스>, 2011.7.14.

34)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5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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