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혼돈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기성질서에 대한 분노가 ‘보편적 도덕과 합리의 추구’를 비웃고 있다. 도덕적으로도 별로 신뢰받기 어려웠던 클린턴 대신 기성질서에 대한 또 다른 반항아 샌더스가 후보가 되었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누가 미국 대통령이 되었느냐보다 기성의 질서가 심판받았다는 것이 더 핵심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트럼프시대의 개막을 오히려 현상변경과 질서변화의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하기도 한다. 트럼프의 당선과 관련하여 “전 세계가 다원화될 것이고, 우리 민족에게는 엄청난 기회다”라는 주장도 그런 기대의 산물일 것이다.

북한이나 중국은 더 노골적으로 환영의 뜻을 드러내고 있다. 중국은 “미·일이 중국을 배제하고 주도해왔던 TPP는 사실상 죽었고, 미국의 아시아 회귀 정책도 약해질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하고 있고, 북한은 “미국민이 결단코 선택해야 할 후보는 그 무슨 조선반도 핵문제 해결에서 이란식 모델을 적용해보겠다는 우둔한 힐러리보다 조선과의 직접대화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트럼프”라고 찬사를 보내고 있다.

트럼프는 기본적으로 ‘위기’이다

그러나 트럼프시대의 개막은 한반도에 있어서는 본질적으로 기회이기보다는 위기의 요소가 더 강하다.

무엇보다 트럼트가 지향하는 기성질서의 변화 혹은 현상변경이 미국 패권 행사의 축소와 자결의 강화보다 ‘힘에 의거한 현상변경’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트럼프가 미국중심주의를 내세우며 기존의 개입주의에 냉소를 보내는 것은 그가 지향하는 고립주의가 오히려 ‘람보’식 군사주의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선거기간 동안 “미국 군대가 ‘너무 크고, 너무 강하고, 너무 위대’해서 아무도 미국을 방해하지(얽혀들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말한 일이 있다. 또 미국은 ‘정치적으로 옳음’(political correctness)으로 낭비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옳지 않은’(politically incorrect) 말을 하라고도 주문하였다.

즉 트럼프는 개입을 줄이는 것과 동시에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을 사용해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행동을 얼마든지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배타적 미국중심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힘에 의한 현상변경’은 한반도와 북핵문제에서 맹위를 떨칠 가능성이 크다. 특히 그의 불안정한 성정과 대북 강경파 일색의 행정부 구조의 결합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자기통제력이 약하고 성정이 급한 트럼프가 존 볼턴이나 뉴트 깅그리치 등의 북한정권 붕괴나 군사적 수단의 사용을 주장하는 대표적 대북 강경론자들의 행정부 속에 둘러싸일 때, 북한문제는 그가 선거기간 언급한 ‘김정은과의 협상’보다는 ‘까부는 꼬마’를 혼내주는 쪽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크다.

그는 이란 핵합의의 재협상을 주장하면서 “이란 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는 자신을 ‘최고지도자’(Supreme Leader)라고 부르지만, 결코 그를 그렇게 부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어이, 꼬마, 안녕하신가?(‘Hey, baby, how ya doing?’)라고 말할 것이다”라고 한 일이 있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박근혜정부의 북한에 대한 강경노선과 이를 반영하는 핵 선제타격 위주의 한·미합동군사훈련 등으로 인해 미국 내에 북한에 대한 군사적 수단의 사용을 더 이상 자제할 필요가 없다는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은 트럼프로 하여금 ‘힘에 의한 한반도 현상변경’ 시도에 더 경도되게 만들 것이 분명하다.

또 트럼프는 북한의 핵포기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판단 때문에 북핵문제를 일정 기간 방치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미국의 많은 언론들이 트럼프정부의 외교과제에서 IS문제와 러시아문제 다음으로 북핵문제를 거론하고 있지만 북한에 핵포기를 설득할 가능성도 없고 북한 내 목표에 대한 정보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선제타격도 선택하기 어렵기 때문에 상당 기간 북핵문제를 중국 책임으로 떠넘기며(outsourcing to China) 남중국해문제와 통상문제 등을 포함하여 포괄적인 중국 압박에만 힘을 쏟을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북한은 “미국이 동방의 핵강국과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가를 결심할 때가 되었다”며 “내년 1월 백악관에 들어앉는 트럼프에게는 주저하고 있을 틈이 없”으며, “시간을 허비할수록 조선의 핵억제력은 질량적으로 더욱 강화되고 미국의 안보상황은 훨씬 더 악화”될 것이라는 주장대로 “동방의 핵강국은 이미 정한 길을 따라 더욱 줄기차게, 더욱 과감히” 공격적 핵능력을 강화해나갈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북한의 선택이 임기 전반기의 트럼프 및 강경파 행정부와 충돌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 될 것이다.

이와 별개로 북한은 트럼프정부를 상대로 대조선적대시정책을 상징하는 한미합동군사훈련 중단 등을 요구하며 적극적 대화도 추진하겠지만, 대북 강경파 일색의 트럼프행정부는 협상 대신 중국 책임론을 내세워 ‘방치 내지는 북한 정권교체’에만 몰두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이럴 경우 북미관계는 북한의 핵능력 강화 및 경제발전 병진노선과 미국의 레짐체인지 수준의 대북제재가 일정 기간 지속되는 교착 양상을 보이게 될 것이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려면

물론 세상은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화복이 정해지기 마련이고,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키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 첫걸음은 무엇보다 국정운영 동력을 상실한 박근혜정부를 대신하는 새 국정운영체제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지난 11월 4일 주한미군사령관은 앞으로 8~10개월 안에 사드 배치를 완료하겠다고 발표하였다. ‘2년 내에 북한이 붕괴할 것’이라는 주술적 예언에 사로잡혔던 박근혜정부의 국정운영 동력 상실은 한편으로는 외교‧국방 및 남북관계에서의 비정상과 폐해를 교정할 기회가 생긴 것이기도 하지만, 단기적으로는 한미 군사협력 등 동맹문제 처리에서 미국의 박근혜정부 무시와 일방통행이 끝도 없이 진행될 것이다. 속전속결식 사드 배치 강행이나 느닷없는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논의 재개 등은 바로 그런 사례들이다.

