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사태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충격과 당혹, 그리고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의 부끄러움이 엄습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생각이 밀려온다. 결국은 그것 때문이었어? 지금까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던 급변하는 대북정책과 꽉 막힌 오로지 한길만을 고집하던 대북정책이 이제야 오롯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또 한편의 자괴감이 밀려온다. 십 수 년간 붙들고 씨름해왔던 북한, 통일 등의 단어가 이렇게 허무하게 느껴질 수 있을까? 아마 많은 이들이 현재의 상황 앞에서 절망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현상 앞에서 다시 한번 민주주의를 생각하게 된다.

돌이켜보면 현 정부의 대북정책은 여러모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세좋게 출발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그 호오(好惡) 여부를 떠나 지난 정권과 일정하게 차별화된 정책이었고, 나름대로의 논리성과 현실성도 갖추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리고 현 정부 초기 남북간에 갈등이 있었지만 부분적인 대화가 시작되었고, 이산가족 상봉도 이루어지면서 삐그덕 거리기는 했지만 무언가 희망이 엿보이기도 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드레스덴 선언은 북한과의 교류와 협력을 말하면서도 그들의 ‘아픈’ 부분을 꼭 짚어서 신경을 건드리는 내용을 담으면서 오히려 북한의 반발만을 초래했고, 통일준비위원회를 만들면서 통일문제의 사회적 확산 대신 오히려 ‘통일’을 둘러싼 갈등을 증폭시켰고, 어렵사리 찾아온 남북의 대화 국면을 무산시키더니 북의 핵과 미사일을 핑계로 제재로 올인(all-in)하는 정책으로 귀착되었다.

나아가 최근에는 공개적으로 탈북을 권유하고, 북한 정권의 붕괴를 재촉하는 듯한 발언은 정상적인 국가의 정책으로 보기에도 민망할 뿐이었다. 누구의 표현처럼 ‘대량의 탈북을 감당한 여력도 되지 않’지만, 국익이 아닌 개인의 희망과 욕망을 채우려는 이런 모습은 ‘정상적인 국가’의 정책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제재 올인 정책은 남북관계의 마지막 끈이었던 개성공단의 전격적인 폐쇄로 개성공단 기업들이 제대로 준비도 하지 못한 채 허겁지겁 도망치듯 나와야했고, 다른 나라에까지 찾아가 북과의 관계를 끊어놓기 위해 외교적 자원을 낭비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중국의 반발이 눈에 뻔한 사드 배치를 강행하면서 애써 마련해놓은 한중 협력의 기류를 한‧중 갈등의 기류로 되돌려놓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이 정부 부처 간의 제대로 된 토론과 협의의 결과가 아닌 담당 부처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이루어졌다고 하니, 도대체 이런 현상이 왜, 그리고 어떻게 가능했는지가 의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의 사태로 의문의 상당부분이 해소되었으니, 이를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 우리의 역사적 경험에서 소수에 의한 배타적 정책결정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대북정책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멀리는 ‘7.4 남북 공동성명’에서부터 시작하여 최근에 이르기까지 민의 참여가 배제된 채로 소수의 정보독점에 의한 배타적 정책결정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특히, 남북관계에서 민간의 교류와 협력이 중단되면서 정부의 정보 독점 현상이 심각해지고, 이를 빌미로 한 정보의 왜곡과 과장이 넘쳐나면서 잘못된 정책결정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현상은 지난 몇 년 사이에 오히려 확대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남북관계의 ‘거의’ 완전한 단절을 가져왔다.

대북정책에서 일정한 비밀주의와 소수의 정책결정은 일정 시기 동안에는 허용될 수 있는 것이라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정책이 결정되고 추진되는 동안에는 민주적 참여와 민의 의지를 결집하여야만 성과를 낼 수 있고, 안정적인 정책 운영이 가능하다는 것은 지난 시기의 뼈져린 교훈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대북정책이 우리 사회의 ‘남남갈등’의 핵심 쟁점이라 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의 참여와 의지의 결집은 우리 내부의 갈등을 막기 위해서라도 더욱 절실하다 할 수 있다.