또 존 볼턴 등 예상되는 미국 새 행정부의 주요 인물들은 냉전 해체 이후 미국 세계운영의 대안의 하나로서 그리고 미 군수산업의 이익을 대변하여 북핵문제의 전략적 가치를 ‘활용’하는데 앞장섰고, 또 북핵문제의 해결 대신 한미 양 정부의 대북 강경노선 유지와 그를 통한 중국 견제와 한중 밀착 방지 추구에 다양한 경험을 지닌 인물들이다. BDA문제를 제기하여 9.19합의를 표류하게 만든 것이 바로 이들이다.

이들은 한국전쟁의 종식 등 한반도 평화체제의 이니셔티브보다 한미 양 정부의 대북강경론을 부추기면서 북핵 위기는 임계점 이하의 수준에서 적절히 관리하는 방안을 찾으려 할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북미협상이 이루어지더라도 '핵동결' 수준의 미봉으로 처리하고 군사대결의 구조는 그대로 온존시키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미국에게 북핵문제와 한반도 군사위기의 임계점을 관리하는 최선의 방안은 비핵화가 아니라 ‘동결’일 수 있고, 이는 핵보유를 기정사실화 하려는 북한의 이해관계와도 맞아떨어진다. 따라서 핵동결 수준의 미봉이 아닌 한반도 위기의 근본적 해소를 위해서는 한반도 비핵화‧평화체제에 가장 절박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한국정부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트럼프는 모든 것이 협상의 대상이 되는 비즈니스의 세계관을 지니고 정치에 뛰어든 인물이다. 중요한 것은 미국 새 정부의 대북정책이 무엇이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기 전에, 한국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점이다. 오바마정부의 아시아재균형과 전략적 인내 정책이 결국 실패했다는 점과, 상호군사위협을 줄이고 협상을 통해 비핵화와 한반도평화체제 형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기성과 다른 새로운 질서를 추구하는 미국 새정부의 가치와 부합하며 또한 미국의 국익과 안전을 근본적으로 보장하는 길이라고 설득해야 한다.

결국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전환’의 시발점은 정상적인 국정운영과 외교가 불가능한 박근혜정부를 대신할 새로운 정부(과도정부를 포함하여)를 빨리 세우는 일이다.

한반도 평화질서의 또 다른 당사자인 북한의 역할 역시 중요하다. 무엇보다 북한은 비핵화 협상을 기피하거나 ‘전 세계의 비핵화’와 같은 비현실적 목표에 구애되지 말아야 하며, 각종 수준의 다양한 접촉 활성화를 통해 트럼프정부에 자신들의 비핵화 ‘7.6제안’을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논의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핵경제병진노선 천명 이래 처음으로 비핵화를 언급한 북한 ‘7.6제안’은 매우 전향적이다. 이 제안에서 제시된 한반도 비핵화 5개 조건은 대부분 미국이 이미 충족시켰거나 한때 원칙적으로 동의했던 것들이며, 주한미군 철수 조건도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일 위원장의 발언(평화유지군으로서의 주한미군 인정) 등을 고려할 때 충분히 협상할 수 있는 문제라고 보인다. 북한은 미국과 국제사회에 ‘매우 중대한 제안이지만 불행히도 잊혀져버린’ 이 7.6제안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대화 분위기 조성에 나서야 한다.

또 북한은 최소한 미국의 정권이행기와 새정부 출범 초기에는 북핵과 장거리 미사일 실험 및 국지적 충돌과 도발을 자제해야 한다. 2009년 4월 오바마대통령의 ‘핵 없는 세계’ 선언을 빛바래게 만든 북한의 장거리로켓(은하2호) 실험과 그에 연이은 제2차 핵실험이 오바마정부 임기 내내 회복하기 어려운 북미간 불신의 원인이 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2017년의 한미합동군사훈련은 반드시 로우키로 진행되어 대북 핵 무력시위를 자제해야 한다. 무력시위는 북한의 반발과 추가도발만 불러올 뿐이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남한 보수정권의 종언과 새로운 국정운영 체제의 등장, 그리고 오랫동안 새 질서를 모색해온 북한의 슬기로운 협상국면 창출 노력이 그 첫걸음이다.

 

 

이승환은 1958년 경북 포항에 태어나, 고려대 경제학과, 경남대 북한대학원(정치학 석사)을 거쳐 경남대 대학원 정치외교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이승환은 통일맞이 정책위원장, 열린정책연구원 정치아카데미 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시민평화포럼 공동대표이며, 또한 민화협 집행위원장,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는 지난 15년여에 걸쳐 남북 민간교류 활동을 전개해왔으며,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6.15남북공동행사 등을 진행해왔다.

그가 쓴 글로는 “문익환, 김일성 주석을 설득하다”(창작과비평, 통권 143호, 2009), “6월항쟁 20년, 남북 및 북미 관계의 변화와 통일담론”(창작과비평, 통권 137호, 2008), “2000년 이후 대북정책담론 연구”(북한대학원, 2008) 등이 있다.

개인 블로그 http://blog.naver.com/lsh2k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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