잠시 눈을 돌려보면, 우리는 개인적인 욕구와 희망으로 대북정책을 추진할 여유가 전혀 없다. 지난 말레이시아에서의 북‧미 접촉에서 보듯이, 제재의 와중에도 미국과 북한이 마주 앉아 서로의 의견과 주장을 교환하고 있고, 일본도 겉으로 드러난 제재와 적대의 이면에서 접촉을 지속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제재의 와중에도 중국은 서한만 앞바다에서 석유 탐사와 시추를 위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고, 러시아 역시 북과의 협력을 더욱 강화하겠다는 입장을 내비치고 있다.

이런 현상들은 단지 양자관계의 특수성으로만 해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모든 현상은 기본적인 국가의 임무로서 ‘국익’을 앞세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흔히 말하듯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는 냉엄한 현실 앞에서 북‧미, 북‧일 조차도 대화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는 것이 바로 ‘현실’인 것이다.

이런 마당에 우리 만이 제재 이외에는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한길을 가는 것은 ‘정책의 일관성’이 아니라 ‘정책의 무모성’이자, 현실이 아닌 오로지 머릿속의 세계를 기반으로 주관적 희망과 욕구를 ‘국익’에 앞세우는 비합리성의 전형이라 할 것이다.

더욱이 그러한 주관적 희망과 욕구가 최소한의 과학적 계산과 합리적 이성의 작용이 아니라 저 멀리의 ‘비과학적 미신’에 기반하고 있다면, 이는 아예 과학과 이성을 포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야말로 ‘비정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정상’을 가능케 했던 것은 결국 민주주의의 무시, 참여의 배제였다. 특히, 대북정책에서는 민주주의적 원리와 절차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이 그간 우리 역사에서 지배적이었다. 정보의 독점, 국내정치적 활용 등의 모든 것이 ‘안보’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고, 민주적 참여와 토론은 자칫 잘못하면 ‘적(?)’에게 우리의 정보를 누설하는 ‘반국가’적인 것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더 많은 참여와 토론이 더 올곧은 대북정책을 만들어왔고, 더 탄탄한 정책 추진을 가능케 하지 않았던가? 오히려 더 많은 정보가 공개되고, 더 많은 토론이 있을수록 더 많은 사람들의 동의와 참여를 이끌어내고 더 많은 결실을 보았던 것이 우리의 역사적 경험이었다. 그리고 이는 여러모로 부족했지만 민주적 의사결정과 참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개성공단 폐쇄, 사드 배치, 굴욕적인 위안부 합의, 국정 교과서 강행 등 소수의 정보 독점과 일방적 결정이 오히려 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더 많은 갈등을 불러 오고 있음을 지금의 현실이 말해주고 있다.

이 점에서 굳이 역사의 교훈을 말하자면, 우리의 분단 극복의 문제는 ‘외세가 가져다 주지도 않지만, 소수의 결탁과 결정으로도 결코 이루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이야말로 비정상을 바로 잡을 때이다. 현 정부가 그토록 강조하던 ‘비정상의 정상화’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그 비정상이란 다름아닌 ‘반 민주주의’이며, 정상이란 ‘민주주의’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는 현재의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대북정책을 바로잡기 위해서도 요청된다.

민주주의의 바탕 위에서 올곧은 대북정책을 만들고 실현하기 위해서도 지금의 반민주주의를 민주주의로 돌려놓아야 한다. 결국 민주주의에 정답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바보야! 문제는 민주주의야!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문학박사, 2001)
캐나다 브리티쉬 콜롬비아 대학 방문연구원(2002-2003)
서울대 국제대학원 연구위원(2004-2006)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 객원연구원(2007)
현재 서강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교수로 재직중
 
주요저서로 북한의 개혁·개방: 이중전략과 실리사회주의(2004), 김정일 리더십 연구(2005), 서울과 도쿄에서 평양을 말하다(2008), 북한과 미국: 대결의 역사(번역서, 201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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